소설리스트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190화 (191/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90화

맵핑 스킬이 중요해진 터라, 선두 차량의 운전을 맡은 것은 박소희 헌터였다.

“와, 천호 대교로는 도저히 못 건너겠네요.”

본래대로라면 처음 우리가 진입했던 장소에서 석촌 호수까지는 차로 20여 분이면 도착할 거리였으나, 다소 문제가 있었다.

이미 육안으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는 문제이기는 했지만, 오래 방치되어 있던 도시인 만큼 도로의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박소희 헌터의 말대로 천호 대교의 경우 아예 다리 중간 부분이 거의 무너져 있었다.

도저히 자동차로 이동하지 못할 정도의 손상이었다.

내 옆에 앉은 양태원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쭉 빼고 주위를 바라보았다.

“저쪽 올림픽 대교는 그래도 멀쩡한 것 같긴 한데…….”

“네, 저쪽엔 몬스터 자생지가 있어요.”

푹 내쉬는 한숨소리가 들렸다.

하기야 다소의 실망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왕 맵핑으로 몬스터 자생지 구역을 파악했으니 자동차도 확보해 기동력도 있겠다, 1차 목표지인 석촌 호수까지는 쓸데없는 소모전 없이 움직일 수 있을 거라 예상했으니까.

“이래서야 제 맵핑 스킬도 쓸모가 별로 없네요.”

“에이, 그건 아니에요. 적어도 몬스터들이 어디서 덮쳐 올지 예상 가능하니까여. 그게 어디예요? 그쵸, 누나.”

“……그건 그렇지. 그리고 몬스터 등급도 알게 되었으니까.”

도로 주변에 살고 있는 몬스터들은 대부분 C급에서 D급으로, 딱히 위협적인 몬스터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쩐지 옆에 앉은 양태원이 옆구리를 찔렀다.

뭔가 싶어 쳐다보니 작게 속삭이는 게 들렸다.

“누나, 영혼. 영혼 좀 실어서 말해 주세요.”

아니, 내가 뭘…… 그렇게 말하려는데 앞쪽 조수석에 앉은 김하현이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양태원 헌터 말이 맞아요. 박소희 헌터 스킬이 얼마나 도움이 됐는데요. 박소희 헌터가 없었으면 아무 목표도 없이 오늘 하루는 수색만 하다가 끝났을걸요.”

아…….

저렇게 정성 들여서 맞장구를 쳐 주라는 거였군.

운전대를 잡은 박소희 헌터가 김하현의 말에 안색이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런 큰 공략에는 처음 참가하는 거라…… 좀 부담됐거든요.”

“아, 완전 이해해요. 거기다 김숙자 교수님 같은 거물한테 캐스팅당하니까 부담이 좀 되죠?”

“네! 완전!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잤다니까요. 먹은 건 다 체하고…….”

“저도 첫 공략 때 그랬는데. 그럴 땐 그냥 눈 딱 감고 포션이라도 들이켜면…….”

나는 이어지는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뭐, 확실히 자전거보다 자동차 쪽이 편하기는 했다.

거기에 다소 소음이 있기는 해도 박소희, 김하현 둘 다 딱히 내 신경에 거슬리는 타입들도 아니고, 바로 옆에 태원이가 있으니 뒤 차량에까지 신경을 곤두세울 일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 나갔군. 편하다고?’

아무리 당장 강대한 몬스터가 없고, 아직 선행 조건이 뜨지 않았다고는 해도 여긴 엄연한 던전이었다.

심지어 멸망한 서울을 배경으로 한.

평소 같으면 왜 이런 상황이 펼쳐진 건지 생각하느라 신경을 바짝 세우고, 과연 어떤 선행 조건이 있을지 가능성을 따져 보고, 또 양태원의 점괘에도 신경을 쓸 테고…… 무엇보다 과연 이 던전을 클리어하는 게 서브 퀘스트와 연관이 있을지 추측하느라 바빴을 텐데…… 지금 내 머리는 아주 백지였다.

이 와중에 남들 손이나 빌려 자동차나 얻어 타고 있는 주제에 몸이 편하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제정신인가.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싫어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아무래도 며칠 전에 그 사람들…… 부모님을 만난 이후 어지간히 정신 상태가 풀어져 있는 모양이다.

던전 공략 전에 힘든 일을 해치우자는 결심이 아주 역으로 돌아온 셈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병원비니 천륜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때려치우고, 전화 한 통으로 끝낼 것을 그랬다.

애초에 그 자리를 왜 나갔던 걸까.

내 가족은 타르토스에 있는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미련이란 게 남아 있었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멸망한 도시의 정경을 마주하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이 시점에서 부모님도 돌아가셨을까, 하는 생각이었으니.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해 놓고.’

그 말은 진심이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씁쓸한 감각이 퍼져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햇살을 받은 한강이 눈을 따갑게 찌를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 누나!”

문득 옆에서 어깨를 흔들어 오는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양태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라뇨, 누나. 몬스터 출현 메시지 안 떴어요?”

“……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창 너머로 내다보니, 어느새 차도를 달리는 다섯 대의 차량들을 향해 몬스터들이 접근해 오고 있었다.

- 몬스터가 출현하였습니다.

- F급 몬스터 : 거대화한 쥐

- D급 몬스터 : 독개구리

- C급 몬스터 : 뿔 달린 하늘소

메시지를 더 읽어 볼 필요도 없이 나는 시스템창을 꺼버렸다. 단순한 형태의 몬스터들이라 숫자만 많다 뿐이지, 다들 등급이 낮았다.

아무래도 도로를 따라 늘어선 파손된 아파트나 한강을 따라 무성하게 자라난 잔디밭에서 서식하던 몬스터들인 듯했다.

“저 정도면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시하고 달릴까요?”

맵핑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던 박소희 헌터도 그리 당황하지 않고 물었다.

“그래도 될 것 같아요. 제가 실드를 치면 되니까…… 어?”

막 그렇게 말하던 김하현이 당황하며 말을 멈추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바라보니, 김하현은 창밖 너머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나도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거 뭐 하는 거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늘에는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른 이우연이 있었다. 한쪽 손에는 검이, 다른 쪽 손에는 거대한 불덩어리가 솟아올라 있다.

아마도 차량에 접근해 오는 몬스터들을 공중에서 쳐 낼 작정인 듯했다.

하기야 등급은 낮아도 숫자는 제법 많으니, 실드만 치고 달리다간 괜히 차에 손상을 입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아마도 직접 엄호에 나선 모양이다.

제대로 된 전투에 돌입하기도 전에 헌터들 사이에서 부상이라도 나온다면 짐을 끌고 가는 셈일 테니까. 그리고 이 정도의 전투는 이우연에게 딱히 부담도 되지 않고, 오히려 몸을 풀기에는 딱 좋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 상대방이 푸른 인연의 귀걸이를 사용하였습니다.

- 상대방이 당신의 의사를 확인 중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메시지가 떴다.

그러고 보니 던전 입장 전에 착용을 하고 들어왔더랬다. 혹시 모를 상황이 발생했을 때 연락할 수단으로 써먹으려고.

나는 곧장 확인 메시지를 눌렀다.

- 상호간의 의사가 확인되었습니다.

- 푸른 인연의 귀걸이를 사용합니다.

“뭐야?”

“예?”

본인한테 한 말인 줄 알고 옆에 있던 양태원이 깜짝 놀랐지만, 나는 손을 내젓고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 아니, 당신도 참여할 생각 없나 싶어서.

“너 혼자서도 충분하지 않아?”

다른 랭커들이 굳이 나서지 않는 이유도 그래서일 텐데.

― 그거야 당연하지. 그런데 이거 제법 기분 전환이 되거든.

“네가 말하는 이게 뭔데?”

― 글쎄, 몬스터와 함께 하는 한강 드라이브?

웃기고 있군.

나는 코웃음을 쳤지만, 확실히 일리가 있긴 했다.

몸이 편하니 자꾸 딴생각을 하게 되지 않는가. 차라리 몸이라도 움직이면 쓸데없는 생각들도 빠져나갈지 모른다.

이우연, 저 자식은 정말 내 기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알아맞힌다니까.

나는 운전석에 앉은 박소희를 향해 말했다.

“창문 좀 열겠습니다. 당황하지 마시고 그냥 달리세요.”

“예? 예, 그러세…… 헉!”

창문을 끝까지 연 나는 창문 사이로 몸을 빼내고, 달리는 차량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다른 차량이라고는 일절 없이 뻥 뚫린 도로를 달리는 차량 위에 서자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을 날려 버리기에는 딱 좋을 정도였다.

“누나, 뭐 해요?!”

내가 빠져나온 창문 사이로 양태원이 얼굴을 내밀고 물었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콰콰쾅!

한강변을 따라 늘어서 있던 고층 아파트 한 채가 내가 날린 검기에 맞아 힘없이 무너져 내리며, 이쪽으로 달려오던 몬스터들이 아래에 깔렸다.

창문으로 몸을 내밀었던 양태원이 한 박자 늦게 놀랐다.

“우와악! 놀래라!”

나는 한 번 더 검에 마력을 담으며 대꾸했다.

“창문 닫고 들어가, 양태원. 먼지 날린다.”

아마 대답을 한 것 같긴 한데, 들리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늘을 날던 이우연이 내게 질세라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꽂았기 때문이다.

내리쳐진 푸른 번개가 한강 주변의 잔디밭을 시커멓게 태우며 떼를 지어 있던 거대 쥐들을 튀겼다.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하늘을 날던 이우연이 씩 웃는 게 보였다.

그리고 떠오르는 메시지.

― 석촌 호수에 도착할 때까지 누가 더 많이 킬 수 올리나 대결 어때? 진 사람이 거하게 밥 사는 걸로.

“그딴 내기를 왜…….”

― 아, 당신은 검사니까 나한테 핸디캡 줘도 괜찮아. 뭘로 해 줘? 한 손만 쓰기?

……이 자식이 하늘을 날더니 진짜 돌았나…….

“그딴 거 필요 없어!”

나는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마력구를 만들어, 날개를 펼쳐 날아 들어오는 검은 벌레 무리를 향해 던졌다.

어쨌든 걸어오는 도전은 받아 줘야지.

좋아, 어디 한번 해 보자고.

*   *   *

“어우, 왜 저래.”

그리고 석촌 호수에 도착했을 즈음.

양태원은 강예나와 이우연을 흰 눈으로 바라보았다.

개인적으로 제법 좋아하는 누나와 적당히 친한 형임에도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이겼어.”

“아니, 내가 이긴 것 같은데? 그리고 당신 계속 건물만 무너트리던데, 설마 깔려 죽은 숫자도 센 거 아니지?”

“그 정도는 적절한 기물 활용이지.”

“에이, 그건 아니지. 아까 전엔 핸디캡도 필요 없으시다면서요. 애초에 내가 더 높은 등급 몬스터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석촌 호수까지 달려오는 내내 차량을 노리던 몬스터들을 학살하던 두 사람이 여전히 입씨름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둘이서 누가 더 많이 몬스터 킬 수를 올리느냐로 내기를 건 모양인데…….

주변 헌터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와, 진짜 둘 다 성격 장난 아니다. 한강변 아파트들 다 무너졌는데?”

“그런데 저러다 둘이 진짜 싸우면 어떡해요?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그냥 장난치는 거 아니야?”

“그런 것치곤 살벌한데?”

양태원은 그냥 한숨만 내쉬었다.

강예나와 이우연.

두 사람 다 한국에서도 순위권의 헌터들을 모아 놓은 이 공략대에서도 단연코 1, 2위를 달리는 헌터들이라, 아무리 간단한 전투였다고는 해도 그 위력은 말할 것조차 없었다.

솔직히, 덤벼 오는 몬스터들이 불쌍해질 레벨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수준 높은 전투력을 선보여 놓고, 막상 장본인 두 사람이 저렇게 수준 낮…… 아니, 유치한 말다툼이나 하고 있다니.

‘진짜…… 아니, 착한 말, 착한 말. 예나 누나가 나한테 해 준 게 얼만데.’

거의 신기급인 청동검을 그냥 넘겨주지 않았던가. 그 은혜를 생각하면 속으로 욕하는 것도 배은망덕한 레벨이다.

그나마 저렇게 이우연과 살벌한 대화라도 하는 걸 보니 예나 누나 기분이 좀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긴 했다.

결국 양태원은 두 사람을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주변이나 탐색해 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엄청 평화롭네.’

강예나와 이우연 덕분에 이래저래 화려한 눈요기를 하면서도 평화롭게 도착한 석촌 호수.

A급 몬스터가 많다고 하기에 당장 전투가 벌어질 거라고 각오했었는데, 석촌 호수 주변에는 어쩐지 평화로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며,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도 환하게 피어난 벚꽃 나무들이 호숫가 주위로 늘어서 있었다. 벚꽃 잎이 한가롭게 호수를 떠다니고, 용케 살아남은 오리 떼들이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물론 주변에 늘어서 있는 건물은 죄다 폐가처럼 흉하게 변해 있었지만, 호수에 비치는 정경만큼은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멸망한 도시 속 호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스템창을 살피고 있었던 박소희 헌터가 얼굴을 찌푸렸다.

“지도에서는 분명 여기에 A급 몬스터가 있다고 뜨는데…… 이상하네요. 어디에 숨어 있는 거지?”

“음, 보통 인기척을 느끼면 튀어나오기 마련인데.”

“호수 안에 있는 거 아니야? 수중 몬스터인가?”

“확인해 보면 그만이지.”

그리고 유치한 대화를 막 끝낸 참이었던 이우연이 호수 정가운데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누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그 유명한 검은 날의 마검이 치켜올려지더니, 곧 기세 좋은 기합과 함께 호수 표면으로 내리쳐졌다.

“하압!”

거대한 검기가 호수를 향해 쏘아졌다.

검기가 호수를 가르며 바닥을 드러냈다.

철썩!

꽤액!

평화롭게 헤엄치던 오리 가족이 갑자기 물을 뒤집어쓰는 봉변을 당해 소리를 질렀다.

검 하나로 호수를 가르는 기적을 선보인 이우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수중 몬스터는 없네. 그치?”

강예나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있어도 방금 걸로 죽었겠다.”

“그럼 킬 수 하나 올려 줘.”

“이게 미쳤나…….”

아직도 안 끝난 거였어?

“누나, 형. 이제 그만 적당히…….”

그때였다.

“조심해!”

날카로운 외침이 터졌다.

양태원은 반사적으로 부적을 꺼내 들어 실드를 형성했다.

그리고 양태원만이 아니었다. 류세연을 포함한 모든 마법사들이 곧장 제각각 실드를 형성하면서 헌터들 전체가 다중 실드로 휩싸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형성된 보호구 밖으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충격이 전해졌다.

쨍강!

양태원의 등골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방금의 공격으로 펼쳐진 실드 중 반은 깨졌다.

만일 적절한 때 실드를 치지 않았더라면 사상자가 나왔을 만큼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헌터들은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뭐야?! 몬스터?”

“시스템 경고는 안 떴는데?”

“몬스터가 아니니까! 저길 봐!”

맨 처음 조심하라고 외쳤던 류세연이 반투명한 실드 위,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가리켰다.

그리고 모든 헌터들이, 한 발짝 늦게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어, 사람이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그랬다.

보통 인간이라면 시야에도 들어오지 않을 높은 건물의 위.

오연하게 서 있는 한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몬스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 맞지?”

“그렇겠지! 몬스터 알람이 안 뜨잖아!”

“말도 안 돼. 여긴 던전인데 어떻게 사람이 있어? 우리 중 이탈자라도 있나?”

“아니, 애초에 사람이라면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건데? 인간형 몬스터 아니야?”

혼란에 가까운 무질서한 추측이 오가는 와중.

강예나가 검자루로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언뜻 보기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검집에서 검이 스르릉, 하는 소리를 내며 뽑혀 나왔다.

날카로운 검명과 함께 스스로 눈부시게 빛을 내는 검이 빠져나왔다.

빛나는 검을 든 강예나가 발을 박찼다.

거대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 발돋움에 땅이 움푹 파였다.

“지켜만 보지 말고 목적을 말해!”

도저히 사람의 발이 닿을 것 같지 않은 높이를 향해 방랑하는 구도자가 검을 휘둘렀다.

그것과 동시에, 강예나의 손에 들린 검이 마치 하늘을 가를 것처럼 길어졌다!

저번에도 보았지만 절로 감탄이 나오는 모습이었다.

양태원은 상대가 누구든 간에, 그 빛나는 검이 벨 수 없는 것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분명 저번에 괴물을 베었듯이 저 적 또한 단숨에 갈라 버릴 것이다.

양태원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카캉!

하늘에서 번쩍, 하고 마치 번개처럼 무언가가 빛났다.

그리고 빛이 사라진 다음 순간 강예나가 휘두른 검이 튕겨나가고, 그 힘을 이기지 못한 강예나가 곧장 땅으로 처박히듯 쏜살같이 떨어지고 있었다.

양태원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누나!”

아니,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땅에 떨어지기 전에 강예나가 평소에 사용하는 ‘님페의 바람’을 쓰면 충분히…….

“어, 어?”

그런데, 그러질 않았다.

반격을 당해 허공에서 떨어지는 동안, 강예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시선은 여전히 건물 위, 단 한 수로 자신의 검을 막아 낸 정체불명의 상대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쩌면 너무 놀라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정신 차려!”

그리고 하염없이 추락하는 그 몸을, 빠르게 날개를 펼친 이우연이 날아가 받아 냈다.

이우연이 강예나의 몸을 다시 땅으로 내려놓을 때까지도, 강예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방금 전 강예나의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친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공격도, 대화를 시도하는 움직임도 없었다.

‘방금 그거 대체 뭐였지?’

양태원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강예나가 사용하는 용사의 검.

그 검이 거리에 상관없이 강예나의 의지에 따라 길게 늘어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방금 전 허공에서 잠깐 번쩍였던 그것은…….

‘같은 검?’

그때였다.

“잠깐만. 그쪽도 헌터 맞지? 나를 모르나?”

김성연 길드장이 나섰다.

“대체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건가? 우린 적이 아니야. 몬스터가 아니라고!”

아마 상대방이 인간이라는 확신이 섰기에 대화를 시도해 보려는 듯했다.

“그게 적이 아니라는 소리는 아닌데.”

그리고 그 시도에 정체모를 누군가가 답했다.

“서울에는 미친개가 있으니 접근하지 말라는 소문을 아직 못 들은 모양이야.”

“뭐?”

“그래도 칭찬은 해 주지. 수완이 상당히 발전했어. 어디서 성검을 구한 건지는 몰라도, 내 클래스까지 흉내 내다니 제법이야. 어느 나라에서 왔지?”

“대체 그쪽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여전히 실드를 유지 중인 김숙자 교수가 팔짱을 낀 채 대답했다.

날카로운 시선이 건물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단 이건 확실히 해 두지. 우리는 대한민국 헌터들이야.”

“……대한민국 헌터들이라고?”

그때, 미동도 하지 않고 굳어 버린 강예나를 지탱하고 있던 이우연이 표정을 찡그리는 것이 보였다.

“아니, 이 목소리…….”

그때였다.

정체불명의 여자가 망설임 없이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휙!

말도 안 되게 높은 높이에서 뛰어내렸음에도 동작에는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그리고, 여자가 땅에 착지하기 직전 바람이 휘몰아치며 몸을 살짝 띄워 올렸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양태원은 뒷목에 서늘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곧이어,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높이 묶은 검은 머리에 제법 큰 키.

한 번 보면 잊기 힘들 듯한, 상당히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물론 생김새가 정연하기도 했지만, 강렬한 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그 눈동자다.

결코 꺾이지 않을 듯한, 강한 의지로 가득 차 있는 눈빛.

사람의 영혼을 볼 줄 아는 양태원은, 첫눈에 그 빛을 알아보았다.

땅에 착지한 여자가 헌터들을 훑더니, 의아함에 코를 찡그렸다.

“이게 대체 무슨 개수작인지 모르겠는데…….”

그때였다.

콰쾅!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던 강예나가 여자를 향해 뛰쳐나간 것이다.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라기엔 더 강렬한 폭발음이 울렸다.

누구 하나 꺾이지 않는, 팽팽한 검의 대결.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양태원은 그 두 자루의 검이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강예나를 마주하는 여자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이 떠올랐다.

지금은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양태원은 알고 있었다.

같은 것은 검만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소름 돋을 정도로 동일한, 두 자루의 용사의 검.

“이거 하나만 묻자.”

그리고 그 검을 잡고 있는 두 사람.

묻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너는 대체…… 누구야?”

강예나가 그렇게 묻는 것과 동시에.

양태원의 눈앞에 시스템 알림창이 떠올랐다.

- 선행 조건을 충족■켰습니다.

- 선행 ■건 : ‘■■나’와의 조우

- 클■어 조건이 갱신됩니다.

- 클리어 조건 : ‘강■나’를 처치■십시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