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92화
“생각보다 쾌적하네요.”
“그러게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갖춰진 환경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 말대로였다.
정체불명의 여자와 맞붙어 형편없이 패배한 뒤, 이우연을 비롯한 헌터들은 별다른 수 없이 건물 안으로 향했다.
다들 상태가 멀쩡했다면 굳이 여자의 말을 따를 것 없이 곧장 도망갈 생각을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여자…… 그러니까, 보스 강예나 쪽에게 엉망진창으로 털린 후라 다들 상태가 엉망진창이었다.
그렇게 다들 마트 안으로 들어섰는데, 제대로 된 상태일 거라는 기대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도시 내에는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었고, 몬스터들의 자생지가 곳곳에 생성된 판국이었으니까.
그런데 의외로 상태가 멀쩡했다.
“잠깐. 왜 전기가 들어오지?”
그 말대로였다.
건물의 모든 층에 불이 들어오는 건 아닌 듯했지만, 몇몇 곳에는 비상등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자체 발전기라도 구해 왔나 보죠. 여기가 정말 서울이라면 어딘가에서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식량도 제대로 구비되어 있는데.”
물론 썩기 쉬운 신선 식품은 이미 치워 버렸는지 거의 다 통조림이나 과자 등, 보관하기 쉬운 건조식품 코너에만 물건이 남아 있긴 했으나 그래도 상당한 양의 물량이었다.
물자를 살피던 한 헌터가 감탄했다.
“한참은 버티겠는걸.”
“한참은 무슨, 하룻밤만 시간을 준다잖아요.”
그 말에 또다시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다들 한국에서는 나름대로 상위권의 헌터들인 만큼, 일방적이었던 전투가 너무도 충격적이었던 탓이다.
김성연을 비롯해 직접적으로 공격당한 헌터들은 모두 기절했고, 마법을 파훼당한 마법사 클래스 헌터들도 반은 기절했다.
이래서야 사기가 저하되지 않는 게 이상할 것이다.
“그나저나 여기가 정말 서울이라면…….”
그렇게 말하려던 사람이 말끝을 흐렸다.
아무도 그 말에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모두가 이 던전에 들어온 이후 암묵적으로 합의한 사안이 있었다.
이 멸망한 도시의 모습을 보았을 때, 모두의 머릿속에 떠올랐음에도 말로 꺼내지 않은 사실.
하지만 진실이란 뒤로 미뤄 둔다고 해서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누군가가 말을 꺼냈다.
“……정말로 여기가 미래 서울의 모습인 건 아니겠지?”
“무슨 그런 재수 없는 말을 해?”
“그래, 말이 씨가 된다는데.”
물론 아무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말이다 보니 반발이 있기야 했지만, 다들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처음 말을 꺼낸 헌터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잖아. 서울에 대형 던전 브레이크가 터져서 다들 죽었다거나…….”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흐린 사람을 대신해, 또 다른 헌터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아까 저 여자가 다 죽였을 수도 있지. 결국 그 여자가 이번 던전 보스 몹인 거니까.”
그 말에 호수에서 기절한 강예나를 건져온 후 줄곧 옆에 붙어서 상태를 관찰하고 있던 양태원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기요.”
공략대 중에서는 가장 어리다지만 노려보는 눈길이 제법 사나웠다.
그 시선을 마주한 헌터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물론 한국에서도 날고뛰는 헌터들을 모아 놓은 만큼 양태원의 눈길 하나에 위축될 정도로 약한 건 아니었지만, 양태원은 이우연은 물론이고 그 랭킹 1위까지 은근히 싸고도는 헌터였다.
어지간하면 건드리지 말자는 분위기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말 함부로 하지 마시죠. 아직 확실한 것도 없는데.”
“아니, 나는 그냥…….”
“자, 자. 우리끼리 싸우지는 맙시다.”
끝없이 침체되어 가는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뛰어든 것은 이선이었다.
이선은 애써 쾌활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 상태로는 될 것도 안 될 겁니다. 일단 좀 먹고 쉬면서 생각해 봅시다. 시간을 두고 생각하면 좋은 방법이 떠오를지도 몰라요.”
이선의 말에 헌터 하나가 손을 들고 물었다.
“어, 저희가 여기 물자를 소비해도 될까요? 아까 그 여자 것 같던데, 손대면 안 되는 게 아닐지…….”
“만일 그랬다면 애초에 손대지 말라고 했겠지.”
이선에게 부축받아 간신히 두 다리로 서 있는 김숙자 교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입가에 대고 있는 손수건에서는 아직도 마르지 않은 피가 배어 나왔다.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건 빨리 체력을 회복하는 거네. 다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두도록…… 쿨럭!”
막 지시를 내리려던 김숙자 교수가 한 번 더 입가에 대고 있던 손수건에 피를 뱉었다.
이선이 대경실색했다.
“교수님! 여기 좀 앉으세요.”
“아니, 나는 괜찮네.”
김숙자 교수는 극구 사양했지만, 이선은 끝내 자신의 재킷을 벗어 바닥에 깔아 김숙자를 자리에 앉힌 후에야 일어섰다.
“자, 그럼 멀쩡한 사람들이 움직입시다. 저랑 같이 위층으로 탐험 나가실 분?”
사람들은 이선의 지시를 따라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면 피를 토해 ‘멀쩡하지 않은’ 축에 속한 이우연은 슬그머니 떨어진 후 운영자, 조한율과 자신 사이에 생성된 채팅창에 메시지를 입력했다.
이필연 : 보고 있어?
답장은 금방 도착했다.
조한율 : ㅇㅇ
애초에 이 던전의 이상한 점은, 대한민국 서버의 운영자인 조한율에게도 그 세부 사항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던전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대한민국 소속 헌터가 입장하게 되면 조한율 또한 헌터를 통해 던전 내부를 뜯어 볼 권한이 생긴다.
그래서 조한율은 한국 헌터들이 던전에 입장한 순간부터 이 던전 내부를 살피고 있었다.
여전히 마음에 드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시스템 운영자라는 끈이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조한율 : 그나저나 예나 씨는? 이왕이면 같이 정보를 전달하는 게 효율적일 것 같은데.
이우연은 그 메시지에 마트 한구석에 눕혀 놓은 강예나를 흘깃 바라보았다.
강예나는 아까 호수에 처박혔다가 건져진 후로도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절한 강예나 옆에는 양태원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래저래 원한을 산 터라 눈을 뗀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싶어 붙여 놓은 것인데…… 무슨 주인 잃은 치와와처럼 늘어져 있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심지어 어디서 주워 왔는지 또 꽃잎이나 떼고 있다.
양태원이 암울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일어난다…… 못 일어난…… 으악!”
“그 쓸모없는 점 좀 그만 쳐라.”
짜증이 난 김에 과자 봉지를 던져서 양태원의 머리를 가격한 이우연은 조한율과의 대화로 돌아왔다.
이필연 : 아직 정신 못 차렸어. 타격이 큰 것 같아.
조한율 : 하긴…… 보스한테 제대로 얻어맞았으니. 그쪽 예나 씨는 능력치가 거의 SSS급이던데.
이우연은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필연 : 뭐라고? SSS급?
조한율 : 그래, 플레이어로는 만렙을 찍었어. 그리고 우리 입장에서는 클리어 대상이니 몬스터로 따지자면 SSS급이라고 봐야지.
현재의 강예나보다 훨씬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렇게 누워 있지도 않을 테지.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만렙이라니.
이필연 : 그럼 우리가 이길 방법이 있긴 해?
조한율 : ……솔직히 모르겠다. 찾아봐야지.
이우연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야 쉬울 거라고 예상하고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게다가 클리어 조건도 조건이었지만, 이우연 또한 이 던전 내 환경에는 여러모로 걸리는 점이 많았다.
이필연 : 그래서 조한율, 네 의견은 어때? 여기가 정말 우리의 미래인 건가?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멸망한 도시의 모습.
필드가 서울로 한정되어 있었기에 다른 지역을 탐색할 수는 없었지만, 수도를 몬스터들의 손에 넘기고 되찾을 생각 없이 방치한 것을 보면 설령 한국의 다른 지역에 사람들이 생존해 있다고 한들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닌 듯했다.
조한율 : 일단…… 환경은 서울이 맞아. 시간대 자체는 우리보다 십 년 정도 뒤고.
이필연 : 그럼 정말로…….
조한율 : 그렇지만 이게 우리의 10년 후 미래라고 가정하기엔 일러. 만일 그렇다면 보스 예나 씨 쪽이 너나 다른 헌터들을 모르는 게 말이 안 되니까.
그건 그랬다.
이곳의 강예나는 이우연을 비롯해 양태원, 김숙자, 이선의 얼굴을 모두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딱히 이쪽을 인지했다는 기색은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즉, 이 강예나는 우리들을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저 이름만 같은 서울이라고 확정 짓기에는 영 찜찜했다.
이필연 : 그렇다면 여긴 대체 뭐야? 시스템의 장난질이야?
조한율 : 글쎄, 현재는 그냥 다 추측일 뿐이라서…….
이우연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운영자씩이나 되는 주제에 별 쓸모도 없는 소리를…… 이 정도의 추측은 백사현을 잡고 물어봐도 나올 것이다.
이우연은 짜증 난 그대로 살벌한 메시지를 보냈다.
이필연 : 뭐라도 쓸모 있는 소리를 뱉어 봐. 그러고도 네가 운영자야?
다음 메시지가 올 때까지 잠깐의 텀이 있었다. 아마 상대방도 짜증이 난 모양이다.
그래도 도발 덕분인지 다음 메시지는 한결 유용했다.
조한율 : 알아낸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일단, 코드를 뜯어 봤는데 이 던전, 우리 서버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던전이 아니야. 그래서 내가 정보를 보지 못했던 거고.
이필연 :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면 뭔데?
조한율 : 또 타 서버의 운영자가 건드린 것 같아.
드디어 도움이 좀 되는 소리를 한다, 싶어 주의 깊게 조한율의 메시지를 읽던 이우연은 금세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이필연 : 잠깐만. 타 서버 운영자? 또라니?
그렇게 묻자 잘 오던 답장이 끊겼다.
이우연은 그 기이한 침묵에 인상을 찡그렸다.
피차 서로 껄끄러운 사이지만, 둘 다 비즈니스적으로는 손발을 맞추어야만 한다.
그래서 그런지 조한율은 던전 정보만큼은 숨긴 적이 없었다. 오히려 네가 가서 해결하라며 엉덩이를 걷어찼으면 찼지.
그렇다면 지금의 경우, 조한율이 고의적으로 이 사실을 숨겼다는 말인데…….
아니, 아니지.
이우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이상한 일이 한 번 벌어지지 않았던가.
금세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필연 : 난이도 조절에 실패해서 시스템에 한 방 먹었다고 했던 거, 거짓말이었지?
얼마 전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던전 브레이크 사건.
조한율은 그게, 강예나가 입장한 던전의 난이도를 조절하고자 개입했다가 시스템에게 한 방 먹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필연 : 그때 사실은 타 서버의 개입으로 오류가 일어났던 거고.
어쩐지 당시 제법 합리적으로 들리는 설명을 듣고도 뭔가 묘하게 개운하지 않다, 싶었다.
그것도 그럴 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려다가 말았던 강예나의 표정에 묘하게 죄책감이 어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역시나, 그 변명이 거짓말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나한테 숨겼다는 건…….’
이필연 : 그럼 그 타 서버의 운영자와 강예나가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
단숨에 거기까지 추론이 이어졌다.
그리고 조한율은 이미 이우연이 답을 알아차린 상황에 굳이 더 상황을 빙빙 꼬려 들지는 않았다.
조한율 : 와, 눈치가 진짜 귀신이네.
사실 그리 유추해 내기 힘든 답은 아니었다.
애초에 강예나는 딱히 거짓말에 소질이 없다. 그때도 무언가 숨기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그런데 그때 더 따지지 않은 것은 어차피 이미 일어난 일이고, 수습도 했고, 말하기 싫어하는데 굳이 캐물었다가 척을 질 정도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조한율이 다시는 같은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하기도 했고.
하지만, 이렇게 또다시 ‘오류’가 일어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필연 : 그럼 이제 숨기지 말고 말해. 지금 우리가 뭘 가릴 상황이야? 이러다간 여기에 들어온 스무 명 다 죽을 판이라고.
이 공략에 실패하게 되면 이우연 본인도 물론이지만, 조한율 입장에서도 까딱하면 한국의 주력 플레이어들을 대거 잃게 될 판이었다.
약간의 힌트라도 절실한 상황.
그러려면 정확한 사태 파악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조한율도 알고 있는 만큼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곧 메시지가 떠올랐다.
조한율 : 그래. 네 말이 다 맞고, 이번에도 그 타 서버 운영자 짓인 것 같아. 클리어 메시지가 깨져서 보인다길래 아까 점검해 봤더니 우리 서버 방화벽이 뚫렸더라고.
그 내용에 이우연은 확 짜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이필연 : 아, 진짜 죽고 싶냐? 일 똑바로 안 해? 잘 막았어야지!
조한율 : 야, 이번에는 내 탓 아니야. 너나 예나 씨 같은 플레이어들이 있어서 틈이 자꾸 생기는 걸 어쩌라고!
이렇게 나오면 또 이우연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어진다.
어쨌든 자신의 존재가 조한율의 서버 관리에 어느 정도 부담을 주고 있는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우연은 더 짜증을 내는 것은 관두고 좀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물꼬를 틀기로 했다.
이필연 : 그래서 그 외부 서버의 운영자란 녀석이 이 던전을 생성시켰다, 이거지. 그럼 목적은 한국 플레이어들을 죽이는 건가?
만일 목적이 그거라면…… 참으로 쉽게 달성할 것 같긴 했다.
클리어 대상인 보스가 저렇게 강해서야.
그렇게 생각한 이우연은 잠시 침묵했다.
보스 몬스터라니.
강예나와 같은 얼굴, 그리고 시간대와 환경이 약간 다를 뿐이지 동일인물인 사람을 두고 이런 생각을 하니 무언가……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감각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게는 사치스러운 감정이라는 것을 모르지도 않았다.
조한율 : 아니, 만약 헌터들을 죽이는 게 목적이라면 이런 복잡한 던전을 만드느니 그냥 저번처럼 오류를 쏟아 내 버리면 될 일이잖아.
하기야 그것도 그랬다.
저번처럼 대규모 던전 브레이크 사태가 이렇게 짧은 텀으로 또 일어났다면, 저번처럼 큰 사상자 없이 상황이 마무리되지는 못했을 테니 그쪽이 훨씬 효율적이다.
조한율 : 그런데 굳이 이렇게 강예나와 동일인물로 보이는 플레이어 처치를 클리어 조건으로 지정한 던전을 만들었다고. 이거 감이 오지 않냐?
이우연은 조한율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곧장 이해했다.
이필연 :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운영자의 목적은 강예나를 죽이는 거다?
조한율 : 내 추측은 그래.
이우연은 눈가를 좁혔다.
지금까지 조한율이 한 말을 종합해 보면 즉…… 그 의문의 타 서버 운영자는 그저 강예나를 죽일 목적으로 던전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정말 끔찍한 악의였다.
게다가 이게 강예나 개인을 노린 시도라면, 만일 이번 공략에 성공하더라도 또 같은 상황이 일어날 확률이 높았다.
여러모로 바람직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이우연이 한동안 메시지를 보내지 않자 조한율이 답답해졌는지 급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조한율 : 야, 야, 야! 그래도 섣불리 행동하지는 마라.
이필연 : 내가 뭘?
조한율 : 이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인 예나 씨를 제거하겠답시고 칼 들고 달려든다거나…….
이우연은 그 메시지를 보고 침묵했다.
도대체 이 인간은…… 나를 뭘로 보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거지?
이필연 : 내가 무슨 인간 말종이냐?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나 살자고 강예나 뒤를 칠까 봐?
물론, 이우연이 강예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헌터로서의 능력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앞으로도 강예나 때문에 이런 던전이 계속 생긴다면,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 근본 원인이란 것도 따지자면 타 서버 운영자 쪽이 아닌가.
이우연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던전 공략에서 효율성을 추구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태의 원인을 착각할 정도로 멍청한 건 아니었다.
게다가 강예나란 인간이 죽인다고 쉽게 죽어 줄 인물도 아니고.
또 아무리 서로 간의 거리를 지키고 있다지만, 이제껏 몇 번이고 함께 공략을 한 신의 정도는 있다.
하지만 조한율은 코웃음을 치는 것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조한율 : 웃기고 있네. 다른 사람이었으면 나한테 이런 위험 요소는 바로 손절하라고 난리쳤을 거면서.
이필연 : 이게 진짜…….
조한율 : 어쨌든, 일단 보스 예나 씨도 당장 너희들을 어떻게 할 생각은 아닌 것 같으니까 클리어 조건을 숨기면서 좀 버텨 봐. 내가 방법을 계속 찾아볼게.
이우연은 침묵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패배하고 나니 자존심은 말도 안 되게 상했지만, 조한율 말대로 지금은 그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던전에 들어와 있는 플레이어 전원이 보스에게 덤벼도 대적하지 못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니까.
‘물론 그 성격에 곧장 우리를 죽일 생각은 없겠지만…….’
그래도 한국 헌터들의 목적이 ‘강예나’의 처치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는 일.
조한율 : 여튼 나도 계속 무슨 구멍은 없는지 알아볼 테니까…….
“야, 이우연.”
그때였다.
누군가 이우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이우연은 깜짝 놀라 등 뒤를 돌아보았다.
“누, 누나! 그렇게 갑자기 일어서면…….”
그리고 거기에는 아직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서 있는 강예나가 있었다.
그 상태로 강예나가 이를 빠득, 갈며 말했다.
“그 새끼 어디 갔어?”
그 새끼가 누굴 이야기하는 건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본인을 이야기하는데 그 새끼라니.
평소라면 그렇게 농담이라도 해서 기분을 풀어 보려 노력할 텐데, 그럴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가면 너머로 얼핏 보인 강예나의 눈동자가 홱 돌아 있었던 것이다.
그야 호전적인 모습은 여러 번 봤지만, 이렇게까지 눈이 뒤집힌 모습은 처음이었다.
노골적인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기세에 심지어 강예나 등 뒤에 선 양태원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이우연조차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이쪽에도 저쪽 강예나 못지않은 최종 보스가 강림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