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194화 (195/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94화

“아, 이우연!”

내내 양태원을 무시하고 있던 이우연은 요새 조금 봐줬다고 그새 또 기어오르려는, 전혀 귀엽지 않은 후배를 노려보았다.

“맞을래?”

“그러니까 무시하지 말고 대답하면 되잖아.”

“네가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럴 시간에 잠이나 자.”

“뭐가 쓸데없어? 같이 말리러 가자는 건데.”

그 말리자고 하는 게 문제니까 그렇지.

양태원이 무엇을 말리자고 까부는지는 뻔했다.

몇 시간 전, 강예나는 기절에서 깨어나자마자 또 다른 강예나가 어디로 갔는지를 캐묻더니 이 건물을 뛰쳐나갔다.

즉 ‘보스’ 쪽이 이 건물에서 나서지 말라고 했던 경고를 완전히 어긴 셈이다. 그래서 양태원이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거고.

양태원 외에 다른 헌터들도 그 모양을 보았고, 어떤 이들은 ‘이 건물을 나서지 말라’라는 경고를 되새김질한 듯했으나, 그렇다고 뛰쳐나가는 랭킹 1위를 말릴 만한 인물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졌다고는 해도, 두 사람 간의 대결 자체는 그들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어 버린 것이었으니까.

과연 누가 말이나 함부로 걸 수 있을까 싶다.

이우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저걸 무슨 수로 말릴 건데.”

일어나자마자 눈에 불을 켜는 꼴이 무슨 최종 보스 같더구만.

물론 일반적인 헌터들이 아니라 지휘 계통을 맡을 만한 헌터, 가령 김숙자 교수가 깨어 있었다면 이야기가 좀 달랐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강예나가 저렇게 아무 대책 없이 뛰어나가는 걸 보면 말렸을 테고, 강예나도 김숙자 교수 정도의 인물이 이야기하면 듣는 척이라도 했을 테니.

하지만 김숙자 교수는 진언을 파훼당한 반동을 견디기 힘든 건지, 아까 전부터 포션을 복용했는데도 기절한 상태였다.

강한 헌터이긴 하지만 역시 나이에 따른 체력적인 문제는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본인도 슬슬 일선에서 은퇴해야겠다는 기색을 비치는 것이긴 한데…….

게다가 김숙자 교수가 저렇게 되어 버려서 이선 헌터마저 덩달아 넋이 나간 상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선 정도는 밖에 남겨 두는 건데.’

달걀은 한 바구니에 담아 두지 말라고 하는 말이 왜 이제야 생각나는지 모를 일이다.

하여간 이선이 기절한 교수님 곁에 붙어서 손을 달달 떨고 있는 걸 보아하니, 저쪽도 체력적 문제는 없다지만 정신을 추스르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자, 부상자들은 여기로 옮깁시다.”

그나마 여러모로 인맥이 넓은 김하현이 부재한 지휘 계통을 대신해 이리저리 헌터들을 추스르고는 있지만…… 어쨌든 오늘 밤 정도는 오로지 휴식에 써야 할 듯했다.

그러니까 뛰쳐나간 강예나를 말릴 만한 인력은 없다, 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니 양태원은 별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다른 사람이 무슨 상관이야? 형 말이야, 형. 형은 할 수 있잖아.”

“……너 지금 내 꼴 안 보이냐?”

자존심이 상해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만, 솔직히 이우연의 상태도 엉망진창이었다.

김숙자 교수처럼 기절까진 하진 않았으되, 그래도 진언 파훼의 반동은 그리 쉽게 넘길 만한 부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함부로 강예나를 따라나서지 못한 것이다.

“이 상태로 괜히 그…… 여자와 부딪혔다간 그대로 죽어.”

만전의 상태로도 졌는데 지금은 그 또 다른 강예나가 손가락만 까딱해도 죽을 판이다. 섣불리 나설 때가 아니었다.

양태원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기색이었으나, 어쨌든 이우연이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자 침울한 표정을 지은 채 세운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으, 나는 왜 이렇게 무능하지…… 저러다 누나 죽으면 어떡해?”

“……그렇게까지야.”

그렇게 대답은 했다만 강예나를 혼자 밖으로 보낸 이우연도 심경이 복잡하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뭐라도 실마리를 잡을 가능성이 있는 건 강예나 본인뿐이야.’

일단, 저쪽 보스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저쪽도 자신과 싸운 인물이 어떤 존재인지는 눈치챈 것 같으니 당장 죽이지는 않을 터.

그러니 그 역할은 강예나가 제격이었다.

또 강예나가 다소 흥분하기 쉬운 면이 있기는 해도 노련한 헌터인 것 역시 사실. 어찌 됐든 클리어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이우연이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빨리 육체를 정비해 다음 전투에 대비하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이성적인 생각을 하는 것과 별개로 헛웃음이 나오기는 했다.

‘나야말로 이렇게 무능한 기분을 느껴 보는 건…… 오래간만인데.’

처음 시스템이 나타난 후……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 모든 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발버둥 치며 살아남았다.

이 삶에 대한 집착이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죽기는 싫었으니까.

그리고 이제까지는 어떻게든 해 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어떻게든 될 거다…… 라고 하고 싶지만.’

그렇게까지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다.

일단 현재 클리어 조건이 달성 불가능한 레벨인 것도 그렇고…… 이우연이 홀로 생각에 잠겨 들던 때였다.

“저기, 이우연.”

저 멀리서 눈치를 살피고 있던 백사현이 다가왔다.

뜬금없이 말을 걸어온 남자를 향해 이우연은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아니, 그…….”

등에 제 몸의 반만 한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있는 주제에 이우연 상대로도 영 기를 펴지 못하는 게, 역시 영 믿음직하지가 못했다.

“아까 전에 그 보스 몬…… 하여간 그 여자 있잖아.”

심지어 옆에서 보스 몬스터라는 말에 양태원이 눈을 시퍼렇게 뜨자 엉겁결에 말을 바꾸는 걸 보니 더욱 그랬다.

“그…… 내가 어디서 본 것 같거든.”

그래서 그냥 이대로 백사현의 말을 무시하려던 이우연은 뜻밖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강예나의 얼굴을 알고 있다고?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였던가?

하지만 만일 그랬다면 강예나가 언급이라도 했을 텐데 이우연은 딱히 들어 본 바가 없었다. 물론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기에 이우연은 일단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되물었다.

“어디서 봤는데?”

“그, 내가 예전에 연락처 물어본 사람이랑…….”

연락처?

전혀 상상하지도 못 했던 뜻밖의 전개에 이우연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뭘 물어봤다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여하튼 내가 일산 호수 공원에서 봤던 사람하고 되게 닮았는데…… 착각인가? 착각이겠지?”

“뭐? 일산 호수 공원?”

의외의 단어에 이우연은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반응했다.

옆에서 침울하게 늘어져 있던 양태원이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을 정도였다.

“너 지금 최초의 SSS급 던전 이야기하는 거야?”

“아, 아, 아니야!”

깜짝 놀란 백사현이 당황해 손을 내저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얼굴이 다 새하얗다.

“얼마 전 촬영 때문에 거기 갔었거든. 그때 이야기야.”

“……사람 헷갈리게 말하지 좀 마.”

괜히 놀라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당시 일산 던전에 있었던 헌터들이 많군.’

김성연부터 시작해서 김숙자, 조한율, 백사현. 그리고 자신까지.

생각해 보니 당시 그 던전에 갇힌 헌터들 중 걸출한 인물이 제법 많았다. 우연이라기에는 가끔 기사로 다뤄질 정도로 유의미한 숫자였다.

뭐, 가끔 범죄나 저질러 감옥에 가는 놈도 나오기는 하는 모양이지만…… 이름이 뭐더라, 무슨 태호였는데…… 하여간에.

이우연은 눈살을 찌푸린 채 백사현을 훑어보았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고?”

이 녀석도 마음에는 안 들지만 그 걸출한 헌터 중 하나이기는 했다.

그런데 그 걸출한 헌터께서는 아무래도 우연히 강예나를 만나, 번호를 물어보고, 대차게 까였던 모양이다.

뭐, 그 정도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니 저 얼굴을 확실히 봤는데도 확신까지는 없는 거고.

‘……이것 참.’

대충 상황을 파악한 이우연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나저나 상황이 참 애매하게 꼬였다.

설마 랭킹 1위께서 클리어 대상으로 튀어나올 줄은.

이래서야 이후 강예나의 신원이 밝혀졌을 때도 혼란이 초래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다들 이쪽의 ‘보스’ 얼굴을 봐 버렸으니까.

‘이것도 문제군. 나가서 고민할 문제긴 하지만 이걸 어쩐다…….’

“사실 저번에 봤을 때도 어딘가 본 것 같다는 이상한 기시감이 들어서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여기서 또 보니까 정말 뭔가 이상…….”

그렇지 않아도 심사가 복잡한 와중에 옆에서 백사현이 묻지도 않은 말을 계속해서 주절대고 있었다.

당연히도, 이우연은 그리 귀담아듣지 않았다.

“지금 네 실패한 헌팅 이야기 따윌 들어 줄 때는 아닌 것 같은데. 뭐, 다시 연락처라도 물어보게?”

이우연이 차갑게 대꾸하자 백사현의 귀가 벌겋게 물들었다.

“그런 게 아니라! 나는 그냥 왠지 낯이 익고, 이런 상황에서 자꾸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을 만나니까…….”

“그래서 낯이 좀 익은 게 뭘 어쨌는데? 그게 공략에 도움이 돼?”

“윽…….”

다소 신랄하게 대꾸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도 백사현이 강예나의 얼굴을 어렴풋하게 기억하든, 헌팅에 실패했든 간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뭐든 간에 어쨌든, 이 클리어 조건을 깨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최우선이다. 굳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어 줄 의리도 없었다.

“더 쓸모 있는 정보가 있는 게 아니라면 괜히 정신 산만하게 만들지 말고 꺼져. 나 쉬는 거 안 보여?”

“……망할!”

결국 백사현이 나지막하게 욕을 지껄이며 건물 한구석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며 옆에 쭈그려 앉아 있던 양태원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눈치도 없이 번호 물어봤다는 소리는 왜 해서 형 심기를…….”

“그런 거 아니니까 너도 조용히 해.”

*   *   *

나와 이 녀석의 무엇이 달랐는가.

그걸 알아내 보고자 ‘우리’는 서로의 연대표를 맞춰 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리 둘 다 옵타티오를 처치하고 출구로 나선 것까지는 같은 거네.”

그런데 이후의 행적을 맞춰 보기 시작하니 사실 연대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왜냐하면 이쪽의 나, 즉 만렙인 강예나 쪽이 겪은 일은…… 온통 몬스터 자생지가 된 대한민국에 홀로 남겨져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필사의 노력뿐.

심지어 몬스터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쳐들어온 플레이어들도 종종 상대해야만 했다고 한다.

어차피 멸망한 나라. 자기들 연습 겸 레벨을 올리는 장소로 쓰겠다며 쳐들어오는 놈들이 제법 많았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나도 만렙을 찍긴 했지만 솔직히 달갑진 않아.”

이건 거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그야말로 아포칼립스 생존물이었다.

“이제 슬슬 통조림 제품에 물려 버렸어.”

묘지기가 아주 암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기야 이 멸망한 도시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먹거리란 보존 기간이 긴 통조림밖에 없었을 테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병실에서 치킨부터 시켜 먹었던 나와는 아주 다른 행보였다.

솔직히 이건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알게 된 또 다른 사실이 있었다.

“한국에서 깨어났을 때 능력치가 다운되지 않았다고?”

내가 허접 깡통이 된 것과 달리, 이쪽의 나는 능력치 하향 패치를 먹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물론 이쪽 육체가 상당히 약화되어 있어서 일정 기간 동안 디버프를 먹긴 했는데, 능력치 자체가 초기화되진 않았어.”

“……짜증 나는데.”

이 차이는 뭐였을까.

하지만 생각해 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그거야 돌아온 게 대한민국 시스템이 아직 살아 있었던 시기라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러니 그쪽 시스템 레벨에서는 내 레벨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강제 하향 조정을 먹은 거고.”

“그게 말이 되네.”

지금도 79 이상으로 레벨을 올리는 것은 금지된 상태이니 알 만했다. 실제로도 안정화되기 전까지는 내 존재 자체가 주변 던전의 포화도나 레벨을 올려 버리기도 했고.

천천히 답을 맞혀 나가던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 잠시만. 그런데 애초에 대한민국이 그 꼴이 됐는데 어떻게 내가 살아남았지? 아무리 강원도 산골짜기 병원이라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운이 좋았나?”

그리고 거기에는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내가…… 아니, 우리가 입원해 있던 병원이 몬스터 침입에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는 요새처럼 지어져 있더라고.”

이쪽의 내가 일어났을 때는 병실이 견고한 금속판으로 둘러져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을 때 일하던 직원 중 누군가가 안전장치를 발동한 것 같다고.

덕분에 일어날 때까지 몬스터의 침입을 받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 빼고 다른 환자들은 죽은 걸 보면 운도 상당히 따랐겠지만…… 처음부터 던전 브레이크 같은 사태를 상정하고 만들어진 병원이었던 건 분명해.”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솔방울 같은 녀석, 그러니까 육체 상태를 유지시켜 주는 유용한 스킬을 사용할 줄 아는 헌터를 간호사로 고용하고 있었던 것만 보아도 그랬다.

그 병원 자체가 상당히 돈을 들여야 입원할 수 있는, 일종의 고급 병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병원에 의식불명이 된 나를 입원시킨 건…….

“……뭐어, 그 사람들은 돈으로는 뭘 안 아끼잖아.”

누가 나 자신 아니랄까 봐, 여자는 내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

“……그랬겠지.”

하지만 그냥 그뿐이다.

나는 멸망한 도시를 바라보았다.

내 침묵을 여자는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묻고 싶었을 것이다. 굳이 강원도의 병실에서 깨어나 이 서울까지 기어 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부모님이 이혼하기 전에는…… 이 근처에서 살았지.’

아직 두 사람이 사이 회복에 어느 정도 의지가 있을 때라 그런지 근처 한강 공원으로 놀러 간 적도 있었다.

몇 되지 않는, 유년기의 즐거운 기억 중 하나였다.

그 기억이 너무 즐거웠던 터라, 이혼이 확정되었던 10살 즈음에 혼자 한강 공원으로 가출을 시도했다가 미아로 신고당해 잡혀 온 적도 있기는 했지만…….

“…….”

아마 내가 멸망한 대한민국에서 깨어났더라면 결국,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야 병원을 통해서 두 사람 모두 연락처가 기재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비용이 지불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굳이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쪽의 나는 또 경우가 달랐으니까.

내 눈으로 직접 생존을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어쩌면 믿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이 나 자신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묘한 일이었다.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말해 주지 않아도 그저 행적을 밟아 나가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

묘지기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그간의 기억을 돌아보는 것이 그리 평온하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 이야기는 이게 전부야. 이제 네 이야기를 들려줄 차롄데.”

“……그래, 나는 한국에 왔을 때…….”

내가 이야기를 막 시작하려던 때였다.

여자의 표정이 갑자기 일변했다.

그리고 그 눈빛을 알아채는 동시에, 나 또한 코끝에 무언가 달콤한 냄새가 스치는 것을 알아차렸다.

파리지옥이 무언가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먹이를 유혹하는 냄새를 내뿜은 것이다.

그게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적이 나타난 것이다.

스르릉!

따질 것 없이 우리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빼 들었다.

나는 가만히 기감을 퍼트려 주위의 흔적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여자가 혀를 차는 것이 들렸다.

“……쳇, 귀찮게 됐군.”

“뭐야? 대체 무슨 적이…….”

“오, 여기에 있었군.”

파리 지옥이 쩍, 하고 입을 벌리는 것과 동시에 그 사이로 날카로운 은빛 줄기가 날아들었다.

달빛을 반사한 칼날이었다.

휘둘러진 검격에 맞은 파리 지옥 한 그루가 순식간에 절명하며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쩍 갈라진 몬스터 사이로 등장한 것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질투의 빛을 닮은 녹색 눈동자의, 사악할 정도로 아름다운 악마.

그가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과장된 몸짓으로 팔을 벌리며 말했다.

“나의 죽음을 만나러 내가 왔다네!”

정말이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악마, 벨리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