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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195화 (196/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95화

- S급 몬스터 : 벨리알이 출현했습니다.

나는 벨리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신이 나서 달려온 악마는 뜻밖의 상황에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다.

“이게 무슨……?!”

아마도 같은 얼굴을 한 인간이 둘이나 있으니 아무리 악마라고 해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저 새끼가 왜 여기에 있어?”

그리고, 황당해하는 나와는 달리 여자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한 번 더 혀를 찼다.

“저 지긋지긋한 마조히스트 새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또라니?”

“전 세계적으로 힘든 시기거든. 알잖아? 사람은 절벽 끝으로 몰리면 선택을 강요당하게 되지.”

악마를 향한 검의 날이 달빛을 받아 섬뜩하게 빛났다.

악마를 맞닥뜨린 사람의 얼굴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아니, 어딘가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명색이 S급 몬스터인데도.

“그래서 악마와 계약해 힘을 얻으려는 인간이 끊이지 않아.”

하기야 타르토스에서도 악마와 계약해 힘을 얻으려는 플레이어들은 많았다.

산 제물을 바쳐 악마를 소환하고, 악마와 계약해 영혼을 대가로 힘을 얻는다. 이것이 플레이어가 악마와 계약하는 법이다.

물론 산 제물을 바치는 것만 해도 엄청나게 수고로운 일인 데다, 설령 계약이 성사된다고 해도 악마 새끼는 대개 계약 이행을 어떻게든 미묘하게 해석해 빠져나가려 하기에 사실 좋은 거래 상대는 아니다만…….

“익숙한 이야기로군.”

저 녀석 말대로, 절박해진 인간의 시야는 좁아지기 마련이다. 설령 파멸이 예정되어 있다고 한들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할 정도로.

나만 해도 ‘운명의 씨앗’이 뭔지 정보를 찾으러 마계까지 쳐들어갔더랬다.

물론 타인을 희생시켜 가며 산 제물로 삼는 녀석들은 전혀 다른 얘기지만.

“게다가 이 악마 새끼는 용사랑 싸우는 게 제일 짜릿하다면서 일부러 나를 찾아오는 거라고.”

“뭐야 그거? 기분 나빠.”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이야기였다.

악마 놈들이 용사 클래스에 집착하는 거야 하루 이틀 된 이야기는 아니긴 하지만, 이렇게 다른 세계의 나에게도 집착하다니.

“내 말이. 악마 새끼란 것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지. 뭐, 나도 대부분 혼자 지내다 보니 심심해서 평소에는 길게 상대해 줬지만…….”

여자가 느릿하게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번엔 눈치 없이 나타난 만큼 바로 죽어 줘야겠어.”

쾅!

묵직한 한 걸음이었다.

하지만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랐다. 그 벨리알이 채 대응하지도 못 할 정도의 속도였다.

“자, 잠시…… 컥!”

땅이 발을 구른 대로 파이는 것과 동시에, 시퍼렇게 빛나던 검날은 다음 순간 벨리알의 배에 그대로 꽂혔다.

파괴적인 한 방이었다.

우두둑!

살가죽이 뚫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뻐억!

그리고, 검날에 배가 꿰뚫린 채 여자의 주먹에 머리를 크게 한 대 맞은 벨리알의 뺨 부분이 기괴하게 함몰되었다.

썩어도 마왕이라고, 밸리알 또한 손끝에 마력을 모아 어떻게든 반격을 해 보려고 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것도 우악스러운 주먹 한 방에 깨져 버렸다.

덕분에, 제대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악마의 무릎이 서서히 무너졌다.

하지만 만렙은 가차가 없었다.

흐르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며 바닥으로 무너지는 몸을 멱살을 잡아채 일으켜 세운 여자는, 벨리알의 배에 꽂힌 성검을 천천히 빼냈다.

“허억!”

배에서 검을 강제로 잡아 빼내진 벨리알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아마 엄살은 아닐 것이다. 나도 검에 찔려 봐서 아는데, 본래 찔릴 때보다 뺄 때가 더 아픈 법이다.

“마, 말도 안…… 흐억!”

그리고 악마 새끼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놀라웠던 모양인지,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품위 있고 고상하던 마왕의 모습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꼴좋다.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벨리알이 발치에서 쓰러진 채 꺽꺽대고 있었다.

그래 봤자 정말로 죽지도 않는 주제에 오버하긴.

“어, 어떻게 이렇게…… 레나, 언제 이렇게 강해진 거지?”

그러자 만렙의 강예나가 코웃음을 쳤다.

“그게 아니라 이제까지 봐준 거다, 이 새끼야.”

어쩐지…….

벨리알 녀석, 자신만만하게 나선 것치고 너무 당하기만 한다 싶더니, 묘지기 녀석이 이제껏 악마를 적당히 가지고 놀았었나 보다.

그래서 저 악마가 콧노래를 부르며 뛰어온 것이다.

그나저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녀석, S급 아냐?”

그야 벨리알은 여러모로 릴리스보다는 한 수 아래지만, 어쨌든 마왕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반격은커녕 한 방에 당하는 걸 보면 S급은커녕 A급도 안 되어 보인다.

“과연 만렙은 만렙이라는 건가.”

갑작스럽게, 얼마 전 마계에서 벨리알의 수하에 불과한 데스나이트 상대로 고전했던 기억이 떠올라 약간 서러워졌다.

당시 장소가 마계라 디버프를 받고 싸웠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줄이야.

지금의 내가 저 벨리알과 싸우게 된다면 용사 클래스 버프에 현 능력치를 감안해 이길 수야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날벌레 죽이듯 쉽게 처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능력치가 높아 봤자 좋을 것도 없어.”

나름대로 칭찬이었는데, 내 말을 들은 여자의 입꼬리는 이상하게 비틀려졌다.

“지킬 게 남아 있지 않은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

나는 조용히 악마의 멱살을 잡아 올린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거야 그랬다.

능력치가 아무리 좋다고 한들, 그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겠지.

곧이어 벨리알의 목 줄기에 검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번엔 타이밍이 안 좋았네. 잘 가라, 악마. 이제 또 보진 말자고.”

콰득!

그리고 목에 검날이 더 깊게 파고들려던 순간이었다.

입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던 벨리알이 손을 들어 목을 파고들던 검날을 잡았다.

“잠깐, 잠깐!”

여자가 그 외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이제 와서 죽기가 싫은 건 아닐 테고.”

“그게 아니라…… 왜 여기에 ‘저것’이 있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벨리알이 검을 잡지 않은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악마에게 손가락질을 당한 나는 표정을 찡그렸다.

“저게 미쳤나…… 나더러 저거라고 했냐?”

나야 괜찮지만 저건 악마 새끼 주제에 건방지다.

그냥 빨리 죽이고 하던 이야기나 하자, 그렇게 이어서 말하려던 때였다.

벨리알의 녹빛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문득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으음, 인간 세상에 나왔을 때만 잠시 동기화된다고나 해야 할까.”

어라, 그러고 보니…….

“거지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냥 뒈…….”

“자, 잠깐만!”

나는 막 벨리알의 목을 쳐 버리려던 여자를 제지했다.

벨리알의 목을 반쯤 자르려고 하던 여자가 동작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네가 죽이고 싶어서?”

“그런 취미 없어. 그게 아니라…… 저 악마 녀석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좀 있어.”

“뭐?”

여자는 내 말에 잠시 의아한 듯했지만, 목을 자르려던 검을 멈추고 악마의 몸을 바닥으로 털썩, 떨어트렸다.

써먹을 구석이 생각나긴 했다만, 일단 확인부터 해야 했다.

나는 바닥으로 떨어져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악마를 내려다보았다.

“벨리알. 너, 나 알지?”

여자가 내 말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야 얼굴만 보아도 동일인물이라는 것은 알 수 있으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얼른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벨리알의 반응은 확연하게 달랐다.

나를 올려다본 악마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린 것이다.

“그래, 저번에는 마계에서의 만찬을 놓쳤지. 설마 그렇게 도망갈 줄이야…… 그런데 대체 왜 이 세계에 와 있는 거지?”

그 말에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역시.”

예전에 나는 마계를 찾아 운명의 씨앗과 관련된 단서를 찾았었다. 그리고 진작 클리어 조건을 달성해, 출구가 생성되었다는 점을 이용하여 정보만 빼낸 후 그대로 튀었고.

그런데, 이쪽 세계에서 만난 벨리알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즉, 이 벨리알은 이쪽의 ‘강예나’를 알고 있는 동시에 나 또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릴리스도 시간대가 꼬였는데 타르토스에서의 나를 기억하고 있더라고.”

백록담 던전에서 릴리스와 만났을 때, 릴리스는 ‘동기화’라는 단어를 썼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시간대가 꼬이고, 설령 세계마저 달라져도 악마 놈들의 기억은 공유되고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렇다면…….

나는 멸망한 세계의 묘지기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 녀석이 내 이야기를 증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침 적시 적소에 쓸 만한 정보원이 나타난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약간 고민을 하긴 했었다.

그도 그럴 게, 앞으로 내가 이쪽의 묘지기에게 들려주어야 하는 내 이야기는…… 여러모로, 교차 검증이라도 하지 않으면 믿지 못할 만한 이야기였으니까.

타르토스가 멸망했다는 것도, 그 멸망한 운명을 뒤집을 수 있다는 것도.

애초에 나부터 ‘운명의 씨앗’의 존재조차 믿지 못해서 무작정 마계까지 쳐들어가지 않았는가.

이런 이야기를 해 보았자 순순히 믿을 리도 없었다.

여자가 나와 벨리알의 얼굴을 몇 번 번갈아 보는가 싶더니, 곧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까지 끌어들여야 믿을 만한 일을 겪었나 보군.”

역시 나 자신이라 그런지 곧장 내 의도를 파악하는 게 편하기는 했다.

묘지기는 벨리알의 갈비뼈 위를 발로 지그시 압박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인지 한번 들어 볼까.”

대단한 이야기라…….

나는 픽 웃었다.

“아포칼립스 생존기만큼 대단한 것 같지는 않다만…….”

사실 나도 나름대로 수라장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쪽 강예나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겪은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어쨌든, 내게는 지킬 게 남아 있었으니까.

적어도 지금은.

“잘 들어 둬.”

그렇게 말하며 나는 시스템창을 힐끗 보았다.

사라지지 않은 클리어 조건 메시지가 무언가를 경고하듯 빨갛게 반짝이고 있었다.

- 클리어 조건 : 강■나를 처치■십시오.

“내가 눈을 떴을 땐…….”

그리고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긴 밤이었으나, 이야기는 그것보다 더 길었다.

내 이야기가 끝날 즈음에는 이미 휘영청 떠올랐던 달이 슬슬 어둠 너머로 사라지고 희미한 새벽 동이 떠오르고 있었다.

“X발, 나랑 장난하나.”

그리고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묘지기는 욕설부터 내뱉었다.

“그렇게 개같이 굴렀는데 최후의 던전이란 말도 거짓말이었고, 심지어 타르토스는 멸망했다고?”

빠직!

“커헉!”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숨이 붙어 있는 벨리알이 갈비뼈라도 부러졌는지 또 피를 울컥 토해 냈다.

확연한 화풀이었다만, 전혀 동정심이 가지 않았다.

여자가 짧은 단발을 손으로 마구 쥐어뜯었다.

“진짜 지X 맞네. 인생이 뭐 이따위지?”

“내 생각에도 그렇다.”

상대가 나 자신이라 숨길 것도 없었다.

나도 인간인 만큼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매 순간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기에 이렇게 발버둥 치고 있는 셈이지만.

묘지기는 연신 욕설을 내뱉으며 거의 빈사 상태가 된 벨리알을 걷어찼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나와 같은 얼굴에 걱정과 슬픔이 깃들었다.

“그래서 애들은? 알리시아랑 루카스만 만나 본 거야? 걔들은 무사해?”

목소리에서도 다급함이 느껴졌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아 새삼스럽게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그렇지만 아직 운명의 씨앗을 사용하는 것에 성공한 것도 겨우 1회 차니까…… 앞으로도 성공해야 정말 무사할 수 있겠지.”

“젠장.”

여자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아마도 충격이 클 것이다.

나도 처음 타르토스가 멸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정신을 추스르기가 힘들었으니까.

한동안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묘지기는 묘지기대로 새롭게 알게 된 타르토스의 멸망 때문에 충격을 받았고, 나도 나름대로 정리해 볼 것이 있었다.

일단, 이 멸망한 대한민국의 정체부터.

‘역시…… 이곳은 우리의 미래는 아니야.’

조한율이 살펴보았을 때 이곳은 대한민국이되, 연대 자체는 우리보다 앞서 있다고 했다. 게다가 타르토스라는 선례도 있으니, 처음 이 던전에 들어왔을 때의 나는 이곳이 내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 버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 가능성은 사라졌다고 봐야 했다.

그도 그럴 게, 이쪽의 강예나가 정말로 미래 시점의 나라면 적어도 이우연과 양태원을 비롯한 한국 헌터들의 얼굴을 알아봐야 했으니까.

그러니 여기가 우리의 미래 시점일 가능성은 제외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다.

이곳의 강예나가 나와 같은 인물이면서도 전혀 다른 환경의 대한민국에 도착한 이유.

내가 운명의 씨앗을 손에 넣어 운명을 바꾸어 본 적이 있기에 알게 된 가능성.

가령, 정소현.

정소현은 백록담에서 홀로 희생해 악마들이 이 현세를 침범하는 것을 막았다.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정소현이 선택한 기로에서부터 뻗어 나간 삶이다.

하지만 혹시…… 정소현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정소현이 자신을 희생하는 대신 삶을 선택했더라면, 당시의 대한민국은 곧바로 악마의 침입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르는 지점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그건 일종의 분기 같은 거겠지?’

최근 양태원에게 하도 게임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제법 현대 한국인처럼 정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정소현 한 사람일 뿐, 어쩌면 더 많은 이들이 이렇게 운명이 갈리는 분기 앞에서 선택을 했을 것이다.

마치 친구를 구하러 마차 밖으로 나서는 용기를 낸 메이처럼.

그 꼬맹이의 선택은 결국 알리시아를 살려냈고, 곧 타르토스를 회생시킬 가능성으로 연결되었다.

세계의 존속을 결정하는 거대한 운명조차 결국은 그런 자그마한 선택이 물길을 만들어 그대로 흘러가는 흐름일 뿐이다.

즉, 어떻게 보면 어떤 이가 낸 단 한 번의 용기만으로도 크게 변화할 수도 있다.

긍정적인 쪽으로도, 부정적인 쪽으로도.

‘그러니까…… 이 대한민국은 내가 알고 있는 한국과는 다른 분기에서 뻗어 나간 세계인 거고.’

조한율 또한 모든 던전은 다른 세계의 편린으로 구성된다고 했으니, 이게 현재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추론이라고 볼 수 있을 듯했다.

양태원 식으로 정리하자면, 내가 도착한 대한민국이 A루트고 이 녀석의 대한민국은 B루트인 셈이다.

다만 그렇게 정리하더라도 나와 이 녀석이 왜 A루트와 B루트로 각각 갈라졌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나는 만렙 강예나의 발밑에 깔려 신음하고 있는 악마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운명력이 작용한 게지.”

저번에 마계에서 만났을 때 벨리알이 그런 말을 했었다.

내가 마계에서 타르토스로 돌아가기 위해 벨리알과 거래를 했을 때, 사실은 차원의 틈새로 나를 집어넣었을 뿐이며, 본래라면 그때 전혀 다른 곳으로 떨어져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라고.

하지만 나는 운명력의 작용으로 타르토스에 돌아갈 수 있었다고 했다.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 했는데…….’

B루트의 대한민국에 도착한 강예나를 보니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만일 내가 운명력 덕분에 숱한 차원의 틈새 속에서도 타르토스로 도착했다면…… 반대로 한국 쪽에서는 나를 끌어당길 만한 어떤 조건이 부족했고, 그 조건의 충족 유무에 따라 내 루트가 갈라졌을 가능성이…….

“그런데 말이야.”

내가 잠시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묘지기의 목소리에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다.

나는 곧 나 자신을 주시하는 까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네 말을 들어 보면 결국…… 타르토스의 운영자가 던전을 만들어서 이 멸망한 세계를 보여 준 거지?”

“……그렇지.”

조한율의 말에 따르면, 타르토스의 운영자가 대한민국에 이 던전을 만들었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여자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럼, 그 운영자 놈은 대체 뭘 원해서 이런 걸 보여 준 것 같아?”

“뭐? 그거야…….”

대답하려던 나는 결국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야 추측하는 바는 있지만 도저히 꺼낼 수는 없는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게, 이 던전의 클리어 조건이 바로 ‘강예나의 처치’가 아닌가.

그걸 생각해 보면 타르토스 운영자의 목적은 단순하다.

나를 처치하는 것. 혹은 저 녀석을 처치하는 것.

물론 이쪽의 강예나가 만렙인 이상 나를 죽이는 게 목적일 거란 생각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걸 클리어 조건인 본인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결국은 결판을 내야 할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아직은…… 여러모로 좀 더 생각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내가 고민하는 동안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새벽빛을 받아 조금씩 붉게 물들어 가는 호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생각 안 해 봤어? 네가 여기에 오지 않았더라면 결코 모를 사실이 하나 있잖아.”

“무슨…….”

“대한민국도 멸망할 수 있다는 것.”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너는 그걸 막을 수 있다는 것.”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묘지기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까만 눈동자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새벽빛을 받아 한층 더 훤하게 보이는, 인기척 하나 없는, 멸망해 버린 도시였다.

“네 세계에서는 부모님도 살아남았겠지? 그래도 화해는 못 했겠지만.”

‘나’는, 내가 지키지 못한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의 무덤 위에 선 묘지기가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네가 타르토스로 돌아간다면 결국 네 대한민국도 이렇게 될지 몰라.”

그 말에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저도 모르게…… 아니,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곧바로 묘지기가 꺼낸 가능성을 부정했다.

“아니…… 그건 아니야. 나 같은 게 없어도 한국은…….”

“그래, 제법 쓸 만한 놈들도 있더군. 어쩌면 잘될 수도 있겠지. 타르토스가 더 소중한 건 사실이고. 게다가 내가 뭐라고? 나 하나로 뭐가 그렇게 달라지겠어? 내가 없어도 세계 통합 서버에서 한국은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내가 말하려던 모든 것들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서 먼저 흘러나왔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차라리 다정하게 들렸다.

어쩌면 그건 동정인지도 몰랐다.

혹은, 질투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지킬 것이 없는 여자가 폐허가 된 도시를 껴안듯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하지만, 어쩌면 이렇게 될 수도 있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눈앞의 녀석이 왜 아무도 없는 이 장소에 계속 머물고 있는지 내가 바로 이해했듯, 이 강예나 또한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일단 알게 되면 모른 척할 수 없어. 도울 수 있다는 걸 아는데, 하지 않을 방법도 몰라.”

“…….”

이 이상으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타자(他者)가 존재할까.

그래.

저 말이 맞았다.

악마를 짓밟고 선 용사가 내 눈동자를 깊숙하게 들여다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시험하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그렇게 강한 힘을 손에 쥐었음에도 지키고 싶은 것이라곤 하나도 가지지 못한, 다른 세계의 나 자신.

“그래서 너는…… 어느 쪽 세계를 구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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