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97화
그 폭탄 발언에 잠시 멈칫했던 묘지기는 가만히 악마를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미친 듯이 광소를 터트리고 있는 악마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죽어.”
담담한 목소리였다.
서걱!
피가 주변의 땅으로 튀었다. 꺼져 가는 웃음과 함께 악마의 목이 떨어졌다.
손쉬운 결말이었다.
S급 몬스터조차 한번에 끝내 버릴 정도로 강하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목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미소를 짓고 있는 벨리알의 표정은 나조차 섬뜩하게 만들 만한 무언가가 있었다.
하기야, 그래서 악마라는 거겠지.
게다가 이렇게 죽여 보았자 실제로 죽는 것도 아니고, 본체는 마계에 돌아갔다가 또 인간계의 비집고 들어올 틈을 노릴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기분이 나빴다.
살아 있는 이상 저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걸까.
“과연.”
검을 휘둘러 악마의 피를 털어 내 버린 묘지기가 잠시 클리어 조건이 떠오른 허공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돌려 머나먼 어딘가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내게는 숨통을 조이는 것과도 같은 침묵이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한동안 어딘가를 응시하던 여자가 겨우 나를 돌아보았다.
“클리어 조건이 나를 죽이는 거였나?”
말하는 내용에 비해 상당히 담담한 목소리였다. 악마가 보여 준 클리어 내용에 그리 놀란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고민했지만, 이미 그 침묵이 충분한 답이 된 듯싶었다.
내 얼굴을 본 여자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래저래 타르토스의 운영자에게 상당히 미움을 산 모양이야. 살고 싶다면 다른 세계의 나 자신을 죽이라니.”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용사들끼리 싸우다니, 악마 녀석들이 제일 좋아하겠군. 마계로 돌아가자마자 벨리알 녀석이 소문을 낼 거란 데 내 파트너를 걸겠어. 릴리스라면 소문을 듣고 침 흘리면서 달려오겠군.”
“악마를 두고 내기하는데 성검을 거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농담처럼 나눈 대화였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희미하게 공기에 적의가 섞여 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적의를 품은 상대는……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그야 이 필드에서 내 적은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여자의 눈길이 한국 플레이어들이 있는 건물 측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클리어 조건이 이렇다면…… 저 녀석들도 모두 나를 죽이려고 들겠군. 그거 참 귀찮겠는데…….”
그 말에는 약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딱히 목소리에 살기가 섞여 있는 건 아니었지만, 능력치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저 녀석이 살의를 품었을 때 방비할 방법이 전혀 없다.
“……저 녀석들은 네 입장에서는 엄지 하나로 눌러 죽일 수도 있는 약한 플레이어들이라는 점을 명심해.”
나 자신의 성격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나름대로 한국에서는 한끗발 날리는 사람들이니 이런 말을 듣는다면 억울하겠지만 만렙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게 정말 사실이기도 하고.
내 말을 들은 여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국 쪽 플레이어들과도 나름대로 친해졌나 봐?”
“뭐?”
“그렇잖아. 내가 굳이 저 녀석들에게 손댈 성격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못을 박는 건, 어지간히 신경이 쓰인다는 이야기니까.”
“……이거 기분 나쁘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들여다보이는 느낌이라서.”
나 자신도 딱히 인정하고 싶지 않아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이 녀석에게 지적당한 느낌이다.
도플갱어는 셋 이상 모이면 죽는다던데, 여기서 또 다른 내가 추가되기라도 하면 과연 기분이 나빠서라도 죽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셈이지?”
살아 있는 자라고는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도시에서, 묘지기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미리 말해 두겠지만 난 널 위해 죽어 줄 생각은 없어.”
악마의 목을 단숨에 베어 낸 검은 날카로운 휘광을 뽐내고 있었다.
내 손에 들린 파트너와 같은 모습의 검이다.
“그쯤이야 나도 알아.”
그렇지 않아도 운 따위로 루트가 갈린 마당에 다른 루트의 나를 위해 희생되라니,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본들 나도 누군가를 위해 죽어 줄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이지 악질이었다.
‘젠장.’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물론 클리어 조건이 ‘강예나’를 처치하는 것인 이상 이 조건을 들키는 순간 상황이 악화될 거야 뻔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벨리알이 저런 식으로 폭로하는 것보다는 나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어쩔 셈이지?”
여자의 검날이 나를 겨누고 있었다.
거리는 아직 떨어져 있었지만, 같은 용사 클래스이자 에이펙스의 광검을 사용하는 만큼 서로 간에 거리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것 정도야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나는 피부를 바늘처럼 찔러 오는 살기를 느끼며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일단은, 히든 클리어 조건을 찾아볼 셈이었어. 분명 빠져나갈 구멍이 마련되어 있을 거야.”
이제껏 겪어 왔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시스템상 아무리 클리어하기 힘든 던전이라고 해도, 찾아보면 성공할 수 있는 돌파구가 반드시 마련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번 던전 또한 한국 플레이어들의 수준에 비해 클리어 조건 난이도가 너무 높게 설정되어 있으니만큼, 분명 히든 루트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유령의 성 던전 때도 SSS급 보스 몬스터가 출현한 대신 히든 루트가 있었던 것처럼.
물론 그 히든 조건을 찾는 것도, 달성하는 것도 어렵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만렙인 나 자신을 죽이는 것보다야 그쪽을 달성할 가능성이 높았다.
“모범적인 답변이로군.”
하지만 그렇게 대답한 것치고 묘지기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던 해는 이제 완전히 떠올라, 도시는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아침이 찾아온 도시에서, 여자는 기묘한 시선으로 다시금 허공 어딘가를 더듬었다.
아마도 시스템 메시지를 읽고 있는 듯한 움직임.
“그나저나, 클리어 조건이 참 애매하네.”
“애매?”
“그래, ‘강예나’를 처치하라…….”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휙!
- 님페의 바람을 사용합니다.
나는 빠르게 발을 굴러 뒤로 물러났다.
물론, 내게로 휘둘러진 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미처 검을 피하지 못한 머리카락 몇 가닥이 바람에 휘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캉!
다음 순간,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희게 빛을 발하는 검 두 자루가 허공에서 만난 것이다.
“……윽!”
하지만 부딪치는 힘은 같지 않았다.
뒤로 물러서며 간신히 검을 휘두를 공간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채 제대로 된 자세를 잡지 못한 나에 비해,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친 녀석의 검에 실린 힘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위에서 내리눌러 오는 검을 올려치려고 했지만, 오히려 땅에 묻힌 발이 점점 더 파묻히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검으로 나를 내려친 장본인인 ‘강예나’ 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마치 나를 시험하는 것 같은 투명한 검은 눈동자.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을 향한 채 여자가 나를 향해 물었다.
“내가 너를 죽여도 그 ‘클리어 조건’은 충족되는 거 아니야?”
아니, 묻는다기보다는 오히려 단정적인 어조였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나도 클리어 조건을 본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강예나’를 처치하라.
그건 눈앞의 이 여자를 뜻하는 동시에…….
“……그렇겠지.”
나를 뜻하는 말도 되지 않나, 하고.
물론 내 현재 플레이어명은 ‘강예나’가 아니라 ‘방랑하는 구도자’이기는 했지만, 타르토스의 운영자가 이 던전을 만든 목적이 나를 죽이는 것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내가 죽더라도 클리어 조건 자체에는 부합할 확률이 높았다.
결국 나 또한 ‘강예나’인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 해당 던전의 클리어 조건이 갱신됩니다.
- 클리어 조건 : ‘강예나’, 혹은 ‘방랑하는 구도자’를 처치하십시오.
X발, 아예 이렇게 못을 박아 버릴 줄은 몰랐는데.
꼭 이럴 때만 시스템 새끼가 열일을 한단 말이지. 이것도 타르토스 운영자가 의도한 결과인가?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악의적이다…… 그렇게 말하려던 때였다.
콰득!
곧이어 손목과 발목에서 불길한 소리가 났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머리 위에서 내리쳐지는 검의 압력을 온전히 버티고 있는 뼈가, 도저히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금이 가는 소리였다.
“뭐야?”
그렇게 물었음에도 여전히 나를 향한 검이 거두어지는 일은 없었다.
나는 묘지기를 향해 이를 악물고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검에 실린 힘이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그대로 검에 머리가 쪼개질 지경이었다.
나는 그 살의에 혼란스러워졌다.
처음에 이 녀석이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를 때는, 클리어 조건 확인차 시험 삼아 검을 휘두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치기엔 지금 이 검에 담긴 살기는 너무도 진심이었다.
아니, 대체 왜?
이 녀석이 나를 죽여서 얻을 게 뭐야?
“히든 클리어 조건을 찾겠다고 했잖아! 그 정도 기다려 줄 아량도 없는 건가?”
물론 나야 클리어 조건을 달성하면 이 던전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지만, 반대로 이 녀석은 그 클리어 조건을 달성해 봤자 얻는 것이 없…….
‘…….’
……설마.
“아, 오해는 하지 마. 나도 나름대로 궁금한 게 있어서.”
그리고, 내 불길한 예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여자가 천천히 말했다.
검에 실은 힘과 반대되는, 한가롭게까지 느껴지는 여유로운 말투였다.
“혹시 네가 죽으면, 내가 너 대신 저쪽으로 갈 수 있는 걸까, 해서.”
망치에라도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나는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
“……뭐?”
“그러니까, 내가 너 대신 저쪽의 ‘강예나’가 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나를 향해 뻗어 오는 용사의 검은 여전히 흰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 투명한 눈동자도 분명 내 것이었다.
하지만, 마치 거울이라도 보는 것처럼 나와 같은 모습은…… 그 순간 무척이나 불가해한 존재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건,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발상이자 발언이었으니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겉모습이 같은 만큼, 그건 무척이나 불쾌하고도 기묘한 경험이었다.
여자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시험해 보기에는 나쁘지 않은 선 같은데. 안 그래?”
“장난하냐?!”
최악이다.
카캉!
결국 나는 죽을힘을 짜내어 내 머리를 짓눌러 오던 검을 비스듬히 흘려보냈다. 그리고 빠르게 님페의 바람을 이용해서 그 자리를 벗어나려던 순간…….
“어딜.”
역시 님페의 바람을 착용한 채 빠르게 쫓아온 여자는 내 손목을 잡고 몸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커헉!”
그리고 배 중앙으로 무릎 차기가 들어왔다. 순발력으로 몸을 비틀어 뼈가 부러지는 위기는 피했지만, 내장이 진탕되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대로 당하지는 않았다. 무릎차기를 정통으로 맞으며 여자의 품 안으로 파고든 덕에, 자연스럽게 틈이 생긴 묘지기의 옆구리로 검을 휘두른 것이다.
“이런……!”
물론 살기를 느낀 여자가 횡으로 그어지는 검을 피해 위로 뛰어오르려 했지만, 나는 아슬아슬하게 검에 와닿는 촉감을 느꼈다.
서걱!
그건 분명 피부가 베이는 감각이었다.
동시에, 눈앞으로 피가 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 용사를 기리는 망토를 장비합니다.
- 상태창이 갱신됩니다!
- 활성화 시간 00:10:00
솔직히 지금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몇 시간 전에 겪었던 전투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걸 쓰지 않으면 채 열 합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게 뻔했으니까.
콰쾅!
나는 땅을 박찼다.
님페의 바람을 착용한 다리에 실리는 힘이 완전히 달라졌다. 속도도, 검에 실리는 힘도 마찬가지였다.
내 망토를 본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뻐억!
검보다 여자의 턱에 내 주먹이 먼저 가 닿았다.
거창한 소리와 함께 주먹에 닿는 감각. 분명히 단단한 뼈가 닿는 감촉이 있었다.
주먹을 맞은 여자의 고개가 돌아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휘둘러지던 검로는 여자의 검에 막혔다. 휘두른 주먹도 여자의 고개를 조금 돌리게 한 정도에 그쳤다.
이게 절대적인 능력치의 차이였다.
“못 보던 아이템인데. 그쪽 루트에서 얻었나 보지?”
입속이 찢어지기라도 했는지 퉤, 하고 바닥에 피를 뱉은 여자가 씩 웃었다.
여자의 눈길은 내 등 뒤로 늘어진 망토에 가닿았다.
“루카스나 좋아할 법한 망토네.”
“닥쳐!”
“걱정 마. 내가 잘 써 줄게.”
그리고 그 자신만만한 선언은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캉! 카캉!
나는 여자를 향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지만, 휘두르는 검로마다 막히지 않는 곳이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방은 내가 ‘용사를 기리는 망토’를 사용하더라도 나보다도 훨씬, 한없이 능력치가 높은 상태였다.
심지어 저쪽은 나보다 더 고등급의 몬스터와 플레이어를 상대한 덕에 요령으로도 이길 만한 구석이 없었다.
“너도 잘 생각해 봐.”
게다가 역시나 나 자신이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가득한 우악스러운 검로.
또한, 완력의 차이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몇십 번의 검격을 주고받으면서 손목에 오는 부담이 시시각각 더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방도 그걸 놓치지 않았다.
쾅!
기어코 내 손목을 기묘하게 노려오는 검로에 절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렇다고 검을 놓치지는 않았지만, 상대방의 힘에 손목이 순간적으로 비틀리며 내 자세도 틀어졌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상대방의 검이 왼쪽 어깨를 향해 날아들었다.
‘망할!’
상대방이 나인 만큼 그 검로도, 수작도 뻔히 보이기는 했지만 손목이 비틀린 상태로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어깨를 내주지 않으면, 그대로 목을 찔릴 수도 있다.
결국 나는 차악을 선택했다.
“크윽……!”
어깨가 깊이 베이면서 불타는 듯한 고통이 자리했다.
그나마 검을 놓치지는 않았지만 뼈가 보일 정도로 심한 부상이었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는 나를 보며 묘지기가 말했다.
“이것 봐. 너보다 내가 더 유용할 거야. 그야 당연하지. 내 쪽이 능력치가 높은걸.”
“개소리 하지 마!”
실제로 확인도 하지 못할 그따위 가능성 때문에 죽으라니, 내가 미쳤냐?
“내가 뒈진 다음 불가능하면,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콰쾅!
다시 한번 검이 부딪혔다.
한쪽 어깨가 나가면 뭐가 어쨌는데!
나는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찼다.
“그것 참 안됐네요, 하고 말 거냐고!”
검이 부딪치며 몇시간 전의 전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충격파가 퍼졌다.
호수의 표면이 거세게 진동했다.
여자의 단발도 휘몰아치는 바람에 엉망이 되고 있었다.
“음, 그래도 일단 확인해 볼 만한 가치는 있을 것 같은데.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말이야.”
“너, 이 X발. 나 맞아? 벨리알이라도 씌인 거 아니야?”
나는 틈을 노려 여자의 배를 발로 세게 걷어찼다.
퍽!
계속해서 내 부상당한 어깨와 손목을 노리던 여자는 발차기를 피하지 못했다.
아마 이렇게까지 개싸움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아무리 능력치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레벨 79쯤 되면 만렙이라도 아예 대미지가 없을 수는 없었다.
정통으로 타격을 받은 여자가 숨을 토해 내며 허리를 숙였다.
“컥!”
이때다.
나는 상대방을 향해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이건 내게 남겨진 유일한 기회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검을 내려치려던 순간…….
휙!
몸을 숙였던 묘지기는 내리치는 검을 피하며 오히려 내 손목을 잡았다.
빠각!
그리고 잡힌 손목이 완전히 부러졌다.
그렇게 팔을 제압하는 동시에, 여자가 내 몸을 잡아당겼다.
푹!
아까 전 깊게 베였던 내 왼쪽 어깨에 검이 박혔다.
검이 어깨를 관통하는 감촉이 소름 끼칠 정도로 선명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의 고통에, 나는 기절하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어쨌든 이건…….”
그리고 내 어깨에 검을 박은 채, 여자가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말을 하려던 그때.
주위의 온도가 갑자기 달아올랐다.
마치 끓어오르는 용암 속에 자리한 것 같은 뜨거움이었다.
갑자기 바뀐 온도 때문에 놀란 묘지기가 고개를 들었다.
“이게 무슨…….”
파지직!
푸른빛의 전류가 나타나 달아오른 공기 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한 줄기의 전류는 허공에서 번개로 변해 묘지기를 향해 내리꽂혔다.
콰르릉!
그러나, 모처럼의 마법조차 여자의 검에 파훼되어 먼지처럼 스러졌다.
아무런 영향도, 피해도 끼치지 못했다.
“……그래도 하루 정도는 쉴 수 있나, 했더니.”
그렇게 되리라는 걸 모를 리 없었을 텐데.
저 멀리서, 입가에 흐른 피를 닦으며 기어 나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당신만 엮이면 꼭 이렇더라니까.”
이우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