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99화
콰르르릉!
멸망한 도시가 한 번 더 무너지고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끊겨 폐건물이 된 곳에 둥지를 틀고 있었던 몬스터들이 기괴한 울음을 지으며 달아나려 했지만, 거대한 해일은 무엇 하나 놓치는 일 없이 도시를 휩쓸었다.
그리고 그 해일이 도시를 덮치기 전, 나는 빛나는 푸른 용이 여자의 사지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휘감는 모습을 목격했다.
검조차 휘두르지 못하게 된 묘지기의 표정에 당황함이 떠올랐다.
“이게 대체 뭐……!”
허공에 떠오른 여자와 찰나간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묘지기가 무언가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 목소리가 내게 닿는 일은 없었다.
철썩!
순식간에 여자의 몸을 집어삼킨 해일이 순식간에 땅을 덮치며 하얗게 부스러졌다.
그리고 퍼져 나간 물결이 온 땅을 잠식했다.
쿠르릉!
거센 물결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은 건물들의 파편이 지상으로 떨어졌다. 본래도 위태로워 보였던 폐건물 몇은 커다란 소리와 아예 건물째로 무너지기도 했다.
정말이지 가공할 만한 위력이었다.
나는 상황도 잊고 혀를 내둘렀다.
‘그래 봤자 레벨 30대일 텐데 이런 위력이 나오다니.’
이선의 진언 마법.
지난번 유령의 성에서도 한 번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보다도 더 발전한 듯 보였다.
애초에 아무리 진언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장대한 광범위 공격 마법은 드문 편이다. 타르토스와 한국을 통틀어 봐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무조건 들어갈 정도의 재능이었다.
심지어 앞으로 레벨을 올리게 되면 더욱 성장할 테니,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플레이어라고 봐야겠지.
‘양태원도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하고.’
물론 마석 던전에서 제사를 지내며 레비아탄을 잠재웠던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당 클래스 고유의 스킬이라는 인상이 컸다.
그런데 만렙인 나를 상대로 결계를 펼쳐서 제법 버틴 데다, 저렇게 청룡을 공격 수단으로 삼을 수 있을 정도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괜히 이우연이 후배로 키운답시고 끼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괜찮아?”
곁으로 다가와 상처를 살피는 이우연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작전은, 내가 검을 휘둘러야만 마법을 파훼할 수 있다는 것을 이우연이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에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익숙해졌다, 는 뜻이겠지.
‘……이거 무서운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이제껏 한국 측 플레이어 들을 얕잡아보는 마음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어쨌든 나는 타르토스에서 10년쯤 구르다 왔고, 레벨도 2배 가까이 차이가 나니, 자연스럽게 한국 플레이어들을 초보 취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면 당연히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내가 지켜야 할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 플레이어들이 만렙인 저 녀석을 상대로 여기까지 해냈다.
내가 별다른 성과 없이 허무하게 ‘용사를 기리는 망토’ 활성화 시간을 날린 것과 반대로.
나는 실패했지만, 한국의 플레이어들 덕분에 살아남은 것이다.
‘물론 묘지기 녀석이 본인의 능력치를 믿고 방심한 덕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한 방 먹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기대하지도 못했던 도움이었다.
“양태원 헌터!”
그때, 아직 긴장을 풀지 않은 이선이 외쳤다.
“상대는요?”
“아, 아…… 그게……!”
워낙 커다란 마법이 쓸고 지나가서일까. 넋을 빼놓고 있었던 양태원이 겨우 입을 열었다.
“이 주문은 지금 제 신력으로는 오래 쓸 수 없어서…… 지금쯤 속박에서 풀려났을 거예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하늘 저편에서 하늘을 날아 돌아오는 청룡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완연한 아침이 되어 밝아진 하늘을 유유히 비행하는 청룡의 자태는 무척이나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어느새 양태원 곁으로 돌아온 청룡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양태원의 몸을 보호하듯 칭칭 둘렀다. 묘지기 녀석을 속박했을 때와는 천양지차의 움직임이다.
이우연이 심각한 얼굴로 해일이 쓸고 지나간 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마법을 파훼하지는 못한 걸 보면, 아마 그대로 정신을 잃고 해일에 휩쓸려 한강까지 흘러갔을 가능성이 높겠네요.”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묘지기 녀석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더라면 마법을 파훼하는 것은 물론, 해일에 휩쓸리더라도 빠져나올 수 있었을 테니까.
하기야 저런 거대한 진언을 정면으로 맞아 버리면 아무리 만렙이라고 하더라도 기절 정도야 하겠지.
그리고 한강 쪽으로 해일이 몰아친 만큼, 제법 멀리까지 떠내려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이선의 완드를 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진언 마법을 사용한 후유증일 것이다. 본인의 마력뿐 아니라 이우연의 마력까지 끌어다 쓴 듯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 시선을 눈치챈 이선이 흠칫하며 자신의 손을 뒤로 숨겼다.
“뭐, 물론 해치우진 못했겠죠. 기대도 안 했어요.”
그것도, 역시 옳은 말이었다.
여전히 클리어 메시지는 뜨지 않았다. 클리어 조건이었던 ‘처치’가 충족되지 않았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다.
아마도 단순한 기절이 아닐까, 싶다.
‘시간을 번 것만 해도 잘한 셈이지.’
세 명의 콤비 공격이 잘 먹히기는 했지만, 레벨이 이 정도로 차이가 나게 되면 유의미한 타격을 주기란 어렵다.
이선의 마법은 대범위 공격 마법이니만큼, 더더욱.
게다가 묘지기 녀석이 기절했다손 치더라도 워낙 능력치가 높은 터라,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이선 헌터!”
그때 건물 옥상에서 이쪽을 관찰하며 보조 스킬을 사용했던 김하현이 이쪽으로 뛰어내렸다.
“옥상에서 천리안 스킬으로 보고 있었는데, 한강까지 휩쓸려 간 게 맞는 것 같아요. 파도가 휩쓴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시간을 번 셈이군요.”
이선이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 아마 공략대의 대장을 자주 맡으며 버릇이 된 모양이다.
“그럼 이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해야겠네요. 다음번엔 이런 정면 공격은 통하지 않을 테니, 기습할 만한 장소를 찾아서 이동하죠. 다른 헌터들을 빨리 깨워서…….”
“아뇨.”
이선이 나를 돌아보았다.
눈썹이 놀란 듯 치켜올라가 있었다.
“네?”
“그럴 필요 없다고요.”
“그게 무슨…….”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 모르는 척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클리어 조건이 갱신된 거, 다들 봤을 텐데요.”
내 말에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야 당연하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 클리어 조건 : ‘강예나’, 혹은 ‘방랑하는 구도자’를 처치하십시오.
저 클리어 조건을 보지 못했을 리 없다.
그리고, 그들이 저 클리어 조건을 보았다면…… 한국 헌터들의 입장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솔직히 지금 한국 플레이어들 수준으로 저 녀석을 해치우는 건…… 무리예요. 아무리 기습을 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지금 한국 측 전력은 반토막이 난 것이나 다름없다.
낮에 진언을 파훼당한 이우연, 김숙자는 당분간 요양을 해야 할 테고, 이선 또한 방금 진언 마법을 쓴 만큼 곧바로 이런 대형 마법을 쓰긴 어렵다.
그 외에도 부상을 당한 헌터들이 많았다.
어딜 보나 ‘강예나’를 처치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선은 얼굴을 찡그린 채 말했다.
“그거야…… 어렵긴 하겠죠. 그렇지만 저번 유령의 성 던전처럼 히든 클리어 조건이 나타날 수도 있는 거고…….”
“굳이 돌아갈 것 없이, 더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자 옆에서 양태원이 경악했다.
“누나, 무슨 말 하시는 거…… 읍!”
무어라 따지려 드는 양태원의 입을 이우연이 막았다. 아마도 분위기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나는 굳이 그 두 사람을 쳐다보지 않았다.
사실은, 아까 클리어 조건이 갱신되었을 때부터……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너보다 내가 더 유용할 거야.”
어쩌면.
그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검을 휘두르는 팔이 움츠러들었다. 또 다른 강예나를 향한 공격에 망설임이 섞였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렇게 생각하는 게 분명 정상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나답지도 않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저 녀석이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용사를 기리는 망토’를 사용해야만 일시적으로 본래 능력치를 활용할 수 있을 뿐, 심지어 그 능력치조차 만렙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실제로도 별것 아닌 셈이다.
애초에 우리 둘을 가른 것은 단순한 운이었다.
그런 내가, ‘누군가를 구할 기회’를 누릴 자격이 있는 건가?
내가…… 정말로 성공할 수 있는 걸까?
‘타르토스와 한국, 어느 쪽을 구하느냐…….’
묘지기가 내게 제시한 그 선택지, 그 중압감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다가왔다.
내가 짊어질 책임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그저 실패가 두려울 뿐이다.
이제까지는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으니까, 그리고 내가 구하고 싶기 때문에, 그래서 성공 가능성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가능성을 따지기 전에 해내고야 말 것이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또 다른 나 자신이 나타났다.
저 녀석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실은, 또 다른 강예나야말로 사실은, 모두를 구할 기회를 가지기에 적합한 녀석인 게 아닐까?
나는 고개를 돌려 방금 전까지 여자가 서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해일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부서져 버린 종말의 도시, 지킬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세계.
이 세계가 내 미래가 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당장, 저 ‘강예나’를 처치하지 않으면 한국 측 플레이어 모두가 죽게 생긴 마당에.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저기요, 방랑하는 구도자 씨.”
짝!
날카로운 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박수를 쳐 내 시선을 끈 이선이 묘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요, 세상에 타협해서는 안 되는 게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마치 겁먹은 아이를 달래는 듯한 눈빛이었다.
“저번에 방랑하는 구도자 헌터도 그렇게 말했었잖아요.”
“제가 언제……?”
“마석 던전에서 김성연 헌터한테 말했잖아요. 그렇게 자신의 이득만 추구하는 인간이라면, 다음에는 이득을 위해 뭘 무시할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희미한 기억이 떠오를 듯 말 듯했다.
이선이 아직도 진언 마법의 후유증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내 손을 마주 움켜쥐었다.
그제야, 나는 내 손이 아주 차게 식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맞아요. 한 번 타협하게 되면 그다음 타협은 좀 더 쉬워지죠. 그래서 저는 처음부터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무슨…….”
“애초에 우리가 이 던전에 들어오는 이유가 뭔데요? 저는 이게 제 일이니까 해요. 저는 공무원이고, 몬스터들에게서 사람을 구하는 게 제 업무니까요. 그런데 나 살자고 파티원을 희생시키면 제 일의 의미는 대체 뭐죠?”
그렇게 말하는 이선에게서는 묘한 박력이 느껴졌다.
드물게도, 나는 약간 주춤하는 것을 느꼈다.
“하, 하지만…… 상대가 너무 강하니까…… 이러다가는 오히려 전멸할 수도 있고…… 차라리 효율적으로…….”
“아니, 이선 헌터 말이 맞아.”
그때 끼어든 것은 가만히 있던 이우연이었다.
이우연은 팔짱을 낀 채 나를 짜증이 담긴 눈길로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소릴 하나 일단 들어 봤더니 이게 무슨…… 나랑 장난해? 입장 바꿔 놓고,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데? SSS급 몬스터 대신 나나 양태원을 죽여서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할 거야? 이건 효율의 문제가 아니잖아.”
“…….”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반대로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저게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 건지 너무도 뻔하게 와닿았으니까.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이우연이 한숨을 푹 쉬었다.
“평소에는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돌진하더니, 다른 사람 목숨이 걸리자마자 그렇게 겁먹기야?”
“아니, 나는…….”
“저기요. 저도 말해도 되나요?”
양태원이 손을 들고 나섰다. 무슨 학교 발표 시간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누나를 희생하는 것도 당연히 싫지만요. 설령 이 클리어 조건 대상이 누나가 아니더라도, 이런 식으로 던전 클리어를 하는 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아주 단호한 목소리였다.
“설사 그 꼰대…… 아니, 김성연 길드장이 대상자더라도 저는 반대했을 거예요.”
그쯤 되면 허탈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들을 살리려고 누구 한 사람이 희생해야 한다는 건 이상하잖아요.”
그런 말을, 하필이면 양태원이 하는 건가.
나는 멍하니 양태원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 위로 또 다른 누군가가 겹쳐졌다.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살 수 있다면 살고 싶어요.”
……그래, 나도 그런 것 같아.
나는 내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떨구자, 깜짝 놀란 양태원이 어깨를 잡았다.
“우, 울어요?”
“……안 울어.”
그냥 머리가 아팠던 것뿐이다.
내 스스로의 멍청함에.
‘정말 멍청한 짓을…….’
이제껏…… 나름대로 거리를 잘 두었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내 사정을 그들에게 제대로 알려 주지도 않았고, 그들의 사정에 깊게 얽히지도 않았다.
친해져 봤자 곧 떠나야 할 세계의 사람들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선을 긋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소중함을 무게로 저울질한다면 어디를 보나 타르토스 쪽이 훨씬 무겁다. 그러니 떠나야 할 때가 오면, 아무렇지도 않게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어디 그렇게 단순한 비교로, 칼로 자른 듯이 쉽게 잘라 내질 일이던가.
만일 그랬더라면 나는 진작 부모님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거였다.
하지만 여전히 신경이 쓰였다.
부모님도 그렇고, 한국에 돌아와 알게 된 사람들도 그랬다.
누군가에 대해 알게 된다는 건 결국 그런 것이다.
한 번 알게 되면 모르는 척은 할 수 없다.
“어어, 괜찮아요? 일단 상처부터 치료합시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요.”
실제로는 나보다 경력도 한참 아래면서 나를 달래려고 드는, 누가 보더라도 쉬운 길이 눈앞에 놓여 있음에도 어려운 길을 선택하겠다고 말한 이선 헌터라던가.
“우, 우는 것 같은데요?! 어떡해?!”
내 옆에서 쩔쩔매고 있는 태원이는 겨우 스무 살이고.
- 운영자, ‘조한율’이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에게 일대일 대화를 신청했습니다.
아까 전부터 끊임없이 대화 요청을 보내고 있는, 원하지도 않은 책임을 떠안고서도 포기하지 않은 조한율도 알게 되었으며…….
“도와줘서 고마워.”
죽어 가면서도 아무것도 돕지 못한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한 정소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을 지킨 사람.
그런 정소현이 지킨 세계에서…… 나는 줄곧 살아왔다.
비록 내가 몰랐을지언정.
“여기 들어오기 전부터 멘탈이 불안정하다, 했더니 진짜 깨졌어? 어디 봐봐.”
갑자기 눈가에 아픔이 달렸다. 이우연이 손을 뻗더니 내 눈가를 마구잡이로 문지른 것이다.
나는 함부로 내 얼굴을 문지르는 이우연의 팔을 쳐 냈다.
“아프잖아!”
“어, 진짜로 안 우네.”
“그러니 일어나, 강예나.”
그리고…… 정말 다 포기하려던 순간에 내게 손을 뻗어 준 녀석도 있었고.
그래서 차마 이우연에게, 나는 어차피 다른 세계로 돌아갈 것이라고, 그래서 네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지금 저 세 사람이 한 말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절대로 이기지 못할 만큼 강한 적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고, 나를 희생한다는 선택지가 분명히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
그래.
아마도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어느새, 또다시 동료가 생겨 버린 모양이다.
나는 내 주위에 선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이거, 나중에 가서 후회해도 난 몰라요.”
“그런 말은 됐고요, 여기서 나가면 술이라도 한 턱 내요!”
“맞아요. 저는 소고기가 좋아요, 누나.”
“드디어 정신이 좀 드나 보네.”
그렇게 말하며 이우연이 씩 웃더니, 손을 뻗었다.
“그럼 이제 슬슬 가자.”
그 말과 함께, 눈앞에 황금색의 시스템 메시지 글자가 축포처럼 떠올랐다.
- ‘멸혼의 불꽃’ 스킬의 발동 조건을 새롭게 충족시켰습니다!
- 해당 스킬의 대상자는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의 ‘신뢰도’에 따라 추가됩니다.
- 추가 대상자 : 이우연, 이선, 양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