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00화
나는 약간 멍한 기분으로 그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멸혼의 불꽃.
설마, 이 메시지를 한국에서 보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쓸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시스템상으로는 계속 사용 가능 상태이기는 했지만, 이건 나 혼자서는 써먹지 못하는 스킬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멸혼의 불꽃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동료’ 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타르토스에서는 ‘기사회생’만큼이나 알차게 써먹은 스킬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타르토스에서는 저 스킬의 대상인 ‘동료’로 알리시아, 일리아스, 루카스, 아리아드네가 등록되어 있었고, 그들은 이 스킬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기에 필요할 때마다 동의를 얻어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이게 뭐야?”
이우연이 갑작스럽게 눈살을 찌푸리며 허공을 주시했다.
그 표정에 우습게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는데……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의 멸혼의 불꽃 스킬 대상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사용을 허락하시겠습니까.’……?”
“어, 나도 떴어요.”
“저도요!”
이선과 양태원, 두 사람도 이우연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시스템 메시지가 뜬 모양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허락하지 마! 지금은 안 돼!”
지금 이 스킬을 사용했다간 쓸모도 없이 사용 횟수를 소모해 버리게 되는 데다, 애초에 대상자들에게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쓸 만한 스킬도 아니었다.
“지, 진정하세요.”
내 목소리가 어지간히 필사적이었던 건지 이선이 깜짝 놀랐다.
“취소할게요. 그나저나 멸혼의 불꽃이라니, 이런 스킬이 있어요? 처음 들어 보는 스킬명인데.”
양태원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나저나 멸혼의 불꽃이라니, 엄청 멋있는 이름인데요? 무슨 게임에 나오는 궁극기 이름 같아여.”
- 플레이어, ‘이선’이 멸혼의 불꽃 스킬 발동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 플레이어, ‘양태원’이 멸혼의 불꽃 스킬 발동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이선과 양태원, 이 두 사람은 정체불명의 스킬에 다짜고짜 Y를 누를 만큼 멍청이는 아니었던지라 다행히도 곧장 취소 메시지가 떴다.
하지만 내가 안도의 숨을 내쉰 것도 잠시.
“…….”
이우연은 메시지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빨리 취소해. 뭐 하는 거야?”
“일단 설명부터 듣고. 이 스킬은 대체 뭐야? 왜 내가 대상이 된 거지?”
대상이 본인인지라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질문이기는 했지만, 나는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게, 저 질문에 대답하려면 결국, 이제 내가 너를 정말 동료로 생각하게 되어서 네가 내 스킬 사용 가능 대상이 되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은가.
‘…….’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까지 낯짝이 두껍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이우연과는 이런 류의 문제로 하마터면 싸우기 직전까지 가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랬던 것이 무색하게, 어느새 내 멋대로 이우연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동료, 혹은 친구로서.
게다가 그걸 시스템이라는 절대적인 대상에게 인증까지 받아 버린 셈이다.
솔직히 얼굴이 홧홧해질 지경이었다.
나름대로 노력해 거리를 뒀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이란 게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무슨 초X파이도 아니고…….’
10년간 타르토스에서 산 만큼 한국보다는 타르토스에 정서적으로 가깝다고 여겼었지만, 이런 걸 보면 근본이 한국인인 듯했다.
“그래서 무슨 스킬이냐니까.”
그 와중에 이우연이 대답을 재촉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왜’ 자신이 이 스킬의 대상이 되었냐는 질문이 빠졌기에, 나는 대강이나마 설명을 해 주기로 했다.
“괜히 수락했다간 네 능력치를 나한테 쪽 빨리는 수가 있으니까, 빨리 취소해.”
성의 없는 설명에 이우연이 단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 눈에는 강한 불신이 서려 있었다.
“내 능력치를 가져간단 말이야? 그런 사기 스킬이 있다고?”
하기야 나 같아도 다짜고짜 이런 설명을 들었다간 저런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타인의 능력치를 가져가는 스킬이라니.
10년간 타르토스에서 굴렀지만 나조차도 같은 스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나마 비슷한 능력이라면 배우 클래스를 꼽을 수 있겠지만, 배우 클래스의 경우 본인이 이해한 다른 클래스의 능력을 연기할 수 있을 뿐, 상대의 능력치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러모로 ‘멸혼의 불꽃’이 특이한 스킬이기는 했다.
“하지만 혹시 실패할 경우 리스크가 워낙 커서…….”
“그럼 혹시 당신 클래스가 검사가 아니라 모기였…… 아야!”
나름대로 진지하게 설명하려던 것도 잠시.
내게 세게 옆구리를 얻어맞은 이우연이 허리를 숙였다. 그렇지 않아도 진언 파훼에 마력까지 빨린 몸이니 정말 내장이 진탕될 정도로 아팠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든 이우연의 눈가에 어렴풋이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 부상자한테 뭐 하는 거야!”
“모기가 뭐 어째?”
모기라니!
그야 나 자신도 이상한 스킬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멸혼의 불꽃’이야말로 용사 클래스의 정수, 그 자체라고 평가해 주었단 말이다.
그런데 그걸 모기라고 부르다니.
나, 이 녀석을 동료라고 인정한 거 맞아?
역시 시스템 녀석이 뭘 착각한 건 아닐까?
“저건 누나 말이 맞아.”
이제껏 옆에서 나와 이우연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양태원이 엄숙하게 말했다.
“같은 말이라도 뱀파이어라고 말하면 멋있고 좋잖아. 멋있는 스킬명이구만, 왜 누나 신경을 긁고 그래?”
“뱀파이어라니…….”
“그거 그냥…… 모기를 좀 멋있게 포장한 단어 아니야?”
이선이 내가 하고 싶던 말을 대신 해 준 와중에,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무리에서 약간 떨어져 있던 김하현이 끼어들었다.
어쩐지 시무룩한 목소리였다.
“뱀파이어가 멋있는 모기라니. 트X일X잇도 안 봤어?”
이 즈음 해서는 주제가 완전히 논지에서 탈선했다.
이선이 김하현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그건 봤지! 나 뱀파이어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는 다 봤어. 혹시 뱀파이어 다X어X도 봤어?”
“아, 그것도 재밌었지. 그거 완전 막장 치정 드라마잖아. 삼각관계.”
“왜, 그래도 결말은 나름 감동적이었다고. 요새도 방영해 주는 데가 있나? 여기서 나가면 정주행하고 싶다.”
“그래, 던전에서 나가면 호캉스 가서 미드 나잇이라도 열자. 하루 종일 막장 드라마만 보는 거야.”
갑자기 두 사람이 의기투합을 했다.
그러고 보니 이선과 김하현은 원래부터 아는 사이라고 했던가.
어쩐지 멍하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김하현이 웃는 낯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혹시 뱀파이어 나오는 막드에 관심 있으면 방랑하는 구도자님도 오세요.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우리랑 같이 놀면 재밌어요.”
“……아니, 그…….”
“맞아요, 1위 씨.”
내가 어색하게 거절하려는데, 이선이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격려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 유령의 성 던전 때부터 밥 한번을 같이 못 먹었네요. 여기서 나가면 이번에야말로 치맥 콜?”
“……저기요.”
대화가 본래 경로를 탈선하다 못해 너무 발랄해졌지만, 그와 별개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전혀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 무거운 현실의 원인 중, 한몫을 단단히 차지하고 있는 나는 마지못해 그 점을 지적했다.
“애초에 던전을 나갈 수 있느냐가 지금 가장 큰 문제인데요.”
“에이, 당연히 나갈 수 있죠.”
이선이 당당하게 어깨를 편 채 말했다. 마력을 모두 소진해 손은 여전히 바들바들 떨리는 주제에 허세 하나만은 대단했다.
그 얼굴에는 김하현과 마찬가지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모였는데 이런 던전 하나 못 깨겠어요? 어떻게든 될 거라고요!”
그 근거 없는 말에 나는 어쩐지 처음으로 이선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유령의 성 던전 안.
정체불명의 원인으로 모두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그 성 안에서 홀로 버티고 있던 사람. 뜸이네, 침이네, 하는 별스러운 수단까지 동원해 가면서도 모두를 살리려고 노력하던 사람.
지금도, 현실적으로는 클리어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웃으며 나를 격려하고 있는 저 사람들.
나 따위가 아니라, 저런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용사가 아닐까?
역시 시스템 따위는 믿을 게 못 된다니까.
그리고 나는 그제야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제껏 내 멘탈이 단단히 깨져 있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역시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부모님을 만난 것부터가 문제였어.’
그렇지 않아도 정상이 아니던 상태에 갑작스럽게 또 다른 나를 만난 데다, 감당하지 못할 만한 정보가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덕분에 멘탈이 완전히 나갔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나답지도 않게 나 대신 묘지기 녀석이 더 잘해 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지.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해일로 쓸려 나간 도시의 폐허. 저 너머 어딘가에 또 다른 강예나가 있을 것이다.
저 녀석의 진짜 속셈이 뭔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또 다른 루트의 나라고는 해도 거의 몇 년간 나와는 다른 시간을 살아온 녀석이니,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같은 점이 있었다.
‘역시…… 죽어 주긴 싫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묘지기의 말대로 저 녀석이 나보다 더 잘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진 욕심을 무엇 하나 버리고 싶지 않다.
이기적인 선택일지는 몰라도, 나는 내 손으로 타르토스의 친구들을 구해 내고 싶었다. 부모님과 평생 화해는 하지 못하겠지만, 죽는 걸 보고 싶지도 않았다. 새로 생긴 한국의 동료들도 지켜 내고 싶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
그야말로 세계의 명운을 구해 내야만 이루어 낼 수 있는 소원이다.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앞까지 보고 움직였다고.’
타르토스냐, 지구냐.
묘지기 녀석이 던진 그 질문이 내 마음을 찌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 마음과는 별개로 언젠가는 분명한 답을 내려야 할 질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당장 해야 할 것은 그런 게 아니다.
현재 내 손에 닿지 않는 것을 아무리 필사적으로 원한다고 해도, 앞으로의 한 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결코 도달할 수 없다.
그러니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나가자.
일단, 지금은.
그 마법의 말이 이번에도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이렇게 차근차근 걷다 보면 바라던 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그래서 나도, 이선을 따라 씩 웃었다.
그래, 웃자.
웃음은 언제나 절망을 극복하는 시작점이니까.
“어떻게든 해 봅시다.”
* * *
그리고 ‘강예나’는 눈을 떴다.
“쿨럭!”
헛기침을 하자 물이 튀어나왔다.
그와 함께, 강예나는 자신이 왜 이렇게 된 것인지 깨달았다.
‘아, 강에 빠졌었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속박당한 채 해일에 휩쓸린 데다, 그 해일 때문에 범람하기 시작한 한강에 그대로 빠져 버린 것이다.
그때쯤에는 속박이 사라져 사지가 자유로워지긴 했지만, 수량이 많아져 물결이 거세진 강은 이미 마법이 아니라 자연재해 그 자체였다.
덕분에 한동안은 속수무책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기는 어디지?’
강예나는 귀에 들어간 물을 털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저 멀리, 한때 여의도의 상징이었던 건축물 하나가 보였다.
지금이야 폐허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상당한 위용을 자랑하던 건물이다.
“여기까지 왔다고?”
이대로 정신을 못 차리고 흘러갔다면 서울을 벗어났을지도…….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셈이다.
내가 이 근래에 이렇게까지 호되게 당한 적이 있던가? 그것도 겨우 레벨 30대나 될 법한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흥미롭기도 했다.
만렙을 찍고 난 후로는 목숨을 건 싸움에 임할 일이 별로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제법 재미있단 말이지.’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허점을 찔러 올 줄이야.
그런 동료들을 사귀다니, 저쪽의 자신도 제법이지 않은가.
‘물론 여전히 그 점은 영 속이 뒤틀리는 것 같지만…….’
강예나는 단발이 된 제 머리카락을 마구 털어 대충 물기를 제거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생각을 해도 별수 없다. 공연한 감정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방해만 될 뿐이다.
그래서 강예나는 질투에 빠지는 대신, 무기질적인 허공의 글씨를 노려보았다.
- 현재 필드, ‘서울’이 침입을 받고 있습니다.
- 필드, ‘서울’에서 침입자를 배제하십시오.
- 제한 시간 52:21:31
앞으로 남은 시간은 52시간.
과연, 어느 쪽이 살아남을 것인가.
강예나는 홀로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