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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201화 (202/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01화

다만, 아무리 내가 정신을 차렸다고는 해도 그걸로 현실적인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상황 끝났나요?!”

건물 내에서 헌터들 몇 명이 튀어나왔다.

아마도 이선, 이우연, 양태원이 튀어나오기 전 건물 안에 헌터들을 대기시킨 것 같았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헌터들이 있으니 그들을 보호할 요량으로 남겨 둔 것이겠지.

그중 눈에 띈 것은 단연 류세연과 백사현이었다.

단, 얼굴이 파리해진 채 덜덜 떨고 있는 백사현과 달리 류세연은 완드를 들고서 기세등등한 태도였다.

류세연이 거만한 얼굴로 해일에 모두 쓸려 간 도시를 훑어보며 말했다.

“소리가 요란한 거에 비해선 처치 메시지는 안 떴는데. 역시 마무리가 어설펐나?”

이선이 피곤한 듯 이마를 짚으며 대꾸했다.

“존댓말 쓰세요, 류세연 헌터. 우리 지금 공적인 임무 수행 중이거든요.”

그러자 류세연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는 넌 남의 완드를 걷어차는 게 공적인 임무 수행이냐?”

“……상대는 강 하류로 쓸려 내려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약간 시간을 벌었어요.”

할 말이 없던 이선 헌터는 슬며시 주제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보스가 돌아오기 전에 일단 부상자를 옮깁시다. 식량과 구급약품은 차 안에 실었나요?”

“물론.”

“잠깐만. 식량을 실었다고?”

내가 깜짝 놀라 묻자 이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이 던전 안에 머물지 모르니까요. 털 수 있는 자원은 챙겨 가는 게 낫죠.”

아무래도 묘지기 녀석의 식량 창고를 털어 버린 모양이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이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어떻게 식량을 모았는지 들은 입장으로는, 좀 미묘하긴 했다.

‘꼭 다람쥐가 겨울을 지낼 도토리 모으듯 한 것 같던데.’

여하튼,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판단이기는 했다.

한국 헌터들 중에는 부상자도 많은 데다, 제대로 클리어하기 전까지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위자료로 챙겨 가기로 할까.’

묘지기에게 시원하게 뚫린 어깨가 말도 못하게 욱신거리고 있었다.

솔직히 포션을 뿌리고 좀 쉬고 싶긴 한데, 죽기 싫으면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니 어쩔 수가 없다.

“그, 상처…….”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나에게 말을 건 것은, 뜻밖에도 백사현이었다.

그나저나 먼저 말을 건 주제에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건지 내게 묻는 입술이 시퍼렇게 질려 있다.

“뭐야?”

“아니, 너무 아프지 않아…… 요? 부상자는 치료부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에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지.”

“저번부터 생각한 건데 누나. 허세가 좀 있지 않아요?”

“…….”

이우연과 양태원의 말은 무시하기로 했다. 백사현도 자신의 말이 무시당했다고 느낀 것인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애써 고통을 잊으려 노력하면서 이선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럼 어디로 갈 생각이죠?”

“아, 그렇지 않아도 미리 맵핑으로 상황을 살펴보도록 부탁했어요. 박소희 헌터!”

“네!”

무리의 뒤편에 있던 박소희 헌터가 또랑또랑한 눈을 뜨고 튀어나왔다.

“맵핑 스킬을 사용해 본 결과, 이 근처 K대 대학 병원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근처에는 몬스터 군락이 별로 없거든요. 그리고 가는 길에 있는 몬스터도 기껏해야 C급 정도이니, 남은 헌터들 힘으로도 충분히 상대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은신처가 대학 병원이라니, 상대방이 너무 추측하기 쉬운 곳 아닌가요?”

옆에서 듣고 있던 백사현이 반론을 제시했다.

“부상자가 있으니 당연히 근처 병원으로 숨어들 거란 예상부터 할 테니까…… 우리를 찾는다면 병원부터 찾을 것 같은데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름대로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의견에 박소희 헌터가 민망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지만, 그때 이우연이 나섰다.

“저는 괜찮은 것 같은데.”

“뭐?”

“그야 병원부터 뒤지기야 하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우리가 원하는 장소로 보스 플레이어를 불러낼 수 있다는 의미도 되니까요.”

그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도 놀랐다.

총력을 발휘했는데도 결국 졌던 상대와 곧장 다시 싸울 생각부터 하다니.

그야 클리어 조건이 ‘처치’인 만큼 재대결은 피할 수 없는 일이긴 하다만, 아무래도 패배 경험이 자꾸 누적되다 보면 인간인 이상 자연스럽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러니 몸도 좀 추스른다는 명목으로 대학 병원을 찾아간다는 말이 나왔을 테다.

하지만 이우연은 그런 미온적인 계획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눈동자가 호승심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부비트랩을 설치할 기회네요. 아이템 창고를 털면 제법 쓸 만한 것도 나올 거고.”

하기야 저 녀석도 VIP 스토어에 다니면서 어지간히 아이템을 모아 두는 것 같기는 했다.

‘뭐…… 원래 던전 공략에 적극적인 놈이긴 했지.’

유령의 성 던전에서도 둘이서 SSS급 보스 몬스터를 공략하러 가자는 미친 제안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참 일관적인 녀석이었다.

“K대 병원이라면 근처에 호수도 있고, 높은 건물도 많으니, 활용할 만한 지형적 이점이 있는 편이죠. 미리 폭탄을 설치해 두고 써먹어도 되고.”

그러니까 또 다른 나를 끌어들여서 머리 위로 건물을 무너트리겠다, 이건가.

“그렇지 않아도 효과를 확인해 보고 싶었던 가스 아이템도 있었는데 잘됐네요. 그런데 방독면 수량이 충분한지 모르겠네.”

심지어 독가스를 살포하는 아이템까지 가지고 있는 건가.

준비가 철저해서 다행인지 무서운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어쩐지 묘지기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만렙이라고 해도 절대무적은 아닐 텐데.

“……이우연 헌터 말에 일리가 있는데요.”

“하긴…… 저거 상대라면 폭탄이든 독이든 써먹어야 조금이라도 승산이 커지겠지.”

그리고 이우연의 말을 들은 현재 공략대의 실질적인 리더나 다름없는 이선과, 가장 또라이 같은 류세연이 각각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의견이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처음 반대 의견을 냈던 백사현도 입을 다물었다.

이선이 헌터들의 얼굴을 빙 둘러보았다.

“다른 분들 의견은…… 없으시군요. 그럼 일단 K대 병원으로 이동합시다. 류세연 헌터, 가는 동안 차량 보호 감독은 맡겨도 되겠죠?”

현재 강력한 플레이어들이 모두 녹다운 된 상태이니, 지금으로서는 믿을 게 류세연밖에 없는 게 사실이기는 했다.

“어이가 없네.”

지목당한 류세연이 팔짱을 낀 채 이선 헌터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멋진 건 지 혼자 다 하고, 나한테는 네 뒤처리를 하란 말이야?”

“……이게 멋져 보이냐? 너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냐?”

이선이 콜록콜록 기침을 해 보였다. 그게 결코 엄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기야 진언 마법의 후유증은 잠시 쉰다고 해서 나을 것이 아니기는 했다.

“맞잖아. C급 몬스터 처리하는 게 뒤처리지 뭐야?”

“어디까지나 차량과 부상자 보호입니다.”

둘은 잠시 서로를 날카롭게 노려보았지만, 곧 김하현이 중재에 나섰다.

“자, 자. 다들 빨리 움직입시다. 부상자들을 먼저 옮겨 주세요! 식량과 구급품은 나눠서 실을게요!”

확실히 여러 번의 공략 경험이 있는 헌터들로 구성되어서인지, 이선이라는 구심점이 방침을 결정하자 움직이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순식간에 현장이 정리되어 가기 시작했다.

“그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 와중에 부상자를 옮기는 대열에 참여하지 않은 류세연이 턱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방랑하는 구도자를 처치하라는 클리어 조건이 떴잖아. 이거 공개적으로 짚고 넘어가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뭐, 그게 뭐예요!”

본인을 지칭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지레 찔린 듯한 양태원이 소리를 높여 반사적으로 따졌다.

이선과 이우연은 가만히 침묵했지만, 곤란해진 것은 확실했다.

그야 뭐, 언제까지고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그런 류세연의 말에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렇게 나오는 게 정상이지.’

저 클리어 조건을 보고도 내가 아니라 보스 플레이어를 잡자는 결정을 내린 저 세 사람이 이상한 것이다.

게다가 류세연 헌터는 나와 사이도 그리 좋지 않은 터. 나를 처치하는 쪽을 선택하고 싶어 할 만도 했다.

‘그나마 김성연이 기절한 채라 망정이지…….’

만일 지금 그 꼰대가 일어나 있었다면, 이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장소 이동하자는 말조차 못 꺼냈을 거다.

그렇다고 뭐, 정신 차린 지금에야 순순히 죽어 줄 생각은 없다만…… 상당히 귀찮아지기는 했겠지.

침묵한 나를 보며 류세연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다른 헌터들이 이선 눈치 보느라 말을 못해서 그렇지, 다들 속으로 생각은 하고 있을 거거든. 이거 정말 기분 나쁘네, 이선 헌터. 결국 저번처럼 1위라고 특별 취급을 하고 있잖아. 그쪽 말마따나 우리는 공적 임무 수행 중인데 말이야.”

목소리가 워낙 커 건물 내에서 바깥의 자동차로 부상자를 옮기던 헌터들도 도저히 듣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어쩐지 지난번 마석 던전 때가 생각나는군. 그때도 류세연 헌터는 저렇게 주위 눈치 따위는 보지 않고 제 할 말은 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아마 장수할 듯싶다.

심지어 이번에는 지난번의 치욕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완드를 두 손으로 꼭 붙든 채였다.

그런 류세연을 이선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류세연 헌터? 그렇지 않아도 시간도 없는데, 또 시비만 걸 셈입니까?”

“시비를 거는 게 아니야. 바빠서 마음이 급한 건 알겠지만 확실히 해 둘 건 확실히 하자는 거지. 이선 헌터, 당신이 제대로, 공개적으로 설명하라고. 다들 클리어 조건 둘 중 한쪽을 선택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게.”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한 류세연은, 막 기절한 채 자동차에 짐짝처럼 실리는 중인 김성연을 턱으로 가리키더니, 별안간 목소리를 낮추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라면 먹힐 거야. 그러니까 빨리빨리 약을 쳐 둬.”

“……뭐?”

이선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류세연의 말이 뜻밖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사실, 나도 뜻밖이었다.

류세연이 더욱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다들 말은 안 해도 불안할 텐데, 이럴 때 공략해야 너한테 넘어오지. 게다가 미리 명분을 확실히 해 둬야 저 꼰대가 깨어난 다음에도 딴소리를 못 하…… 아니, 덜 할 거고. 그러니까 얼른 사람들 모아 놓고 연설해! 너 잘하는 거 있잖아.”

“아니, 연설이라니…….”

“본인이 직접 하는 건 좀 아니고, 실질적으로 현재 대장인 네가 제대로 말해 두는 게 나아. 누구 한 사람을 희생해서 살아남는 건 우리 신념과 위배되니 어쩌니, 아까 말한 거.”

기본 능력치가 좋은 만큼, 아마도 이선이 말한 내용을 엿들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류세연이 하고 싶은 말은 결국…… 기절한 김성연이 깨기 전에 미리 다른 헌터들을 모두 제대로 설득해 반론의 싹을 자르란 뜻이다.

지난번 마석 던전에서 김성연 길드장은, 자신을 따르는 헌터들과 함께 다른 주머니를 차려고 함부로 움직이다가 몬스터의 어그로를 끈 적이 있었다.

물론 당시 김성연 길드장이 주모자이기는 했지만, 결국 그건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헌터들이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다.

즉, 김성연이 일어나서 나를 처치하는 게 필요한 희생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에 넘어갈 헌터들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솔직히 뻔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딱히 인망이 없는 나로서는 그걸 막을 방법이 없는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김성연이 일어나 혹시 내게 불리한 쪽으로 여론을 흔들려는 조짐이 보이면, 조용히 무리를 이탈해 홀로 던전을 공략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야 이선이 나서서 분위기를 잡아 주면 좋긴 하지.’

어쨌든 나 혼자 묘지기 녀석과 맞서는 것보다는 다른 이들의 협력을 받는 게 훨씬 나으니까.

하지만 내가 나서서 이선에게 분위기를 조장해 달라고 하는 것도 이상한지라 딱히 말을 꺼낼 생각은 없었다.

진언 마법의 여파가 남아 있는 데다, 김숙자 교수가 부상을 당한 후 정신이 없는 게 뻔히 보이기도 했고.

그런데, 그 점을 하필이면 류세연이 지적했다는 것이 너무도 의외였다.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는다던데, 혹시 사망 플래그를 세운 건가?

“허어…….”

잠시 놀란 듯 눈을 굴리던 이선이 갑자기 씩 웃었다.

어쩐지 류세연과 아주 닮아 보이는 웃음이었다.

“네 말이 맞다. 내가 정신이 없어서 못 챙길 뻔했네. 고맙다.”

“까먹을 걸 까먹어라. 그래서 어떻게 헌터부 장관이 되겠냐.”

“누가 그런 걸 한다는 거야?! 무서운 소리 하지 마!”

그렇게 말한 후 이선이 나에게 목례를 하더니,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헌터들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아마 류세연이 말한 대로 헌터들을 제대로 설득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선의 등 뒤에서, 나는 류세연을 바라보았다.

칼처럼 반듯하게 잘린 단발에, 얼굴을 크게 가로지르는 흉터, 커다란 아몬드처럼 생긴 눈동자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날 죽이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러자 류세연이 완드를 빙빙 돌리며 씩 웃어 보였다.

“개인적으로 한번 붙어 보고 싶기는 하지만, 그쪽을 죽이는 건 반대야.”

“왜?”

“그야, 나는 레비아탄을 후려갈기는 그쪽 실력을 봤잖아. 그리고 꼰대를 다짜고짜 패 버리는 반(反)유교적인 성깔머리도 봤고.”

“…….”

그건 딱히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류세연의 표정이 상당히 산뜻한 걸 보니, 본인은 칭찬이랍시고 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 내가 김성연을 냅다 차 버린 게 본인 마음에 들었다는 건가.

류세연은 이빨을 드러낼 정도로 입술을 크게 말아 올린 채 웃고 있었다.

“뭐, 쉽게 말해서 같이 일하기엔 꼰대보다는 여러모로 방구 쪽이 낫다는 생각이야.”

“……잠깐만. 너 지금 나를 뭐라고…….”

“적어도 지금처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더라도, 무시하지 않고 들어 주기는 할 거란 확신이 섰거든.”

그렇게 말하며 류세연이 나를 향해 완드를 겨누었다.

“그러니까 이건 우리의 첫 단추야. 어디 한번 잘 끼워 맞춰 보자고, 1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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