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03화
이렇게 될 걸 예상하지 못한 건 결코 아닌데…….
“하룻밤 만에 다시 싸움을 벌이다니. 도대체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건가?”
역시나 귀찮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차가운 시선으로 김성연 헌터를 바라보았다. 그런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할 리 없는데, 김성연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이선을 향해 을러대고 있었다.
“적어도 기절한 사람들이 일어났을 때까지는 지켜보며 기다렸어야지!”
직접적으로 ‘다른 클리어 조건’을 달성해 이 던전을 나가자고 말하지 않는 점이 역시나 노련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방랑하는 구도자’를 처치하라는 클리어 조건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내가 직접 나설 수 있겠지만, 김성연 길드장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기절한 사이 변한 상황만을 꼬집고 있었다.
“이렇게 적대적으로 굴 것이 아니라, 가까이서 관찰하며 약점이 발견되거나 다른 클리어 조건이라도 찾아봤어야 했네. 이렇게 갑작스럽게 다시 전면전을 벌이다니, 아무리 봐도 승산이 낮지 않나.”
게다가 나에게 이야기하는 게 아닌, 실질적인 책임자가 된 이선 헌터와 이야기하며 내가 나서기 애매한 상황을 만들어 놨다는 것도.
심지어 언제나 그렇듯,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나도 저렇게 생각하기는 했으니까.
현재 묘지기 녀석과 붙어서 이길 가능성이 적다는 거야 나도 안다. 그래서 당연히 시간을 두고 좀 더 지켜볼 생각이었다.
다만 벨리알이라는 미친 악마 새끼가 나타나 갑자기 초를 쳐 버린 게 문제였다. 묘지기가 ‘강예나를 처치하라.’라는 클리어 조건을 듣고 갑자기 눈이 돌아 버린 것도 큰 문제였고.
만렙인 녀석이 다짜고짜 죽이겠다고 달려드는데, 거기다 대고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뭐, 사실상 그냥 얌전히 뒈지란 거겠지만.’
직접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뿐이지, 그런 함의가 말 곳곳에서 은근히 배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더불어, 김성연 헌터가 일어나자마자 변하는 헌터들 사이의 분위기도.
‘그야 모두들 이선 헌터 같을 순 없겠지.’
모두라고는 할 수 없지만, 몇몇 헌터들이 내게로 향하는 눈길에 은근한 원망이 담겨 있는 것이 느껴졌다.
뭐, 너 하나만 희생하면 우리 다 살 수 있는데…… 이런 뜻이려나.
아무래도 어제 낮, 묘지기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열패감도 있을 테니까.
“효율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움직여야 해.”
그리고 김성연 헌터가 입에 담은 말.
그놈의 효율과 합리.
언제나 강자 입장에서 살아온 인간이 입에 담는 효율이니 합리니 하는 것은 그 속을 까발려 보면 뻔하다.
결국 본인은 손해 따위 보지 않고 싶다는 소리지.
“어쨌든 적이 너무 강하니까 말이야.”
하여간, 김성연의 선동은 짧고 효과적이었다.
적의 강대함을 설파하고, 효율과 합리라는 방어막을 둘러 어딜 보나 추한 선택지를 포장한다.
덕분에 일단은 이선의 말을 따르고 있었던 헌터들 사이에 동요가 느껴졌다.
“보스 몹이 너무 강하긴 해. 전력을 다해도 이길 수 있을지는…….”
“아무리 준비를 한다고 해도 겨우 하룻밤 사이에 정비가 될 리가 없잖아요. 너무 섣불렀던 건 사실이지.”
“역시 지금이라도 히든 클리어 조건을 찾으러 가야…….”
“그건 너무 맨땅에 헤딩이라고.”
“…….”
에휴.
나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예상대로의 전개라 한숨밖에 나오질 않는다.
“왜 일어나서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네.”
물론, 그딴 건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 녀석도 있었다만.
나와 함께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이우연은 헌터들을 돌아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눈길에는 노골적인 한심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런 이우연을 돌아보았다.
“너, 내 옆에 있어도 돼? 일단 ‘저거’ 네 소속 길드의 길드장 아닌가?”
“혹시 그 길드 이름이 뭔지 알아?”
“영원 길드 아냐?”
“그러니까. 이름부터 나랑 안 맞지 않아?”
……장난하냐?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이우연이 웃으면서 팔꿈치로 나를 툭툭 쳤다.
“그래도 뭐, 저거 혼자 일어난 건 아니니까. 검 뽑지 말고 5분만 더 기다려 봐.”
“……내가 갑자기 검이라도 뽑을 것 같아 옆에서 감시 중인 거였냐?”
“에이, 서얼마.”
“…….”
이우연의 반응이야 어쨌든 간에.
이렇게 조금 떨어져서 보니, 차라리 ‘내’가 타깃이 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야 이 한국 헌터들 사이에서는 가장 강한 데다, 지지해 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리 신경 쓰지 않지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처치하라는 클리어 조건이 떴다면 상황은 또 달라졌을 것이다.
혹시 태원이를 처치하라는 클리어 조건이라도 떴으면 당장 목덜미를 집어 들고 저 멀리 튀었을 거다.
“그러니까, 도저히 지켜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요.”
그때, 김성연의 말을 듣고 있던 이선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 강대한 보스 몹이 갑자기 돌변해서 우리를 공격하는데 그 상황에서 어떻게 버티란 말인 거죠?”
김성연의 말이 교묘하게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선이 일방적으로 털리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냥 다 까놓고 말해 보시죠. 지금 이렇게 일어나자마자 트집 잡는 이유가 있으신 거잖아요.”
그 날카로운 톤에 주위 헌터들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평소에는 공무원이라는 입장상 상당히 사무적으로 나왔던 이선이 이렇게까지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드물었다. 언제나 다른 헌터들 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포지션이었으니까.
심지어 제 입장을 이용해 이선을 제 아랫사람처럼 털고 있던 김성연조차 움찔했다.
“그게 아니라…….”
“뭐가 아니라는 거죠? 지금 김성연 헌터가 하는 말은 결국 저쪽이 공격해 오는데 그냥 그대로 당해 줬어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 말이 아니지 않나! 그냥 상황을 좀 더 유연하게 움직였어야…….”
“말장난은 그만하지, 김성연 헌터.”
이선과 김성연의 말소리가 커지는 와중에, 그 사이를 단호하게 끊어 내는 엄중한 목소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기절해 있었던 주제에 이제 와서 지난 일을 두고 무어라 하는 건 그냥 트집밖에 되지 않아.”
기다란 검은 가죽 코트를 입은 김숙자 교수였다.
아직 두통이 영 가시지 않았는지, 안경을 벗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대고 있었다. 안색이 파리한 것이, 역시 전부 회복됐다고는 할 수 없어 보였다.
“우리는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어.”
그럼에도 김숙자 교수의 발언에 잠시 느슨해졌던 긴장의 실이 탁, 하고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적이 오고 있어. 이건 바꿀 수 없는 사실이고, 우린 살아남는 게 우선이야.”
“그러니까!”
김성연이 성마른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살아남으려면 이렇게 공격을 준비할 게 아니라, 빨리 다른 클리어 조건을 찾아보아야……!”
“아니, 나는 이선 헌터의 방침에 동의하네.”
김숙자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저쪽은 우리에게 적대적으로 변했어. 괜히 다른 클리어 조건을 찾아본답시고 흩어졌다가 각개 격파당하면 끝이지 않나. 조금이라도 전력이 남아 있을 때 도전해 보는 게 낫지.”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몇 시간 전, 모두 힘이 남아 있을 때도 당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공략에 성공할 확률이 너무 적습니다!”
그 말에 김숙자 교수가 눈살을 찡그렸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뭐, 방랑하는 구도자’를 죽이고 클리어를 하자고?”
본론은 터트리지 않고 노른자 주위만 깔짝이던 대화에서 기어코 직접적인 언급이 나오고야 말았다.
노골적인 말에 헌터들 사이에서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김성연 헌터도 놀란 모양이었다.
“아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물론 아니겠지.”
김숙자 교수가 김성연의 반사적인 부정을 받아쳤다.
“누군가 한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다니,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우는 우리 헌터들 사이의 신뢰를 깨트리는 짓이지 않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누가 목숨을 걸고 타인을 위해 싸우고 싶어지겠는가? 사회적 신뢰망이라는 자산을 깎아 먹는 일이야.”
“…….”
“물론 길드를 이끄는 입장인 김성연 헌터 또한 이 점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믿네.”
옆에서 이우연이 팔꿈치로 나를 쿡쿡 찔렀다.
“아프겠다.”
물리적인 폭력이 일어난 건 아니다만, 여기서 팬 사람과 얻어맞은 사람은 매우 명백했다.
이렇게까지 정론으로 나온다면 김성연 입장에서는 더 이상 나서기도 애매했다.
어쨌든 김성연 길드장은 본인이 노골적인 악역 포지션을 맡는 걸 꺼려 하고 있으니까.
결국 입을 몇 번 뻐끔거리나, 싶던 김성연이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이렇게, 굳이 당사자인 내가 나설 것도 없이 상황이 정리되었다.
‘물론 나중에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다만…….’
레비아탄이 출현했던 던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솔직히 도중에 저번처럼 냅다 갈겨 버릴까, 생각도 했는데 굉장히 빠르게 정리되었군.
김숙자 교수의 무게감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문득 김숙자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교수님이 살짝 미안하다는 눈인사를 하는 것이, 아마 당사자인 나를 배제하고 이야기를 진행한 것이 미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선 헌터. 계획은 세웠나?”
그리고, 그 갑작스러운 부름에 이선 헌터가 깜짝 놀랐다.
어깨에 바짝 기합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네, 넵! 일단 가지고 있는 아이템 리스트 업은 끝냈고, 박소희 헌터의 맵핑을 토대로 설치를…….”
* * *
이선의 지시에 따라 헌터들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전 자체는 간단했다.
묘지기 녀석이 우리를 찾아오리라는 가정하에, 각종 습격과 함정을 준비하는 것.
아이템창을 모두 털어 보니 생각보다 쓸 만한 것들이 많이 튀어나왔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이 ‘강예나’를 죽이는 것에 활용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어쩔 수 없이 찜찜하긴 하다만.
“영 개운치 못한 얼굴이네.”
그리고 나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자연스럽게 이우연과 움직이게 되었다.
참고로 아까 전 묘지기와의 대결에 신력을 모두 써 버린 태원이는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잠시 휴식을 취하라고 눕혀 둔 상태였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나. 그야말로 ‘본인’이니까.”
다른 사람들의 눈이 있을 때는 말을 아끼더니, 우리 둘만 남겨져서인지 드디어 이우연의 입이 열렸다.
뭐, 당연히 물어볼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이우연이 조심스럽게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괜찮아?”
“안 괜찮아.”
그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나는 아이템을 설치하며 이우연을 향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닥쳐 온 현실에 언제까지고 징징대고 있어 봤자 변하는 것은 없다. 아무리 억울하더라도 일단 살아남으려면 제자리에 멈춰 있을 수도 없고.
“저걸 어떻게 이기나, 싶긴 하지만.”
“아, 그거 말인데.”
이우연이 검지로 제 앞의 허공을 툭툭 찔러 보였다.
“하나 기억해 둬, 강예나.”
“뭘?”
“나는 아직 ‘취소’하지 않았다는 걸.”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우연이 무엇을 취소하지 않았다고 언급하는 것인지는 매우 명백했다.
“……너……!”
그러니까 저 녀석의 말은, 아까 전 ‘멸혼의 불꽃’ 스킬 발동을 취소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우연이 발동을 취소했다는 메시지는 결국 뜨지 않았더랬다.
“대체 왜 그래?”
이쯤 되면 차라리 어이가 없어졌다.
갑작스럽게 정체불명의 스킬 발동에 동의하느냐, 라는 어이없는 메시지가 떴는데, 대체 왜 취소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인지 모르겠다.
평소에는 의심도 많고 눈치도 빠른 녀석이 왜 저러는 거지?
“너, 그게 뭔지는 알고 내버려 두는 거야?”
“그야 당연히 모르지.”
이우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이 제대로 이야기해 주지 않았으니까.”
딱히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그저 사실을 사실로서 이야기하는 무덤덤한 어조였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가시에 손톱 밑을 찔린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건…….”
“뭐, 피차 이야기하지 않은 게 많긴 하지. 그거야 언제나 있는 일이긴 한데…….”
어떤 선을 긋고 그 이상 친해지지 않고, 거리를 두고 서로를 대한다. 그건 이제껏 우리 사이에서 무너진 적이 없던 태도였다.
“그래도 나는 당신을 믿어.”
그러나, 그 선 밖에서 틈을 찾아 찔러 들어오는 말.
나는 눈을 깜박였다.
“뭘…….”
“솔직히 타인의 능력치를 가져간다니, 그런 사기적인 스킬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그러니까, 이 스킬에는 리스크가 있어서…….”
“그러니까 그 리스크 말이야.”
이우연이 반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나인 거지?”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 자식, 어떻게 알았지?
일부러 리스크도, 스킬의 상세 사항도 말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넘겼는데…….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이우연이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역시, 맞네.”
그랬다.
이 멸혼의 불꽃이라는 스킬 자체가 여러모로 고약한 녀석이었다.
멸혼의 불꽃은 발동 조건이 까다로운 것도 물론이지만, 애초에 성질 자체가 정말 불처럼 드센 스킬이다.
보통 플레이어들은 레벨이나 클래스와 관계 없이 적어도 열 개 넘는 스킬을 깨우치기 마련이지만, 나의 경우는 다른 스킬이 발아할 가능성을 ‘멸혼의 불꽃’이 모두 불살라 없애 버릴 정도니까.
덕분에 79라는 레벨에도 불구하고 스킬이 겨우 세 가지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유용한 스킬이라는 건 부정하지 못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스킬을 사용할 때 따르는 위험은 그 스킬을 사용하는 플레이어, 본인이 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선과 양태원은 당연히 그 위험을 내가 짊어진다고 생각하고 놀라 곧장 취소를 한 것일 테다.
하지만 ‘멸혼의 불꽃’의 경우, 스킬 발동을 승인한 상대방 또한 내가 스킬 발동 실패 판정을 받게 되면 일정 페널티를 지니게 된다.
그렇기에 곧장 세 사람에게 스킬 발동을 취소하라는 말을 한 것이다.
내가 실패하게 되면 모두가 위험을 짊어지게 되니까.
정말이지 고약한 스킬이었다.
이우연은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깎아 놓은 것 같은 얼굴이 빛나는 게, 영 꼴 보기가 싫었다.
“뭐, 뻔하잖아.”
“뻔하기는 무슨…….”
저 자식은 대체 왜 저렇게 눈치가 빠른 건가.
보통은 이런 류의 스킬이 있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 텐데 말이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더 잘 알겠네. 그냥 무시해. 괜히 나한테 휘말려서 너까지 리스크 지기 싫으면.”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믿는다니까.”
“그러니까 뭘 믿는데?”
“여기서 최강의 패는 당신이라고.”
이우연이 어깨를 으쓱이며 웃어 보였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한테 올인이야.”
잠시, 대답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
나는 이우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우연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고 있었다.
커다란 까만 눈동자 속에서는, 진심 외의 다른 뜻을 읽을 수 없었다.
도대체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나 말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본인 입으로 동료도, 친구도 아니라고 한 주제에 너무 과하다 싶은 신뢰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러다 패가망신하는 수가 있다.”
그냥, 그렇게 대답하고야 마는 나도 문제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망할.
‘어쩌다 이렇게 됐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특히나 이렇게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상황에 자꾸 함께 내던져지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하하. 패가망신이라니. 그럼 내 운이 거기까지였던 거겠지.”
이우연이 낄낄대며 내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렇지만 내 특성은 기적의 승부사라서 말이야.”
잠깐만, 무슨 특성이…….
내가 무언가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 운영자, ‘조한율’이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에게 일대일 대화를 신청했습니다.
- 해당 일대일 대화를 위해 플레이어에게 일시적으로 가상 키보드를 제공합니다. 대화 신청을 수락하시겠습니까?
- Y/N
시스템창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내가 말을 하려다 말고 허공에 시선이 꽂힌 것을 본 이우연이 눈치 빠르게 물었다.
“뭐야? 조한율?”
“어, 맞아. 무슨 일이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적어도 24시간은 필요하다고 말한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설마 벌써 다른 클리어 조건을 발견하기라도 한 걸까?
가장 기다리던 연락이었으므로 나는 망설일 것 없이 곧장 대화를 수락했다.
조한율 : 앗, 예나 씨! 이우연도 같이 있죠?
방랑하는 구도자 : 그래, 무슨 일이야? 혹시 히든 클리어 조건이라도 발견했어?
조한율 : 그건 아닌데.
약간 기대했던 만큼, 그 메시지가 떠오르자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우연이 코웃음을 쳤다.
“별거 없었나 보네.”
조한율 : 하지만 중요한 걸 발견했어요!
방랑하는 구도자 : 뭔데?
조한율 : 이 던전, 예나 씨 클리어 달성 조건에 시간제한이 붙어 있어요!
나는 뜻밖의 정보에 깜짝 놀랐다.
시간제한이라니.
“잠깐, 시간제한까지 있다면 더 큰 일이잖아.”
그렇지 않아도 클리어 조건이 빡센데 여기에 시간마저 제한받는다면 더욱 문제였다.
옆에서 듣던 이우연도 깜짝 놀랐다.
“시간제한? 내 시스템창에는 딱히 뜨는 거 없는데.”
그 말대로였다.
나 또한 조한율의 말을 듣고 시스템 메시지를 띄워 보았지만, 시간제한에 관련된 메시지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다급하게 키보드를 쳤다.
방랑하는 구도자 : 아무것도 뜨는 게 없는데?
조한율 : 아니, 아니, 아니요! 우리가 아니라, 저쪽이요!
조한율 : 그러니까, 보스인 강예나 씨!
뭐라고?
조한율 : ‘강예나’ 씨는, 앞으로 대략 40시간 이내에 서울 필드에 침입한 자들을 필드 밖으로 쫓아내지 않으면 죽게 된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