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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204화 (205/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04화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러니까, 묘지기 쪽에서 시간제한이 걸린 퀘스트를 진행 중이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나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이우연도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대방 레벨을 고려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그거야 그랬다.

어쨌든 저쪽 강예나 레벨은 만렙이니까. 아직 평균 레벨이 고작해야 30대에 머무르고 있는 한국 헌터들에게는 짐이 버겁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리 용을 쓰더라도 절대 공략 불가라고 봐야 한다.

이레귤러인 내가 있다고는 해도, 그건 ‘절대적으로 불가능’ 한 일을 ‘상대적으로 어려운’ 정도로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

그만큼 만렙인 ‘강예나’는 강력한 플레이어다.

그러니 밸런스 조정이라는 면에서 볼 때는 합당하다고 볼 수 있을 터다.

하지만…….

조한율 : 이렇게 되면 우리 쪽이 확 유리해졌죠?

“……부정하기 힘들군.”

그저 밸런스 조정이라고 하기에는 일이 너무 쉬워진다.

본래 클리어 조건은 ‘강예나’를 처치하라는 것.

하지만 저 녀석은 이쪽 진영이 일정 시간 동안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이라는 페널티를 받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시간을 끄는 것만으로 상대방을 이길 수 있다는, 아주 간단한 도식이 성립하고야 마는 것이다.

일단, 서울 필드가 워낙 넓다는 점부터 그랬다.

이렇게 넓은 데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사람들을 추적해 낸다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물론 이동하면서 흔적이 남기야 했겠지만, 몬스터들이 자생하고 활동도 활발한 만큼 남은 흔적도 많이 훼손되었을 것이다.

그야 묘지기 녀석에게 우리를 쫓을 수 있는 스킬이나 아이템 따위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타르토스에서 떠날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공통 루트를 밟은 셈이지. 그렇다면…….’

소지창에 상대방을 추적하는 종류의 아이템은 없을 것이다.

추적 스킬 또한 마찬가지였다.

멸혼의 불꽃이라는 스킬이 사라졌다면 모를까, 이 미친놈의 스킬이 존재하는 이상 ‘강예나’에게는 새로운 스킬이 발아할 일도 없으니.

게다가 묘지기 쪽은 한강으로 한참을 떠내려가면서 시간을 날려 먹기까지 한 상태.

즉, 현시점의 묘지기는 아무런 단서도 없이 이 넓은 서울 바닥에서 우리를 찾아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것도 40시간 안에.

이건 어딜 보나 우리에게 유리한 게임이었다.

물론 여전히 목숨이 걸려 있는 술래잡기이기는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우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나에게 말했다.

“이 정보, 빨리 다른 헌터들에게도 알려야겠어. 이렇게 되면 만일 마주치더라도 정면 승부하는 대신 도망치는 게 유리한 거잖아.”

“……그렇지.”

“다만 문제는 운영자 측이 직접 알려 준 정보라, 우리 쪽에서 다른 헌터들에게 전달하기가 좀…….”

하기야 한국 측 플레이어들은 우리와는 달리 운영자의 정체는커녕 운영자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만큼, 이걸 나나 이우연의 입으로 직접 전달하기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조한율 : 아, 그거라면 제가 우리 쪽 클리어 조건을 갱신하면 해결될 문제네요.

조한율이 그렇게 메시지를 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스템 메시지가 갱신되었다.

- 새로운 클리어 조건을 발견하였습니다.

- 클리어 조건 : 필드, ‘서울’에서 생존하십시오.

- 제한 시간 41:01:19

“……이걸로 제법 희망이 생긴 셈인가.”

이우연이 떠오른 갱신 조건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조한율 : 물론 그래 봤자 상대는 만렙이니 방심할 수는 없지만요. 전원 무사 귀환할 수 있을지는…… 여러분의 노력에 달려 있는 거고요.

그야 그랬다.

아무리 공략 난이도가 비교적 쉬워졌다고는 해도 우리가 버텨야 할 시간이 제법 긴 것도 사실이고, 조한율 말대로 모두가 무사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였다.

“다들 난리가 났군.”

클리어 조건이 갱신된 순간 다른 헌터들과의 연락망이 폭발하기라도 한 건지 이우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텔레파시 스킬은 쓰면 쓸수록 머리가 아프단 말이지.”

“반응은 어때?”

“다들 축하하고 난리가 났지. 이 정도면 해 볼 만하다면서.”

하기야 왜 아니겠는가.

김숙자 교수와 이선 헌터 때문에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도, 저 묘지기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린 녀석들은 많았을 터.

갑자기 나타난 이 히든 클리어 조건이 얼마나 반가울지는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김성연 같은 놈은 오히려 아쉬울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녀석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마지막 순간,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나를 공격할 것 같은 놈이라서, 오히려 이렇게 히든 클리어 조건이 뜬 게 아쉬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한국 헌터들과의 연락은 이우연에게 맡겨 두고, 조한율에게 물었다.

방랑하는 구도자 : 그나저나,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조한율 : 뭐든지 말씀하세요! ٩( ‘ω‘)و ٩( ‘ω‘)و

전원 무사 귀환이니 뭐니를 입에 올린 것치고는 이 녀석도 어지간히 신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저 이상한 이모티콘은 저번부터 재미가 붙기라도 한 건가, 도대체 왜 쓰는 건지 모르겠다.

정신만 사납다.

방랑하는 구도자 : 저 녀석의 클리어 조건, 언제부터 시작된 거야?

조한율 : ? ? 죄송해요, 질문이 이해가 잘 안 가요. 다시 한번 질문해 주세요.

방랑하는 구도자 : ……그러니까 저 녀석의 클리어 조건, 도대체 언제 뜬 거냐고. 우리가 던전에 진입한 순간인가?

조한율 : 아, 그렇지 않을까요?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제한 시간 자체는 72시간에서 시작한 것 같아요. 한국 플레이어가 들어간 지 대략 하루 반나절 정도 지났으니, 타이밍상 그게 맞겠죠.

역시나.

이거, 들을수록 어쩐지 찜찜해지기 시작했다.

내 침묵이 길었던 탓인지, 조한율 측에서 먼저 메시지를 띄웠다.

조한율 : ??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방랑하는 구도자 : 문제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계속해서 내 머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우리를 곧장 처치하지 않은 거지?”

그 말에 채팅창 너머의 조한율도, 한국 헌터들과 연락을 하고 있던 이우연도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야?”

조한율 : 넹?

“그렇잖아. 저쪽의 강예나는…… 우리가 던전에 진입한 순간 저 클리어 조건이 떴던 건데, 왜 처음 만난 순간 우리를 죽이지 않았던 거지?”

말로 꺼내고 보니 더욱 이상했다.

맨 처음 석촌 호수에서 ‘강예나’를 만났을 때, 강예나는 충분히 우리 모두를 죽일 수 있었다.

심지어 한국 측 플레이어는 나를 포함해 모두 그 여자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했고, 딱히 무해한 상대도 아니었으니 제거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텐데.

내 물음에 이우연이 어딘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야…… 당신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그쪽도 당신이 그…… 본인과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알아차렸겠지. 일단 이야기라도 들어 보려던 심산이 아니었을까.”

“……그건 나 하나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들을 죽이지 않을 이유는 안 되는데.”

그 말에 이우연이 어째서인지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까놓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랬다.

솔직히 지금 묘지기 녀석 입장에서는 죽지 않으려면 한국 측 플레이어들을 일찌감치 죽였어야 했다.

괜히 살려 뒀다가 지금처럼 서울 어딘가로 모습을 감춰 버리면, 저 녀석 입장에서는 이지 모드 게임이 하드 모드로 변질되는 셈이니까.

그런데, 묘지기 녀석은 빠르게 클리어 조건을 달성할 기회를 그냥 날려 버렸다는 것이다.

아무리 본인이 만렙이라서 방심했다고 해도 그렇지, 이런 클리어 조건인데 나를 제외한 플레이어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뒀다고?

“아무래도 이상해.”

사실, 벨리알 녀석이 등장한 순간부터 무언가 강렬한 위화감이 들었다.

저 녀석이 정말로 ‘나’라면 절대로 저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거라는 위화감.

무언가 내게 말하지 않은 다른 계획이 있을 것 같다는, 그런 근거 없는 감각.

나는 다시 한번 클리어 조건을 확인했다.

“봐. 클리어 조건도…… ‘침입자를 배제하라.’잖아. 이거 여러모로 여지가 있어 보이는데.”

이우연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여지라고?”

“그래, 시스템은 언제나 불친절하지. 정확한 조건과 상황이 모이지 않으면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지 않아.”

가령 몬스터의 상태를 조회할 때 ‘상세 조회’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다거나, 공개된 클리어 조건 외에 다른 것들이 있을 때도 특정 단어를 언급하지 않으면 절대 해금되지 않는 등.

유령의 성 던전 때 겪었던 ‘정화’ ‘파훼’ 등의 단어가 그 예다.

“그리고 이번에는…… 클리어 조건의 범위가 애매하군.”

지난번 마석 던전 때도 그랬다.

쉽게 보면 레비아탄을 정석대로 ‘처치’하는 것만이 클리어 조건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양태원이 제사를 지냄으로싸 몬스터를 잠재웠고, 그 결과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었다.

이번 경우에도 비슷한 해석을 적용해 볼 수 있었다.

“배제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어. 가령 죽이지 않고 서울 필드 밖으로 쫓아낸다거나…….”

조한율 : 하지만 그건 우리 쪽이 불가능한걸요. 필드 제한이 있어서 서울 밖으로 못 나가니까.

“하지만 묘지기 녀석은 그걸 모르잖아. 또, 침입자 모두를 배제하라는 명시도 되어 있지 않은 데다, 애초에 침입자의 정의도…….”

“잠깐, 잠깐만.”

이우연이 내 말에 끼어들었다.

한창 추측을 늘어놓던 중이었던 나는 이우연을 돌아보았다.

이우연은 팔짱을 끼고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긴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착각하는 거라면 미안한데…….”

“뭐야?”

“당신, 혹시…….”

이우연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뱉어 냈다.

“저쪽 강예나와 싸우는 게 꺼림칙한 거야?”

속이 다 들여다보일 것 같은 날카로운 시선이 내 얼굴 위를 훑고 있었다.

그 시선에 나는 순간적으로 멈칫하고야 말았다.

“역시나.”

그러자 이우연이 푹, 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게 눈치 빠른 이우연에게는 충분한 답이 된 모양이었다.

“지금 당신, 어딜 봐도 싸우기 싫어서 어떻게든 ‘싸우지 않아도 될’ 변명을 찾고 있는 사람이거든.”

“……딱히 그런 건…….”

“뭐,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해해. 솔직히 또 다른 세계의 ‘나’를 죽이라니, 누가 봐도 너무하다고는 생각하거든.”

내가 무어라 설명하기도 전에 이우연은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마도 제 딴에는 위로인 모양이다.

“하지만 적어도 저쪽의 강예나 씨가 클리어 조건의 해석 여지와 관계없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건…… 명백한 사실이야.”

“…….”

나는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우연의 지적은 극히 옳았다.

설령 내 말대로 클리어 조건에 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한들, 묘지기 녀석이 그에 따를 생각이 없다는 건 명백했다.

“나도 옆에서 지켜봤잖아. 그 살기가 연기였다고는 말 못 해.”

“……그래.”

나 또한 내게로 다가오는 검날에 실린 시퍼런 살기를 기억한다.

그게 연기였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적어도 그 순간 묘지기가 내게 느낀 감정, 질투와 살의는 명백한 진심이었다.

‘……결국, 피할 수는 없는 건가.’

그리고 저쪽의 강예나가 나를 죽이려고 마음을 먹은 이상, 이우연 말대로 내가 클리어 조건에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고 한들 아무런 소용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내게로 검을 들이밀던 여자를 생각했다.

포션을 썼는데도 다 아물지 않은 어깨의 상처는 아직도 욱씬거리고 있었다.

본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그저 단순한 행운의 작용으로 기회를 얻은 또 다른 자신에게 향하는 살심.

그 마음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나만큼은.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 꼭 그만큼의 크기만큼 저쪽의 묘지기 또한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다는 의미이니까.

그렇다면 그 녀석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나였다.

물론 그렇기에 묘지기 녀석에게 순순히 죽어 줄 수는 없지만…….

‘…….’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사람 일이라는 건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니까, 보험 하나는 챙겨 두는 게 좋겠지.

나는 다시 한국 헌터들과 작전 회의에 들어간 이우연을 뒤로하고, 다시 가상 키보드를 꺼내어 채팅을 쳤다.

방랑하는 구도자 : 잠시만, 조한율. 이거 하나만 더 알아봐 줄래?

조한율 : 예? 여기서 더요? 이제 우리 클리어 조건은 확정된 거니까 더 파 볼 것도 없지 않아요?

방랑하는 구도자 : 맞아. 그래서, 이건 내 개인적인 부탁이니까 거절해도 돼.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자 잠시 답이 오지 않는다 싶더니, 다음 순간 굉장한 기세로 답장이 떠올랐다.

조한율 : 말Takㅆg아ktpdy!

조한율 : 말씀하세요!

조한율 : 아니, 아니!지!잠시만요!

조한율 : 듣고 결정하겠습니다. 저는 운영자니까 플레이어의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 드릴 수는 없거든요!

조한율 : 그런데 일단 말씀은 해 보세요.

“………….”

지적하고 싶은 점은 수도 없이 많다만…… 나한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거니까 그냥 넘어가도록 할까.

*   *   *

- 현재 필드, ‘서울’이 침입을 받고 있습니다.

- 필드, ‘서울’에서 침입자를 배제하십시오.

- 제한 시간 32:21:31

“이런, 이런.”

‘강예나’는 옷에 별로 묻지도 않은 먼지를 털어 내며 메시지창을 흘끗, 눈짓했다.

“잠깐 체력을 회복한다고 낮잠을 잤더니 시간이 너무 흘러 버렸네.”

대답해 줄 상대 하나 없이 흩뿌리는 혼잣말에도 유일하게 반응을 돌려주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허리에 찬 파트너였다.

검신이 부드러운 흰빛과 함께 진동했다.

그 온유한 빛이 아마도 자신을 질책하는 듯싶어, 강예나는 한 번 더 웃었다.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간만에 좋은 꿈을 꿔서 깊게 잔 것뿐이라고.”

정말로 좋은 꿈이었다.

평소에는 꿈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던 친구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내 주었던 것이다.

물론 꿈에서 깨어났을 때 보인 것은 폐허가 된 회색의 도시이고, 동료는커녕 주위에 있는 거라곤 몬스터뿐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꿈이었다.

우우웅.

다시 한번 검이 항의하듯 울음을 터트렸다.

강예나는 그 재촉 같은 울음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간다, 가.”

잠깐이라도 꿈의 여운에 잠겨 있고 싶은 마음을 몰라주다니, 이게 무슨 파트너람.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되잖아. 그나저나 넌 성검 주제에 왜 그렇게 성질이 급해? 대체 누굴 닮은 거지?”

딱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그간 혼잣말에 너무도 익숙해진 강예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혼자 주절주절 잘 떠들어 대고 있었다.

만일 여기에 친한 누군가가 있었다면 당연히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에이펙스의 광검이 어느 정도의 영혼과 의지를 가진 에고소드인 만큼, 유일한 주인인 자신을 닮았을 것이라고.

그래서 그런 대답이 돌아올 것을 상정한 강예나는, 또다시 주인 없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함정 초입부터 독무를 깔아 놓을 정도는 아니란 말이지.”

그 말대로 보랏빛의 독안개가 거리 전체에 자욱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 앙겔루스의 가호가 당신의 신체를 정화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기어코 서울까지 진출한 마왕이 지역 전체에 마기를 뿌렸을 때나 봤던 것 같은데.

이런 시스템 메시지조차 제법 반가워서 강예나는 또 미소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간만에 맛보는 자신의 목숨을 건 도박이었으니.

하여간 아이템인 것이 분명한 독무가 등장한 것을 보니 제대로 찾아오기는 한 모양이다.

현재 이 서울 필드에 또 다른 ‘침입자’는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원래 자생하는 몬스터 놈들도 내 입장에서 거슬리는 건 마찬가지인데 말이지.’

하지만 시스템 놈의 기준이 거지같은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한탄해 봤자 소용없다.

어찌 되었든, 눈앞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

“자, 과연 날 상대로 뭘 준비해 놓았는지 한번 보러 갈까?”

그렇게 한 발을 더 앞으로 들여놓은 순간.

일반인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을, 실보다도 더 가느다란 마력의 실이 발치로 엉겨드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강예나는 굳이 설치된 함정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저들의 마지막 여흥이기도 할 테니 기대에는 착실히 부응해 줄 생각이었다.

펑!

퍼펑!

그와 동시에 강렬한 폭음으로 주위가 휩싸였다.

터진 것은 단순한 폭음만은 아니었다. 사람은 물론이고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것 같은 시퍼런 불길이 솟아올랐다.

거대한 불꽃이 순식간에 강예나의 몸을 집어삼켰다.

다만.

빛을 내는 성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마력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폭발했던 불꽃은 단숨에 사그라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그라진 불꽃 속에서 나타난 여자의 모습에서는, 어디 한군데라도 상한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강예나는 듣지 못했지만, 한국 헌터들은 텔레파시 스킬을 사용해 이미 작전에 돌입한 상태였다.

- 시작합니다!

이선의 지시와 함께 연속해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쾅!

여자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폭탄이 터지며 불꽃이 거리를 휩쓸었다.

우르릉!

게다가 건물 골조에 설치해 두었던 트랩이 작동해 높은 건물이 무너져, 견고한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우르르, 여자의 주위로 쏟아져 내렸다.

고층 아파트가 많은 지역인 만큼, 사방에서 무너지는 콘크리트 더미를 맞지 않고는 거리를 지나기 힘들 정도였다.

땅은 살을 엘 것 같은 지독한 불길에 휩싸이고, 하늘에서는 인간이 만든 건축물이 부서진 채 창처럼 머리 위로 쏟아졌다.

땅도, 하늘도.

가히 지옥이라고 부를 법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강예나는 별 망설임 없이 그 사이로 발을 내디뎠다.

마치 이것만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말하는 듯이.

그리고 입가에는 미소가 여전히 걸려 있는 채였다.

“그럼, 여느 때처럼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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