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12화
아무래도 나는 또 다른 나 자신과 친해지지는 못할 모양이다.
“이렇게 손발이 안 맞아서야…….”
그리고 그런 감상은 저쪽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묘지기 녀석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애들은 평소에 나랑 어떻게 같이 싸웠던 거지?”
키에에엑!
그렇게 말하며 휘두른 검에 한 데스나이트가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데스나이트가 들고 있던 폴 엑스가, 흡혈 박쥐의 무리를 발로 차고 있던 내 쪽으로 둔중하게 떨어졌다.
하마터면 떨어지는 도끼날이 단두대처럼 발등을 작살 낼 뻔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그 자리에서 멀어졌다.
“아, 좀 보고 움직이라고!”
“알아서 피했어야지. 아, 참.”
몬스터의 몸을 가르면서 묘지기가 혀를 찼다. 마치 본인은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라는 투의 건조한 어조로.
“네 레벨이 나보다 한참 떨어진다는 걸 미처 생각하질 못했네. 미안.”
“…….”
아무리 봐도 ‘나’에게 적의를 가득 품고 있는 듯한 발언이었다.
저 녀석, 멸망해 버린 한국으로 돌아와 버린 바람에 나랑 다르게 성격이 괴팍해진 거 아닌가 모르겠다. 최소한 나는 주위에 누가 있으면 나름 신경을 쓰면서 싸운다고.
물론 또 다른 강예나에게 그렇게 말해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 속으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어른 다 됐다, 강예나.
퍽!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나도 본 레벨을 회복한 덕에 날아다닐 것처럼 몸이 가볍다는 것이었다.
정신적인 컨디션은 제쳐 두고 육체적인 컨디션만 따지자면 최고조였다.
서걱!
검을 휘두를 때마다 악마들이 썰려 나갔다.
적들이 너무 쉽게 휙휙 쓰러져서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물론 평소에도 ‘용사를 기리는 망토’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10분의 제한 시간이 있었던 데다, 언제나 급박한 상황에서만 활용했던 만큼 체감이 완전히 달랐다.
지난번 백록담 던전에서 만나. 고전했었던 푸른 피부의 거인.
빠각!
내가 발로 걷어차자 그대로 갈비뼈가 부러지며 절명했고.
저번에는 피부에 달라붙어 귀찮게 굴었던 흡혈 박쥐 녀석들.
키에에에엑!
내 피부를 뚫기는커녕 손에 살짝만 힘을 주어도 으스러져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그리고, 코끼리처럼 커다란 덩치로 한껏 위용을 자랑하던 마수조차.
뻐어엉!
주먹 한 방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저 멀리로 날아간다.
마수의 거대한 몸을 피하지 못하고 그 아래에 깔려 버린 악마들이 괴성을 내지르는 게 들렸다.
나는 방금 코끼리 마수를 저 멀리 날려 버린 내 주먹을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하도 오랫동안 강제로 너프를 먹은 상태로 살고 있어서 그런지, 적들이 무슨 종이로 된 슬라임처럼 휙휙 쓰러지고 있으니 영 어색한 느낌이었다.
“한눈팔지 마!”
그때 호통 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향해 소리친 묘지기 녀석이 검을 휘둘러 주위로 몰리는 마수들을 베어 내고 있었다.
끼이이이익!
콰쾅!
묘지기 녀석이 용케도 아직 부서지지 않고 남아 있던 광역 버스를 발로 차 악마들을 뭉개 버렸다.
화르륵!
아직 기름이 남아 있었던 건지 고맙게도 버스 차체가 폭발하며 주위의 악마들을 집어삼켰다.
급이 낮은 마수들이 폭발에 휘말려 울부짖었다.
휘익!
그리고, 하늘마저 온통 뒤덮어 버린 수없이 많은 악마들 사이를 강렬한 흰색의 광휘가 가로질렀다.
악마들은 속절없이 그대로 반으로 썰려 나갔다.
이게 게임의 한 장면이었다면 아마 망겜으로 불렸을 것이다.
파워 밸런스를 못 맞췄다는 이유로.
그런 무시무시한 광경을 몇 번이고 재현하며 묘지기가 무심하게 일갈했다.
“물론 별것도 아닌 것들이긴 하지만.”
나 또한 긴장감 하나 없이 악마들을 처치하고 있었지만 저쪽은 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쪽은 레벨 100으로 시스템상 만렙.
내게도 쉬운 적들이니 저 녀석에게는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는 녀석들일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가 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러게.”
나는 시스템창을 힐끗, 눈짓했다.
- 현재 필드, ‘서울’이 침입을 받고 있습니다.
- 침입자의 과반수 이상을 처치하여 필드, ‘서울’을 수호하십시오.
- 제한 시간 27:02:17
- 침입자 처치 수 3,819 / 50,001
악마들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침입자의 과반수 이상을 처치해야 우리의 승리인데, 현재 시스템상으로 나타난 처치해야 할 숫자는 50,001.
즉, 릴리스의 지휘 아래 현재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상경한 악마의 숫자는 십만이라는 이야기였다.
각오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까마득한 숫자였다.
“뭐, 그나마 십만으로 끊은 것도 시스템이 나름대로 밸런스를 맞춘 결과라고 봐야지.”
그 와중에 묘지기 녀석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저 녀석 말대로라면, 이렇게 밸런스 조정이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십만도 넘는 숫자의 악마가 서울에 쳐들어왔을 거란 이야기다.
용사를 향한 릴리스의 악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밸런스를 맞춰서 십만이라, 이거지.”
우리가 약 3시간 동안 처치한 악마의 숫자는 3819마리.
한 시간당 약 1200마리를 처치한 것이니 검사 둘이 붙은 것치고는 제법 놀라운 성과다만, 남은 27시간 내 오만이라는 숫자를 채우기에는 아무래도 화력이 부족했다.
이 스퍼트를 유지한다고 쳐도 기껏해야 삼만 조금 넘게 처치할 수 있으려나.
게다가 인간인 이상 갈수록 체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고.
역시, 여러모로 우리에게 승산이 높은 싸움은 아니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날개를 가진 악마들이 뿜어내는 마기로 검게 물든 지 오래였다.
빛이라고는 보이지 않았고, 불길한 붉은빛을 띤 몸체를 가진 짐승들이 새의 날개를 가지고 끽끽대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지상도 상황은 같았다.
폐허가 된 건물 위로 바퀴벌레처럼 검고 매끄러운 등딱지를 가진 마물들이 몰려들어 세상을 뒤덮고 있었고, 커다란 덩치를 가진 마수들은 거침없이 전진하며 그런 벌레들을 짓밟았다.
그리고 동족을 짓밟은 자리에 또다시 새로운 악마들이 몰려들었다.
그야말로 악마와 마수로 이루어진 파도라고밖에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쉬운 싸움이라곤 없었다만, 이렇게까지 끔찍한 풍경은 또 처음이다.
“망할 놈의 악마 새끼들.”
물론 저 악마 녀석들 하나하나를 따지자면 결코 강하지 않다. 아무리 방심하더라도 도저히 질 수가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이렇게 숫자로 압도해 버린다면 물리적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나와 묘지기 녀석은 몇 시간의 전투 끝에 현재 광화문 근처까지 떠밀려 온 상태였다.
끝도 없이 우리를 향해 전진해 오는 악마 녀석들 때문에 뒤로 몰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한국 헌터들과는 멀어졌다는 건데.’
뭐, 그쪽에도 이우연이나 양태원, 이선이 있는 만큼 쓸데없는 걱정일지도 모른다. 겨우 이 정도 레벨의 악마들에게 당할 인물들은 아니니까.
게다가 악마들이 나와 묘지기만을 노리고 있는 만큼, 한국 헌터들이 조심하기만 한다면 굳이 어그로를 끌 일도 없을 테고.
물론 정말로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다면, ‘푸른 인연의 귀걸이’든 조한율과의 채팅창이든 켜서 물어보면 될 일이긴 하다만…….
‘그럴 틈이 없네.’
얼굴에 또다시 새로운 피가 튀었다.
베어도 베어도 도저히 끝이 나지 않는다.
손에 감각이 없어질 만큼 베고, 팔에 들러붙어 오는 악의를 떨쳐 내며 팔을 휘둘렀다.
주먹에는 끈적이는 피가 엉겨 붙고, 앙겔루스의 가호를 받은 갑옷조차 정화시키지 못한 독기가 침입해 피부를 푸르게 물들이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여전히 검을 휘둘러 덮쳐 오는 적들을 차근차근 베어나갔다.
그럼에도 시스템에 새겨진 숫자는 끔찍할 정도로 느리게 올라갔다.
지난한 싸움이었다.
- 침입자 처치 수 4,019 / 50,001
폭탄 및 기물을 활용하거나 높은 건물을 일부러 붕괴시키는 등 나름대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지만, 좀처럼 숫자가 늘어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나와 저 녀석이 강하더라도 검을 휘두르는 검사인 이상, 화력의 부족은 어떻게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본래 쭉쭉 뻗어 있던 8차선 도로 위는 달리는 자동차나 걸어 다니는 통행인이 아닌, 온통 악마들로 뒤덮여 있었다.
휙!
독을 가진 전갈이 꼬리를 치켜들고 달려드는 것을 손으로 잡아채 바닥에 내려치고, 다리를 타고 오르려는 벌레들을 떨구어 으깼다.
커다란 다리를 불안하게 움직이며 내 머리 위를 그대로 덮치려 든 마수를 향해 검기를 날려 목을 따고, 못이 거꾸로 박힌 몽둥이를 후려치려 드는 거인의 공격을 피해 머리를 베었다.
각종 마기며 독, 체액이 콘크리트를 부식시키는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렇게 또다시 제자리에서 버티며 감각도 없이 검을 휘두르기를 얼마일까.
문득 묘지기 녀석이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는 것을 보니, 체력이 떨어지긴 한 모양이다.
“그러게, 내가 기회 줄 때 도망치면 됐잖아. 왜 플레이어명까지 바꿔 가며 고생이야?”
그래도 저 말은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어서 나는 짜증 난 채 외쳤다.
“어디서 쿨한 척이야? 그냥 고맙다고 해!”
“하나도 안 고맙거든?! 그냥 죽는 게 둘이 됐을 뿐이잖아!”
“왜 둘이야?”
나는 검을 휘두르는 동시에 내 팔을 노리고 날아온 흡혈 박쥐의 머리통을 으깨며 소리쳤다.
“시스템상으로는 너랑 나랑 동일 인물이니까 둘이 아니라 하나로 카운트되는 거 아냐?”
셈은 똑바로 해야 할 것 아닌가.
내 말에 기가 찬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래서 내 말이 틀렸어? 내 말이 맞지? 지금 우리는 하나잖아?”
“아, 그래. 너 잘났다!”
뻐어어억!
어쩐지 감정이 실린 펀치가 날아가 외눈박이 거인의 몸을 저 뒤로 날려 버리는 것이 보였다.
저 주먹을 날리고 싶은 상대가 아무래도 나였던 것 같은데…… 약간 등골이 서늘해지네.
……뭐, 나라고 저 녀석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는 건 아니다.
나는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하늘을 뒤덮어 빛을 가려 버린 날개 돋은 짐승들 사이로 검을 내질렀다.
콰직!
후두둑!
검에 맞은 마수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하며 땅으로 떨어졌으나, 그럼에도 그 자리는 다시 다른 악마들로 채워졌다.
여전히 빛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쾅!
전갈들의 등짝을 부술 정도로 강렬한 바람을 발에 휘감은 채 나는 한 번 더 발을 굴렀다.
콘크리트가 패여 나가고, 벌레들이 으깨지는 끔찍한 소리가 피부로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이게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누군가는 바보 같다며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르고, 쓸데없는 짓이라며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역시…….
“어?”
그때였다.
악마에게서 못이 거꾸로 박힌 거대한 몽둥이를 빼앗아 신나게 휘두르던 묘지기 녀석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너야말로 한눈팔지 말라고!”
“그게 아니라…… 이상한 게…….”
몰려드는 악마들 때문에 한마디 한 후 무시하려고 했지만 영 멍청해 보이는 것이 예삿일은 아니다, 싶어 나는 묘지기가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그리고, 나도 저 녀석처럼 얼빠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한 치의 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하늘 아래.
무언가 눈부신 빛이 접근하고 있었다.
부르르릉!
그것도, 아주 요란한 배기음과 함께.
“……자동차?”
그랬다.
헤드라이트를 켠 차량들이 줄지어 속속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나는 경악했다.
이 서울에서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녀석들의 정체는 너무도 뻔했다.
“아니, 저 녀석들이 여긴 왜 와?!”
* * *
그렇게 한달음에 달려갔더니, 내 질문에 돌아온 대답이 아주 가관이었다.
“누나가 여기에 있으니까요!”
그렇게 대답한 양태원은 무슨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해맑은 표정이었다.
그 몸을 휘감은 거대한 모습의 청룡은 양태원과는 반대로 질책하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겹쳐지는 기억에 말문이 턱, 막혔다.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어서였다.
“…….”
그러나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내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유란 말인가.
나와는 경우가 완전히 다르다.
“아니, 그래도 너희들은 안전한 곳에 있었어야…….”
나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양태원 등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이우연과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눈길이었다.
“…….”
솔직히 눈이 마주친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차라리 릴리스랑 한 번 더 싸우고 말지,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다가는 그대로 얼려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
“예나 씨. 아니, 강예나 헌터!”
그때 내게는 다행히도, 차량 안에서 이선이 불꽃같은 기세로 뛰쳐나왔다.
나는 잠시 공개적으로 외쳐진 내 이름에 깜짝 놀랐지만, 생각해 보니 이제 굳이 내 본명을 숨길 필요는 없어졌다.
시스템상 랭킹에 새겨진 ‘방랑하는 구도자’라는 이름이 강예나로 바뀌었을 테니.
“말도 없이 이탈하다니,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그리고 이선 헌터의 목소리도 이우연만큼은 아니었지만 제법 매서웠다. 어딜 봐도 나를 책망하는 어투였다.
아니, 그야 한국 헌터들을 지휘하는 이선 입장에서는, 내가 말도 없이 레이드 중 팀을 이탈한 셈이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
문득 억울해졌다.
“그러는 이선 헌터야말로, 왜 여기에 온 겁니까?”
어쨌든 내 입장에서는 한국 헌터들을 배려한 셈이었다.
이건 강예나의 싸움이고, 오롯이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그렇기에 따로 떨어져 관계없는 남들을 말려들지 않게 한 것이고.
물론 감사받자고 한 일이야 아니다만, 이렇게 비난을 받을 일도 아니지 않나?
아니, 사실 비난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지금 문제는 한국 헌터들이 이곳에 오면서 위험에 처했다는 것이었다.
쾅!
마법사들이 창백한 낯으로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실드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곧 악마들의 공격으로 깨질 것이 분명했다.
현재의 나나 묘지기의 검 앞에서는 종이 슬라임이라지만 한국 헌터들이 상대라면 사정이 다르다. 아무리 등급은 낮다고 해도 숫자가 압도적인 만큼 평균 레벨 20대 플레이어들에게는 아직 벅찬 적이었다.
“그냥 남은 시간 동안 숨어만 있어도 클리어 가능한 상황인데 대체 왜 이런 판단을…….”
“어허, 또 짐짝 발언 시즌 2야?”
앞으로 나선 류세연이 나를 향해 다소 위협적으로 완드를 흔들고 있었다.
“내가 첫 단추 잘 끼우라고 했지. 근데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난 짐짝 아니거든?”
“짐짝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
“왜 여기에 왔냐니. 이상한 질문이로군.”
부드러운 목소리로 끼어든 것은 김숙자 교수였다.
여전히 파리한 안색이었지만, 그래도 완드를 잡는 손에는 힘이 돌아온 것이 보였다.
“그야 당연히 함께 이 던전을 클리어하러 온 거지. 왜, 혼자 공로를 차지할 셈이었나?”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뭐가 아니야?”
이제껏 팔짱을 끼고 무섭게 침묵하고 있던 이우연이 불퉁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당신한테 베팅한 건 맞는데, 그렇다고 혼자 모든 걸 떠맡으라는 소리는 아니었어.”
뭐라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이우연이 검을 들고는 내 옆으로 와서 섰다.
내 얼굴 상처를 발견했기 때문인지 뼛속까지 얼릴 것 같은 시선은 약간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냉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니까, 같이 싸우게 해 줘.”
그럼에도 그 검 끝은 도시를 가득 메운 악마들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이우연뿐만이 아니었다.
“커흠, 몬스터 놈들이 감히 세종대왕님 동상을 쓰러트리다니.”
이 풍경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신 헛기침을 해 대며 못마땅한 눈초리를 향하는 김성연 길드장의 검조차 내가 아닌 악마들을 향해 있었으며.
“…….”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어 하는 듯한 표정이지만,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백사현.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한쪽 눈을 윙크해 보이는 김하현을 비롯해, 이 던전에 들어와 있는 모든 한국 소속 헌터들이 악마를 향해 각자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이게, 대체…….”
혼란스러운 와중에 문득, 미리 띄워 놓은 침입자 처치 수를 카운트하는 메시지를 발견했다.
- 침입자 처치 수 6819 / 50,001
- 제한 시간 25:08:12
본래대로라면 기껏해야 4000 후반대에서 머물러 있어야 할 숫자가, 어느샌가 말도 안 되게 큰 폭으로 뛰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한국 헌터들이 여기로 향하면서 악마를 처치한 숫자까지 카운트된 건가?
하지만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한국 헌터들은 저쪽 강예나 입장에선 여전히 ‘침입자’라는 포지션이니, 그들이 악마를 처치한다고 해도 카운트 되지 않아야 정상이니까.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조한율 : 여기 좀 보시라고요!
시야 한구석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메시지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조한율?”
조한율 : 아, 다행이다. 드디어 봤다! 지금 카운팅 올라간 거 보이시죠?
조한율 : 본래대로라면 우리 한국 헌터들이 처치한 숫자는 강예나 씨 카운팅에 포함되지 않는 게 맞지만, 제가 머리를 좀 썼어요.
조한율 :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강예나 씨가 쓴 편법을 재탕한 거지만.
“뭐?”
조한율 : 결국 우리는 같은 한국 소속 헌터들이니까요. 예나 씨의 존재처럼 그쪽 시스템이 잠시 ‘소속’을 착각하도록 만들면 되는 거죠.
시스템창으로 가로막혀 보이지 않는 화면 저편에서, 운영자가 미소하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조한율 : 어디 한번, 용사와 함께 악마에게서 대한민국을 지켜보자고요.
* * *
그리고 그 시각.
‘강예나’는, 한국으로 돌아온 후 처음으로 본 메시지에 넋을 놓고야 말았다.
- 플레이어, ‘강예나’의 클리어 조건을 표시합니다.
- 현재 필드, ‘서울’이 침입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언제나와 같았다.
다만, 추가된 한 줄의 메시지.
그 문장이 이제껏 묵묵히 홀로 싸워 왔던 용사의 시야에 파고들었다.
- 대한민국 서버에 소속된 다른 플레이어들과 협력하여 필드, ‘서울’을 수호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