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13화
“흐아아압!”
김성연 길드장이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검을 쥐고 악마들 속으로 질풍처럼 달려 나갔다.
“죽을힘을 다해서 달라붙어!”
“뒤처지지 마라!”
그리고 그 뒤로 역시 검을 쥔 검사 플레이어들이 따라붙었다.
김성연을 위주로 한 포메이션이 익숙해 보이는 것이, 평소에도 자주 연습한 형태로 보였다.
키에에에엑!
달려 나가는 헌터들을 발견한 악마들이 새로운 먹이를 향해 일제히 달라붙었다.
콰직!
하지만, 그들도 괜히 한국 헌터들 중에 상위 랭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악마들이 휘둘러진 검에 사정없이 베여 나갔다.
그리고 개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김성연이었다.
늘씬한 검신을 자랑하는 롱소드가 휘둘러지는 자리마다, 마물들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죽어 나갔다.
히이이잉!
그런 김성연을 향해 거대한 흑마가 달려왔다.
어지간한 성인이라면 그대로 밟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크기에, 무엇보다도 시퍼런 불꽃을 갈기처럼 두른 기괴한 모양의 흑마였다.
그 기세에 주눅이 들 만도 했는데 김성연은 침착하게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흑마를 향해 몸을 날렸다.
휙!
말발굽을 피해 몸을 숙인 김성연의 검이 흑마의 다리를 베었다.
인간들을 짓밟으려던 흑마의 관절이 강대한 검기에 단번에 부러졌다.
털썩!
흑마의 몸이 그대로 허무하게 쓰러졌으나.
화르르륵!
다만, 불꽃으로 된 갈기가 주변으로 퍼져 나가며 빠르게 불이 붙었다.
마기로 가득한 불꽃이 사람의 살을 녹일 것 같은 악의를 가지고 혀를 날름거리며, 순식간에 한국 헌터들이 유지하고 있는 실드까지 번졌다.
“다들 집중하게! 실드가 무너지면 안 돼!”
그때 김숙자 교수가 목소리를 크게 높여 후방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마법사들을 격려하는 것이 들렸다. 실드 너머로 느껴지는 화기 때문인지 완드를 꽉 쥔 콧잔등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악마들의 숫자가 상식을 초월하게 많은 만큼, 실드를 유지하는 인원은 최소한으로 둘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력 제어력이 좋아 최소한의 마력으로도 최대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는 김숙자 교수가 그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덕분에 계속되는 악마들의 공격에도 실드는 아직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악마의 화염이 계속해서 실드 주변으로 번져 나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 뭐 하는 거야!”
공격 마법으로 전방에 나선 검사들을 지원하고 있던 류세연이 가장 먼저 그 난리를 깨달았다.
깨달은 다음에 취한 행동은 빨랐다.
완드를 잡고 제 주위에 날카로운 얼음 화살을 수십 개 형성해, 그 주위로 무자비하게 쏘아 댄 것이다.
콰콰쾅!
화염에 얼음 화살이 적중했지만, 악마의 불꽃은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꺼지지 않았다.
“저거 왜 안 꺼져?!”
류세연의 강대한 마력 덕분에 잠시 사그라지는 듯했지만, 시퍼런 화염은 곧 다시 기세를 올려 타오르려고 했다.
김숙자가 이를 악물었을 때였다.
“1조! 지금 2시 방향, 수계 마법!”
다행히도, 그 소동을 알아챈 이선이 나섰다.
이선 헌터의 지시에 따라 전방을 향해 공격 마법을 구사하고 있던 1조에 소속된 마법사들은, 화염이 막 엉겨 붙으려던 위치에 일제히 수계 마법을 퍼부었다.
퍼퍼퍼펑!
순식간에 그 자리에는 까맣게 탄 자국이 남은 땅과, 같은 악마의 화염을 피하지 못하고 타죽은 악마들의 시체만이 남았다.
“교수님!”
김숙자 교수는 당장 자신을 향해 달려오려던 이선에게 손을 내저어 보였다.
전투 중 잠시 일어난 해프닝일 뿐이다.
“난 괜찮으니 공격에 집중하게!”
어찌 되었든 앞으로도 스무 시간 남짓을 버텨야 이기는 게임이다.
무엇보다도 페이스 분배가 중요했다.
‘이번엔 유독 덩치가 큰 몬스터가 많군.’
김숙자 교수는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썼다.
아직까지는 기껏해야 A급 몬스터들만 나타나고 있어서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그 이상 가는 등급의 몬스터들이 출현한다면 여러모로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몸이 버텨야 할 텐데.’
자신도, 다른 헌터들도.
한편, 그렇게 정석적인 전투를 반복하고 있는 한국 헌터들이 있는가 하면.
그오오오오오!
악마들의 기운으로 검게 가려져 있던 하늘을 청룡이 가로질렀다. 청룡의 거대한 몸이 지나치는 자리마다 강한 빛에 닿은 그림자처럼 악마들이 소멸해 가고 있었다.
그 덕분에 빛 한 점 비치지 않던 광화문의 하늘은 순식간에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청룡이 지나간 하늘 아래에서는, 양태원이 청동검을 든 팔을 힘차게 횡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하아아압!”
솔직히 검을 다루는 모양새는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다만, 그 서투르기 짝이 없는 검로에 서린 오색 창연한 기운이 거대한 악마들에게 닿은 순간.
크아아아악!
주변에 존재하고 있던 수백 마리의 악마들이 갖은 비명을 지르며 인세에서 재처럼 화하며 사라졌다.
그야말로 압도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위력이었다.
검을 휘두르거나 마법을 사용해 착실하게 한 마리 한 마리를 처치해 나가고 있는 다른 한국 헌터들에 비하면 더더욱.
본래 무당 클래스이니만큼 악마를 상대할 때 유리한 데다, 심지어 지금은 그 무당의 손에 ‘청동검’마저 들려 있는 상태.
그야말로 무당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전장에서 양태원이 활약하지 못하는 쪽이 이상할 것이다.
미친 것 같은 청동검의 위력 때문인지 양태원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와, 이거 진짜 개사기템인데?! 신력 소모가 엄청 적어! 그런데 원래 이런 신급 무구는 한 번 사용할 때마다 MP 소모량이 극심해야 밸런스가 맞는 거 아닌가? 오히려 부적보다도 소모되는 기운이 적은 느낌인데. 이런 게 게임에 있으면 당장에 GM이 하향 패치 먹일 것 같아.”
“웃기고 있네.”
어쩔 수 없이 양태원의 호위 역할로 붙은 이우연은, 검을 휘둘러 몬스터들의 대가리를 날리는 한편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거든? 그런 무기를 손에 넣었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절을 해야지. GM도 그럴 거다.”
조한율 : 맞말추
이 와중에 한가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래, 본인은 어차피 밖에서 지켜만 보면서 꿀 빤다, 그거지.’
아마 조한율이 듣는다면 억울해서 팔짝 뛸 것 같은 생각을 하며, 이우연은 양태원에게 잔소리나 하기로 했다.
“그리고 양태원 너. 내가 예전부터 체력 키우라고 했지. 벌써 숨이 넘어가는데 앞으로 열 몇 시간을 어떻게 버틸 거야?”
화풀이가 반 정도 섞이기는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국 헌터들이 광화문에 진입한 지는 이미 5시간째.
현재까지의 성과는 나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악마들의 우악스러움과 유래 없는 난전에 당황해 부상자가 나오기도 했지만, 김숙자 교수가 중심을 잡고 이선이 지시를 내리면서 현재로서는 상당히 안정된 상태로 악마를 공략해 나가고 있었다.
아마 눈치를 보아하니 대부분의 헌터가 레벨 2,3업 정도는 한 듯했다.
“야, 나 벌써 5업 했다!”
저렇게 투명하게 외치는 류세연을 포함해서.
어쩐지 신나게 마력을 펑펑 써 대더라니.
어쨌든 레벨 20대 헌터들이 B급 던전 두, 세 번은 돌아야 겨우 1업 정도를 한다는 것에 비추어 보면, 겨우 몇 시간 만에 전체적으로 레벨을 올린 것은 상당한 성과였다.
던전이 클리어될 즈음이면 다들 레벨 30대 초반에 진입하는 것도 꿈은 아닐지도 몰랐다.
다만 문제라면, 던전이 완전히 클리어될 때까지는 앞으로도 대략 22시간이 남은 상태라는 것.
그러니까 거의 하루가 꼬박 남은 셈이다.
그런데 양태원은 이미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매일 밤새서 게임이나 하니까 그렇지.”
양태원이 이우연의 잔소리에 입을 삐죽댔다.
“아, 게임 많이 안 했어. 그리고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내가 무당 클래스인 걸 어떡하냐고. 근육이 안 붙는다니까! 게다가 지금 내가 제일 활약하고 있잖아!”
“그거야말로 웃기지 마.”
그렇게 말하며 이우연이 전장 한편을 가리켰다.
“저쪽이 있는데 네가 제일 활약은 무슨. 100년은 이르다.”
양태원의 고개가 자동으로 돌아갔다.
시선을 돌린 그곳에서는…….
쿠콰콰쾅!
귀를 찢을 것 같은 폭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떻게 검으로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저런 소리가 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하게도, 이우연이 가리킨 것은 강예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강예나‘들’이었다.
강예나가 싸우는 장면쯤이야 이미 몇 번이나 본 광경인데도, 양태원의 입에서 감탄이 새어 나왔다.
“우와…….”
두 사람의 강예나가 빛나는 검을 들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마치 배가 지나간 자리에 흰 물거품이 생기듯, 악마들이 그대로 죽어 나가고 있었다.
물론 악마들을 해치운 절대적인 숫자로 따지자면 청동검을 지니고 있는 양태원이나 광역기가 있는 마법사 쪽이 더 위겠지만, 그건 그냥 클래스 특성의 문제였다.
당장 눈에 보이는 위력은 단순 비교도 못 할 정도였다.
도대체 저 두 사람이 얼마나 강한 건지, 도저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하압!”
두 여자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격해 오는 악마들을 향해 마주 달려 나갔다.
퍽!
검이 휘둘러지는 자리마다 악마들의 목이 날아가며 피를 흩뿌리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둘 다 제 몸을 아끼지 않고 적의 약점만 보이면 무조건 파고드는 것이 정말이지, 똑 닮아 있었다.
“조심해!”
막 거대한 코끼리 마수의 발을 다 베어 내지 못해 짓밟힐 뻔한 한 플레이어를 구해 내며, 단발을 한 강예나가 검을 휘둘렀다.
콰직!
단 일검.
강건해 보이던 마수의 몸이 단번에 쓰러졌다.
하마터면 죽을 뻔한 헌터가 얼떨떨한 눈으로 갑자기 튀어나온 강예나를 바라보았다.
“가,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감사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단발의 강예나는 또 다른 몬스터를 상대하러 이미 자리를 떠난 상태였다.
갑자기 목숨의 은인이 되어 버린 강예나의 등을 바라보며, 구명을 받은 헌터는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아니, 근데 왜 구해 준 거지……?”
하기야 헌터들이 처음 이 던전에 진입했을 때 떠오른 클리어 조건이 ‘강예나를 처치하라’는 것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기묘한 변화이기는 했다.
당장 몇 시간 전만 해도 강예나를 처치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한국 헌터들 입장에서야, 보스 강예나가 그들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굳이 싸울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클리어 조건이 생존으로 갱신되기도 했고.
심지어 보스 강예나가 위험할 때마다 시기적절하게 나타나 도움을 주기까지 하니, 한국 헌터들 입장에서야 때 아닌 횡재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한국 헌터들을 제 목숨을 깎아 가며 돕는 저쪽 강예나 속이 막상 어떨지는…….
‘……물러 터져서는.’
이우연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더 깊게 생각해 봤자 자신의 입장에서 뭘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으니, 속만 쓰릴 것 같아서였다.
그 와중에 강예나의 전투에 감명을 받은 양태원이 속도 없이 불퉁하게 말했다.
“아니, 물론 이번 전투에서 MVP를 꼽자면 예나 누나긴 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그래, 그걸 알면서 왜 네가 자랑스러워해? 네가 지금 그럴 때야? 너 뭐 돼?”
“아, 왜 또 갈구는데! 그러니까 누나한테 삐진 거 있으면 나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누나한테 직접 말을…… 아야!”
양태원은 결국 그 와중에 이우연에게 한 대 쥐어박히는 기염을 토했다.
조한율 : 맞말추222
그 와중에 쥐어박을 수도 없는 밉살맞은 GM은 덤이었다.
* * *
악마들과 전투를 계속하는 한편으로, 나는 조한율에게 상황 설명을 듣고 있었다.
궁금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기에 한국 헌터들이 그냥 안전한 곳에서 버티는 대신 레이드를 뛰기로 결정하게 된 건지.
조한율 : 아니, 저도 사실 처음에는 반대했거든요? 그냥 버티다 클리어하고 나오라고~ 그게 무슨 생고생이냐고~
다만 이렇게까지 길게 조한율의 신세 한탄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조한율 : 근데 갑자기 거기서 이우연이 급발진을 하지 뭐예요! 한국 헌터들더러 언제까지 짐짝으로 있을 거냐면서!
그러다가 이제야 조금 쓸모 있는 정보가 나왔다.
그러니까…… 즉, 이우연이 모두를 선동했다는 뜻인데…….
“미친놈인가?”
한국 헌터들에게 짐짝이라는 발언을 했다고?
나는 흘깃, 전장 저 한구석에 떨어져 양태원과 붙어 있는 그 미친놈을 건너다보았다.
문득 눈이 마주쳤지만 이우연이 팩, 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
멀리서 보아도 흰 뺨이 불퉁하게 튀어나와 있는 게, 평소처럼 눈만 마주쳐도 히죽대는 상태는 아니었다.
날 도와주겠답시고 대형 어그로까지 끈 녀석인데 말이다.
딱 보기에도 나한테 뭔가 기분이 상한 일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퍽!
그게 뭔지 물어볼 상황이 아니라 문제지.
주먹질에 나가떨어진 전갈 대가리를 발로 마저 으깨며, 나는 조한율의 메시지를 흘깃 올려다보았다.
조한율 : 그런데 사실 그게 또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실력에 답답함을 느끼고 나아가려고 하면, 저는 그걸 서포트해 주는 게 맞는 거니까.
조한율 : 플레이어들이 렙업을 한다는데 운영자로서 그걸 방해할 수는 없잖아요. 여기서 방해한다면 그거야말로 월권이죠.
“……뭐, 레이드야 그렇다 치고. 그래도 이렇게까지 개입하면 위험한 거 아냐?”
이우연을 비롯해 레이드를 뛰러 온 한국 헌터들이야…… 어쨌든 레벨 업이 필요한 상태인 건 맞으니 아주 납득 못 할 것까지는 없었다.
그런 한국 헌터들을 대하는 조한율의 태도도 이해되었고.
하지만 조한율이 나를 위해 한 일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그래도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혼란을 주는 건 다른 문제였을 텐데.”
물론 조한율이 첫 만남 때와는 달리 내게 꽤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설마 시스템에 개입하면서까지 도와줄 줄이야.
이건 정말로 오로지, ‘강예나’를 위한 개입이었다.
- 침입자 처치 수 12,013 / 50,001
- 제한 시간 19:47:12
현재 광화문에 한국 헌터들이 진입한 지 5시간 정도가 흘러가고 있었다.
이미 악마를 처치한 숫자는 12000마리를 넘어서고 있었다.
순조롭다 못해 앞으로 남은 시간을 생각해 보면 여유로울 정도의 공략 페이스였다. 이대로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이 몇 시간 후면 클리어 조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 마몬은커녕 릴리스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보스 몬스터 처치가 아니라 침입자 처치 수를 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 조한율 덕에 훨씬 유리해진 것은 확실했다.
“이렇게까지 해 주는 이유가 뭐야?”
심지어 조한율은 운명의 씨앗 1회 차 던전에서 날 돕다가, 타르토스 운영자에게 호되게 당하기까지 했었다.
이번 던전도 사실상 그때 일어난 사고의 연장선이고.
그러니 이번 던전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체 왜…….
조한율 :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제가 왜 이러나 모르겠어요. 이번에는 그냥 모르는 척할까, 싶기도 했는데…….
꾸밈 따위는 없는 날것 그대로의 솔직한 말.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진심이 느껴졌다.
조한율 : 그래도…… 저쪽 예나 씨가 인연은커녕 안면도 없는 우리 한국 헌터들을 도와주려고 했다는 걸 알았는데, 여기서 저만 입을 싹 닦을 수는 없잖아요.
조한율 : 저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한 성격이거든요.
그 메시지가 떠오른 순간.
내 옆에서 검을 휘둘러 검기를 날려 보내던 묘지기가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하다니. 저거 웃긴 놈이네.”
그 내용도, 웃음도,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명백했다.
조한율이 혼란스러워하는 메시지를 띄웠다.
조한율 : 어?! 저쪽 예나 씨한테 제 메시지가 보이나요?!
조한율 : 도대체 왜?!
“그래, 아까부터 보여.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고.”
묘지기가 무심한 어조로 대꾸했다.
언젠가부터 묘지기의 시선이 내가 보는 메시지를 따라오기에, 그 점을 알고 있었던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추측하기로는…… 시스템이 우리를 같은 존재로 혼동하고 있기에, 현재 묘지기에게도 조한율의 메시지가 보이는 오류가 생긴 것이 아닐까.
“이런 건 편리하네. 무슨 단톡방 같고.”
묘지기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메시지 너머, 조한율에게 말을 걸었다.
“운영자라고 했지? 그럼 내가 보는 시스템 메시지도 그쪽한테 보이나?”
조한율 : 어? 네. 그런데 무슨 시스템 메시지를 말씀하시는 건지……?
눈치 없긴.
저 녀석이 뜻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뻔하지 않은가.
- 대한민국 서버에 소속된 다른 플레이어들과 협력하여 필드, ‘서울’을 수호하십시오.
이쪽 시스템이 한국 헌터들의 소속을 ‘착각’하는 순간, 묘지기가 보는 메시지에도 변화가 생겼다.
묘지기가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 메시지.
누군가와 함께 협력하여 무언가를 지키라는 클리어 조건.
“고맙다.”
묘지기가 산들바람처럼 가벼운 어조로, 그러나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누군가와 함께 싸운다는 게 어떤 거였는지…… 오랜만에 떠올리게 해 줘서.”
그 말에 눈앞의 몬스터나 베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던 나는 문득 묘지기를 돌아보았다.
그 녀석은 어쩐지 홀가분하게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야, 아직 아무것도 안 끝났어. 고맙다는 말은 너무…….”
이르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손쓸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퍼어어억!
그건 악몽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땅에 쓰러져 있던 거대한 코끼리 형태를 한 마수의 시체가 갑자기 폭발하듯 위로 솟구쳤다.
그걸 보는 순간 어라,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유독 저렇게 몸집이 큰 마수가 많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무슨……!”
마수의 살가죽과 내장을 뒤집어쓴 채 무언가가 시체의 가죽을 뚫고 등장했다.
그야말로 악귀, 그 자체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이……!”
이제껏 마수의 시체 안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악마.
아름답게 물결치던 아마 빛의 머리칼은 피에 젖어 검게 보였고, 개암빛의 눈동자는 악의에 물든 채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입가까지 찢어지게 보이는 미소가 유독 희었다.
귓가에 파고드는 목소리는 악몽처럼 달콤했다.
“안녕, 자기. 보고 싶었어.”
그리고 한발 늦게 뜬 시스템 메시지.
- 보스 몬스터와 조우하였습니다.
- SSS급 몬스터 : 욕망하는 화염
그 글씨를 인식하는 순간.
푹!
악마의 손톱이 심장을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