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16화
“마음의 준비가 되면 말해. 실드 해제할게.”
검을 세운 채 이우연이 말했다.
희뿌연 실드 밖으로, 악마들이 이빨을 드러낸 채 우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검자루를 꽉 쥐었다.
양태원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누나는 이대로 보스 몹을 잡으러 갈 거예요?”
“그래.”
클리어 조건 자체는 몬스터 처치 숫자를 채우는 것이라 굳이 릴리스를 처리하지 않아도 된다지만, 문제는 릴리스의 존재 그 자체였다.
인간과 악마 간 싸움에서 그나마 인간에게 유리한 점이 있다면…… 악마들 대부분이 스스로 생각조차 못 하는, 멍청하다는 점에 있다.
그렇지만 릴리스가 옆에 있으면 그 장점조차 사라진다.
지금 이우연이 친 실드 밖에서 실드가 해제될 때를 조용히 노리는 몬스터들의 눈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본래라면 제 힘도 가늠하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사냥감에만 집중해 실드에 몸을 부딪치다가 날파리처럼 죽어 나갔을 녀석들이, 지금은 어떻게 해야 나를 잡아 죽일 수 있을지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릴리스가 바로 옆에서 그들을 통솔하고 있기 때문이다.
“릴리스가 있는 한, 앞으로 19시간을 못 버틸 거야.”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그 시간 동안 내내 릴리스가 몬스터들을 통솔한다면 지금까지처럼 순조롭게 마물들을 처리하기는커녕, 한국 헌터들까지 죄다 전멸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우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동의해.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완전히 달라졌어. 다른 사람들이 걱정이로군.”
“그쪽도 SSS급 출현 메시지는 봤겠지. 일단 조심하라고 텔레파시 스킬로 전달해 줘.”
물론 조심해서 될 일도 아니다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할 것도 없이, SSS급 몬스터는 강하다.
타르토스에서는 세계를 멸망시킬 최후의 용이라고 불렸던 옵타티오가 SSS급이었다.
당시 타르토스 대륙에서 손꼽히게 강했던 나를 비롯해 아리아드네, 루카스, 일리아스…… 그리고 알리시아까지 5명의 인원으로 클리어를 해내기는 했지만, 그 당시 우리는 모두 레벨 80대였다.
게다가 5인의 조합이 환상적으로 좋기도 했고.
그에 비해 현재 한국 헌터들은 잘해 봐야 레벨 30대.
‘이우연 정도는 렙 40대에 진입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S급 몬스터 단독 공략도 아슬아슬할 판에 SSS급은 무슨, 본래대로라면 근처에는 접근도 말아야 할 수준이다.
‘역시, 최대한 빨리 승부를 내야 해.’
릴리스의 목표는 나나 묘지기겠지만, 성격상 한국 헌터들을 인질로 잡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번에는 또 얼마나 악마 같은 짓거리를 할지 모른다.
절로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짓을 벌이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죽여 없애야 한다.
“SSS급이라고는 하지만 릴리스…… 저 보스 몹과는 몇 번이나 붙어 봤어. 저 녀석이 내 약점을 아는 만큼, 나도 저 녀석의 약점을 알아.”
“헉, 그게 뭔데요?”
릴리스의 약점.
그건 당연히…….
“저 악마를 구성하는 핵이 몸 안 어딘가에 있어.”
릴리스의 몸을 인세에서 구성하고 있는 핵.
그것만 찾아 부수면 SSS급이든 뭐든 릴리스는 당장 이 세계에서 마계로 역소환될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정면으로 돌파하는 수밖에.
“그래서 당신과 저쪽 강예나가 그 핵을 찾아 부수겠다, 이거지.”
이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나는 최대한 서포트할게.”
“저, 저도요!”
양태원은 긴장한 기색으로 청동검을 들고 있었다.
나는 이우연에게 힐끗, 눈짓을 보냈다.
“알아서 상황 판단 잘해. 너희까지 신경 써 줄 틈은 없을 테니까.”
목숨이 위험하다 싶으면 알아서 애 데리고 빠져라, 라는 뜻이다.
그걸 알아듣지 못했을 리 없는 이우연의 눈가가 살짝 구겨졌지만, 곧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2위한테 바라는 것도 많지.”
“2위는 무슨. 너 지금 하는 거 보면 류세연한테 그 자리 넘겨줘야 해.”
나는 그렇게 말하며 실드 너머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하늘에 둥둥 떠올라 있는 류세연의 주위로 번개 같은 흰빛이 벼락을 치듯 번쩍이고 있었다.
콰콰쾅!
그리고 그 마력이 마법이 되어 땅에 내리쳐질 때마다 몬스터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거의 폭주에 가까운 공격이었다.
기세만 보면 이번 던전의 MVP는 역시 저쪽이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나도 질 수는 없지.”
명색이 대한민국 헌터 랭킹 1위인데 말이다.
게다가 내가 여기서 뒤처지면 류세연이 말한 ‘첫 단추’에 어울리지 않는 꼴이 될 테니.
땅바닥에 발을 구르자 부서져 금이 간 콘크리트에서 희뿌연 먼지가 일었다.
이쯤이면 마음의 준비는 충분했다.
“실드 해제해.”
그리고, 이우연이 마력을 거두었다.
이제껏 우리를 감싸고 있던 실드가 일시에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실드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악마들의 눈길이 일제히 나를 향해 몰려들었다.
새카만 눈길들이 악의와 살기를 가지고 한꺼번에 모여든 순간, 나는 앞으로 박차고 달려 나갔다.
그런 내 등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가 길을 뚫을게요!”
양태원의 손에서 청동검과 함께 푸른 기운이 줄기줄기 뻗쳐나갔다.
“하아아압!”
기세 좋은 기합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해일처럼 퍼져 나가는 신력에, 덮쳐들려던 수십여 마리의 악마들이 일제히 괴로워하는 비명을 질렀다.
양태원이 가진 힘은 악마와는 상극.
현재 이 전장에서 릴리스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A급 정도의 악마인 만큼, 저 기운에 항거할 수 있는 악마는 거의 없을 것이다.
쾅!
나는 발을 박차며 양태원이 뚫어 준 길을 나아갔다.
님페의 바람이 몸을 감싸 안았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땅이 푹푹 파이며 콘크리트 조각이 위로 튀었다.
그런 나를 노리고 숱한 악마들이 손길을 뻗쳐 왔다.
크어어어엉!
독이 오른 소리를 내지르며 거대한 염소 뿔을 가진, 사자처럼 생긴 마수가 달려들었다.
뒤에서 양태원이 청동검을 휘두르며 길을 뚫어 주고 있었지만, 숫자가 워낙에 많아 악마를 정화하는 속도보다 몰려드는 속도가 더 빨랐던 탓이다.
‘귀찮게……!’
나는 검을 휘둘렀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쿠콰콰쾅!
막 내가 검을 휘두르려던 자리에 정확하게 불꽃의 화살이 꽂혀 들며 몬스터와 도로를 한꺼번에 작살냈다.
매우 정확한 타격에 콘크리트 조각과 그 밑에 깔려 있던 갈색의 흙이 높게 솟구쳤다.
“그럴 필요 없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거대한 흰 날개를 펼친 이우연이 한 손에 마법을, 다른 한 손으로는 검을 쥐고 허공에 떠오른 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곧 따라갈게!”
그렇게 외친 후, 이우연이 쏜살같은 속도로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우르르 쾅!
등 뒤에서 마치 벼락이 내리쳐진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굳이 보지 않아도 악마들의 비명 소리만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뻔했다.
나는 이우연의 말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다시 한 발을 내디뎠다.
-에이펙스의 광검이 당신의 의지에 반응해 성검으로 진화합니다!
손에 들린 파트너가 몸을 떨며 울고 있었다.
아마도 이 녀석 또한 마지막으로 릴리스의 몸을 꿰뚫었을 때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등을 밀어 주었기에 겨우 닿을 수 있었던 지점.
그리고 이번에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릴리스를 향해 뻗어 나가는 발걸음에 망설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쾅!
마법이 터지고, 신력이 뻗어 나가 악마들을 정화하며 길을 트는 동안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로를 꽉 채운 악마들 사이에서 릴리스의 모습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한창 묘지기 녀석과 전투를 벌이는 것 같았는데 그 소음도 어느새 뚝 끊긴 채였다.
나는 내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네.’
악마들 사이에서 성검은 요동치듯 제 몸을 필사적으로 빛내고 있었다.
내 의지가 강렬한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양태원과 함께 나타난 청룡이 하늘에 뒤덮인 악마를 쓸어버리기 전까지, 이곳에서 빛이라곤 바로 성검 두 자루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또 다른 성검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건 즉…….
‘설마 그새 릴리스에게 당한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상상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릴리스가 SSS급이라지만 그 녀석도 만렙이니만큼 금방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나?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아직 시스템 메시지에 별다른 이변이 없으니 죽은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무언가 일이 벌어진 것만큼은 확실했다.
하여튼 빨리 릴리스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워낙에 악마들이 많아, 이우연과 양태원이 길을 뚫고 있어도 릴리스의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 지상으로 마법을 쏟아붓고 있는 이우연을 향해 외쳤다.
“위에서 뭐 보이는 거 없어?!”
“아무것도!”
콰콰쾅!
그 말과 함께 거대한 불꽃이 터지며 몬스터들을 잡아먹었다.
나는 자욱한 연기를 피해 뛰며 생각에 잠겼다.
‘하늘에서도 보이지 않는다면 환상 마법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설령 그렇다 한들 조금만 기다리면 내 앙겔루스의 가호가 릴리스의 환상 마법을 깨 주겠지만…….
- 앙겔루스의 가호가 당신의 의지에 힘입어 스스로 손상을 복구합니다.(현재 복구 진행도 : 30%)
아직도 복구 진행도가 30퍼센트에 불과했다.
언제까지고 앙겔루스의 가호가 복구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그럼 추측하는 수밖에.’
릴리스라면 과연 이 전장 어디에 있을까?
릴리스의 성격이라면 이미 지독하게 겪었다.
그 악마라면 자신 탓에 이 난장판이 된 광경을 아주 즐겁게 지켜보고 있을 테다.
그것도 아마, 아주 가까운 장소에서.
관조하며 즐기는 모습이야말로 악마의 본질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을 모욕할 수 있을 만한 장소를 선택했을 것이다.
‘……설마.’
그렇다면, 적어도 이 근방에서 짐작 가는 장소란 하나밖에 없었다.
더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둘 다 나를 따라와!”
나는 내 뒤를 따르며 분투하고 있는 이우연과 양태원에게 소리친 후 곧장 앞을 향해 뛰었다.
그와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우우웅!
검신이 마력을 잡아먹으며 기다란 도로를 단번에 가를 만큼 뻗어 나갔다.
나는 목표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검이 휘둘러진 곳은…….
파지직!
- 에이펙스의 성검이 악(惡) 속성 몬스터에게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합니다!
- 보스 몬스터의 마법, ‘현혹하는 환상’을 파훼하였습니다!
- 보스 몬스터에게 일정 타격을 주었습니다! 업적치 정산 시 가산됩니다.
“자기는 나를 너무 잘 안다니까.”
마법이 파훼된 순간, 시야를 가리고 있던 투명한 장막이 걷혔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릴리스를 발견했다.
그 녀석은, 모욕적이게도…….
“응, 왔어?”
악마는 광화문 처마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투명한 장막 뒤에 숨어 있던 릴리스의 풍성한 개암빛 머리칼이 바람에 하늘거리며 흩날리고 있었다.
어이가 없다.
“이 미친 악마 새끼가…… 당장 내려오지 못해?”
“왜, 무슨 역사적으로 뜻깊은 곳이라도 되는 걸까?”
그렇게 말하며 릴리스는 한가롭게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런 릴리스를 향해 곧장 검기를 쏘아 보내려고 했던 나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라…….’
환상 마법이 걷힌 후에야 깨달은 것.
기묘하게도, 이 넓은 도로를 꽉 채우고도 남을 숫자의 악마들이 광화문 부근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광화문 근처로, 반경 5미터 정도의 공간이 생겨나 있었다.
이 공간을 침범하고 있는 악마는 릴리스가 유일했다.
처마 끝에 다리를 꼬고 앉은 릴리스가 손톱에 묻은 살점을 툭, 하고 바닥에 내던지며 한가롭게 말했다.
“오래된 문지기가 이 문을 지키고 있더라구. 가까이 오면 온통 뿔로 받아 버리는 게, 보통 사나운 게 아냐.”
“해태는 정의를 수호하는 신수라고 알려져 있죠.”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악귀를 싫어할 수밖에.”
청동검을 든 양태원이, 어느샌가 내 옆에 서 있었다.
릴리스는 갑자기 나타난 양태원을 흘끗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아이네. 제법 귀여운데. 레나, 네 동생?”
“묻지 말고 뒈져.”
“흐응, 안 닮긴 했다. 그나저나 저건 뭐야? 굉장히 불쾌한 걸. 무슨 천사 같잖아. 레나, 네 장난감?”
그렇게 말하며 릴리스가 가리킨 것은, 하늘에서 막 땅으로 내려앉은 이우연이었다.
흰 깃털을 흩날리며 착지한 이우연은 가라앉은 시선으로 릴리스를 바라보았다.
“저게 보스 몹인가? 까다로워 보이네.”
몬스터의 말 따위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아주 강렬해 보였다.
릴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뭐, 아무래도 좋아. 나도 다른 장난감에게는 관심 없으니까.”
“유언은 그걸로 끝이냐?”
나는 검을 든 채 릴리스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릴리스가 크게 소리를 높여 웃었다.
“아하, 아하하하! 레나는 언제나 재밌는 말을 해. 유언이라고? 나는 절대로 죽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릴리스가 하늘을 향해 팔을 벌렸다.
마치 누군가를 향해 과시하는 듯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 악의는 강철의 갑옷처럼 보였고,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전장을 내려다보는 눈에는 희열이 담겨 있다.
“악마는 인간의 마음에 사는 존재이니까, 인간이 존재하는 이상 사라지지 않는단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마구 웃던 릴리스의 고개가 그 목소리에 삐그덕, 하고 돌아갔다.
“악귀 주제에 인간을 아는 척 굴지 마.”
릴리스의 말에 차갑게 대꾸한 것은 양태원이었다.
청동검을 든 양태원은 릴리스를 강렬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인간의 마음이 약해 가끔 사로잡힐 수는 있겠지. 하지만 악귀는 쫓아내면 그만이야. 너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 목소리와 함께, 양태원의 몸을 보호하듯 감싸 안고 있던 청룡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마치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릴리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흐음…….”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듯한 눈빛.
그 눈빛에 불길함을 느낀 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검을 휘두르려던 순간…….
릴리스가 빙긋 웃었다.
“그래, 어디 한번 쫓아낼 수 있으면 쫓아내 보렴.”
그리고, 그때였다.
“조심해!”
이우연이 갑자기 내 몸을 잡아끌었다.
덕분에 등 뒤에서부터 날아온 거대한 검기는, 중심을 잃은 내 몸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광화문에 직격했다.
그리고, 릴리스가 앉아 있던 광화문이 무너져 내렸다.
우지끈!
역사적인 궁궐의 대문이 한 방에 무너져 망가지고 만 것이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등 뒤에서 검기가 날아온 것은 놀랍지도 않았다. 그 주인의 정체도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뻔했으니까.
내가 놀란 건 다른 것 때문이었다.
“하마터면 내가 맞을 뻔했잖아! 그리고 광화문을 부숴 버리면 어떡해!”
“어차피 이제 나 말고는 볼 사람도 없는 건축물인데 뭐 어때.”
그렇게 무심하게 대꾸하며 나타난 것은 물론, 묘지기 녀석이었다.
옆에서 태원이가 조그맣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허, 헉…….”
그럴 법도 했다.
악마들의 피를 온통 뒤집어쓴 묘지기의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다른 무언가처럼 보였으니까.
어디에 갔나, 했더니 릴리스의 환상 마법을 깨지 못해 다른 곳을 헤매면서 무작정 악마들을 해치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 녀석 말마따나 어차피 파손되어 버린 문, 틈이 생긴 지금 당장 릴리스를 공격해야 했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곧장 파손된 건물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릴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아압!”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두르며 뛰어든 순간…….
카캉!
릴리스의 손톱이 끼긱대는 소리를 내며 내 검을 막아 냈다.
그리고 내가 다시 한번 공격하기도 전에, 다른 손이 내 목을 잡아 뽑으려 갈퀴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강예나!”
“누나!”
뒤에서 마력과 신력이 느껴졌다. 아마도 나를 보조하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내 판단이 더 빨랐다.
“익……!”
고개를 숙여 릴리스의 손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오히려 과감하게 릴리스의 품속으로 한발 더 내디뎠다.
그리고, 머리로 세게 릴리스의 턱을 치받았다.
쾅!
“악!”
내 골이 울릴 정도로 세게 받아 버리자 릴리스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아마 무어라 지껄이려고 하다가 혀라도 깨문 모양이었다.
그걸 노렸다.
“윽……!”
나는 턱을 세게 받혀 그 충격에 릴리스가 잠시 비틀거린 틈을 놓치지 않았다.
중심을 잃은 릴리스의 발을 걸고 한 팔로 릴리스의 어깨를 눌러 그대로 뒤로 자빠트렸다.
휘익!
물론, 릴리스도 만만하지는 않았다.
중심을 잃어 뒤로 넘어지면서도 긴 손톱이 아슬아슬하게 내 목을 긁고 지나갔다.
짜릿한 아픔이 스쳤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 에이펙스의 성검이 악(惡)을 단죄하고자 합니다.
손에 들린 파트너의 검신이 희게 길어지고 있었다.
나는 뒤로 넘어가고 있는 릴리스의 몸에 성검을 말뚝처럼 박을 심산으로, 검을 든 팔에 힘을 주었다.
‘단번에!’
그리고, 악마의 몸에 막 날이 들어가려던 찰나.
카캉!
검은 릴리스의 몸을 뚫는 대신, 무언가에게 크게 받아쳐졌다.
그 반동을 버티지 못한 나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털썩!
그제야 릴리스의 몸이 뒤로 쓰러지며 흙먼지가 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격이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의.
“……잠깐만…….”
떨리는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기다려 줘.”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말도, 행동도.
“대체 뭘……?”
“강예나.”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이우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한껏 긴장되어 있었다.
“물러서. 이쪽으로 와!”
하지만, 이우연이 왜 그러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 내 앞에서…… 릴리스를 감싸듯 나를 향해 검을 들고 있는 인물은…….
“무슨 짓이야?”
‘강예나’였으니까.
검을 든 묘지기의 얼굴 표정이 보였다.
나 자신의 얼굴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그래서 당황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혹시 이번에도 무언가 이유가 있는 걸까? 이것도 내가 아직 알아채지 못했을 뿐일, 릴리스를 속이려는 또 다른 연극인 걸까?
그러나 미처 그럴 듯한 가설을 세우기 전에, 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나를 향해 치켜세워진 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 무덤을 지키는 것뿐.”
성검에는 이제, 더 이상 빛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이 악마들이 가득한 곳에서 그 빛을 찾아내지 못한 것도, 묘지기가 릴리스의 환상 마법을 깨트리지 못하고 헤맸던 것도 당연했다.
- 에이펙스의 성검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의지도, 신념도 더 이상 깃들어 있지 않은, 그저 고철 덩어리가 된 검을 든 채 거대한 무덤을 오랫동안 지켜 온 여자가 나를 바라봤다.
마주친 시선에 무언가가 가득 고였다가…… 이윽고, 제방이 터진 것처럼 흘러내렸다.
“……나는…… 내가 용사건 악마건 상관없어.”
너무나 익숙한 마음.
나 또한 만일 타르토스를 구할 수 있다면, 멸망해 버린 세계의 내 친구들을 구해 낼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다.
“내 친구들을 구할 수 있다면 나는 뭐든지 할 거야.”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검이 나를 향해 겨누어졌다.
“설령 그게, 악마가 되는 길일지라도.”
이번에야말로, 진정으로.
* * *
저 내기가 악마의 같잖은 수작이라는 것 정도야 물론 알고 있었다.
이제껏 몇 번이고 싸워 왔으니까.
그러나, 그렇기에 동시에 알고 있다.
악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언제나 진실이 더욱 절망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빛을 잃은 성검을 바라보며 악마가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래그래, 이렇게 나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