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19화
이선의 말을 들은 나는 살짝 당황했다.
시스템 밸런스 조정이라니!
물론 그 말에 근거가 있음은 나도 알고 있었다.
유령의 성 던전에서 히든 루트를 찾아내, 본래 SSS급 보스 몬스터이던 적군의 왕을 S급으로 너프시켰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때 이선은 진언 마법의 후유증으로 뒤에 남아 있었지만, 내가 당시 상황을 보고서로 작성해 제출했으니 정부 소속인 이선이야 당연히 알고 있겠지.
다만, 문제는 이거였다.
“아니, 이선 헌터.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건 아닌데…….”
항상 시스템이 플레이어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려 주는 건 아니다.
어떻게든 해낼 수 있게 난도가 설정된다는 느낌은 있지만, 정말로 두 번은 죽었다 깨야 겨우 할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다.
게다가 유령의 성 때는 내가 우연히 히든 루트를 충족시킨 덕분에 보스 몬스터의 등급이 너프되었다는, 확실한 인과 관계가 존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릴리스의 SSS급이 너프될 만한 건덕지가 전혀 없었다.
애초에 저 릴리스 녀석은 만렙인 묘지기에게 맞추어 설정된 보스 몹이라, 우리에게 맞추어 너프될 이유가 전혀…….
‘……어라, 그것도 아닌가?’
생각해 보니 현재는 시스템이 한국 헌터들의 소속을 착각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보스 몬스터 또한 묘지기 녀석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평균 레벨에 맞추어 등급이 낮아져야 할 수도…….
“크, 크아아아악!”
“오, 드디어 처치됐다. 정말 끈질기군.”
이우연이 먼지처럼 사라지는 마몬의 육체에는 일말의 시선조차 주지 않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S급 몬스터를 단독으로 해치운 것치고는 아주 담담한 태도였다.
이우연이 이선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밸런스 조정이라, 나쁘지 않은 착안점인데요.”
“그렇지? 물론 히든 루트든 뭐든 찾아야 할 것 같긴 한데…….”
“아니, 어쩌면 이미 밸런스 조정에 들어간 건지도 모르겠어요.”
이우연이 그렇게 말하며 반투명한 실드 너머로 보이는, 다 스러진 광화문 폐허 위에 홀로 앉아 있는 릴리스를 가리켰다.
“그게 아니라면 저 SSS급 몬스터가 저기에 가만히 앉아 있을 리 없잖아요.”
글쎄, 과연 그럴까.
나는 약간 회의적이었다.
다른 놈이라면 모를까, 릴리스는 그저 이 상황을 즐기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 침입자 처치 수 35,614 / 50,001
- 제한 시간 17 : 51: 45
제한 시간이 짧다면 모를까, 우리를 가지고 놀 만한 시간을 17시간 남짓 가지고 있으니 더욱 그렇겠지.
지금 릴리스는 특히나 양태원을 흥미로운 눈길로 관찰하는 중이었다.
그야 이쪽 세계에서는 공략하지 못했을 백록담 던전의 청동검을 손에 쥐고 있으니 호기심이 드는 것도 당하겠지만…….
“우왁! 왜 그래요, 누나?”
양태원을 잡아 끌어내 등 뒤로 숨기자 양태원이 의아하게 물어보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런 스토커 녀석이 달라붙으면 평생 곤란해진다.
옆에서 류세연이 툴툴거렸다.
“그 산만 한 덩치가 네 몸으로 가린다고 가려지냐고.”
“……솔직히 말해서, 밸런스 조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야, 또 나 무시하냐!”
이선이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왜요? 불가능한가요? 하지만 저번에는 분명…….”
“그게 아니라, 우리가 히든 루트를 찾는 걸 저 녀석이 그냥 둘 리 없어서요.”
그래, 일단 이선의 말대로 밸런스 조정 가능성이 있다는 것까지는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조정 작업이 들어가려면 히든 루트든 뭐든 찾아내야 가능한 일이었다. 시스템이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그걸 릴리스가 눈뜨고 지켜만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지금이야 그냥 모여서 회의나 하고 있으니 지켜보고 있는 것이겠지만, 릴리스의 지능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노리는지 뻔히 알아챌 터.
그렇게 되면 방해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릴리스가 이미 시스템 개변 스킬을 사용했다는 것 정돈가.’
이쪽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그걸 빌미 삼아 시스템의 클리어 조건을 추가했다면, 대악마를 상대해 본 적 없는 한국 헌터들은 혼란스러워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이미 묘지기 녀석을 상대로 개변 스킬을 썼으니, 이번 필드에서는 더 이상 쓰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번에는 당신과 생각이 다른데.”
그때 이우연이 나섰다.
나는 이우연을 돌아보았다.
“어떤 점에서?”
“음, 여러모로. 오히려 나는 당신이 왜 눈치채지 못하는지 모르겠거든.”
“이 상황에서 장난 치냐? 빨리 말해.”
그렇게 대꾸하자 어쩐지 류세연이 오오, 하며 신나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도대체 왜?
“싸우냐? 싸울 거냐?”
“……애도 아니고 고작 그런 걸로 싸우겠냐.”
이우연과는 던전 공략을 할 때 유독 생각이 잘 맞는 편이기는 했지만, 당연히 의견이 갈라질 때도 있는 법.
게다가 던전 공략 때 여러 의견을 듣는 건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나는 류세연을 무시하고 이우연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말해 봐.”
“말보다는 보는 게 빠르지 않나?”
그렇게 말하며 이우연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우연이 가리킨 곳은…….
“……아.”
한국 헌터들이 친 실드 안에 들어와 있던 묘지기 녀석이었다.
아직도 시스템의 과부하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모습.
물론 앞뒤 사정을 모르는 한국 헌터들이 보기에, 지금 묘지기 녀석은 그냥 굳은 표정을 하며 망부석처럼 대기하는 것으로 보일 테지만…….
“저거야말로 시스템이 무언가 조정을 하고 있다는 가장 큰 증거 같은데.”
“……그래, 일리 있군.”
나는 곧바로 납득했다.
물론 내가 이우연의 말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가령 시스템이 우릴 감안해 릴리스를 너프 중이라든가, 그런 낙관적인 전망은 역시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하지만 초점을 조금 바꿔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한국 헌터들을 대상’으로, 이런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이다.
조한율이 무언가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우연이 내게 말하고 싶은 것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한율이라는 운영자의 존재는, 현재 대한민국 헌터들 중에서 나와 이우연만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못한 거겠지.
하여튼 이우연 말대로 조한율이 이 상황에 개입했을 여지는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조한율이 아니라면 개입할 만한 사람이 없다.
저렇게 묘지기 녀석의 움직임을 제한한 것은 누가 보아도 나를 돕고자 규칙 위반을 한 셈이니까.
그럴 만한 인물은 현재로서는 조한율밖에 없다.
내가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우연이 씩, 웃었다.
“어, 그럼 정리된 건가요? 예나 씨도 제 의견에 동의하는 거예요?”
이선이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하기야 이우연의 한마디로 납득하는 모습을 보이니 그럴 법도 했다.
어쩐지 류세연이 혀를 찼다.
“에이, 재미없어.”
“너 재미있으라고 던전 공략을 하는 게 아니라고.”
옆에 조용히 서 있던 김하현이 핀잔을 주는 게 들렸다.
말 한번 잘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남은 문제가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
조한율은 아까부터 아무리 메시지를 보내 봐도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릴리스의 등급 조정을 하느라 바쁜 것일까?
하기야 그럴 법도 했다.
플레이어들이 딱히 히든 루트를 찾아낸 것도 아닌데 운영자 권한으로 보스 몹의 등급 하락을 시키다니, 딱 봐도 부담이 커 보였다.
‘게다가 묘지기 녀석에게 이렇게까지 길게 과부하를 먹이다니.’
내가 유령의 성에서 받았던 과부하는 기껏해야 1분 정도.
그런데 묘지기 녀석은 이미 5분 이상 굳은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조한율 말대로라면 운영자가 플레이어에게 일정 이상 간섭하는 것은 룰 위반에 해당되어 페널티를 받는다고 하지 않던가.
즉, 이대로라면 조한율이 페널티를 받게 된다.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큰 고통을.
당장 ‘불굴의 의지’ 스킬 덕에 고통 경감 효과를 가지고 있는 나만 해도, 알리시아에게 시스템이 금지한 사항을 발설하려다가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아직도 입안이 마를 정도인데…… 묘지기 녀석의 과부하에 릴리스의 등급 조정까지, 대체 어떻게 감당하려는 거지?
내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조한율 : 예나 씨!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지가 떴다.
그것과 동시에 이우연이 실드 너머로 고갯짓을 했다.
“왔다.”
파직, 파지직!
릴리스 주변으로 거대한 스파크가 일어나고 있었다.
어딜 보나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었다.
“와, 와아! 저거 봐. 저게 시스템 조정인가?”
“진짜로 이게 먹히네. 이선 헌터 대단하다…….”
헌터들은 약간 압도된 모습이었다. 하기야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릴리스를 쳐다보는 대신 조한율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강예나 : 밸런스 조정인가? 네가 한 거야?
조한율 : ……음…… 결과적으로 보면 맞긴 한데요.
무언가 시원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내가 의아해하는 동안 조한율의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조한율 : 할 말은 정말 많은데 그건 일단 이번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서 하기로 하고…… 어쨌든 곧 보스 몹이 SS급으로 조정될 거예요. 아무래도 현재 예나 씨가 레벨 79 상태라 S급까지 낮출 수는 없었고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만렙인 묘지기 녀석만이 아니라 현재의 내 레벨도 감안해야 했을 테니.
애초에 S급 중에서는 하급이라지만 마몬을 이우연 녀석이 처치한 만큼, 한국 헌터들의 수준을 고려해 보았을 때도 릴리스가 S급으로 너프될 수는 없었을 터.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SSS급과 SS급은 차이가 매우 크다.
당장 SSS급인 릴리스는 청룡의 가호에 청동검까지 들고 있는 양태원이 이렇게 지척에 있어도 딱히 영향을 받지 않지만, 아마 SS급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강예나 : 이렇게까지 간섭해도 되겠어? 페널티 받는다면서.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눈앞의 보스 몬스터가 아니라 조한율 쪽이었다.
조한율 : 음…… 그게…… 그것도 돌아오면 이야기하기로 해요. 이제 곧 보스 몹이 움직일 거라 시간도 없을 테고요.
조한율 : ……어라? 이거 너무 사망 플래그 같은데? 그냥 이야기할까요?
강예나 : ……됐다.
어차피 릴리스의 밸런스 조정이 끝나면 곧장 전투에 들어가야 할 터. 한가하게 메시지를 읽을 틈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시급하게 물어볼 문제가 있기도 하고.
강예나 : 그런데 묘…… 저쪽 만렙 녀석은 전투 내내 저대로 둘 건가? 그래도 괜찮아?
물론 풀려나자마자 내 목숨을 노릴 테니 위험하긴 하겠지만, 조한율이 페널티를 받는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언제까지고 저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물어본 것인데,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조한율 : ?????????
조한율 : 저게 뭐예요?? 플레이어 개인한테 과부하를 먹였다고? 와, 미친 거 아냐?
……아니, 그걸 나한테 물어봐도.
* * *
릴리스는 자신의 사지를 속박하기 시작한 거대한 힘을 바라보며 빙글, 웃었다.
용사를 앞에 두고 그리 기꺼운 상황은 아니었으되, 그럼에도 즐거웠다.
강제로 악마의 무릎을 잡아 꿇리려는 그 강대한 의지가.
파지직!
사지를 얽매는 힘과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 시스템 경고
- 운■자 권한으로 보스 몬스터, ‘욕망■는 화염’의 등■ 강제 조정이 이루어집니다.
- 몬■터 등급 변경 : SS급
- 운영자와의 ■촉 종■를 권고■■다.
- 시스템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현재 서버와의 접속을 종료하시겠습니까?
제대로 글씨조차 떠오르지 않는 오류 투성이의 메시지.
그러나 릴리스는 그 메시지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마음에 꼭 드는 무대의 연출가를 바라보는 배우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등급 조정이라…….”
물고기처럼 유연하고, 강철처럼 단단한 사지에 무형의 쇠사슬이 의지를 띄고 감겨드는 것이 느껴졌다. 전신을 칼로 난자하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릴리스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바라던 바였으니까.
저 용사가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듯이, 지금 저 시스템 뒤에 선 채 릴리스의 목에 줄을 채워 다루려는 누군가 또한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릴리스는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생이 있는 것들은 모두가 살아남고자 필사적인데, 자신의 생을 연료처럼 불태우면서까지 이루고 싶어 하는 욕망이 대체 무엇인지.
강예나는 악마가 시스템을 신으로서 숭배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광활한 바다는 그저 자연일 뿐, 의지를 가진 무언가일 수 없다. 그렇기에 시스템은 숭배할 무언가가 될 수 없다.
악마가 숭배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빛깔이야.”
악마가 존재하는 이유.
인간이 욕망하기에 악마는 그 마음의 틈을 타고 태어나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란, 인간의 강렬한 의지가 있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빛깔이지.”
그리하여, 악마가 숭배하는 것은, 인간이다.
저 광활한 바다를 기필코 가로질러 새로운 땅을 찾고자 하는 욕망.
그 욕망이야말로 악마의 근원이 된다.
“그래, 나의 신께서는 내게 무엇을 바라는가?”
그렇기에 릴리스는 기꺼이 자신을 얽매는 신의 구속을 받아들였다.
- 운영자의 개입으로 ‘욕망하는 화염’에게 걸린 제약이 강화됩니다.]
- ‘욕망하는 화염’의 등급이 SSS급에서 SS급으로 조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