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20화
조한율에게, 그럼 대체 누가 묘지기 녀석에게 과부하를 걸어 버린 것인지 좀 더 묻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 운영자의 개입으로 인해 ‘욕망하는 화염’에게 걸린 제약이 강화됩니다.
- ‘욕망하는 화염’ 등급이 SSS급에서 SS급으로 조정됩니다.
릴리스의 등급 조정 메시지가 떠오른 순간, 한국 헌터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도 SS급이네. SS급 뜬 거 처음 아닌가?”
“예전 일산 호수 공원 던전 때는 SSS급이었다면서요.”
“그땐 히든 클리어로 몸만 빠져나왔던 거니까 이번이 처음이라고 봐도 될 것 같은데…….”
불안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현재 한국 헌터들 레벨을 따져 봤을 때 S급 몬스터라면 모를까, 아무리 내가 있다고 해도 SS급 몬스터는 아직 버거운 감이 있었다.
‘할 수 있을까?’
물론 나 혼자 공략하는 것보다야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만, 그만큼 릴리스가 어떤 교활한 술수를 부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괜히 인질의 후보군을 늘리는 결과가 된 걸지도…….
“자, 그만.”
그렇다고 모두가 불안에 떠는 것은 아니었다.
짝!
릴리스의 몸 주위에서 점점 스파크가 잦아들기 시작한 걸 보면서 김숙자 교수가 손뼉을 쳤다.
그 소리에 헌터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이선 헌터 말대로 등급 조정이 완료되었으니 어서 작전대로 움직이지. 다들 빨리 전투 준비를 하게.”
공략 준비가 아니라 강의 준비라도 하는 듯 담담한 어투였다.
하지만 그 덕인지 잠시 일던 소란이 순식간에 가라앉더니, 흐트러져 있던 집중도가 확 달라졌다.
실은 나조차도 그랬다.
이상하게 사람의 주목을 모으는 목소리라고 할까.
조한율 : 김숙자 교수님에게 ‘명강사의 목소리’ 스킬이 있긴 해요.
진짜 스킬이었냐.
실질적인 공략을 지휘하는 건 이선이긴 하지만, 이렇게 헌터들 사이에 동요가 일 때마다 김숙자 교수가 적절히 나서서 한마디 하는 것만으로 무게감이 완전히 달라진다.
“…….”
그래서인지 본래대로라면 언제나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어 했을 김성연은 굳은 표정을 한 채 검을 들고 본인의 자세를 가다듬을 뿐,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
김숙자 교수에게 눌린 건지, 긴장한 건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어쩐지 양태원을 흘끗흘끗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기분 나쁜데……?’
“저기, 누나. 왜 자꾸 잡아당겨요? 누나 등 뒤에 서라고요?”
“조용히 하고 이리로 와.”
“아, 넵.”
“둘이 무슨 문제라도 있어?”
불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고 있던 이우연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나저나 나는 작전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못 들었는데.”
“작전?”
이우연이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잖아.”
“어?”
“작전이고 뭐고 어차피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면서. 말해 봤자 듣지도 않을 건데 뭐하러 들어? 시간 낭비지.”
“……어째 말에 가시가 있다, 너.”
“왜? 찔려?”
그야…… 조금 찔리긴 했다.
아무래도 이우연은, 내가 묘지기 녀석을 상대할 때 작전대로 움직이지 않고 홀로 튀어 나간 것에 아직도 불만이 있는 모양이다.
이우연이 비아냥대는 어투로 말했다.
“하긴 혼자 튀어 나갔다가 가슴을 푹, 찔리기도 했으니까 말이야.”
“…….”
이 녀석, 뒤끝이 상당히 긴 타입인가?
내 앞에서는 언제나 살살 웃으면서 비위를 맞추던 놈이 저렇게 대놓고 빈정대는 걸 들으니 나름대로 신선하긴 했다.
사실 정말로 비난한다기보다는 그냥 속상해서 투정 부리는 거에 가까운 것 같기는 하지만.
뭐, 이번에는 내가 잘못한 것도 맞지. 짜증 나긴 하지만 여기까진 참아 주자.
“미안하다는 말로 다 해결될 것 같으면 경찰이 왜…… 아야.”
퍽!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결국 나는 이우연의 옆구리를 한 대 쥐어박고야 말았다.
재수 없는 얼굴이 너무 얄미웠던 탓이다.
“그만하라고 했지. 어?”
“지금 누가 누구한테 화를……!”
“누나, 형. 나머지는 집에 가서 얘기하자고요.”
양태원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누나 체면도 있는데 밖에서 이렇게 싸우는 건 좀…….”
“양태원, 너 자꾸 은혜도 모르고 강예나 편만 들 거야?”
“형이 나한테 그렇게 크게 잘해 주지는 않았…… 잘못했슴다. 넵.”
“……그래서 결국 작전이 뭔데?”
“그러니까 어차피 안 들…… 악!”
“강예나 헌터, 잠깐 괜찮으신가요?”
나는 이우연을 한 대 더 때리려던 주먹을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나를 부른 것은 이선이었다.
이선은 약간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다가와 그와 반대되는, 최대한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아마 남의 눈을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아까 강예나 헌터는 못 들으셨을 테니까, 실드가 해제되기 전에 간단하게나마 작전을 설명하려고 하는데요.”
“아, 네.”
“……라고 해도, 사실 그렇게 기발한 작전은 없어요. 일단 데이터가 없는 만큼 악마 계열의 몬스터와 상성이 좋은 양태원 헌터를 중심으로 공략을 짰습니다.”
“드디어 이 청동검이 빛을 발할 때가 온 거죠.”
양태원이 손에 든 청동검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말했다.
양태원의 손에 들린 채 신비로운 기운을 감고 있는 청동검은 누가 보아도 신물(神物)임이 느껴졌다.
“그건 그렇다 치고, 구체적으로 뭘 어쩌겠다는 건데? 네가 근접전을 할 수는 없잖아.”
“저도 제법 검술이…… 죄송합니다. 저번에 보스 강예나 누나한테 써먹었던 작전을 한 번 더 재활용해 볼까, 하는데요.”
보스 강예나…… 그러니까 묘지기가 나를 죽이려고 연기했을 때 양태원과 이선, 이우연이 합작해 묘지기 녀석을 파도로 쓸어버렸을 때의 이야기다.
‘청룡의 힘을 빌리겠단 건가.’
그때 묘지기의 사지를 청룡이 뱀처럼 칭칭 감고 놓아주지 않았었지.
즉 신력으로 악마의 손발을 묶은 후, 최대한 딜을 꽂아 넣겠다는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마법을 쓰는 몬스터에게는 물리적 타격이 좋은 편이니, 강예나 헌터가 다른 검사들을 이끌어 공격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선의 말대로 그리 기발할 건 없지만, 현재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작전이었다.
마법을 쓰는 몬스터에게는 보통 물리적 공격이 잘 먹힌다는 것 역시 틀린 말은 아니고.
릴리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릴리스의 경우 마법을 쓸 뿐 아니라 본인의 육체 자체도 중장비나 다름없는 강도라서 문제지만, 나는 그걸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건 말로 해 봤자 와닿지 않는다. 내가 어느 정도 무리를 할 수밖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더니 문득 이선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저기, 그런데…… 저쪽 보스 강…… 플레이어 씨는요? 우리를 도와주시는 거 맞나요?”
“아…….”
나는 여전히 굳은 채 허공을 노려보고 있는 묘지기 녀석을 바라보았다.
이번만큼은 진짜 살의를 가지고 달려들었다는 걸 이선은 모르니, 그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기대하고 있는 걸 꺾는 것 않아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아뇨, 전력 외로 계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침 시야 한구석에 조한율의 메시지가 떴다.
조한율 : 아무래도 제 힘으로는 저 과부하를 풀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저랑은 완전 다른 방식으로 간섭한 흔적이 있어서……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여러모로 질문할 게 많은 메시지였다. 조한율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묘지기 녀석을 멈춰 나를 도운 건지,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을 한 것인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 묻기엔 현재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젠장, 여기서 나가기만 해 봐라.
어쨌든 묘지기가 이쪽의 목숨을 노리는 입장에 놓인 나로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릴리스와 묘지기, 두 사람 모두 상대할 필요는 없어졌으니까.
이선이 내 대답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 하지만 아까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녀석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우리 힘만으로도 충분히 공략할 수 있어요.”
“……뭔가 사정이 있나 보군요. 알겠어요.”
이선이 아쉬워하면서도 한발 물러섰다. 어쨌든 긴 이야기를 하기에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었다.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얼마든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콰쾅!
이선과의 대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실드 위로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드디어 속박에서 벗어난 릴리스가 불덩이를 만들어 내 실드 위로 던진 것이다. 릴리스의 공격을 받은 실드가 단번에 쩌적, 하며 금이 갔다.
게다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 휘익!
뿌연 창문 같은 실드 너머로, 릴리스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 크게 휘파람을 부는 것이 보였다.
그 휘파람 소리는 일반적인 소리처럼 그대로 사라지는 대신, 바람을 타고 날아가 아주 멀리 퍼졌다.
두두둥!
곧이어 저 멀리서 다시 한번 땅울림이 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릴리스의 부름에 답하는 소리들이었다.
“역시.”
나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국 헌터들은 사정이 달랐다. 후방에서 감시하고 있던 헌터가 놀라 소리쳤다.
“모, 몬스터가 또 몰려옵니다!”
“망할, 아까 그렇게 쓸어버렸는데 또?”
“아직도 이렇게 숫자가 많다고?!”
당연한 일이었다.
서울 내에 있는 십만 마리의 악마.
광화문 근처에 몰렸던 악마들을 쓸어버리며 클리어 조건의 2/3 이상을 채웠다고는 해도, 릴리스가 제 수하로 다룰 수 있는 악마는 여전히 도처에 널려 있는 상황인 것이다.
“뭘 새삼스러운 소리를.”
스릉!
검이 뽑히는 소리와 함께 이우연이 내 옆에 다가와 서며 말했다.
검은빛의 검신을 자랑하는 마검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야 SS급 보스 몹 공략이 쉬울 리 없잖아요. 다들 목숨을 걸 각오 정도는 해야죠.”
“……확실히 그건 그렇지.”
그에 대답한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김성연 길드장이 결연한 얼굴로 롱소드를 든 채 나와 이우연 옆, 가장 앞쪽의 전열에 선 것이다.
의외였다.
이 실드가 깨지면 SS급 몬스터를 검 한 자루와 자신의 육체만으로 상대해야 하는 자리.
쉽게 나설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저 인간이라면, 당장 철수하여 퀘스트만 해결하자고 호통이나 칠 줄 알았는데.
‘대체 무슨 꿍꿍이지?’
내 의심 어린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김성연이 흘끗, 내게로 시선을 던졌다.
“아, 오해하지는 말게. 딱히 강예나 헌터가 공을 세우는 걸 도우려고 이 자리에 있는 건 아니니까.”
마치 내 심중을 꿰뚫어 본 것 같은 말이 돌아왔다. 나한테 툭 던지는 말에는 여전히 적의가 가시처럼 돋아 있었다.
이 던전에 들어와 거의 처음으로 말을 섞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이제껏 저 적의를 숨겼나 모르겠다.
하기야 ‘방랑하는 구도자를 처치하라’는 클리어 조건이 떴을 때 은근히 나를 버리려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가려고 했었다만.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딴 오해 안 했는데.”
어차피 김성연 길드장를 걷어찬 순간부터 사이가 좋아질 거라는 생각 따위는 버렸다. 이제 와서 좀 더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낸다고 해 봤자 내게는 딱히 달라질 것도 없었다.
오히려 김성연이 양태원에게 향하는 관심을 돌릴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위협해 볼 생각이다.
검을 쥐고 있던 김성연의 얼굴에 순간 파란이 스쳤다.
“혹시 건방지다는 말 자주 듣지 않나?”
“내 알 바 아니야.”
“정말 짜증 나는 사람이로군, 자네.”
검 손잡이를 잡고 있는 김성연의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게 보였다.
저 검날은 릴리스보다 내게 더 날아올 가능성이 커 보이는데.
콰콰쾅!
그리고 실드에 한 번 더 릴리스의 공격이 꽂혀 들었다.
파지직!
실드에 커다란 금이 가는 광경을 보며 김성연이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그 태도를 보니 강예나 헌터가 생각하는 나라는 사람이 어떤지 잘 알겠네.”
“…….”
“아마 실력도 없는 주제에 권력과 이득만 탐하는 꼰대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
솔직히 그 말에는 놀랐다.
자기 평가가 노골적이어서가 아니었다.
저렇게까지 자기 객관화가 되어 있는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권력을 가진 대부분의 인간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게 자기 객관화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저렇게 자기 객관화가 되어 있는 인간이라는 게 더 끔찍하기는 했다. 본인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반성하지도, 고치지도 않는다는 의미이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김성연은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딱딱한 어조로 이어 말했다.
“자네 입장에서 그렇게 보였을 거란 걸 부정하진 않겠네. 하지만 그건 틀렸어.”
“…….”
“난 한국 최고의 길드를 만든 수장이고, 헌터들의 대표라는 입장에서 사고를 하지. 아무리 자네가 랭킹 1위라고 할지라도 이 대한민국 헌터계를 이끌어 가는 주축은 나야. 자네가 어디서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한국을 지켜 낸 것도 나고, 우리 영원 길드의 헌터들이란 말이네.”
“……그래서?”
릴리스 대신 나랑 붙어 보겠다는 건가.
김성연 길드장이 강한 시선으로 내 눈을 받아쳤다.
“그러니 건방진 젊은이에게 사과를 받기 위해서라도…….”
쾅!
챙강!
릴리스의 공격에 마침내 실드가 완전히 깨져나갔다.
그와 함께.
“저 보스 몬스터는 우리가 해치우겠네! 자, 가자!”
김성연이 가장 먼저 발을 박차고 나가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우, 우오오오!”
심지어 김성연 길드장의 뒤를 따라 다른 검사들도 함께 뛰쳐나갔다.
“길드장님을 따라라!”
“겁먹지 마라!”
내가 나설 새도 없이 모두가 기세 좋은 함성을 지르며 눈앞의 악마에게로 쇄도해 갔다.
그리고 그걸 보는 내 심정은…….
“……뭐야, 저건?”
황당했다.
그러니까 내게 무시당해서 자존심이 상했다, 이건가?
그런데 뭐 저딴 이유로 목숨을 걸고 SS급 몬스터에게 달려들어? 누가 보면 세계를 구할 비장한 각오라도 한 줄 알겠다.
“그야 이야기 속 용사 같은 사람에게는 납득이 안가겠지만.”
황당해하는 내게 이우연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보다 인간은 복잡한 생물이라고.”
그때 뒤에서 이선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1조, 타격 발사!”
콰과광!
릴리스를 향해 각종 마법이 쏟아졌다. 그와 함께 양태원도 청동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힘을 빌려주세요, 청룡 님!”
간절한 목소리와 함께 릴리스에게로 쏜살같이 뻗어 나가는 청룡의 모습.
“흐아아압!”
그와 동시에 가장 앞서 나간 김성연이 매서운 기세로 휘두른 검이 릴리스의 목을 노렸다.
그것이, 이번 던전 최종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