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23화
아리아드네?
그게 대체 누구냐, 그렇게 물어보려던 이우연은 곧바로 정황을 파악했다.
갑자기 불꽃 속에서 나타난 끔찍한 인영과,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듯한 강예나의 모습.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우연은 재빨리 자신의 안구 주위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챙강!
마치 유리라도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며 환상이 깨져나갔다.
시퍼런 불꽃 사이로 기어 나오던 금발 여성의 인영이 사라졌다.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보스 몬스터, ‘욕망하는 화염’의 ‘무저갱의 공포’에서 벗어납니다.
그 메시지를 보며 이우연은 이를 갈았다.
“정신계 마법……!”
이우연 또한 마법사인 만큼 정신계 마법의 무서움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무저갱의 공포’라니.
이건 최고위 정신계 마법 중 하나였다.
그것도 단순히 상대방을 환각으로 현혹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방의 무의식중에 잠재되어 있는, 가장 두려워하는 광경을 보여 주는 마법.
이우연처럼 정신 방벽이 강한 체질로 타고난 게 아니라면, 한 번 걸린 이상 쉽게 깨트릴 수 없는 환각 마법이었다.
‘방심했어!’
이우연은 이를 악물었다.
SS급 몬스터이니만큼 당연히 마법으로도 공격해 올 거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이제껏 계속 물리적인 공방만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마법에 대한 방비를 잊고 있었다.
물론 미리 대비한다고 한들 이 정도로 고위 정신계 마법을 쓰면 어쩔 도리는 없었겠지만.
“강예나, 내 말 들려?!”
이우연은 강예나의 어깨를 흔들며 깨워 보려 애썼지만 한 번 나간 눈의 초점은 좀처럼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미 정신계 마법의 환상에 단단히 걸려 든 것이다.
뺨이라도 때려 볼까 생각했지만 그만두었다.
어차피 이 마법은 외부의 자극만으로는 간단히 깨지지 않으니까.
대체 그 불꽃 속의 여자가 누구길래…….
‘아니, 근데 왜 나한테도 같은 환각이 보인 거지?’
당연한 의문이 피어났지만, 사실 오래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불길한 예감부터 해결해야 했으니까.
‘잠깐. 강예나가 이런 상태라면…… 다른 사람들은?’
SS급 보스 몬스터가 이런 고위 정신계 마법을 펼쳤다면 다른 사람들이 회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우연은 빠르게 주위 헌터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어, 어머니……?”
“이건 말도 안 돼…… 네가 왜…….”
“으악, 두부야!”
상황은 이미 심각해진 상태였다.
이미 헌터들 대부분이 환각에 홀린 상태였던 것이다.
“이런, 이미 늦었…… 윽!”
이우연은 정통으로 날아오는 얼음 덩어리를 검으로 깨부수며 이를 악물었다.
“으아아아! 저리 비켜!”
환각에 단단히 홀린 몇몇 이들이 상대를 분간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설마 이렇게까지 개판이 될 줄이야.
“모두들 정신 차리게!”
“다들 왜 이래?”
“형, 이게 뭐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모두가 환각 마법에 당한 것은 아니라는 것.
이우연 외에도 저 마법에 홀리지 않은 헌터들이 셋 있었다.
“정신계 마법이라니.”
이우연과 마찬가지로 정신 장벽이 두터운 김숙자 교수.
“어, 어떻게 하죠?!”
그리고 타고난 힘 자체가 대(對)악마전에 특화돼 있는 양태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어떻게 해야 돼?!”
그리고…… 백사현.
저건 이상했다.
본래 검사는 항마력 속성이 없어서 정신계 마법에 홀리기 더 쉬운 법인데…… 항마법 아티팩트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어쨌든 네가 뭔데 정신계 마법에 걸려들지 않았냐고 추궁하기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
이우연은 양태원을 향해 빠르게 외쳤다.
“양태원, 주위로 최대한 많은 신력을 방출해!”
“어?! 그렇지만 그랬다간 신력이 남아나질 않는데……!”
“하라면 해!”
“아, 알았어!”
처음에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해하던 양태원은 곧장 이우연의 지시를 따랐다.
양태원이 든 청동검 주위로 오색찬란한 빛깔의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고위 정신계 마법은 마법사를 처치하거나 스스로 미혹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없어.’
물론 이 마법을 건 몬스터를 처치하는 게 가장 확실하겠지만, 현재 멀쩡한 인원은 겨우 넷. 이 정도 인원으로는 SS급 몬스터를 공략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남은 방법은, 환상 마법에 걸린 사람들이 스스로 미혹을 떨치고 정신을 차리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양태원의 힘은 기본적으로 악마와 반대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강예나처럼 마법 자체를 완전히 파훼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 마법이 악마의 악의에 가득 차 있는 이상, 사람들이 환각에서 깨어나려는 의지를 갖고 있기만 한다면 신력이 정신을 차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지금은 불길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SS급 몬스터가 언제 밖으로 걸어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퍽!
김숙자 교수가 날린 마법이 유독 심하게 날뛰던 헌터 하나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겼다.
허공에 대고 미친 듯이 마법을 난사하던 한 헌터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빨리 움직이게!”
그리고 그 근처로 김숙자 교수의 지시를 받은 백사현이 허겁지겁 달려가 기절한 헌터의 입에 포션을 흘려 넣었다.
아마 너무 심하게 난동을 부리는 이들은 기절시키되, 상처가 악화하지 않도록 저렇게 조치를 하는 모양이었다.
퍽!
꾸엑!
퍼퍽!
“아악!”
김숙자 교수의 마법에 헌터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가기 시작했다.
“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게 제일 빨라.”
백사현의 물음에 김숙자 교수가 칼같이 대답했다.
“어차피 저 정도로 미혹된 상태라면 적어도 두세 시간은 벗어나지 못하고 날뛰겠지. 괜히 날뛰게 내버려 두면 자신도, 타인도 상처 입을 뿐이네.”
‘그, 그런가?’
양태원은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마구잡이로 뒤통수를 때려 기절시키는 방법을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신력을 방출하는 데 집중하느라 대꾸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우연은 동의했다.
“그게 효율적이겠죠.”
현재 정신계 마법에 당했더라도 정신 방벽이 나름대로 견고하거나, 혹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저항하고 있는 이들은 날뛰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불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강예나를 비롯해 이선, 류세연, 김성연 등의 고위 레벨 헌터들이 그랬다.
이런 경우 시간만 끌면 스스로 깨어날 확률이 높지만, 난동을 피울 경우는 그럴 확률이 적었다.
차라리 기절시킨 후 후방으로 보내 보호하는 게 낫다.
‘물론 공략 인원이 여기서 더 줄어드는 건 뼈아프긴 하군.’
이우연은 검을 든 채 불꽃 속을 노려보았다.
양태원의 신력 버프를 받아 푸르게 타오르는 불길 속, 아른대는 인영이 보였다.
SS급 몬스터, 욕망하는 화염.
이제까지의 싸움을 지켜보며 저 몬스터가 얼마나 교활한 녀석인지는 이미 파악했다.
‘곧 온다.’
아마 지금처럼 사람들이 미혹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를 노려 공격해 오겠지.
다른 헌터들, 적어도 강예나를 비롯한 전력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는 혼자서라도 버텨야 했다.
우우웅!
왼손에 마력을 피워 올리고, 오른손으로는 검을 잡은 채 이우연은 불꽃 속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 재미있는 녀석이 있네.
육성이 아니라, 마치 정신에 직접 들려오는 것 같은 목소리.
이우연은 경계했다.
그리고 그 경계심은 옳았다.
“저, 저게 뭐야!”
불길 속에서 갑자기 길고 검은 팔이 그림자처럼 쭉, 뻗어 나온 것이다.
악몽 같은 광경이었다.
사악한 기운으로 넘실대는 거대한 악마의 손.
하늘 위로 한없이 길게 뻗은 그것을 본 이우연은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마기의 결정체……!’
일반적인 마력으로 만든 팔이 아니었다. 그건 보는 것만으로도 뇌리를 저릿저릿하게 찌를 것 같은, 악취가 풍기는 듯한 악의의 집합체였다.
콰쾅!
“이런!”
그리고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김숙자 교수가 후방에서 그 팔을 향해 마법을 날려 보았지만, 역시나 제대로 먹히질 않았다.
“제가 해 볼게요! 하압!”
주위로 신력을 방출하고 있던 양태원이 청동검을 들고 팔을 향해 기운을 방출했다.
일렁이는 신력에 닿는 순간, 검은 팔이 약간 주춤하는 듯했지만…….
- 더 이상은 위험하다, 태원아.
양태원에게만 들리는 청룡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 던전에 들어온 후 양태원의 신력 소모는 장난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신력을 계속 방출해 헌터들을 마기에서 보호하고 있었던 데다, 지금 릴리스를 불태우고 있는 불도 양태원이 신력을 계속 불어넣고 있기에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양태원의 타고난 신력과 그릇은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보아도 손에 꼽을 정도로 강대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 곧 힘이 모두 소모될 게야.
“그래도요, 청룡 님! 제가 하지 않으면……!”
양태원은 그렇게 외쳤으나, 아무리 강고한 의지가 있어도 한계는 존재하는 법.
파밧!
악마의 팔을 옥죄이려 하던 기운이 옅어졌다.
그리고 악의에 가득한 악마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쾅!
순식간에 지상을 향해 팔이 휘둘러졌다.
아직 환각에 홀린 채인 헌터들은 자신에게로 향하는 공격을 모른 채, 그대로 넋을 잃은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쾅!
“큭!”
강대한 공격을 홀로 받아 낸 이우연은 악문 잇새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 정도로 가공할 만한 위력이었다.
악의로 만들어진 팔은 노이즈처럼 지직대는 소리를 내며 이우연을 위협했다.
이우연은 그 와중에도 냉정하게 상대를 분석했다.
‘어지간한 검사는 상대가 안 되겠어.’
검술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저 팔을 감당할 만한 검이 문제였다.
이우연이 장비한 것은 레바테인이라고 불리우는 마검.
그렇기에 악마의 기운에도 잘 버티는 것이지, 평범한 검이라면 저 용암 같은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녹아 버릴 것이다.
이제까지는 그나마 양태원의 신력이 담긴 부적을 받아 일반적인 검으로도 악마들을 상대해 왔지만…….
눈앞의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여기까진가.’
슬슬 신력을 거의 다 소모했을 거란 예상은 했다.
양태원을 탓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평소에 험하게 굴리긴 했지만, 솔직히 처음으로 들어온 대형 던전인데도 이 정도면 제법 오래 버틴 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솔직하게 칭찬해 줄 생각은 없다만.
‘어떻게든 버텨야 해.’
이우연은 힐끗, 옆에 서 있는 강예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고 있지는 못했지만,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등 표정이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지금 보고 있는 환각에 의문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대로라면 얼마 있지 않아 스스로 환각 마법을 깨고 정신을 차릴 것이다. 그리고 강예나가 정신을 차리면 악마의 마법도 파훼할 수 있으니, 다른 헌터들도 깨어날 테고.
즉 강예나를 믿고 버텨 보는 수밖에.
‘……언제 이렇게까지 신뢰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분명 처음에는 강한 헌터가 어디선가 뚝 떨어졌길래, 이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 주겠다…… 그 정도 생각밖에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정말로 친구라고 해도 될 법한 사이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피차간에, 그리 바라지 않았던 달갑지 않은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도 믿는다, 강예나!’
지금은 어떻게든 해낼 수밖에!
팔을 밀어내는 검에 힘을 주며, 이우연은 굳게 버티고 섰다.
하지만, SS급 몬스터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있는 힘을 다해 공격을 막고 있던 이우연의 뒤로, 김숙자 교수가 소리쳤다.
“이우연 헌터! 앞을 보게!”
그 소리에 이우연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아하하하하핫!”
먼저 귀를 찌르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신력이 반쯤 사그라진 불꽃 속.
악마가 서 있었다.
악마는 아무것도 방해되는 것 없이 불꽃 밖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네가 레나의 새로운 동료라, 이거지?”
불길하게 반짝이는 시선이 이우연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이 무슨 교묘한 운명의 장난인지…….”
“……뭐?”
“그래도 궁금하던 차에 답을 얻었으니…… 만족스럽군.”
홀로 선문답을 하듯 중얼대던 릴리스의 시선이 문득, 강예나를 향했다.
“네가 언제 이 답을 얻을지 궁금하구나, 레나. 그리고 무엇보다…….”
탁!
릴리스가 제자리를 박차며 빠른 속도로 이우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답이 네 손에서 빠져나갔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네 얼굴이!”
‘이런!’
이미 헌터들을 향하고 있는 거대한 팔을 검으로 막고 있던 이우연은, 자신에게로 덮쳐 오는 릴리스를 분명히 인지했음에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우연이 릴리스의 공격에 대응한다면, 이 거대한 팔이 그대로 헌터들을 직격하고야 말 것이다.
그랬다간 한국 헌터들은 모두 전멸이었다.
“이우연 헌터!”
김숙자 교수의 목소리와 함께 이우연 앞으로 실드가 완성되었지만, 급하게 만들어 얇은 잠자리 날개 같은 방어막은 릴리스에게 방해조차 되지 않았다.
검은 손톱에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방어막을 보며 이우연은 각오를 다졌다.
즉사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캉!
그런데, 뜻밖에도 금속음이 쨍하게 울려 퍼졌다.
이우연은 자신 앞에 나타난 사람의 등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거기 서 있었다.
“백사현……?”
릴리스의 손톱을 막아 낸 백사현이 든 바스타드 소드에는, 희미하지만 흰빛의 광채가 돌고 있었다.
양태원의 신력이 아니라, 백사현 본인이 뿜어내는 힘이었다.
“호오…….”
그 검을 마주한 릴리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게 뭐지?”
그리고 릴리스를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한 백사현은 아주 기절할 것만 같았다.
끼긱!
릴리스의 공격을 막아 낸 바스타드 소드에 금이 가고 있었다.
이우연은 경악했다.
이대로라면…….
“뒤로 빠져, 백사현! 그러다 진짜 죽는다!”
“나도 알아!”
솔직히, 백사현은 지금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그만큼 SS급 몬스터가 뿜어내는 힘은 장난이 아니었다.
- 스킬, ‘메소드 연기’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시스템창의 메시지가 빛나고 있었다.
끼이익!
백사현은 벌벌 떨리는 자신의 손을 느꼈다.
막상 악마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여기서 도망치는 것조차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발이 굳어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망할, 망할, 젠장!’
그렇지만.
‘연기를 그만둘 수는 없잖아!’
배우 클래스의 고유 스킬, 메소드 연기.
이해한 클래스의 특성을 고스란히 자신의 몸으로 재현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그리고, 지금 백사현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아직도 머릿속에 깊이 박힌 한 장면이었다.
호수 위, 푸른 하늘을 까맣게 덮어 버린 몬스터 떼들을 일소(一掃)한 한번의 검격.
설령 재앙 같은 위험이 닥치더라도, 그저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장 앞에 나서는 사람의 모습.
‘재수 없어!’
백사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은 알고 있다.
구국의 영웅이 되겠네, 어쩌네 했지만…… 그건 사실 자신 같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백사현은 무엇 하나 특별할 게 없었다.
클래스가 배우이니만큼 아무리 검사를 연기한다고 한들 실제 능력치는 일반 검사보다 훨씬 떨어지고,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두의 앞에 나서거나 위험을 무릅쓸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에는 모든 평범한 이들이 그랬듯, 특별한 사람의 등을 바라보며 그저 열등감을 가슴에 안고 삭여야 할, 그런 평범한 인간이다.
나는 결코 그렇게는 될 수 없다.
나는 용사 같은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이니까.
“야, 방랑하는 구도자!”
그렇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 현재 당신이 연기하고 있는 배역은 ‘용사(LV.3)’입니다.
평범한 사람인 내가, 평생 쫓아갈 수 없는 자리를 올려다보기만 하는 나라도.
이 단 한순간만큼은 용사를 연기해 보이겠다.
두려워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래도 백사현은 릴리스에게 맞선 채 악을 썼다.
“정신 차려어어어!”
한심하게도 분명, 진정한 용사라면 그 외침에 대답해 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끼긱!
그때, 백사현이 그렇게 외친 순간, 있는 힘을 다해 버티고 있던 바스타드 소드가 한계를 다했다.
챙강!
옅은 광채를 두르고 있던 검이 뚝, 부러지고.
기묘하게도 약간 미소를 띤 릴리스가 팔을 휘둘렀다.
백사현은 자신에게로 덮쳐 오는 릴리스의 손톱을 보며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그의 시야에서는 그 모습이 어쩐지 느릿하게 보였다.
‘여, 역시 무리였나?!’
나름대로, 용기를 쥐어짜 나선 거였는데.
나로서는 겨우 이 한순간을 버티는 것도…….
백사현이 죽음을 각오했을 때였다.
캉!
태양만큼이나 찬란한 광휘를 두른 검.
그 검이, 막 백사현의 목을 파고들려던 악마의 손톱을 막아 내고 있었다.
그와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
“……잘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이 악마의 공격을 튕겨 낸 것이다.
백사현은 입을 벌리고 으어어…… 소리를 냈다.
“어, 어어……!”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막 죽음을 맛보기 직전이었던 터라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이제 뒤로 물러서 있어.”
그런 백사현을 제치고, 용사가 앞으로 나섰다.
익숙한 등이었다.
가면을 써서 얼굴조차 모르는데도, 눈에 보이는 등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든든하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악마는 웃었다.
“어머나.”
과연 용사란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에 반응하는 존재라, 이건가.
“이래서 네가 좋다니까, 레나.”
“닥쳐라, 릴리스.”
사랑의 고백에 살벌한 대꾸가 돌아왔다.
“감히 나를 농락한 대가를 치르게 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