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25화
“깼어?”
나는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이우연의 얼굴이었다. 반사적으로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아니, 물으려고 했다.
“……뭐…… 컥!”
하지만 이상하게도 목이 심하게 손상된 것처럼 목소리가 잘 나오질 않았다.
“켈록, 켈록…….”
내가 계속해서 기침을 하자 이우연이 등을 두드려 주며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와주었다.
“조심해. 아직은…….”
“조심은 무슨, 환자도 아니고.”
한심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말한 여자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묘지기 녀석이었다.
“그쯤 잤으면 회복할 때도 되지 않았냐? 하여튼 약해 빠져서.”
‘잤다고?’
아직 상황이 파악되지 않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어쩌다가 이우연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가 일어난 거지?
기억이 얼른 떠오르질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사람이라고는 이우연과 묘지기뿐이었다.
풍경도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거의 파괴되다시피 한 도로와 건물들. 그나마 내가 누워 있던 곳은 깨끗한 침낭이 깔려 있었지만…….
“얼른 상황 파악 좀 해라. 시스템 메시지부터 보라고.”
……일단 저 녀석이 엄청 짜증 나게 굴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어쨌든 아직 멍한 상태인 데다, 눈을 뜨기 직전의 기억이 나지 않아 묘지기 말대로 시스템 메시지를 보니…….
- 침입자 처치 수 58,123 / 50,001
- 제한 시간 01:23:11
“어?”
뭔가 이상했다.
나는 몇 번이고 눈을 비빈 후 다시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침입자 처치 수가…… 아니, 시간은 왜 1시간밖에 안 남은 거야?”
“그러다 눈 붓는다.”
이우연이 연신 눈을 문지르고 있는 내 팔을 억지로 잡아 내리며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게 맞아. 당신, 거의 반나절 넘게 쓰러져 있었거든.”
“내가? 왜?”
“그러게, 왜일까? 그건 내가 묻고 싶다. 나한테 목숨을 맡기라고 하더니만 초X이언이 되어서 튀어 나가던데?”
“……아.”
기억났다.
나는 머리를 감싸 안고 신음을 흘렸다.
왜 이렇게 전신이 심하게 두들겨 맞은 후 깊은 물속에 잠기기라도 한 것처럼 아프고 무거운지 이해가 되었다.
“맞다…… 그 또라이 같은 스킬…….”
이제야 쓰러지기 직전의 상황이 기억이 났다.
멸혼의 스킬을 사용해 릴리스를 처치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와 동시에 스킬 제한 시간이 끝난 것이다.
그리고…… 제한 시간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그대로 뻗었다.
뻗었다고 하면 웃기지만, 사실상 기절한 것이었다.
멸혼의 불꽃은 말이 좋아 동료의 힘을 빌리는 것이지, 사실상 내 육체가 감당하지 못하는 능력을 의지력으로 쓸 수 있게 만드는 스킬이기에, 한 번 쓰고 나면 후유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백이면 백, 이 스킬을 쓰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반죽음 상태가 된다.
심지어 릴리스 상대로 심력을 엄청나게 소모한 데다, 이 던전에 들어온 이후 계속 쉬지 않고 달렸으니…….
‘거의 12시간 넘게 기절해 있었던 건가.’
솔직히 12시간 만에 일어난 게 기적…….
“그냥 네가 약해 빠진 거지.”
묘지기 녀석이 코웃음을 치는 것이 들렸다.
어조에 삐죽한 가시가 돋아 있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소모되었다고 해도 그렇지, 던전 내에서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오래 정신을 잃다니.
만일 이우연이나 다른 헌터들이 없었다면 그대로 다른 몬스터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었을 것이다.
‘무의식중에 안심했나…….’
던전 공략하다 죽기 딱 좋은 정신 상태로군.
정신 차리자.
나는 내 뺨을 세게 갈겼다.
짝!
“그쪽도 너무 비꼬지만 말…… 강예나 뭐 해?!”
“와…… 나 왜 저래…….”
확실히 다소 과격하긴 했지만 뺨이 화끈거리는 게 정신이 아주 번쩍 들었다.
나는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그럼 내가 기절한 사이에 한국 헌터들끼리 몬스터를 소탕한 거야?”
시간이 12시간이나 지난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보다는 몬스터 처치 수를 만족시킨 것이 더 놀라웠다. 물론 시간이야 있었다지만 다들 상당히 피로한 상태였을 텐데.
내 물음에 이우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응? 아…… 그거야 당연하지. 다들 늦게라도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어?”
“밥값이라고? 던전이 그냥 클리어됐는데?”
나는 손도 대지 않고 코푼 격이었다. 밥값이라고 퉁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열심히 클리어한 건데.
이우연이 코웃음을 쳤다.
“SS급 보스 몹을 혼자 잡아 놓고 무슨 소리야.”
“그래 봤자 그게 던전 클리어 조건은 아니었잖아.”
그렇다.
릴리스를 잡아 봤자 던전 클리어 조건인 서울 내 과반수 이상의 몬스터 처치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냥 처치+1이 될 뿐이지.
그래서 릴리스를 처치하면서도 내내 뒷일을 걱정했었다.
이렇게 이 녀석을 죽이는 데 있는 힘을 다하면 이후에 클리어 조건은 어떻게 채우나 싶어서.
결국 클리어 조건을 채우지 못하면 죽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클리어 조건을 한국 헌터들이 알아서 채워 준 것이다.
솔직히 무척 얼떨떨했다.
이렇게 일이 잘 풀릴 거라고는, 그것도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이 모든 게 끝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생색을 좀 내. 당신 아니면 다 꼼짝없이 전멸했을 테니까. SS급 몬스터에 비하면 12시간 동안 남은 숫자 채우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이우연은 나랑 의견이 다른 모양이었다.
“아니, 그거야 뭐 상대가 상대니까…….”
릴리스의 정신계 마법은…… 어지간해서는 답이 없는 문제였다.
릴리스라는 악마가 워낙 교활하게 상황에 맞는 환상을 꾸며내기도 하고, 또 개인의 두려움을 이끌어 내는 형식의 마법을 사용하는 터라, 끔찍한 경험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심한 환각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평범한 일반인보다는 헌터들처럼 던전 공략 경험이 있는 이들일수록 릴리스의 마법에 쉽게 걸려드는 것이다.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본다, 고 하지 않던가.
나조차 그런데 한국 헌터들이 정신계 마법에 저항하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안 걸린 사람들이 신기하군.’
한번 분석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 듯했다.
짜증 나게도 릴리스의 경우, 또 언제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은 악마니까.
정말이지, 이제 그 녀석에게 당하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하여튼 그 보스 몹이 죽은 후 남은 몬스터들도 체계를 잃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해서 다들 쉽게 잡았어. 렙업하기 딱 좋은 사냥터였지.”
“그럼 너는?”
“나야 나보단 양태원 렙업이 시급하니까 걜 보낸 거지.”
‘뭔 소리야?’
이우연은 왜 사냥하러 가지 않고 여기에서 나한테 무릎베개나 해 주고 있었냐는 건데, 양태원 이야기는 왜 나온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묻기도 전에 묘지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쯧쯧.”
“……아까부터 넌 왜 자꾸 시비조야?”
내가 숨 쉬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은 태도였다.
내가 묻자 묘지기가 픽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야 마음에 안 드니까 그렇지. 너 같으면 안 그렇겠냐?”
“……그것도 그렇군.”
“거기서 또 납득하지 마라. 그게 더 재수 없거든?”
진심으로 불쾌하다는 어조. 나를 바라보는 눈길에도 호의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게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결국 저 녀석이 선택한 건…….
“…….”
나는 잠시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남은 시간은 대략 한 시간 반 정도.
어차피 클리어 조건이 채워졌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이우연.”
“응?”
“진짜 미안한데, 잠깐 자리 좀 비켜 줄래?”
이우연과도 해야 할 말이 많기는 했다.
특히나 이 멸혼의 불꽃 스킬이 발동한 순간, 페널티 항목이 이우연에게도 떴으니 설명도 해야 할 터.
하지만 지금은 이 던전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구와의 대화를 우선해야 할지는 명백했다.
“…….”
이우연이 잠시 눈살을 찌푸린 채 나와 묘지기를 번갈아 보았지만,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이제 괜찮겠지. 그래도 적당히 해.”
그리고 날개를 펼치는가 싶더니 금세 저 멀리로 휙, 하고 날아갔다. 흰 깃털 몇 개가 나풀나풀 떨어졌다.
그 뒷모습을 보며 묘지기가 눈가를 좁혔다.
“저 어이없는 스킬은 또 뭐야? 무슨 천사라도 돼?”
“글쎄…….”
“내 참…… 진짜 이상한 놈이네. 아무리 봐도…… 윽.”
파지직!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묘지기가 주위에서 일어난 스파크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닫았다.
명백한 시스템의 간섭이었다.
“■■■가…… 아니, 진짜 작작 좀 하라고!”
묘지기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스파크에 벌컥, 성질을 냈다.
나는 그런 묘지기를 제지했다.
“그만해. 네가 이우연에 대해 뭔가 전해 주려고 한다는 건 알겠으니까.”
“…….”
계속 말을 하려고 시도하던 묘지기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라고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이 녀석은 처음 이우연을 봤을 때부터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기색이었으니까. 그런데 그에 관련된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시스템의 간섭이 일어났다.
아마도 시스템 운영자가 그 정보를 내게 전달해선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그렇지만 묘지기 녀석은 몇 번이고 시도했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스파크 때문에 얼굴 주변이 온통 실금 같은 상처투성이인데도.
아마 제법 중요한 정보일 것이다.
“내가 스스로 알아낼게.”
그래도, 더 이상 저 녀석에게서 무언가를 받을 순 없었다.
저 녀석은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다 했으니까.
- 플레이어, ‘강예나’가 ‘욕망하는 화염’의 내기에 응하지 않아 내기가 종료됩니다.
그 메시지가 잊히지 않는다.
저 녀석이 나를 위해 포기한 기회가 무엇인지, 나만큼은 알고 있었다.
“동정하는 것처럼 쳐다보지 말라고.”
묘지기가 투덜거렸다.
“솔직히 마지막까지도 널 죽일지 말지 엄청나게 고민했으니까.”
“알아.”
나 같아도 고민했을 것이다.
어차피 용사 클래스 따위에는 미련도 없었다. 친구들을 구하지 못한다면 용사고 뭐고,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래도, 저 녀석의 검에는 다시 한번 광휘가 깃들었다.
“고…….”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거나 그런 말 하지 마라. 진짜 짜증 날 것 같으니까.”
“……그래.”
하기야 감사 인사도, 사과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저 고맙다고 하기엔 저 녀석이 포기한 게 너무나도 컸고,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넘기는 것도 기만 같았다.
묘지기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제 한 시간 반 남았군.”
“그러네.”
“네가 여기 온 며칠간 정말 악몽 같았어. 갑자기 내 세계뿐 아니라 타르토스도 멸망했다질 않나, 날 죽이라는 클리어 조건을 갖고 있질 않나, 한동안 제주도에 처박아 뒀던 릴리스까지 여기로 오고.”
하긴, 나도 그랬지만 저 녀석 입장에서도 폭풍 같은 며칠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자신의 잘못도 없는데 왜 이렇게까지 운명이 갈려 버린 건지 알 수가 없으니 억울하기도 했을 것이고.
아마 그리 기껍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묘지기는 뜻밖의 말을 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뭐?”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누구랑 같이 한편에서 싸우는 거, 처음이라서.”
그렇게 말하며 묘지기가 허공에 뜬 시스템 메시지로 시선을 옮겼다.
- 침입자 처치 수 58,356 / 50,001
- 제한 시간 01:11:45
지금 이렇게 우리가 대화하는 순간에도 몬스터 처치 숫자가 올라가고 있었다.
묘지기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는 거, 너무 오랜만이었어.”
“그건…….”
“그래서 나쁘지 않았어.”
콰콰쾅!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을 듣는 여자의 얼굴에 무어라 형언하지 못할 감정이 스쳤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 말을 이은 것은 묘지기 쪽이었다.
“그나저나 멸혼의 불꽃, 정말로 해금했더라. 혹시 내 도발에 넘어온 건가?”
“……넘어오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원래도 시간문제였으니까.”
“그래? 서로 정이 쌓였나 보네. 하기야…… 그런 건 가랑비에 옷 젖듯이 물드는 거니까.”
그 말대로였다.
정이니 뭐니, 그런 건 방해만 되니까 거리를 두며 지내려고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그런 내 심정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묘지기가 말했다.
“심란하겠네. 한국에도, 타르토스에도 소중한 사람들이 생겨서.”
“…….”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이야. 언젠가는 정말로 한쪽을 선택해야 할 때가 올 테니까.”
그랬다.
하도 상황이 계속 격변하기에 잠시 생각하는 것을 미루어 두고 있었지만, 묘지기 녀석이 말해 준 대로라면 앞으로 한국 쪽의 상황도 위험해질 것이다.
‘돌아가면 꽤 복잡해지겠군…….’
게다가 플레이어명도 강예나로 바꾸었으니 그에 따른 혼란도 있을 테고.
던전에서 벗어나 한국으로 돌아가면 내 신상 따위 일찌감치 까발려진 건 아닌가 모르겠다.
‘…….’
그래도 그럴 만한 가치는 있었다. 후회 따위는 한 점도 없었다.
묘지기 녀석이 어깨를 으쓱였다.
“또, 단적으로 네 몸은 하나니까 두 세계에 모두 머무를 수도 없을 거고.”
“……그건…….”
“뭐, 내 알 바는 아니다만. 내 문제도 아니고.”
“…….”
저 자식, 역시 그냥 비아냥대고 싶은 거잖아. 갑자기 약간 후회되려고 하는데…….
스릉!
하지만 내가 짜증을 내기도 전에, 묘지기가 갑자기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예기를 되찾은 에이펙스의 광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우웅!
그 손에 들린 검이 진동하며 무언가를 전하려고 하는 듯했다.
하지만 검은 말이 없다.
언제고 그 의지를 표현하는 것은 검을 쥔 사람이고, 그 사람이 취하는 행동이다.
묘지기가 내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검 뽑아.”
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저리듯이 아파서 느릿한 동작이었지만 묘지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를 기다려 주었다.
챙!
내가 검을 뽑아 맞대자 청명한 금속음이 울렸다. 그러자 맞대진 두 자루의 검이 찬란하게 빛났다.
두 자루의 검을 십자로 맞대는 것.
이건 루카스에게서 배운 기사의 의식이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해내고자 하는 것을 관철하겠다고, 서로에게 맹세할 때 치르는 의식.
성검의 광휘 아래 묘지기의 눈빛이 불타듯 빛나고 있었다.
“그래도 반드시 해내라. 두 세계 모두 구해 내.”
어쩌면 억지에 불과한 말.
불가능할 거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목표.
그렇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게.”
반드시.
그리고, 나는 이어 말했다.
“너도 해내라. 어떻게든.”
네 세계를 구해 내라.
역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있는 힘을 다하더라도 가능할지조차 의문인…… 그런 절망에 가까운 목표.
게다가 저 녀석의 상황은 나보다 훨씬 열악했다. 그렇지만 나를 통해 가능성을 본 이상,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저건 결국 나니까.
“……하하.”
내 말을 들은 여자가 씩 웃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나와 닮은 웃음이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하지만, 그래.
웃음은 언제나 절망을 극복하는 시작점이니까.
* * *
- 제한 시간 00:03:56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며 묘지기가 픽 웃었다.
“이제 정말로 갈 시간이네.”
“그러게.”
그 후, 남은 1시간 남짓한 시간 내내 우리는 이야기를 했다. 두서도 없고, 딱히 유익한 정보가 될 것 같지도 않은 말들.
마치 거울을 보며 말하는 듯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있다는 것이 달랐다. 정말이지, 온갖 던전을 다 다녀 본 나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무슨 심리 치료도 아니고.
“그럼, 몸조심해라.”
또 다른 나 자신은, 별 미련도 없어 보이는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문득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악마들과의 전투로 우리가 여기 오기 전보다 훨씬 더 을씨년스럽게 변해 버린 도시.
내가 가면 이 녀석은 또다시 이 폐허가 된 도시에 홀로 남게 되는 건가.
묘지기가 기지개를 쭉 펴며 말했다.
“네가 가면, 이제 나도 여기를 떠날까 봐.”
“뭐?”
“이쯤 되면 탈상(脫喪)할 때도 됐지.”
어딘가 홀가분해 보이는 어조였다.
“나도 우리 세계의 운명의 씨앗이든, 운영자든 찾으러 갈 거야.”
그건 나에게 말한다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결심이었다.
이제껏 죽은 자들의 도시를 기리며 머물러 있던 녀석이 드디어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 제한 시간 00:02:16
“우리의 운명은 과거 어디에선가 갈라졌지만, 앞으로의 운명은 또 모르지.”
묘지기가, 아니, 강예나가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나도 세계를 구해 내면…… 또다시 어디선가 운명이 겹쳐서 만나게 될지도.”
그건,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을 건드리는 듯한 말이었다.
잠시 누군가의 장난으로 일이 꼬여서, 우리는 우연처럼 만나게 되어 지독한 일을 겪었지만…… 그 덕에 불꽃이 사그라져 다시는 타오르지 않을 것 같던 세계에 다시금 무언가가 깃들려 하고 있었다.
작은 우연이 거대한 운명의 방향을 결정하는, 그런 순간.
기묘한 확신이 섰다.
“그래, 또 만나자.”
다른 세계의 나 또한, 역시 이 세계를 구해 내고야 말리라는.
우리는 서로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그 온기를 마지막으로.
- 제한 시간 00:00:00
-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 최대 업적자 : 강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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