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28화
“뭐 얼마나 대단한 소리를 하려고 당신답지 않게 겉치레를 하고 그래? 본론이나 말해.”
이우연이 양태원의 머리를 사과로 맞춘 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팔짱을 끼고 다시 앉았다.
그래 봤자 애 뒤통수에 사과나 던졌으면서.
“왜 애를 때리고 그래?”
“아, 지금 그게 문제야? 나한테 할 말 있는 거 아냐?”
그렇기는 했다.
“뭐, 그건 그런데.”
“역시…… 사람 헷갈리게 하지 좀 말아 줄래?”
“헷갈릴 게 있냐? 얼굴도 보고 용건도 좀 있어서 부른 건데 왜 혼자 삐져 가지고…….”
“워, 워.”
조한율이 손을 저었다.
“저야 둘이 싸우면 개이득이긴 한데, 일단 예나 씨. 용건부터요.”
“……그래, 알겠어.”
“조한율, 넌 또 뭐가 이득인데? 왜 끼어들어서 지…….”
“이우연, 부탁이 몇 개 있는데 쉬운 것부터 말할게.”
“뭐어?”
이우연이 기가 차다는 식으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당연히 내가 당신 부탁을 들어줄 것처럼 말하네. 나도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거든.”
나한테 올인했네, 뭐네 할 때는 어쩌고.
어차피 그냥 뻐기는 소리인 게 뻔해서 나는 그냥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일단 최대한 빨리 김성연 길드장이랑 자리 좀 만들어 줘.”
“……일단 한 번은 튕기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뭐라고? 김성연?”
이우연이 있는 대로 표정을 찌푸렸다.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아직 놀라기엔 이른데.”
나는 시계를 한 번 확인한 후, 이우연의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어차피 입원한 참이니 피차 시간은 많지? 오늘은 하루 종일 나랑 수다나 떨자고.”
이제, 어제 새벽 내내 조한율과 했던 회의의 결과를 이 녀석에게 납득시킬 차례였다.
* * *
어느 평화로운 월요일 아침 10시.
주말이 끝나 힘겹게 출근한 영원 길드의 신입 사원, 신우영은 상사의 눈치를 보며 잠시 핸드폰을 꺼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핸드폰을 만지는 건 금기나 다름없었지만 워낙에 할 일이 없어 한가한 데다, 출근하기 전까지 보고 있던 웹소설이 워낙 흥미진진한 부분에서 끊겼던 탓이었다.
‘아, 그래서 드래곤이 인간의 심장을 빼앗아서 뭘 어쨌다는 건데?!’
어지간한 소설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역할을 하곤 하는 드래곤이 소설 끝 부분에서 갑자기 등장했던 것이다.
결말이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현실에서도 던전이 열리고 몬스터를 사냥해야 하는 세상에 드래곤이 등장하는 웹소설을 읽는 게 웃길 수도 있지만, 신우영은 아직 갈 길이 한참 먼 초급 헌터였다.
던전 공략이라고는 C에서 D급 정도.
그래서 드래곤 같은 상급 몬스터는 아직 실제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탓에 박진감 넘치게 다가오는 소설이었다.
‘실제로 보면 엄청 무섭겠지?’
현실에서도 드래곤까지는 아니더라도 얼마 전 홍대입구역 쪽에서 이무기가 나타난 적이 있기는 했다. 그래서 한동안 교통 통제 때문에 출퇴근길이 엄청나게 밀렸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런 괴물이 나타났는데도 신우영이 느끼는 것은 겨우 그 정도의 불편이었다.
그것도 그럴 게 현실에 무서운 드래곤 같은 괴물이 나타나도 누군가가 그걸 한 방에 처리해 버렸기 때문이다.
‘뉴스로 보면 무슨 게임 같긴 하던데.’
솔직히 화면을 통해 보는 재난은 신우영에게 그다지 현실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괴물을 처리한 헌터 또한 그랬다.
‘그러고 보니까 또 제보 뜬 거 없나?’
어차피 딴짓을 시작한 김에 신우영은 웹소설 창을 끄고 본격적으로 인터넷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요새 웹소설만큼이나 신우영이 빠져 있는 것.
그건 바로 홍대에 나타난 이무기를 한 방에 처리했던 헌터, 방랑하는 구도자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는 것이었다.
‘새로운 글 진짜 많이 올라오네.’
최근 어지간한 대형 커뮤니티는 아예 방랑하는 구도자 관련 게시판을 따로 신설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게 일주일 전, 랭킹 1위는 어떤 심경의 변화인지 방랑하는 구도자라는 약간 허세가 느껴지던 플레이어 명을 ‘강예나’라는 본명으로 돌연 바꾼 것이다.
당연히 화제가 될 수밖에.
‘방랑하는 구도자도 멋있었는데. 괜히 인터넷에서 뭣도 모르는 새끼들이 까서 바꾼 거 아냐?’
검사 클래스인 신우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신우영 입장에서 강예나는 마법사 클래스가 강세인 한국에서 갑자기 나타나 당당하게 랭킹 1위를 차지한 롤 모델이었던 것이다!
심적으로 강예나의 편을 들게 될 수밖에 없었다.
뭐, 길드장인 김성연의 경우 오히려 같은 검사라 경쟁심을 느낀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신입인 신우영으로서는 딱히 와 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여튼 강한 검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
그 정도의 감각.
어차피 하늘과 땅만큼 실력 차이가 나니 경쟁심을 느낄 건덕지도 없었던 것이다.
하여튼, 갑자기 랭킹 1위의 본명이 밝혀진 덕에 이 일주일간 인터넷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강예나가 아주 특이한 이름은 아닌 탓에 동명이인들이 많아 자신이야말로 랭킹 1위다, 혹은 자신의 지인이야말로 방랑하는 구도자라는 각종 제보가 넘쳐 나기 시작한 것이다.
신우영은 그중 한 게시물을 클릭했다.
각종 제보 중에서도 특히 댓글이 많이 달린 게시글이었다.
제목 : 내 고등학교 동창 중에 강예나 있는데 얘가 현 랭1인 것 같다
내용 : 근거를 말해 보겠음.
1. 고등학교 시절에 체육을 잘했음.
일단 우리 지역은 경기도 일산.
현재 방구가 살고 있다고 추정되는 지역이랑도 들어맞음 ㅇㅇ 얼마 전 호수 공원에서도 출몰했으니까 맞을 듯.
그리고 겨우 고딩 때 체육 잘한 거 가지고? 라고 말할 수 있는데 진짜 재능충이었음.
우리 그냥 일반 사립고라서 다들 자체 0교시 하면서 내신, 수능 준비하는 학교거든? 체육 일주일에 꼴랑 2시간 있었다.
근데 거기서 뭐만 하면 다 도내 기록 세웠음. 따로 운동도 안 하는데 그냥 리얼 재능충ㅋㅋㅋㅋ
체육쌤이 맨날 너는 체고를 갔어야 했다고 말했는데, 뭐 공부도 잘하긴 해서ㅋㅋㅋ
여튼 이런 재능러가 시스템 열려도 적응 잘하지 않나? 올림픽 선수 출신 랭커도 꽤 있잖아.
2. 같이 사는 가족 없고 친구도 없음
이렇게 오랫동안 방구 정체 안 밝혀진 거 보면 방구한테 친척이나 지인 없을 거라고 추측 많았잖아.
근데 내 동창 강예나가 딱 그랬음.
원래는 할머니랑 같이 살았는데 돌아가신 지 좀 됐던 걸로 알고, 부모님이랑도 따로 살았댔음. 내가 알기로는 공부에 집중하느라 근처에 자취하는 걸로 알고 있었고. 공부 좀 잘하는 학교라 내신 관리하는 애들은 진짜 빡세게 공부했거든.
그래서 친구도 별로 안 사귐. 그냥 점심이나 같이 먹고 그랬던 걸로 앎. 그것도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연락 끊겼다고 들음. 같은 대학 붙은 애들이 입학식에서도 못 봤다고 하고.
근데 우리 대학 들어갈 때 딱 던전이 터졌단 말이지.
만약 그 강예나가 랭킹 1위라면?
대학교가 다 뭐야 그냥 헌터 하는 거지. 나 같아도 랭1 할 정도로 재능이 있으면 학교 때려치움 ㅋㅋㅋㅋ 번 돈이 얼마냐
여러모로 상황이 맞아 떨어지지 않음?
3. >>>얼마 전에 목격담이 뜸<<< 제일 중요
강예나랑 같은 반이었던 애가 얼마 전에 얘를 봤다고 함.
목격 장소는 광화문.
학교 졸업 후에 한 번도 못 봤는데 우연히 만나니까 반가워서 인사하려고 했는데, 여기부터 소름 돋음.
강예나 옆에 누가 있었는지 암?
모나미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거의 확정 아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때가 겨울이라 모나미가 얼굴 목도리로 가리고 있다고는 했는데 솔직히 모나미는 몰라보기가 쉽지 않잖아 ㅋㅋㅋㅋ 그냥 연예인인데.
당시에는 그냥 구라까지 말라고 강예나가 어떻게 모나미랑 아는 사이겠냐, 네가 잘못 본 거다 하고 넘어갔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맞는 거 같음
참고로 모나미가 강예나 짐 들어 주고 있었다고 함ㅋㅋㅋ
추천 1000개 넘어가면 졸업 앨범 인증하겠음^^추천 부탁.
- 오 이제껏 본 글 중에서 제일 신빙성 있다 일단 모나미가 나왔어 ㅋㅋㅋㅋ
└ 신빙성은 개뿔ㅋㅋㅋ 3번이 제일 신빙성 없다 모나미가 왜 =3 짐을 들어 줘 호구냐?
└ 랭1 짐인데 들어 줄 수도 있지
└ 모나미도 랭2거든?
- 목격 장소도 광화문이네 모나미 광화문 사는 거 아는 사람만 아는 건데
└ 그러는 너는 어떻게 앎?
└ 이웃 주민임ㅋㅋㅋㅋ모나미가 기자들한테 개지랄하는 거 실시간 관람함ㅋ
- 고딩 때부터 자취했으면 돈 없는 집은 아닌 듯? 부럽네 ㅅㅂ
└ ㅁㅈ 게다가 사립고면 뭐 ㅋㅋㅋ 집에 돈도 있고 본인은 랭1이고? ㅋㅋㅋ이야 개부럽네 인생 개꿀일 듯
- =3랑 모나미 둘이 사귐? 왜 이렇게 목격담마다 붙어 다녀
- 나도 동창인데 인증해도 되나? 내가 생각하는 걔 맞으면 부모님 둘 다 직업도 좋음 ㅋㅋㅋ 그래서 친구 가려서 사귄다고 뒷담 좀 나옴ㅋㅋㅋ
- 썰 풀리는 거 보니까 인생 졸라 탄탄대로였겠네 사립고 출신에 공부 잘해 체육 재능러야 현 랭1ㅋㅋㅋㅋ
- 읽어 보니까 근데 상황은 잘 맞아떨어지긴 한다. 얘 말고도 오늘 추측글 올린 다른 애도 같은 학교인 것 같은데 인증 때림 ㅋㅋㅋㅋ이 정도면 학교는 확정인 듯?
└ ㅁㅈㅁㅈ 오늘 본 글 한 열 개는 되는데 다 같은 학교인 것 같음 저 학교 학생 수 많네ㅋㅋㅋㅋ
└ 나도 그 고등학교 출신인데 내 생각이 맞으면 강예나 좀 유명했어서 그런 듯ㅋㅋㅋㅋ 같은 학교 출신이면 다 알 걸?
└ 헐 궁금해 썰 풀어 줘
- 근데 니네 이렇게 함부로 썰 풀다가 랭1한테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써방이라도 해
└ 설마 동창을 고소하려고 ㅋㅋㅋㅋㅋ
└ 써방명이 방구인데 써방명을 쓰는 게 더 위험하지 않아? 나 같으면 방구라고 쓴 사람 다 죽일 거임
└ 킹치만 ‘방’랑하는 ‘구’도자잖아ㅠㅠㅠㅠ 어떻게 다른 써방명을 정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3=3=3=3=3
- 방랑하는 구도자님 팬 카페에서 미리 성지 순례 왔습니다 그리고 모욕 발언은 다 PDF 따놓을 거임ㅇㅇ
- 방랑하는 구도자님 모교 투어 만들어 줘 나 갈게
그러고도 댓글은 한참이나 길게 이어졌다.
‘이 새끼들, 이거 그냥 악플 아냐?’
이미 반쯤 강예나의 팬이 된 신우영은 순간 욱하고야 말았다.
이 자식들이 고마운 줄도 모르고.
‘구해 줄 가치도 없네, 이놈들!’
찬양할 때는 언제고 신상이 좀 특정되기 시작하니 깔 거리를 찾는 모습이란.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인증이 넘쳐 나는 댓글이 흥미진진하기도 했다.
‘뭐야? 그래서 왜 유명했는데?’
그렇게 신우영이 한창 신나게 댓글을 구경하고 있었을 때였다.
“신우영 씨.”
“헉, 넵!”
갑작스럽게 상사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신우영은 하마터면 딸꾹질을 할 뻔했다.
상사는 신우영을 건너다보지도 않고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딴짓하는 건 좋은데 길드원이 오면 바로 장비를 내줄 수 있게 재고 파악은 해야 합니다.”
“네, 넵! 죄송합니다!”
“정 할 일이 없으면 마력 구슬 개수가 충분한지 한번 확인하고 오세요. 10시 반부터는 슬슬 길드원이 들르곤 하니까요.”
“아, 넵! 알겠습니다!”
기합이 바짝 들어간 채 신우영은 핸드폰을 얼른 주머니에 집어넣고 구슬 개수를 확인하기 위해 창고로 들어갔다.
창고 안에는 각종 아이템이 즐비했다.
신우영은 늘어선 장비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휴, 지루해.’
물론 아무리 헌터라고는 해도 영원 길드처럼 앞날이 창창한 대형 길드에 들어온 것은 여러모로 행운이 맞았다.
신우영도 처음에는 영원 길드에 입사한 만큼 자신의 앞날은 창창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각종 지원을 받아 던전에 들어가고, 순조롭게 업적치를 쌓아 운 좋게 한몫 단단히 잡는 상상.
아마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복권 당첨과 마찬가지로 헌터가 되어 일확천금을 얻는 꿈을 안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누구라도 헌터가 될 수 있는 만큼 복권 당첨보다는 약간 더 현실성이 있어 보이기도 했고.
하지만 신우영이 입사해서 처음 맡게 된 일은 생각과는 달랐다.
멋지게 던전 공략을 하는 게 아니라, 영원 길드 내의 아이템을 보관하는 창고를 지키는 담당이 된 것이다.
물론 이것 또한 중요한 업무기는 했다.
길드 내에 아주 중요하고 값비싼 무기나 아이템은 보관하지 않지만, 그래도 값나가는 것들이 상당히 많았으니까.
그러나 당장 막 헌터가 되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고 싶은 열의에 찬 신입 사원에게는 역시 영 심심한 업무기도 했다.
‘나도 하면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이야.’
이렇게, 요렇게.
슉슉!
마력 측정 구슬을 든 채 신우영은 화면에서 보았던 강예나의 공략 영상을 흉내 내 보았다.
그 빛나는 검, 진짜 멋있었지.
한 번 휘두르니까 빌딩만 한 레비아탄이 푸슉! 하고 바다로 쓰러지고.
휙! 하고 찌르면 이무기가 단숨에 두 쪽으로 갈라졌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물론 강예나와 레벨 차이는 까마득하겠지만, 그래도 신우영 또한 검사로서 제법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래도 영원 길드에 뽑힐 정도는 되니까.
혹시 어디 던전에 들어가서 운 좋게 그런 검을 얻는다면 나도 지금 당장…….
“시, 신우영 씨!”
신우영이 홀로 몽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밖에서 신우영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우영은 곧 정신을 차렸다.
“네, 넵! 지금 가겠습니다!”
방금 전까지 들고 생쇼를 하고 있던 마력 구슬을 안은 채 신우영은 허겁지겁 창고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
땡그랑!
신우영이 안고 있던 마력 구슬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저런…… 저거 비쌀 텐데.”
그리고 그 광경을 본 청년이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얄밉게 말하는 얼굴은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뉴스든 광고든, 한국에 시스템이 열린 이후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가 지겹도록 보았던 사람.
“이, 이우연 헌터님!”
신우영은 깜짝 놀라 그렇게 외쳤다.
그랬다, 이우연이었다.
현재 랭킹 2위이자, 신우영이 얼마 전에 입사한 영원 길드의 간판인 헌터.
마치 연예인을 아주 가까이서 본 것 같았다.
가슴이 다 벌렁거렸다.
‘와, 속눈썹 엄청 길어!’
사진이나 영상으로 많이 보기는 했는데 실물이 훨씬 더 섬세하고 잘생겼다. 딱히 꾸민 것 같지도 않은데 얼굴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유명인을 만난 충격에 신우영은 쉽사리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어, 무, 무슨 일로 여기에…….”
“……이우연 헌터‘님’?”
어이없다는 게 확연히 드러나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잠시 신우영을 바라보고 있던 이우연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신우영의 시선도 이우연을 따라갔다.
“이우연 너, 밖에서 ‘님’ 소리 듣고 다니냐?”
처음 보는 여자가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이우연을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영원 길드에 입사한 이래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데 모아 높게 묶은 긴 머리카락에 예쁘장한 얼굴이 먼저 눈에 띄었는데, 잘 보니 여자의 목에는 영원 길드를 출입할 때 사용하는 손님용 패스가 걸려 있었다.
아마도 이우연이 데려온 손님인 듯했다.
광고 찍을 때 알게 된 연예인이라도 되나?
하지만 그렇다기엔 눈빛이 엄청나게 매서웠다. 절로 사람을 위축시킨다고 해야 할까? 앳된 얼굴인데도 기묘하게도 위압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 일반인은 아닌 것 같은데…… 헌터인가?’
이우연이 여자를 향해 억울하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설마. 내가 그럴 것 같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길드 내에서는 떵떵거리면서 다닐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아니라고.”
“뭐 하긴 좀 떵떵거리고 다닐 수도 있지. 그래도 님 자는 너무 갔다.”
‘저거 시비 거는 건가? 놀리는 건가? 친한 거 같긴 한데.’
둘의 대화를 들으며 신우영은 혼란스러워졌다.
“참 나…… 저기요. 그쪽이 설명하시죠. 제가 언제 님 자 붙여서 부르라고 했어요?”
“아, 아뇨!”
자신에게로 돌아온 이우연의 화살에 신우영은 깜짝 놀라 고개와 두 손을 동시에 내저었다.
“제가 말이 잘못 나온 겁니다. 제가 신입이라서!”
“아, 신입이로군.”
그리고 신우영은 그제야 이우연의 뒤에 누군가가 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얼굴을 본 신우영은 이번에야말로 새파랗게 질렸다.
이우연을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기, 기, 길드장님…….”
그랬다.
신입 사원으로서는 딱히 마주칠 일도 없는, 영원 길드의 길드장인 김성연.
그가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서 있었던 것이다.
‘맙소사.’
마치 호랑이를 앞에 둔 토끼처럼 신우영은 단숨에 졸아 붙어 버렸다.
그 와중에 이우연이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나저나 저건 일단 수리를 시도해 봐야겠네요. 그렇죠, 팀장님?”
“아, 예.”
신우영의 상사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신우영은 그제야 자신이 떨어트린 구슬이 깨졌다는 것을 깨닫고 새파랗게 질렸다.
과연, 바닥에는 구슬이 깨진 조각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엄청나게 비싼 아이템인건 둘째 치고, 하필이면 김성연 길드장에 이우연 헌터 앞에서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지르다니!
‘난 끝났다…….’
이대로 잘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대기업 사장 앞에서 실수를 저지른 신입 사원. 지금 신우영이 바로 그 처지였다.
살짝 눈물까지 핑 돌 정도였다.
‘이대로 영원 길드에서 잘리고 헌터계에서 추방당하면 어떻게 하지?’
강예나처럼 멋지게 몬스터를 처치하던 망상은커녕 온갖 비관적인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신우영은 살짝 손을 떨며 바닥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제가 지금 바로 주워서 수리를…… 사비로라도…….”
하지만 신우영이 허리를 굽혀 구슬을 줍기도 전에, 먼저 이우연 옆에 있던 여자가 조용히 깨진 구슬 조각 하나를 주워 들었다.
그걸 본 이우연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다 손 벤다.”
“내 손이 이깟 걸로 베이겠냐.”
이우연의 만류를 쉽게 뿌리친 여자가 막 조각을 주우려던 신우영의 손을 잡아 말렸다.
“그쪽은 손대지 말고요. 베일 수도 있으니까.”
“어, 그렇지만…….”
“그렇게 당황하지 않아도 돼요. 이런 타입의 마력 구슬은 산산조각 나도 마력만 주입하면 얼마든지 복구되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그쯤이야 신입인 신우영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만한 마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흔하냐고!’
말이 쉽지, 깨진 아이템을 복구하기 위해 필요한 마력은 무척이나 방대했다.
게다가 그쯤 마력을 소모하면 회복하는 데도 오래 걸리고.
지금 깨진 구슬을 복구하려면 적어도 레벨 30은 넘는 마법사여야 할 텐데, 그 정도의 마력을 소유한 플레이어를 이깟 수리에 고용하느니 그냥 새로 아이템을 사는 게 나을 정도였다.
‘대, 대출이라도 받아야 하나…….’
신우영이 어두운 앞날에 눈앞이 깜깜해졌을 때였다.
화아악!
눈앞에서 무언가 강렬한 빛이 번쩍였다.
그 빛에 눈을 잠깐 감았다 떴더니…….
“자, 다 됐네요.”
여자가 감쪽같이 수복된 구슬을 신우영에게 내밀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기는 했지만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 그래도 또 떨어트리면 안 되는데.”
여자가 신우영의 떠는 손을 꽉 잡고 구슬을 건네주었다.
신우영은 건네받은 구슬을 살펴보았다.
‘맙소사.’
보고 있는데도 믿기지가 않았다.
깨진 자국 따위는 전혀 남지 않은, 완벽한 구슬이었다.
‘대, 대마법사라도 되나? 이번에 길드로 스카우트한 마법사?’
“어? 굳은살이 있네. 검사예요?”
정체 모를 대마법사가 말을 걸었다.
신우영은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으로 대답했다.
“네, 네…… 검사입니다…….”
“그렇구나. 같은 검사였네.”
“네…… 네?”
“앞으로도 힘내요.”
화이팅!
여자가 다정하게 신우영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 김성연 길드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여기 있는 장비를 내가 직접 확인하란 건가?”
방금 전 신입인 신우영에게는 나름 예의 바르게 격려했으면서, 길드장인 김성연에게 하는 태도는 어쩐지 격의가 없다 못해 어딘가 적대적이었다.
신우영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대마법사라고 해도 그렇지, 김성연 길드장쯤 되면 헌터계의 가장 큰 인물 중 하나인데 저런 태도를……?
“아니, 물론 아니지. 실례했군. 목록을 받아 갈 생각이네. 그걸 보면 되겠나?”
여기서 한 번 더 놀랐다.
맹세코, 신우영은 김성연 길드장이 저렇게 공손히 누군가를 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뉴스나 인터뷰에서도 언제나 자신만만하게 굴던 김성연이 심지어 앳되게까지 보이는 헌터에게 저렇게 예의 바르게 대하다니……?
‘대체 누구야?’
“그럼 볼일은 다 끝났네.”
김성연이 상사에게서 장비 목록을 받는 것을 보며 이우연이 여자의 어깨에 친근하게 팔을 둘렀다.
“우린 먼저 가 있을까?”
“야, 좋은 말로 할 때 팔 내려라.”
“아, 왜? 내가 눌러서 키가 줄어들까 봐?”
“……네가 덜 맞았지?”
그리고.
퍽!
여자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주먹으로 이우연의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상당히 아파 보였다.
이우연이 고개를 숙이고 맞은 부위를 문질렀다.
“아, 강예나 주먹 진짜 세다…….”
어?
신우영은 눈을 깜박거렸다.
방금 이우연이 뭐라고……?
“시끄러워. 다 된 건가?”
그 물음은 김성연을 향한 것이었다.
목록을 받아 든 길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됐네. 이제 그만 가지. 이우연 헌터, 자네도 올 거지?”
“네, 네. 물론이죠. 가자, 강예나.”
“그래…… 수고하세요.”
여자가 고개를 까딱, 하고 신우영과 상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 어어…….”
놀라움에 입이 떨어지지 않는 신우영과 눈이 마주치자 여자가 씩, 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위로하는 것 같은 다정한 미소였다.
“별거 아닌 실수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않으면 좋겠네요. 그럼, 이만.”
“…….”
그렇게 폭풍이 지나간 후.
“도대체 이게 무슨 실책입니까…….”
신우영은 상사에게 혼나면서도 금 간 곳 하나 없이 깨끗해진 구슬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오늘부터 진짜 팬 카페 가입한다……!’
* * *
“이렇게까지 해 줄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영원 길드의 최상층.
김성연이 사용하는 사무실로 안내받은 나는 그렇게 말하며 김성연과 마주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현재 영원 길드가 소유하고 있는 아이템의 목록이 늘어서 있었다.
이우연을 통해 요청한 사항이긴 했지만 이렇게 순순히 내줄 줄은 몰랐는데.
김성연 길드장이 내 앞으로 직접 탄 차를 내밀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귀한 분이 찾아오셨는데 당연히 내가 대접해야지.”
나는 내밀어진 찻잔을 바라보았다.
딱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세공이 들어간 찻잔에, 잘 우려진 찻물이 찰랑였다.
김성연이 웃으며 손짓을 했다.
얼마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호의 어린 태도.
“어서 들게나.”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몬스터랑 바꿔치기 된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