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40화
팟!
온통 눈으로 덮인 땅을 밟을 때마다 얼음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방한구 아이템을 착용했는데도 아무것도 없는 눈밭을 거의 다섯 시간째 달리고 있자니 엄청나게 추웠다. 잠깐이라도 발을 멈추면 그대로 얼어붙을 것 같은 온도.
아주 잠깐이지만 그냥 하룻밤 자고 올 걸, 하고 후회했다. 아무래도 밤에는 더 춥기 마련이라.
그야말로 사람은 살기 힘든 사해(死海)의 설원이었다.
- 몬스터가 출현하였습니다.
- C급 몬스터 : 눈도마뱀
파파팟!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몬스터들이 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만,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도망가는 것이다.
‘여기 오기 전에 능력치를 어느 정도 회복해서 다행이다.’
현재 내 능력치는 레벨 50대 정도.
C급에서 D급 몬스터들은 지능이 뛰어난 야생 동물과 마찬가지라, 이 정도 능력치쯤 되면 알아서 슬슬 피해 가기 마련이다.
덕분에 그나마 편하게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A급 이상 몬스터들은 안 보이는군.’
일리아스가 협곡에서 살고 있다면 그가 몬스터들을 쫓아낸 걸까?
그럴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쯤 되는 강대한 흑마법사라면 평소에 뿜어대는 마력만 해도 살아 있는 몬스터들에게는 일종의 위협이 된다.
그래서인지 설원을 지나 협곡이 있는 곳으로 근접해 갈수록 몬스터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게다가 예전에 비하면 한참 약한 등급의 몬스터들만이 보였다.
하지만 몬스터가 예전에 비해 많이 사라졌다고 해도 여전히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아니었다.
빛이라고는 하늘의 달과 별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과 가혹한 추위, 눈이 쌓인 척박한 대지.
외롭다고밖에 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일리아스는 이런 곳에서 몇 년째 살고 있단 말이지.’
일리아스가 아무리 네크로맨서라고 한들 주거 공간의 취향이 일반적인 사람들과 아주 다른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먹을 건 먹고, 잘 때는 자야 하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도저히 살지 못할 것 같은 오지에서 홀로 살고 있다니.
내가 곁에서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게다가…… 내가 타르토스를 떠난 지도 거의 10년은 넘게 흘렀잖아.’
그랬다.
지난 던전에서 알리시아를 만났을 때, 알리시아는 갑자기 사라진 나를 몇 년 동안 찾아다녔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 어린아이였던 페트라가 이렇게 장성한 걸 보면…… 정확한 시간은 몰라도 대한민국으로 치면 금수강산이 한 번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딱히, 친구들이 나를 잊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 그럴 수도 있으려나?’
생각해 보면 그랬다.
물론 우리가 거의 몇 년을 동고동락했고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기는 했지만, 타르토스에서 시간을 보내 왔던 동료들 입장에서는 이미 십 년도 넘게 흐른 과거의 일 아닌가.
나에게는 친구들이 추억이 될 정도로 시간이 흐르지 않았지만, 일리아스에게는 어떨지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예전에 친했지만 지금은 연락이 끊긴 동창이 갑자기 나타나는 느낌일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좀 우울하다.
‘그건 그거대로 어이없겠다.’
연락이 끊겼던 동창이 말하길 갑자기 세상이 멸망할 것 같고, 그 멸망에 네 죽음이 관련되어 있으니 너를 지켜 주겠다…… 고 찾아오면 어떨까.
한국식으로 보자면 어, 저 친구가 못 본 새 이상한 종교에 빠졌구나…… 할 일 아닌가.
심지어 지금 나는 페트라의 몸을 빌린 상태고.
무슨 말을 해도 신용도가 없을 만했다.
알리시아야 워낙 단순한 데다, 기본적으로 생각이란 걸 안 하고 감으로 판단한 다음 그걸 덥석 믿어 버리는 성격이라서 나를 알아보고 내 말도 믿어 주었다지만…… 남매라도 일리아스는 상당히 염세적이고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만일 알리시아가 자신의 경험담을 일리아스에게 말했다고 한들 ‘꿈이라도 꿨어? 가서 세수나 해.’라고 말할 법한 성격이다.
……생각해 보니 열 받는데?
‘안 믿어 주면 그냥 패자.’
알리시아도 나한테 한 방 먹으니까 정신 차리던데, 일리아스도 한 대 때리면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차오르는 걱정을 발 아래로 밀어 넣어 눈밭에 던져 버렸다.
내 불안함 따위는 사소한 것이었다.
설령 일리아스가 나를 과거에 친했던 친구 정도로 여긴다고 한들 그게 대수인가.
걔는 내 가족이고, 내가 구하고 싶으니, 그거면 된 거다.
“……여긴가.”
그렇게 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벗 삼아 달린 지 몇 시간째.
나는 드디어 멈추어 섰다.
눈앞에 익숙한 지형이 보였다. 타르토스에서 용병으로 구르던 시절에 몇 번 와 봤던, 사해의 협곡 지대였다.
깎아지를 듯 높은 얼음 산 사이에 좁은 길이 보였다. 사람 하나가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법한 넓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 사이로 발을 옮기려 했을 때…….
- 몬스터가 출현하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몬스터 출현 메시지가 떴다. 진작 협곡 주위에서 풍겨 나오는 마력을 느끼고 있었던 나는 혀를 찼다.
그리고 높은 절벽 위, 무언가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그곳에는…….
- S급 몬스터 : 아이언 골렘
얼음으로 만들어진 듯,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거인이 서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덩치의 몬스터가 협곡 위에 서 있으니 어마어마한 압박이 느껴졌다. 두르고 있는 마력도 무시무시했다.
발치에 검은빛의 기운이 회오리처럼 맴돌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덜그럭!
- A급 몬스터 : 해골 병사
- A급 몬스터 : 해골 병사
- B급 몬스터 : 해골 궁수
- B급 몬스터 : 해골 궁수
에러가 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수백은 될 듯한 몬스터 메시지가 중복으로 떠올랐다.
숱한 언데드 몬스터들이 협곡 위에 나타나 앞에 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알이 없어 텅 빈 동공 수백 개가 이쪽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 섬뜩했다.
나는 골렘과 해골 병사들을 올려다보며 허리춤에 맨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검을 뽑지는 않았다.
몬스터들의 정체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것은 일반적인 몬스터가 아니었다.
‘일리아스의 소환수…….’
네크로맨서의 무서움은 본인이 마법에 능통하다는 것뿐 아니라, 저렇게 시체를 이용해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졸(卒)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에 있었다.
본인의 마력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는 이론상 무제한으로 복제가 가능하다.
그리고 지금 협곡 위로 보이는 해골 병사만 해도 수백 체.
게다가 상위 언데드인 아이언 골렘까지.
아마 타르토스 전 대륙을 뒤져도 이렇게 강한 흑마법사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문제는, 그 강력한 언데드 몬스터들이 지금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건데…….
‘저걸 쥐어 패면 일리아스가 나오려나?’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달그락!
협곡 안에서 해골로 된 언데드 몬스터가 하나 비죽, 고개를 내밀었다.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머리 위에 어설프게 뜨개질한 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살기가 느껴지지 않아 가만히 있었더니 모자를 쓴 해골이 고개를 까딱, 거리며 내게로 뼈로 된 팔을 뻗었다.
공격적인 모습이 아니라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는 것 같은 모양으로.
‘아, 설마?’
문득 깨달은 나는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그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달그락!
편지를 건네받은 해골이 잠시 그것을 살펴보는가 싶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협곡 위의 절벽을 빼곡히 채우고 있던 해골 병사 무리가 일제히 모습을 감췄다.
아이언 골렘 또한 제자리로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그야말로 장관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긴 루카스가 자기 부하를 보내는데 공격당하게 뒀을 리가 없나.’
편지에 특수한 처리라도 해 놓은 모양이었다.
모자를 쓴 해골이 편지를 돌려주더니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였다.
잠시 망설였지만, 나는 해골을 따라가기로 했다.
좁은 협곡 사이의 길을 지나며 고민이 깊어졌다.
이제 곧 일리아스를 만나는 건가.
생각보다 별 고생 없이 만나게 된 건 다행인데.
‘은의 장막은 해제해야 하나? 아니면…….’
그게 고민이었다.
페트라로서 행동하라는 제약이 걸려 있으니만큼 사실 가면을 벗고 싶지는 않았다. 상대방이 나를 페트라라고 인식하면 더 행동의 제약이 심해지는 것 같아서.
그러나 일리아스는 원래 의심이 많은 성격이다. 게다가 내 마지막 기억으로 일리아스의 레벨은 나와 비슷했고, 지금 부리는 소환수의 숫자를 보면 레벨이 더 높아졌을 확률이 컸다.
레벨이 그 정도로 높아졌다면 은의 장막이 가지고 있는 은폐 효과는 거의 먹히지 않을 게 뻔한 데다,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가면을 벗고 페트라로 행세하자니 기억을 이어받지 못해 그건 그것대로 자신이 없고…….
달그락!
어느새 해골을 따라 협곡에 깊숙이 들어갔을 때였다.
모자 쓴 해골이 갑자기 멈추는가 싶더니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를 돌아보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뭐지?”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해골은 제 머리에 쓰인 어설픈 모자를 벗어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이거 나 가지라고?”
고개를 저어 부정한 해골이 빈손을 까딱까딱 흔들며 제 척추뼈를 만졌다.
“아…….”
나는 그제야 눈치를 챘다.
해골이 모자를 내게 주었듯이 나도 몸에 가지고 있는 것, 그러니까 무기를 달라는 뜻이었다.
아무리 루카스의 부하라고는 해도 해검(解劍)은 해야 한다 이건가.
납득할 수 없는 일은 아니라 나는 허리에 찬 검과 모자를 같이 건넸다.
우우웅!
물론 졸지에 남의 손에 넘어가는 꼴이 된 에이펙스의 광검이 몸을 떨며 약간 항의를 했지만, 이번에는 파트너의 의지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파사삭!
광검을 받아 들려던 해골 병사의 손이 부서져 내렸다.
챙그랑!
해골이 눈알이 없는 구멍만 남은 동공으로 얼음 바닥에 떨어진 검을 바라보았다.
아, 이런.
그러고 보니 흑마법사의 마력과 내 에이펙스의 광검은 상극이었지…… 오랜만이라 깜박했다.
“아, 됐어. 그만해.”
해골이 부서져 내린 손으로도 계속해서 검을 들려고 하기에 말렸다.
아무래도 지능은 없는, 명령 수행만을 목적으로 하는 언데드 몬스터라 상황 판단력은 떨어진다.
“자.”
내가 아이템창에서 대충 가죽 비슷한 것을 꺼내 광검을 감싸 건네주자, 그제야 버틸 만한지 해골이 팔로 검을 꼭 안아 들었다.
우우웅!
언데드의 품에 안긴 광검이 짜증으로 몸을 떨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광검의 빛에 부서져 내린 해골의 손은 빠르게 복구되었다.
‘언데드는 저게 무섭지.’
네크로맨서가 만들어 낸 몬스터는 사령술사의 마력이 남아 있는 한 끊임없이 복구된다.
말 그대로 좀비와도 같은 생명력.
그리고 상극인 기운에 제 몸이 부서지더라도 상관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복종.
그렇기에 사령술사는 상대하기 까다롭다.
반대로 말하자면 사령술사에게는 그만큼 든든한 존재고.
“……모자 까먹지 말고.”
나는 해골의 맨질맨질한 머리에 모자를 씌워 주었다.
검을 껴안은 해골이 모자를 쓴 채 다시 덜그럭대며 좁은 길을 나아갔다.
그대로 해골의 안내를 받아 따라가니 얼마 있지 않아 약간 넓어진 공간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그 얼음 수정의 꽃이 묻힌 채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불을 피운 흔적도 군데군데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이다.’
창문 사이로 약간의 불빛이 비쳤다.
마을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회색빛 돌을 쌓아 만든 단출하고 작은 집이었다.
검을 안은 해골이 팔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들어가라고?”
끄덕.
해골은 검을 꼭 껴안은 채 나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힌 후, 문 옆에 섰다.
검을 들고 저기에 서 있을 모양이다.
나는 잠시 집의 외관을 바라보았다.
두근.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온기가 퍼졌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푸른 불이 타오르고 있는 난로였다.
특이하게도 장작이 없는데 계속해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아이템이나 마법을 사용한 것이겠지. 덕분에 얼음 협곡 한복판에 있는 집인데도 구석구석 훈기가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입구를 등진 채 난로를 향해 놓여 있는 푹신한 소파가 하나.
그 소파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내게서 등을 돌린 채 불빛을 쬐고 있었다.
“……잠시만 거기서 기다려 주겠니? 불을 피우지 않은지 오래되어서.”
익숙한, 다정한 목소리.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약간 울컥하고야 말았다.
내가 말없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이상했는지, 소파에 앉은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얼굴이었다.
옅은 회색빛이 감돌기 시작한 금발에 갈색 눈동자.
내가 기억하던, 전체적으로 까다롭고 예민하던 분위기는 그대로였지만, 세월이 흘러서인지 눈매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마치 전장에서 은퇴한 병사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 언젠가는.’
언젠가는 이런 모습을 볼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시간이 흐르고 같이 늙어 가면 어떻게 살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니까.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간다…… 그렇게 생각했으니.
그런데 이렇게 나를 두고 홀로 시간을 보낸 일리아스의 모습을 보니…….
‘뭔가, 나 혼자 동떨어진 듯한 기분이…….’
“페트라, 무슨 일이야?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서 있기만 하고.”
그때 일리아스가 말을 걸었다.
나는 움찔했다.
‘아는 사이였나?’
그건 예상하지 못했다.
일리아스는 클래스의 특수성 때문에라도 남들과 어울리기 힘든 터라 우리들 외에는 쉽게 인연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쩐지 들어오자마자 다정하게 맞이하더라니, 페트라와는 구면인 모양이었다.
일리아스가 나를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얼굴에 쓴 그 이상한 건 뭐야? 수도의 새로운 유행이니?”
역시 은의 장막은 한번에 꿰뚫어 보는군.
“……음, 네…… 아마?”
“기사가 되려면 네, 아니오로 대답해야지. 얘도 참…… 유행이고 뭐고 벗어. 간만인데 얼굴은 봐야지.”
어딜 보나 한참 어린 애를 대하는 말투였다.
하기야 페트라와 스무 살은 더 차이가 날 테다.
“……네.”
나는 어색하게 은의 장막을 해제해 손에 들었다.
일리아스가 눈썹을 찌푸린 채 가면을 해제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친한 사이라니, 대체 어떻게 연기를 한다…….
내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일리아스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