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47화
나는 잠시 말을 잃고 아리아드네를 지켜보았다.
아리아드네의 모습을 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흰 신관복 사이로 물결치는 긴 금발이 쏟아져 내렸다.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좀 더 세월이 지난 얼굴이었지만, 선한 빛의 녹색 눈동자는 여전했다.
“성녀님!”
페트라가 성주의 몸을 껴안고 아리아드네에게 애원했다.
“제발, 제발! 주군을…….”
아리아드네가 어두운 얼굴로 페트라의 품에 안겨 있는 성주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대어 축 늘어진 성주에게 성력을 불어넣었다.
팟!
찬란한 흰빛이 성주의 몸에 물들었다.
이윽고 아리아드네가 성주의 얼굴에 씌워져 있던 철가면을 벗겨 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성주가 무언가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면을 벗기고 드러난 얼굴은 생각보다도 훨씬 심해 보였다. 얼굴의 반쯤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성주가 눈을 뜨고, 드러난 파란 눈동자.
그 눈만큼은 아무리 얼굴이 변했어도 알아볼 수 있었다.
의심할 여지없는, 루카스였다.
‘……그러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처음 유령의 성에 갔을 때, 첨탑 위에서 성주와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설마 그곳이 타르토스였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어째서 깨닫지 못했을까.
그때 루카스의 정체를 알아차렸든 아니든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아리아드네가 루카스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요, 루카스 님…… 제가 너무 늦었군요.”
“아리아드네로군.”
그리운 친우를 본 루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시나마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늦었군.”
“……사과밖에 드릴 말씀이 없어요.”
“아니, 내가 사과를 받을 입장은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막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루카스가 페트라에게 눈짓을 했다. 그 눈짓의 의미를 알아차린 페트라가 루카스의 몸을 부축해 앉도록 일으켰다.
“주군, 어서 몸을 피하셔야…….”
그러나 루카스는 고개를 저었다.
“페트라, 너는 나를 두고 이곳을 떠나라.”
“주군!”
“어서.”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엄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페트라가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하지만…… 전하, 저는 기사입니다. 주군마저 지키지 못한다면 제겐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너는 기사이기 전에 한 인간이다. 그리고 난 네 주군이기 전에 너를 키운 부모이고.”
그 말에 문득, 페트라의 기억 한 장면이 떠올랐다.
유령성을 공략한 후 보았던 성주와 페트라의 한때.
그때 내가 마치 부모와 자식 같은 모습이라고 느꼈던 것은 틀리지 않은 듯했다.
페트라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제가 어찌 감히 전하의…….”
“난 네가 살아남길 바란다. 그러니 가라. 이게 내 마지막 명령이다.”
“싫……!”
“가라. 어서.”
그렇지만 루카스의 말에도 페트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리아드네가 입을 열었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제가 이후 저 아이의 신병을 맡겠습니다, 루카스 님.”
아리아드네의 말에 루카스가 고개를 돌렸다.
루카스의 눈에는 어느새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아리아드네, 물어볼 것이 있다.”
“말씀하세요.”
“몇 년 전, 시스템의 힘이 갑자기 약화되었다. 몇몇 인물을 제외하고 모두가 갑작스럽게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지. 덕분에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고, 나는 본래라면 당하지 않았을 독에 당해 이 꼴이 되고 말았어.”
루카스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시스템의 힘이 약화되었다니…….
‘아니, 잠시만.’
그러고 보면 유령성의 정황은 이상했다. 스킬이나 마법을 쓸 때 사람들이 ‘힘을 되찾은 것이냐.’라고 물었다.
데이먼은 기적이라도 배워 왔냐고 물었었고.
그 당시에는 정보에 필터링이 걸려 있는 데다, 어차피 흘러간 과거의 일이니만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신전의 짓이냐?”
그렇게 묻는 루카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몸이 반쯤 썩어 들어가는 와중에도 총기를 잃지 않은 눈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아리아드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이미 대답이었다.
그러자 페트라가 격분했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신전이 우리에게서 힘을 빼앗았단 말입니까?”
“이전부터 너를…… 아니, 신전을 의심은 하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를 향한 루카스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신전의 신관들 중 누군가가 이 시스템의 ‘운영자’인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운영자라고? 그 단어가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하지만 내 심정과 관계없이 루카스의 추궁이 이어졌다.
“형님만이 그대로 마법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신전의 누군가와 결탁한 것이지?”
힘이 없어 남에게 기대고 있으면서도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있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생각해 온 결과 내린 결론인 듯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랬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충격적이기는 했지만, 납득이 가기도 했다.
조한율을 보면, 아무리 운영자라는 것을 숨기려고 해도 언젠가는 겉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타르토스의 운영자는 누구인가.
적어도 내가 존재를 모르는 범부(凡夫)일 리는 없었다.
그런데, 운영자가 신전 측의 인물이었다면…… 말이 된다.
이미 타르토스 대륙 전체가 신전의 말에 휘둘리지 않았던가.
“……과연 루카스 님. 손발이 모두 잘린 상황에서도 거기까지 유추하셨던 거군요.”
“몇 년 전 일리아스가 죽기 전까지는 그의 도움도 받았으니까. 물론 아니기를 바랐다만.”
루카스가 쓰게 웃었다.
“그래서, 신전은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교황 선출 때문이냐? 운영자는 대체 누구고?”
“…….”
“곧 죽을 나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걸 보니 금제라도 걸려 있는 모양이구나.”
그 말에 아리아드네가 무의식중에 제 팔목을 감싸는 것이 보였다.
살짝 비친 금빛의 술식이 신관복 사이로 사라졌다.
‘……운영자의 정체를 말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건가.’
하긴, 저렇게 입을 막아 두지 않는다면 운영자의 정체가 전 대륙에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신전의 내부 권력 싸움에 휘말려 일어난 일이라니…….”
루카스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이게 세상을 구한 영웅들의 말로라니, 너무도 하찮지 않은가?”
“루카스 님…… 죄송합니다.”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떨궜다.
“어떻게든, 말리려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빠르게 끝내려고도 해 보았지만…….”
“그래, 안다. 아리아드네 그대가 노력했을 것이라는 거.”
“그러나 그 노력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군요.”
아리아드네가 슬픈 얼굴로 루카스의 머리칼을 쓸었다.
“친우의 목숨 하나 구하지 못하다니.”
그 말에, 분노하고 있던 페트라가 깜짝 놀라 아리아드네의 팔을 잡았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제 치료가 된 것 아닙니까?”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저었다.
“루카스 님의 육체는 이미 수명을 다했습니다. 저는 잠시나마 영혼을 육체에 붙들어 놓았을 뿐.”
“그런……!”
페트라의 눈에서 눈물이 한없이 뚝뚝, 떨어졌다. 아리아드네 또한 언제 울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침울한 표정이었다.
반면에 루카스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고 있는데도 어쩐지 평온해 보였다.
“슬퍼하지 말거라, 페트라. 어차피 나는 죽을 사람이었다. 너는 최선을 다했다.”
얼핏 무정하게 들렸지만 다정한 말이었다.
페트라가 울부짖으며 루카스의 손을 잡았지만, 루카스의 귀에는 이미 페트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루카스의 시선이 아리아드네에게 닿았다. 그리고 입술이 달싹였다.
아마도,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되리라.
고통스러웠지만, 내가 지켜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내가 없는 동안 홀로 그 모든 고통을 겪어 냈을 나의 친우.
심지어 내가 운명을 바꾸기 전의 루카스는 알리시아도, 일리아스도 차례차례로 잃었으며 권력 싸움에 휘말려 마법도, 지위도 잃었다.
루카스의 말대로 그게 영웅들의 말로라면, 너무도 하찮았다.
그런 그가 삶의 마지막에서 남길 말.
이 세상을 향한 저주의 말이라고 해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의 내 심정 또한 그랬으니까.
이런 세상 따위는…….
그때, 루카스의 입가가 즐거운 듯 호선을 그렸다.
“……레나가 보면 나를 비웃겠군.”
뜻밖의 이름에, 나는 늦게 반응했다.
뭐라고?
“겨우 그깟 일에 무릎이 꺾였냐고 말이야. 그게 다 내가 마검사 같은 어중간한 클래스인 탓이라고 하겠지?”
아리아드네가 간신히 미소했다.
“……어쩌면요.”
“그 애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싸우고 있겠지.”
“네, 그렇겠죠.”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그래, 그러면 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루카스의 얼굴에 천천히 안온함이 내려앉았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정말로 마지막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착잡한 얼굴로 오랜 친우의 얼굴을 쓸어 주었고, 페트라는 땅에 머리를 찧듯이 엎드렸다.
그리고 나는 망연히, 숨을 거둔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가 루카스에게 다가가 그 이마를 쓸었다.
“루카스 님의 영혼은 제가 인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게도 아직 그 정도의 힘은 있으니까…….”
타르토스 사람들은 신관이 사자(死者)의 영혼을 내세로 인도해 준다고 믿었다.
페트라가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루카스 님의 장례를 치러 드린 후, 함께 성으로 갑시다. 남은 백성들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네, 그것도 부탁드립니다.”
“……페트라 경?”
이상한 대답에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돌렸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철퍽!
뜨거운 피가 바닥에 쏟아졌다.
아리아드네가 깜짝 놀라 외쳤다.
“그만두세요!”
스스로 심장을 꿰뚫은 기사의 몸이 꺾인 나무처럼 스러졌다.
“페트라 경!”
뒤늦게나마 아리아드네가 페트라의 상처에 손을 갖다 대고 성력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있었다.
페트라는 그저 모든 것이 후회스러웠다.
이렇게 되기 전, 어쩌면 운명을 바꿀 수도 있었던 많은 순간들이 흐릿한 의식 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 모든 순간에, 만일 내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더라면…….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 바꿀 수 있다면요?
기이하게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의식 속에서, 문득 그런 말이 들렸다.
그것이 천사의 속삭임인지, 혹은 악마의 꼬드김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페트라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노라고.
-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 될 겁니다. 가능할지 아닐지도 알 수 없고요.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직도 망막 속에는 짓밟히는 성의 백성들과, 자신이 달려갈 퇴로를 열며 목숨을 바친 기사단원들, 마지막까지 자신을 믿어 준 소꿉친구의 얼굴, 행복하게 살라던 루카스의 모습이 박혀 있었다.
이대로 죽더라도 영혼 한구석에 깊이 박혀 잊지 못할 원통한 기억들이었다.
마치 저주처럼.
그 모든 순간을 다시 한번 돌이킬 수 있다면…….
- ……신의 가호가 당신과 함께하기를.
그것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끊겼다.
그리고, 나는 눈을 떴다.
- 오류가 안정화됩니다.
- 경고! 당신의 생명력이 극도로 저하되어 있습니다. 안정을 취하십시오.
- 최소 안정화까지 00:05:00
“커헉!”
피가 울컥 쏟아졌다.
입가에 흐른 피가 고스란히 얼굴로 쏟아졌지만, 닦아 낼 힘조차 없었다.
서서히 사지에 감각이 돌아오면서, 폐부를 찌르는 것 같은 추위가 다시 와닿았다. 눈 위로 내팽개쳐진 손이 무척이나 시렸다.
하지만 나는 한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다.
어차피 안정화 메시지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정신적으로 지쳤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지친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왔다.
“……차라리 내가 기계였으면 좋겠군.”
그렇다면 이 모든 정보를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정리해 보면 사실 간단한 이야기였다.
인간을 위해 싸웠던 내 친구들은 모두 인간들의 싸움에 휘말려 죽었다.
그들은 세상을 지키기 위해 싸웠지만, 세상은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들여다보면 하나하나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만, 따져 보면 결국 그런 것이었다.
일리아스가 왜 저렇게 날뛰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얼마나 이 세상이 증오스러울까.
……그런데도.
“루카스 미친놈…….”
그런데 루카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어째서 원망이나 저주가 아니라, 내 행복을 바라는 말인 걸까.
진짜 웃기고 있다.
말도 없이 십수 년 전에 사라져 버린 사람의 안위를 왜 걱정한단 말인가.
‘되기는 뭐가 돼.’
아무것도 괜찮지 않았다.
이게 너희의 끝이어도 될 리가 없다.
“……X같은 세상 같으니.”
나는 간신히 후들거리는 팔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 에이펙스의 광검이 당신의 의지를 격려합니다!
그때까지 내 선택을 관조하고 있던 성검이, 마침내 흰빛을 내뿜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내 친구들을 저렇게까지 몰아간 세상이 원망스러운데. 그들을 외면한 세상 따위, 내 알 바 아니라고 외치고 싶은데…….
그래도 루카스는 마지막까지 세상을 저주하지 않았다. 페트라의 미래를 걱정했고, 내 행복을 빌었다.
그런 녀석이 내 친구였다.
그렇다면, 나는 역시…… 그 바람을 들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페트라의 간절한 마지막 소원 또한.
‘아리아드네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한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지금 페트라의 몸을 빌려 이 자리에 있다.
페트라가 후회했던 모든 순간, 거대한 운명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는 지금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이번에야말로 너희들이 온당한 끝을 맞이할 수 있다면…….
“……싸워야겠지.”
상대가 설령 이 세상 전체라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이 세상을 죄다 부수어서라도, 그 개 같은 운명을 바꾸어 주겠다.
시스템 메시지가 환하게 빛났다.
- 플레이어, ‘강예나’의 클래스 적합 재심사가 완료되었습니다.
- 현재 당신의 클래스는 ‘혼돈의 용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