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50화
시스템 운영자와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
이번에 던전에 들어왔을 때부터 타개책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시스템 운영자에게는 일대일 채팅창을 개설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니까. 지난번 조한율만 해도 그 권한을 톡톡히 써먹지 않았는가.
“레, 레나. 잠시만.”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일리아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섰다.
“너 어쩌려고 그래?! 너무 위험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상 무소불위의 힘을 다룰 수 있는 것이 운영자인 만큼 이렇게 직접적으로 맞서는 것은 위험했다.
물론 보통은 지나친 간섭을 할 경우 리스크가 주어지고, 그 리스크라는 것이 맨정신으로는 참기 힘든 고통이기에 조한율처럼 정상적인 운영자에게는 브레이크가 되는 것이지만…….
‘타르토스의 운영자에겐 그 리스크가 의미가 없지.’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미 몇 번이나 간섭을 해 왔었다.
그래서 조한율이 학을 떼며 미친놈이라고 단정한 것이고.
즉, 지금 내가 상대하려 하는 것은 그런 미친놈이었다.
위험한 불구덩이에 맨몸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어차피 한 번은 부딪혀야 해.’
타르토스의 운영자.
운영자의 속내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나를 죽이려는 건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는 건지.
그리고 어째서 내가 운명의 씨앗을 이용해 타르토스의 운명을 바꾸려는 것을 방해하려 하는 것인지.
혹시 운영자가 타르토스의 멸망을 바라는 것이라면 내 최종적인 적은 그 자식이다. 게다가 어차피 13시간 후에 쫓겨나야 하는 입장에서는 무슨 수라도 던져 보아야 할 때였다.
“무슨 헛소리를!”
“그쪽은 닥치시고.”
나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는 성기사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얇은 피부 위로 핏줄기가 흐르고, 펄떡이는 맥박이 닿아 있는 검날을 통해 전해졌다.
여기서 내가 조금만 검을 움직여도 이 작자는 죽는다.
기사가 분한 듯 이를 갈며 외쳤다.
“헛소리 말고 차라리 어서 죽여라!”
“응? 죽이진 않을 건데.”
“뭐라고?”
그렇게 놀랄 것까지야.
딱히 내 친구를 죽이려던 놈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현 클래스인 ‘혼돈의 용사’의 충족 조건이 뭔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이런 종류의 히든 클래스는 가끔 불살이 조건인 경우도 있는지라.
‘뭐, 용사 클래스는 불살 조건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다.
용사라는 직함에 그리 미련은 없다만, 선악을 굳이 가리지 않고 팰 수 있게 됐다는 점은 마음에 든다. 특히나 일리아스 때문에 신전과도 붙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라면 더욱더.
그래서 이왕이면 가능한 한 길게 유지할 생각이다.
“이제 와서 자비를 베풀 생각이냐? 그래 보았자 신전은……!”
“아, 착각은 하지 마.”
나는 기사의 목에 댄 검을 좀 더 깊게 들이댔다.
“직접적으로 죽이는 건 아니더라도 이러다 과다 출혈로 뒈지는 것까진 어쩔 수 없지.”
“……!”
“그 정도면 시스템도 관대하게 봐주지 않을까?”
기사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그게 무슨 차이냐는 속내가 얼굴에 그대로 쓰여 있다.
‘뭐, 나도 무슨 차이인가 싶긴 한데.’
그래도 시스템은 의외로 융통성 있게 판정을 하는 편이다.
어쨌든 이 성기사의 목숨을 가지고 운영자를 협박하고 있는 만큼 살의도 내보여야 하고.
“서, 성검을 든 자가 그런 비겁한 짓을……!”
“너도 성기산데 윗대가리 명령만 받고 사람 죽이러 다니잖아.”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성기사의 눈이 부릅떠졌다.
“사람을 죽이다니, 우리 신전은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그 말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웃기고 있네. 우리 일리아스는 옵타티오를 잡았는데, 네가 뭔데 그것보다 대륙 평화에 이바지했다는 거야? 너도 SSS급 몬스터 잡았어? 어?”
“그건…….”
“말끝 흐리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해 보라고. 네깟 게 대륙 평화를 위해 뭘 했다고 X랄…….”
“레나, 욕 좀 그만 해.”
“……하여간 네가 뭘 얼마나 세계 평화에 이바지했냐고.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봐, 말을.”
검면으로 턱을 툭툭 두드리자 성기사의 얼굴이 더할 수 없을 정도로 붉어졌다.
저러다 화병으로 죽으면 그건 내가 죽인 걸로 카운트될 것 같았다.
그 전에 입질이 와야 할 텐데.
하지만 아무리 기사를 도발하며 기다려도 운영자의 접근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무시하시겠다?’
그렇다면 또 방법이 있지.
나는 허공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그럼, 여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다음 운영자가 어떻게 정해지는지 까발려 줄까?”
보이지 않는 운영자 대신 일리아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긴장한 채 나를 지켜보고 있는 병사들과 기사는 무슨 말인지 몰라 벙찐 상태고.
사실, 여기서 내 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건 일리아스밖에 없긴 했다.
‘내가 전부 까발리면 아무리 운영자라도 꽤 귀찮아질걸.’
운영자가 뭐하는 놈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만, 페트라의 기억을 통해 신전 측 인물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거기다 더해 현 운영자를 살해하면 그다음 대의 운영자를 맡을 수 있다는 사실도 조한율에게 들었다.
그런데, 운영자의 존재뿐 아니라 이다음 운영자를 결정하는 방법이 공개적으로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이제 사냥당하는 건 신전이 되겠지.”
내부의 분열은 물론이고 온 대륙의 강자가 신전을 노리게 될 수도 있다.
힘을 탐하는 인간들이 못 할 짓은 없다는 것은 이미 확인한 바니까.
“레나!”
그리고,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이해하고 있는 일리아스가 나섰다.
그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굳이 그렇게 도발하지 않아도 다른 방법이…….”
일리아스가 나를 설득하려던 순간이었다.
파직, 파지직!
금빛의 스파크가 주변에서 일어났다.
이번 던전에서는 처음으로 보는 시스템의 간섭 현상이었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렇게 나오셔야지.”
“이, 이게 무슨…… 레나!”
일리아스가 내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내가 더 빨랐다.
뻐억!
“컥!”
내게 뒷목을 세게 얻어맞은 성기사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이걸로 언데드에게 치명적인 성역을 만들어 내는 녀석은 제거했으니, 일리아스 혼자 남겨 둔다고 해도 별 탈은 나지 않으리라.
나는 일리아스를 향해 웃어 주었다.
“일리아스, 나 다녀올 테니까 저 자식들 잘 붙잡고 있어.”
“레나!”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어.
그러나 대답도 채 마치기 전에, 시야가 암전되었다.
- 일대일 채팅방에 소환되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새카만 암흑이었다.
내 계획이 먹혀들었다는 뿌듯함도 잠시.
밀도 높은 공허.
잠시라도 정신을 잃으면 내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릴 것 같은, 방향 따위 없는 공간에서 나는 잠시 아연해졌다.
조한율이 나를 불렀던 곳과는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어두운 공간에 조한율을 대신한 빛의 구체가 하나 떠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야 앞에 끝없이 펼쳐지는 것은 새카만 어둠뿐.
어둠이 불길하게 일렁이며 눈앞에 환한 글자가 떠올랐다.
- ■■…….
그것은 깨진 글씨처럼 보이는 문장이었다.
그 문장 뒤로 다가가니 무언가, 검은 덩어리가 위협적으로 울렁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와 함께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나를 짓누르듯 덮쳐 왔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게 타르토스 운영자인가?’
하기야 대화를 한다고 해서 곧바로 운영자의 정체를 알게 될 거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조한율과 이런 식으로 처음 접촉했을 때도 직접 얼굴을 본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이건…….’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무언가, 역겨운 것이 차오르는 듯했다.
이전에 조한율이 구현한 빛의 구체를 보았을 때는 이렇게 불쾌한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온통 어둠만이 자리하는 공간이었어도 운영자 자신을 표현한 상징이 있기 때문인지, 오히려 귀엽고 온화한 느낌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속에서 검은색의 무언가가 어둠 속의 괴물처럼 꿈틀거리는 것을 보니 본능적인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릴리스를 볼 때도 이만큼 역겹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거대한 어둠 속에 도사린 무언가.
어쩌면, 그것은 악마보다도 더한 악의의 총체처럼 보였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조차 거세된, 그렇기에 더더욱 깊은 절망.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 타르토스의 운영자이자 이제껏 나를 방해해 온 자의 심상이 구현된 모습이었다.
그 절망이 황금빛의 문장을 토해 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알아볼 수 있는 단어였다.
- 감히 인간 따위가.
인간?
나는 그 단어에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그쪽은 인간이 아니라는 듯 말하는군.”
시스템의 운영자라고 해 보았자 결국은 인간.
저런 식으로 자신의 끔찍한 심상을 실체화시킨들 그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쪽은 대체 정체가 뭐야?”
게다가 이번에 내가 한 협박이 먹혔다는 건 운영자 또한 결국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런 주제에 인간 따위라니…….
“무슨 목적이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검은 형체의 무언가가 위협적으로 일렁였다.
- 건방진.
콰드득!
어둠 속에 먹힌 팔이 반대 방향으로 꺾였다.
우드득 대며 기괴하게 꺾인 팔에 신음을 토해 낼 겨를도 없이, 나는 강제로 무릎을 꿇리려는 무언가의 압박을 느껴 허리를 숙였다.
“윽!”
방심했다.
조한율과 대화를 할 때는 그저 말만 왔다 갔다 했을 뿐이라, 설마 이런 식으로 플레이어에게 강압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것까지는 몰랐는데……!
파지직!
그때, 어둠 속을 한 줄기 스파크가 갈랐다.
나는 그걸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것도 리스크를 무시하고 나에게 간섭하고 있는 건가?’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라고?
- 이곳은 나의 ■■.
암울한 글씨들이 떠다니며 사지를 벌레처럼 기어 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살갗 위에 끔찍한 감각이 파고들었다.
- 이곳에서는 네 하잘것없는 생각 한 터럭조차 나의 눈을 피해 갈 순 없다.
“윽!”
영혼이 찢기는 것 같은 고통이 닥쳐와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뭐 이딴 게……!’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뿌리치려고 해 보았지만 상대는 실체 없는 어둠이었다. 내가 무엇을 상대하는지도 도저히 알 수가 없는데, 제대로 반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그런 인간의 목숨 따■는 내■ 아무 의미도 없다. 주제를 모■고 나서기에 네 주제를 알려 주려 부른 것뿐.
위협적인 문장이 늘어섰다.
- 그러니 이만 꺼져라.
적의밖에 보이지 않는 태도와 압도적인 힘.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말하는 대로, 저것은 정말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앞에서 인간의 의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태풍 앞에서 잔디가 땅에 내린 뿌리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의식이 점점 흐릿해졌다.
마치 깊은 심해 속에 공기 없이 잠겨서 죽어 가는 것만 같았다.
‘망할, 이렇게까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일 줄은…….’
이대로 정말,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허무하게 끝나 버리는 건가……?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나는…….
“두 세계 모두 구해 내.”
아니, 아직은 아니다.
멀어지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눈앞에서 일렁이는 어둠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 아무 의미도 없다면…….”
이대로 끝날 수는 없었다.
무엇이라도 해 봐야 했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이 대화가 끝난다면 나는 이대로 타르토스에서 쫓겨나게 된다. 일리아스를 저대로 내버려 두고 돌아갈 수는 없다.
두 세계 다 구해 내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어째서인지 다른 운명을 맞이했지만, 같은 결론을 내린 다른 세계의 나 자신에게.
“왜 나를 진작 죽이지 않았지?”
그랬다.
B루트의 강예나는 당시 릴리스의 유혹에 넘어가 나를 죽이려고 했지만, 시스템의 과부하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했었다.
당시 시스템에 과부하를 일으켰던 것은 조한율이 아니라 타르토스의 운영자였다.
만일 이 타르토스의 운영자가 정말로 나를 죽이려 했다면 굳이 간섭을 해 올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타르토스의 운영자가 나의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즉, 저 녀석은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소리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나는 어둠에 잠식된 사지를 풀려 애쓰며 소리쳤다.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하라고! 나와 거래를 해!”
저쯤 되는 존재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솔직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뭐든 간에 해낼 각오는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제발 먹혀라……!’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지를 좀먹듯 흐르던 어둠이 멈칫하더니, 느릿한 문장이 시야 앞에 떠올랐다.
- 거래?
약간의 흥미가 느껴지는 문장.
- 너는 대체 무엇을 원하길래?
처음으로, 저쪽에서 대화를 할 의지가 엿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도 잠시, 나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대답을 골랐다.
어떻게든 저 녀석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해야 대화를 이끌어 갈 수 있…….
- 뱉어 내라.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무언가 더 고민할 겨를도 없이 목구멍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이 세계를 구하고 싶어.”
예전 백록담에서 신수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무런 꾸밈이나 계산 없이, 그저 솔직한 마음.
대륙을 불태울 듯이 하늘을 날아다니던 최후의 용.
강남의 던전 브레이크가 종료된 순간, 무언가의 오류로 그 광경을 본 순간부터 나는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우리는 괜찮을 거야.”
산더미 같은 시체를 뒤로하고 죽어 가던 아리아드네의 모습까지도.
“어떻게 해서든 구하고 싶다고.”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 인간들의 악의 속에 마모되어 온 내 친구들도.
어떻게 해서라도 구해 주고 싶다.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던 사람을, 나도 구해 주고 싶다.
그들이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설령 나 따위는 태풍 앞의 잔디처럼 하잘것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노력해야만 했다.
- 하찮은 소원이군.
하지만.
- 가치 없는 자들에게 허락할 생은 없다.
그런 내 바람 따위는 무시하고서, 타르토스의 운영자는 멸망을 선언했다.
- 이미 멸망한 세계의 시간을 되감으려 들지 마라.
“이미 멸망한 세계라고?”
- 그래.
형체 없는 어둠이 불길하게 일렁였다.
그와 함께, 이제껏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시야에 갑자기 무언가가 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 이 세계는 이미 한 번 끝났다.
둥그런 시야 속에서 끔찍한 풍경이 보였다.
말을 타고 검을 든 병사들이 백성들을 짓밟았다. 절망에 빠져 신음하는 약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익숙한 광경이었다.
이전에 저주가 걸린 거울을 통해서도 보았고, 페트라의 기억을 통해서도 보았던…….
“……저건…….”
유령성.
페트라와 엘리사 메이를 비롯한 기사단이 죽고, 백성들이 짓밟혔으며, 루카스마저 저기서 목숨을 잃었다.
그저 힘이 없다는 이유로.
잔혹한 광경이었다.
- 이 세계의 멸망은 인간들이 자초한 결과일 뿐.
내 말을 비웃는 것이 확연히 느껴지는 문장.
그 글씨의 낱낱에서는 이해할 수 없이 깊은 증오가 느껴졌다.
- 너 또한 이미 세계의 편린을 목격했을 터. 그래도 여전히 이들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한동안 눈에 비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무엇 하나 비극이 아닌 삶이 없었다.
사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알리시아도, 일리아스도…… 다른 이들의 욕망에 짓밟혀 오랫동안 고통받아 왔다.
그걸 생각하면 정말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에 회의가 들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약자를 깔아뭉개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래도.
“네가 틀렸어.”
- 뭐?
“세상엔 저런 녀석들이 다가 아니잖아.”
그런 걸로 절망하기엔 나는 숱하게 도움을 받아 왔다.
“내 친구들만이 아니야.”
가령, 백록담 정상에서 정소현에게.
깊은 숲속에서 만난 엘리사 메이에게.
심지어는 다른 시공의 나 자신에게도, 이우연이나 조한율을 비롯한 한국 헌터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힘이 모자라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생각지도 못 한 누군가가 반드시 내게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분명 그럴 테다.
사람은 그런 식으로 살아남아 왔다.
“그러니까 나도 돕고 싶은 거야.”
그렇기에 포기할 수 없다.
그저 힘이 모자라 벌어진 비극이라면, 내가 힘을 보태면 그만이다.
- 네가 무슨 수로?
“시스템이 있잖아.”
이제껏 증오해 온 것이 무색하게도, 그랬다.
아니, 생각해 보면 그렇지.
네크로맨서든 성기사든 결국은 힘의 성질보다 그 힘으로 무엇을 하는지가 중요한 것처럼 시스템도 같았다.
인간의 육체를 초월하게 해 주는 힘.
그 힘을 어떻게 쓸지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소관이었다.
내 말에 한동안 침묵하던 타르토스의 운영자는, 곧이어 문장을 쏟아 냈다.
- 네 생각이 그렇다면, 나와 내기하자.
“뭐? 내기?”
- 이 세계를 멸망시킨 자가 있다.
악의와 비웃음이 배인 문장이 느릿하게 늘어섰다.
- 네가 그자를 찾아내 죽인다면, 너의 판단을 인정하지.
- 운영자, ‘운명을 거스르는 자’가 플레이어, ‘강예나’에게 내기를 제시하였습니다.
- 내기에 응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