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51화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 나는 눈가를 좁혔다.
그야 운영자와 담판을 지어 거래를 해야 하는 상황이니 내게 잘된 것이기는 한데.
‘갑자기 왜 내기를 하자고 하는 거지?’
나야 그렇다치고 운영자가 굳이 저런 내기를 걸 이유가 전혀 없는데.
나는 신중하게 물었다.
“이 내기에 이겨서 당신이 얻는 건 뭐지?”
- 이 내기에서 내가 이기면…….
황금빛의 문장이 망설임 없이 이어졌다.
- 다시는 이 세계에 돌아오지 마라.
“…….”
나는 그 문장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글자에는 어떤 표정도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얼굴이라도 보이면 좋을 것을.
하지만 지금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아주 깊은 어둠뿐이었다.
나는 신중하게 물었다.
“……그게 그쪽이 내게 원하는 건가?”
- 그래.
짧은 대답이었다.
사실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간 타르토스의 운영자가 벌여 왔던 일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한국 서버에 오류를 일으키고, 알버트를 몬스터로 만들고, B루트의 강예나에게 과부하까지 걸었는데…… 그만한 일을 벌여 놓고선 원하는 것이 고작, 내가 타르토스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고?
문득 B루트의 강예나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타르토스의 운영자는 대체 뭘 원해서 이런 걸 보여 준 것 같아?”
그래.
그때 녀석의 추측이 맞았던 것이다.
대한민국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게 보여 줌으로써 타르토스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 정말로 타르토스 운영자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나는 밀려오는 의문을 참지 않고 부딪혔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내가 여기에 돌아오는 게 싫었다면 그냥 죽이면 됐던 거 아닌가?”
그럴 만한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더 캐물었지만 여전히 대답하는 문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침묵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아무래도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대답해 줄 생각은 없는 것 같군.’
그렇다면 다른 쪽으로 의도를 추측할 수 있게 좀 더 질문을 던져 보기로 했다.
어쨌든 기껏 운영자와 직접 대화하고 있으니만큼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얻어 내야 했다.
“내기를 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
- 물어라.
“세상을 멸망시킨 자라니. 어차피 그쪽이 한 짓 아냐? 나더러 그쪽의 정체를 찾아서 죽이란 건가?”
그리고 도발하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럼 교황이라도 죽이면 되나?”
타르토스 운영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몇 가지 가설을 세워 두고 있었다.
신전 측이 운영자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신전 내부의 일은 워낙에 비밀스러워 내부자가 아니면 알기 힘들기는 했다. 정보 통제를 한답시고 신관들에게 금제를 거는 것도 예사였고.
다만 운영자쯤 되는 인물이 평신관으로 남아 있을 리는 없다.
특히 아리아드네가 교황을 선출하는 자리에 굳이 낀 걸 보면, 운영자의 정체가 교황일 확률이 가장 컸기에 떠본 것이다.
내 도발에 침묵하던 운영자는 그제야 문장을 빛처럼 발했다.
- 그래, 현재 시점에서 운영자를 죽이면 굳이 운명의 씨앗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멸망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겠지.
기묘한 말이었다.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운명의 씨앗 없이도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고?
“운명의 씨앗이 있어야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 아니었나?”
정소현 때도 그렇고, 알리시아 때도 그렇고.
이미 정해져 있던 운명은 운명의 씨앗이 발아함으로써 겨우 바뀌었다.
……비록, 내가 그 두 사람을 진정으로 구할 수는 없었던 것 같지만.
- 너는 운명이 뭐라고 생각하지?
“헛소리라고 생각하는데.”
정해진 운명이고 뭐고, 멸망한 세계의 운명을 뒤집으려는 내게는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누군가가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 있다면, 그깟 운명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 운명이란 하나의 거대한 흐름. 그러나 정작 그 흐름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낱알 같은, 보잘것없는 인간들이다. 그리고 현재의 운영자는 이 세계가 멸망으로 흘러가도록 한 장본인 중 하나. 그를 죽인다면 운명의 흐름이 뒤바뀔 수도 있겠지.
“잠깐만.”
나는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까부터 너, 현재의 운영자는 자기가 아니라는 것처럼 말한다?”
현시점의 운영자를 죽이라니, 뭐니.
지금 나와 이런 공간에서 대화하고 있는 것만 해도 타르토스의 운영자로서 권한을 사용한 게 확실한데, 대체 왜 현재 시점이라는 말을 쓰는 거지?
“……아.”
그런데, 그 순간.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벼락처럼 깨달음이 스쳤다.
이제껏 얻은 정보가 순식간에 결합되며 머리를 관통하고 지나간 것이다.
계속해서 느끼고 있었던 위화감에 마지막 퍼즐이 맞추어져 하나씩 실체를 찾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타르토스의 운영자는 타르토스를 두고 ‘이미 멸망한 세계’라고 말하며, 시간을 되감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건 이상했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멸망하지 않은 시점의 타르토스로 왔으니까.
그러니 애초에 현시점에서 타르토스의 운영자가 멸망한 세계 운운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내가 빙의한 페트라의 기억 속에 본인의 죽음이 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 모든 일은 ‘현재 시점’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페트라는 분명 엘리사 메이를 잃었고, 루카스의 죽음을 지켜보았으며, 끝내는 자결했다.
그런 기억이 분명 남아 있었다.
그리고 페트라는, 자결하는 순간 생각했다.
‘그 모든 순간을, 다시 한번 돌이킬 수 있다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번 깨달은 것은 빠르게 결론을 향해 치달았다.
페트라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
이 모든 것의 답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생각한 답을 내뱉었다.
“……페트라가 과거로 돌아온 거구나.”
페트라의 회귀.
그것이 답이었다.
‘맙소사.’
만일 내가 이전, 백록담의 던전을 통해 과거로 돌아간 경험이 없었더라면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시간을 거스른 경험이 있었고, 그렇기에 곧바로 이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내가 백록담의 던전을 통해 과거로 돌아갔듯이, 페트라 또한 무언가의 방법으로 과거로 돌아온 거다.
그렇다면 이제껏 내가 페트라의 몸에만 빙의한 것도 설명이 된다.
페트라야말로, 시간을 거슬러 이 세계의 운명을 바꾸려는 주체였으니 페트라를 통해서만 타르토스의 과거에 간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적이라면 기적이었지만, 이건 아마…….
“힘든 길이 될 거예요.”
나는 눈을 감았다.
아리아드네.
너,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 그래, 그 아이가 이미 끝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지.
운영자가 자아낸 문장을 바라보며, 나는 이 결론을 확신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타르토스의 운영자가 ‘현재 시점’을 운운하며 멸망한 세계를 알고 있는 이유 또한, 이걸로 해결된다.
“그리고 너도 시간을 거슬러 회귀한 거로군.”
답은 그것밖에 없었다.
페트라와 운영자, 둘 모두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회귀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도 많았다.
“그럼 그쪽은 현재 운영자가 아니란 건가? 그렇다면 지금 대체 어떻게 운영자 권한을 쓰고 있는 거야?”
만약 저 녀석도 과거로 돌아왔다면 운영자 권한을 쓸 수 없어야 정상 아닌가?
거기에 이 두 사람은 왜, 어떻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거지?
하지만 내 질문에 속 시원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나는 너의 정보 제공자가 아니다.
“……치사하게 굴긴.”
- 그래서, 어쩔 거지? 이쯤이면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준 것 같은데. 내기에 응할 건가?
나는 잠시 더 그 어두운 형체를 바라보았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내가 눈이 멀었다는 착각에 빠질 것만 같았다.
사실,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에도 망설이는 것은…… 저 한없이 절망에 가까운 어둠을 바라보고 있자니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악마와의 내기는 영혼에 상처를 입힌다.
그렇다면 운영자와의 내기는 어떨까.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며,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선언한 자. 인간을 파괴하려는 욕망이라도 있는 악마보다도, 어쩌면 절망 그 자체에 가까운 존재.
이 존재와의 내기는 내 영혼을 파괴하리라는 불쾌한 예감이 피부를 엄습했다.
- 내기에 응하지 않겠다면…….
“조건이 있어.”
그러나, 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것 외에는 내 친구들을, 세계를 구할 길이 없으니까.
- 뭐지?
“현재 내 클리어 조건의 제한 시간을 없애 줘. 앞으로 몇십 시간 안에 운영자인지 세계를 멸망시킨 놈인지를 찾아내 죽이란 건 아무리 봐도 나한테 너무 불리하잖아.”
일단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제한 시간을 없애는 것이었다.
이번에 또 어영부영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음 운명의 씨앗을 사용해 타르토스에 와 보니 이번엔 일리아스가 죽어 있었다, 뭐 그런 결말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 그 정도는 괜찮겠지.
의외로 흔쾌히 떨어진 승낙에 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이렇게 쉽게 제한 시간 조건을 바꿔 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리 운영자라고는 해도 이렇게 쉽게 클리어 조건에 손을 댈 수 있는 거야?”
- 그래. 이건 내기에 응한 당사자, 둘 모두에게 이득이니까.
“뭐? 그게 무슨…… 그쪽한테도 이득인 조건이라고?”
- 더 이상은 대답하지 않겠다.
“…….”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어 내려고 했더니 씨알도 먹히지 않네.
- 이걸로 내기는 성립되었다.
그리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문장과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갱신되었다.
- 운영자, ‘운명을 거스르는 자’와 플레이어, ‘강예나’와의 내기가 성립되었습니다.
- 승리 조건 : 세계를 멸망시킨 자를 죽이시오.
나는 찜찜한 심정으로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이걸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고 그간의 의문도 어느 정도 풀렸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대로 물러서면 언젠가 후회할 것만 같았다.
- 그럼 이제 그만 꺼져라.
“잠깐.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 뭐지?
“왜 네 이명이 운명을 거스르는 자인거야?”
그렇게 물은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도 그럴 게 타르토스의 운영자이니 저 작자도 신관 출신일 확률이 높은데, 타르토스의 신관이란 시스템이 신이라고 믿으며 인간은 운명에 따라 이미 정해진 길을 걷고 있다고 믿는 자들이었다.
말하자면, 운명에 순종하는 자들.
아리아드네 또한 그랬다.
그런데 저런 이명이라니.
그러나 한동안 기다려도 대답하는 문장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무시하려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눈앞에 빛나는 문장이 떠올랐다.
- 그조차도 나의 운명이었으니까.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암전했다.
* * *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질박한 나무로 된 천장이었다.
“깼어?”
그리고 일리아스의 목소리.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일리아스가 부드럽게 미소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 저도 모르게 안도해서 따라 웃으려던 순간.
“악!”
일리아스가 읽고 있던 책 모서리로 내 정수리를 내려찍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다.
“그렇게 사고를 쳐 놓고 혼자 쓰러지면 어떡하니, 레나. 뒤처리는 누가 하라고?”
이건…… 할 말이 없었다. 성기사며 병사들을 죄다 패 놓고 정작 나는 운영자와 대화한다며 쓰러져 버렸을 테니 말이다.
나는 순순히 사과했다.
“……잘못했습니다…….”
“사고 치는 건 좋은데 적어도 미리 상의는 해. 걱정했잖아.”
아니, 그런데 왜 나만 일방적으로 혼나는 것 같지?
그러는 일리아스도 혼자서 세계 멸망이나 시키려고 했으면서.
뭔가 억울했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어 말은 못 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 일리아스가 한숨을 쉬며 본인이 친 내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뭐야? 병 주고 약 주기?”
“그래서, 대화는 잘 하고 왔어?”
“그야 뭐.”
- 메인 퀘스트 클리어 조건 : ‘일리아스’를 설득하시오.
시험 삼아 시스템 메시지를 불러 보니 역시 남은 시간 조건이 사라져 있었다.
타르토스의 운영자가 약속을 지킨 것이다.
진짜 어이가 없군.
이렇게 쉽게 클리어 조건에 손을 대다니.
물론 그 외에, 새롭게 떠오른 메시지도 있었다.
- 운영자, ‘운명을 거스르는 자’와 플레이어, ‘강예나’와의 내기가 진행 중입니다.
- 승리 조건 : 세계를 멸망시킨 자를 죽이시오.
세계를 멸망시킨 자.
영 불온한 울림이다.
“왜 그래?”
그리고 마침 내 눈앞에도 세상을 멸망시키려던 녀석이 있다.
일리아스.
아직 내 클리어 조건이 달성되지 않은 걸 보면 일리아스의 결심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거겠지.
그럴 만도 했다.
아무리 내가 성기사 놈들을 쥐어팼다고 할지라도 한 번 인간에게 실망해 다친 마음이 쉽게 회복될 리가 없다.
확실히 지금의 세상은 썩어빠졌으니까.
특히 그 신전 놈들과 황제 놈은 뼈를 갈아 마셔도 모자랐다.
게다가 알리시아도…….
순간적으로 심장에 지끈거리는 통증이 달렸다.
‘……그래도 아직 최악까진 아니잖아.’
페트라의 기억에서는 일리아스는 물론이고 루카스도 죽었다.
그렇지만 지금 내 앞에는 살아 있는 일리아스가 있고 품속에 넣고 있는 루카스의 편지는 바스락거리는 감촉을 전했다.
이게 모두 다, 페트라가 내게 기회를 준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지금 이 상황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믿는다, 루카스.’
결심을 다진 나는 일리아스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일리아스!”
갑자기 손을 잡힌 일리아스가 당황했다.
“왜, 왜 그래?”
“나도 함께할게.”
“응? 뭘?”
고개를 갸웃한 일리아스를 향해 나는 외쳤다.
“이런 썩은 세상 따위, 다 부숴 버리자!”
한 번은 세상을 구하는 용사였으니.
이번에는 세상마저 부수는 용사로 가 보자고.
우우웅!
성검이 찬성하듯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