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53화
깜짝 놀란 일리아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설마 그 편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일리아스가 보지도 않고 테이블에 내던지고 갔던, 페트라가 품고 온 편지.
그 편지에는 신전에서 추살대를 편성했다는 것, 그리고 절대로 혼자 싸울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갈 때까지 페트라의 도움을 받아 시간을 끌고 있으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며 버티면 루카스가 온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다행히도 일이 잘 풀렸다.
본래대로라면…… 일리아스와 신전의 인원이 정면으로 충돌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느 쪽이 이기고 졌든 간에 그 이후의 일은 평화롭게 굴러가지만은 않았을 테다.
특히 은의 기사쯤 되는 인물이 죽기라도 했다면 신전 입장에서는 네크로맨서를 공개적으로 ‘처벌’할 명분이 생기니까.
안 그래도 자기네들의 실책을 일리아스에게 뒤집어씌우려던 참인데, 아주 적절한 핑곗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신전을 상대로 일리아스가 맞서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고.
페트라의 기억 속에서도 일리아스는 이미 죽었다고 했으니…… 운명은 가혹하게 흘러갔겠지.
‘그래도 이번에는 달라.’
나는 루카스와 일리아스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일리아스도 신전의 기사들도 죽지 않았고, 루카스 또한 제때 도착했다. 성기사들도 죽지 않았으니 루카스 또한 일리아스를 어느 정도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참, 겉으로는 까칠해 보여도 제 사람은 의외로 잘 챙긴단 말이지.
“일리아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건가?! 내가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물론 좀 시끄럽긴 했다.
저놈의 잔소리.
일리아스가 억울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네요. 저는 그저 맞서 싸웠을 뿐입니다. 탓할 주체가 다른 것 같군요.”
“물론 신전에는 마땅히 항의할 거야. 그렇지만 자네도 굳이 그렇게 이름까지 내걸고 신전을 도발하지 않아도 되었잖나!”
도발?
처음 듣는 이야기에 내가 의아해하는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일리아스가 대답해 주었다.
“아, 사람을 시켜 신전이 있는 도시마다 ‘신전은 거짓말쟁이 위선자다’라고 벽보를 붙였거든.”
……뭘 했나 했더니 진짜 도발이었잖아?!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나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루카스가 왜 도발이라고 말하는지는 알겠다. 신전의 명예를 정면으로 모욕한 셈이니까.
하지만 교황이 스스로 책임을 인정했음에도 사람들의 반절은 신전의 선동에 넘어간 걸 보면 일리아스야 당연히 억울할 만도 했다.
한국으로 따지면 인터넷에 공론화하는 거랑 똑같은 거 아닌가?
“억울한 건 사람들한테 알려야지. 암.”
옵타티오를 공략한 건 우리 애다, 이 말이다.
거짓말쟁이 위선자 맞는데 뭐.
그러자 루카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페트라 경, 무슨 말이…… 음?”
잠시 나와 눈이 마주친 왕자님이 멈칫, 했다.
나는 루카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일리아스가 그렇듯이 역시 내가 기억하던 때보다는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나만 두고 세상이 흘러가 버렸다는 서운한 느낌을 못내 지우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살아 있잖아.’
페트라의 기억 속에서 본 루카스의 마지막 모습이 여전히 생생했다.
독에 당해 죽어 가던 모습.
그리고 유령성의 첨탑에서 서서히 죽어 가던 모습.
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 살아서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처럼 느껴졌다.
“페트라 경……?”
루카스가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당신은 해당 인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일단은, 던전 내에서 내가 스스로 정체를 밝히는 짓은 여전히 금지되어 있지만…….
‘일리아스가 말해 주려나?’
하지만 일리아스를 보았더니 그냥 잔잔히 웃고 있을 뿐, 딱히 설명은 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설명이 필요 없었다.
다음 순간, 루카스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더니, 곧이어 정답이 흘러나왔다.
“……레나, 너로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 대답을 들은 루카스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울컥하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감정이 울렁이듯 밀어닥쳤다.
한동안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루카스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고, 나는 그 말을 듣기 위해 기다렸지만…….
루카스가 등을 돌리는 것이 먼저였다.
그러더니 나무둥치에 묶여 있는 성기사를 향해 걸어가 버렸다.
갑자기 홀로 남겨져 버린 나는 황당해졌다.
“……응?”
나는 눈을 껌벅였다.
아니, 방금 전까지 감동의 재회를 할 것 같은 분위기이지 않았어?
그런데 잠깐 쳐다보나 싶더니, 바로 등을 돌려 버린다고?
“뭐야, 쟤 왜 저래……?”
“저런.”
일리아스가 내 어깨를 토닥였다.
“전하 입장도 이해해 줘. 전하 입장에서는 레나 너를 거의 십수 년 만에 만난 거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나는 황망한 채 루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게 끝이야?”
“으음…….”
일리아스가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나한테 너는 동생이니까 나이 차가 더 난다고 한들 크게 신경 쓰이진 않지만, 루카스 님은 조금 느낌이 다를 것 같긴 하네.”
“응?”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야 루카스는 나보다 세 살쯤 어리긴 했지만, 이제 와서 내가 쟤를 연상 취급할 것도 아니지 않나.
솔직히 우리 사이에 나이 차이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리고 지금은 페트라의 몸이란 것도 생각해야지. 생각해 봐. 페트라는 딸 같은 애라고. 그런데 네가 페트라의 몸에 있으니…….”
“……뭐라는 거야?”
나름 설명을 해 주고 있기는 한데 무슨 소린지 영…….
내가 영 갈피를 못 잡자 일리아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느 쪽 잘못도 아니란 거지. 전하도 세월이 지났으니 마음을 좀 추스르면 괜찮아지실…… 어이쿠.”
우지끈!
성기사를 묶어 놓은 나무가 검에 베여 넘어갔다.
쾅!
루카스가 베어 넘긴 나무가 쓰러지며 거대한 땅 먼지를 일으켰다.
파리한 기색의 성기사가 루카스를 올려다보았다.
“……루카스 왕자 전하.”
“나는 이제껏 신전의 무도한 짓거리를 참아 왔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검날보다도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너희들의 뜻이 많은 이들의 안정과 평화에 있는 건 사실이니까.”
성기사를 바라보는 루카스의 시선이 경멸로 날카롭게 빛났다.
“그런데 내 인내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군. 네크로맨서란 이유만으로 옵타티오를 처치한 영웅을 죽이려 들다니, 그대들에게는 이해나 자비심은 없는가?”
“전하, 사감에 휩쓸려 판단을 그르치고 계십니다!”
성기사가 피를 토하듯 외쳤다.
“네크로맨서들은 사자(死者)의 명예를 모욕하고, 존재만으로도 생자(生物)의 생기를 앗아갑니다. 이를 처치함이 민생에 도움이 되는 길입니다!”
기사의 시선이 늘어선 언데드 병사들을 훑었다. 마치 꺼림칙하고 불결한 것을 보는 것처럼.
“설령 왕자 전하의 친우라 하여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네크로맨서로 각성해 그 힘을 휘두르는 이상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습군.”
하지만 루카스의 목소리에는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부모가 죽어 홀로된 아이가 빵을 훔쳤다면 자네는 죄인이라며 손가락질을 하고 감옥에 넣을 텐가?”
“예?”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래도 되겠지. 하지만 나도, 신전도 그래서는 안 돼.”
루카스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익숙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세월이 무색하게, 루카스는 변한 게 없었다.
처음으로 루카스를 만났을 때.
그는 네크로맨서인 일리아스도, 한쪽 팔이 몬스터인 용병 알리시아의 모습에도 개의치 않았다.
사실 파격적인 일이기는 했다.
어쨌든 왕족씩이나 돼서 이런 불한당 같은 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안 좋게 보는 시선은 많았으니.
그러나 루카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나는 이 파티가 이대로 성장한다면 최후의 던전 공략에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함께 다니는 게 효율적이지.”
그때 나는 루카스의 말에 울컥했다.
“그럼 단순히 효율성 때문에 우리랑 같이 다닌다는 거야? 그래서 일리아스나 알리시아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참아 준다, 뭐 그런 건가?”
대답 여하에 따라 몇 대 패고 루카스를 일행에서 빼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물었더랬다.
나도 사람들이 내 친구들을 경시하는 것에 질려 있었으니까.
그런데 같이 다니는 작자가 그놈의 효율 때문에 우리와 억지로 다니고 있는 것이라면 굳이 함께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건 아니다. 나 또한 일리아스와 알리시아의 선택에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으니까.”
“뭐? 책임감?”
“일리아스가 네크로맨서가 된 것도, 알리시아가 팔을 잃은 것도 모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나라가 지키지 못했던 탓이지.”
“…….”
“그러니 그들이 겪었던 고통은 모두 왕족인 나의, 우리의 책임이며……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 또한 내가 짊어져야 할 일이다.”
왕족이란 그런 것이다.
루카스는 그렇게 말했다.
타르토스 대륙은 여전히 혈통을 기준으로 하는 신분제 사회였다.
솔직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자란 내게는 영 이해되지 않고 불합리한 점이 많은 사회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책임을 져야만 하는 자들이니까.”
예전에 내가 들었던 것 같은 답.
루카스의 말에서는 적어도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리아스와 알리시아의 어린 시절을 안타까워했고,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것에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것이 루카스가 가진 책임감이었다.
왕자로서 태어나 고귀한 혈통이라 추앙받은 만큼 자신은 그 추앙하는 자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
민주주의 사회의 일원인 나로서는 솔직히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저 정도쯤 생각하는 인간이 드문 것도 사실이다.
아니, 사실 현대 한국에서도 별로 못 본 인간 군상이긴 하지.
어쨌든 고귀한 왕자님은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네크로맨서인 친구를 구하려는 일념 하나만으로 이 먼 길을 달려왔다.
내게는 그거면 충분했다.
루카스의 윽박지름에 성기사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저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공개 재판을 할 것이다.”
루카스가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 재판에서 증언하도록. 신전의 죄상을 낱낱이 밝혀낼 테니.”
“……라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만히 루카스의 말을 듣고 있던 일리아스가 조용히 말했다.
나도 한숨을 쉬었다.
“그야 그렇겠지…….”
아무리 루카스가 왕자라고 해도 신전이 쌓은 권위와 위상은 강대했다.
던전과 몬스터가 계속 출현하는 이상, 사람들에게는 신성력을 가진 신전이 필요했다. 그러니 신전보다는 약자인 일리아스나 알리시아 탓을 하는 게 편했을 테고.
그러니 설령 재판을 한다고 한들, 제대로 된 죗값을 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아마 내가 법이고 절차고 무시하고 교황을 찾아내 족치는 게 빠르겠지.
사회의 규칙이란 그 근본이 되는 사회가 썩어 있다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설령 나나 루카스가 각자 어떻게든 세상을 때려 부수고 고친다고 하더라도…….
나는 시스템 메시지를 흘끗 바라보았다.
- 메인 퀘스트 클리어 조건 : ‘일리아스’를 설득하시오.
역시.
클리어 조건은 아직 달성되지 않았다.
일리아스의 마음은, 세상에 실망한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일리아스를 바라보자 그는 반사적으로 웃어 주었지만 그뿐이다.
일리아스에게 내가 있고, 루카스가 있지만 아직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루카스가 정말 재판으로 죄를 묻고 심지어는 내가 교황을 때려잡아 죽이더라도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일리아스는 동생을 잃었으니까.
‘……알리시아.’
그 애를 다시 돌려받지 않는 이상 이 메인 퀘스트는 성공할 수 없다.
나중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후에 루카스에게 물어봐야겠다.
“포로를 묶어라! 성까지 끌고 간다.”
“예!”
루카스가 휘하의 기사와 병사들에게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이 곧 나무에 묶여 있던 신전 측의 인원을 모두 다시 묶어 호송을 준비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루카스가 우리에게 다가와 말했다.
“여기서 성까지는 한나절만 달리면 된다. 말을 타라.”
“아, 응. 그런데 루카스…….”
“나중에.”
루카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보는 눈이 많으니 나중에 얘기하자.”
“…….”
아니,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나는 황당한 심정에 루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페트라 경, 경의 말을 가져왔습니다!”
기사들 사이에서도 특히 앳된 얼굴의 기사가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그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저건 분명…….
“데이먼 오닐 경?”
“예?”
데이먼 오닐은 유령성에서 함께 싸웠던 기사 중 하나였다. 주근깨가 인상적인, 활달해 보이는 청년. 엘리사 메이를 따라 목숨 바쳐 싸우겠다는 맹세를 했었다.
지금은 그때보다도 한참 더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아직 견습 기사인 듯했다.
“왜 그러십니까? 오늘따라 페트라 경, 요상하신데…….”
“오닐 경! 농땡이 치지 말고 죄인을 묶는 걸 도와!”
“헉, 농땡이 안 피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데이먼이 내게 인사를 하고 후다닥 멀어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감회에 사로잡혔다.
떠오르는 태양 사이로 경례와 함께 사라지던 유령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구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반드시 바꿔 보이고 말 것이다.
나는 굳게 다짐하며 말에 올라탔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달려 한나절이 지난 후.
나는 펼쳐진 풍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무슨 일이지?”
갑자기 말을 멈춰 세운 내게 루카스가 물었지만, 도저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유령성의 모습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