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66화
“문자 몇 번 드렸는데 답이 없으시더라고요. 아하하…… 바쁘실 거 알지만 계속 신경 쓰여서.”
솔직히 말만 들어 보면 완전히 작업 멘트인데, 그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이 드물게 순진해 보이는 인상이라 딱히 불쾌하게 들리지 않는 게 신기했다.
“아, 죄송해요. 진짜 바쁘긴 했거든요.”
듣고 보니 솔방울 번호로 가끔 문자가 왔었던 것 같은데 답장을 한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사실 솔방울 간호사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도 나름대로 신세를 졌는데 약간 미안해졌다.
“그래도 이렇게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놓이네요.”
솔직히 자기가 돌봐 준 환자가 연락을 무시했으니 마음이 좋지 않을 법도 했는데, 저렇게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어보이자 양심이 조금 더 찔리기 시작했다.
적어도 답장은 해 둘걸. 물론 바쁜 건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누나, 아는 사람이에요? 헌터?”
그때 양태원이 사교성 있게 끼어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내가 병원에 있을 때 돌봐 주셨던 담당 간호사님이야. 솔방울 씨도 잘 지내시죠?”
“그럼요. 서울에 올라오고 처음에는 좀 힘들었지만 이젠 완전히 적응해서 일하는 것도 보람차고, 활기도 돌고…… 이것도 다 예나 씨 덕분이에요. 덕분에 병원 이전할 마음도 먹고…….”
그대로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 가나 싶더니 솔방울은 금세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불러 세웠다는 것을 그제야 자각한 모양이다.
“죄송해요, 일행분도 계신데 제가 반가운 마음에…… 그럼 나중에 시간이 되면 연락이라도 한번 주세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요.”
연락이라…….
나는 잠시 솔방울 간호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길거리에서 지나치다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들은 이야기로는…….
‘일산 호수 공원 이야기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군.’
당시의 나는 어떻게든 타르토스로 돌아가려고 했던 터라, 처음에 어떤 방식으로 전이했었는지 용을 쓰며 기억을 살리려던 때였다.
그러던 것이 운명의 씨앗을 얻게 되면서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사실 그렇게 쉬이 넘길 일이 아니긴 했다.
일산 호수 공원 던전.
대한민국에 생겨난 최초의 던전이자 솔방울의 말에 따르면 내가 정신을 잃고 있다가 발견된 장소.
‘아무리 봐도 그때 죽었어야 정상이란 말이야.’
딱히 사람들에게 특출한 도덕심을 요구하는 것도, 잔인함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처음으로 시스템을 맞이한 플레이어들이 기절한 사람을 챙기는 여유를 부리면서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나는 기절한 채로도 살아남았고, 게다가…….
“솔방울 간호사랑 아는 사이였어?”
그래, 이우연.
지금 자연스럽게 솔방울에게 아는 척을 한 이 녀석을 포함해 김숙자 교수, 김성연 등 현재 한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헌터들 대다수가 같이 휘말렸다고 했다.
우연치고는 과하고 여러모로 기묘했다.
솔방울이 어색한 표정으로 가면을 쓴 이우연을 훑어보았다.
“저, 죄송한데 누구신지…….”
그러자 이우연이 슬쩍 쓰고 있던 가면 한쪽을 들어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솔방울 씨.”
“……어, 아니, 이우연 씨?! 우연 씨가 왜 예나 씨랑 같이 있어요?”
이우연의 얼굴을 보고 솔방울이 경악했다.
그사이 양태원이 내 귀에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나, 방금 이우연 표정 봤어여? 두 번이나 데이트를 방해받아서 그런지 완전 썩었던데요.”
“네가 언제부터 이우연 기분을 신경 썼다고 그래.”
“저야 누나가 보호해 주지만 저분은 누가 저 더러운 성깔로부터 보호해 주죠?”
글쎄다. 뭐, 평소에 저 두 사람이 딱히 부딪힐 일도 없는데 큰일이야 있으려고.
그리고 지금은 이우연의 심술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속 시원하게 의문을 풀 수 있는 기회였다.
가령 솔방울은 나를 기억하는데 이우연은 왜 나를 기억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대체 어떻게 초보자끼리 기절한 사람까지 데리고 던전을 클리어해서 나온 건지.
예전에는 이우연이 무슨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는지 몰라서 함부로 묻지도 못하고 추측만 하며 골치를 썩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솔방울과 이우연의 정보를 크로스 체크까지 해 볼 수 있는 기회 아닌가.
물론 일주일간 놀기로 했다지만 걸쩍지근하게 남아 있던 호기심을 해결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솔방울에게 바로 제안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길거리 한복판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뭐하고, 자리를 옮길까요?”
내 말에 이우연은 얕게 한숨을 쉬었고 솔방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그렇지만 제가 끼는 것도 좀…….”
“솔방울 간호사님께 물어보고 싶은 게 좀 있어서 그래요. 이우연, 괜찮지?”
“……괜찮지, 뭐. 내가 무슨 힘이 있나…….”
이우연은 힘 빠진 어조로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곧장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카페를 검색하기 시작했고 솔방울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하. 정말 괜찮은 걸까요…….”
* * *
“그나저나 솔방울 간호사가 당신이 입원했던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니.”
카페에 들어와 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이우연 쪽이었다.
“이런 말 싫어하는데, 정말 엄청난 우연이네.”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놀랐어요. 설마 이우연 씨랑 예나 씨가 같이 계실 줄은 몰라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든 잔을 가만히 만지작거리던 솔방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혹시 제가 데이트를 방해한 건……?”
“잘 아네.”
“상관없어요.”
칸막이가 있어 남들 시선에서 벗어나는 자리라 이우연은 가면을 벗고 있었으므로 그의 떨떠름한 표정이 아주 잘 보였다.
“상관없다니! 너무해. 우리 재밌지 않았어?”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는데 뭘. 그나저나, 솔방울 씨.”
“네?”
“이우연이랑은 일산 호수 공원 던전에서 만나 안면을 트게 된 거라고 했죠?”
“아, 네. 맞아요. 그땐 이렇게 유명인이 되실 줄은 몰랐지만.”
솔방울이 웃으며 이우연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우연 씨한테는 따로 자리를 만들어 한 번 더 감사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감사 말씀?”
“네, 지금 근무하고 있는 헌터 전용 병원에 바로 취직하게 된 거, 이우연 씨 인맥 덕분이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서울 헌터 전용 병원에서 솔방울을 만나 어떻게 이렇게 빨리 병원을 옮겼냐고 물으니 인맥이 있었다고 했었지.
그런데 그 인맥이란 게 설마 이우연이었을 줄이야.
“딱히, 제 덕분은 아니죠.”
이우연이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헌터 병원이야 언제나 손이 부족하고, 솔방울 씨 정도 스킬이라면 당연히 환영받을 만합니다.”
“그래도 우연 씨 추천이 없었으면 텀 없이 곧바로 이전하진 못했을 거예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 솔방울의 스킬은 확실히 임상에서 유용하긴 하되, 응급 환자가 없는 요양 병원에서만 쭉 일해 왔기에 이른바 뉴 빅3 병원 중 하나인 헌터 전용 병원에 바로 투입하기에는 경력면에서 살짝 부족함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걸 보증해 준 게 이우연이었다고.
“헌터인 내가 솔방울 씨 스킬 유용성은 제일 잘 아니까.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말 두어 마디 보탠 정도야.”
헌터 전용 병원에, 헌터계의 VVIP인 이우연이 보증했으니 그것만큼 확실한 건 없었을 것이다
다만 흥미로운 이야기기는 했으나 지금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주거니 받거니를 하는 두 남자를 가리켰다.
“그래, 그래서 두 사람은 일산 호수 공원 던전에 같이 휘말린 것으로 친해졌단 거죠?”
“친해진 것까진 아니지만…… 네, 맞아요.”
“그런데 솔방울 씨는 나를 알지만 이우연은 날 못 알아봤고.”
이우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무슨 소리야?”
“일산 호수 공원 던전 말이야.”
나는 드물게 벙찐 표정의 이우연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나도 거기에 있었다고.”
“뭐?!”
드르륵!
이우연이 깜짝 놀라며 일어선 바람에 의자 끌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이우연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당신도 그 던전에 있었다고?’
그리고 그 표정을 본 나는 곧 결론을 내렸다.
저건 진짜다.
‘예전이라면 연기가 아닌지 의심했겠지만.’
이제 그 정도 간파는 할 수 있다.
게다가 이제 와서 이우연이 내게 비밀을 만들 이유도 없고.
즉, 이우연은 정말로 나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우연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솔방울도 놀라 고개를 기울였다.
“어어? 우연 씨, 예나 씨 기억 안 나요? 저희 클리어해서 나올 때 부상자 몇을 업고 나왔었잖아요. 그중 하나가 예나 씨였는데.”
솔방울의 증언 또한 일관적이었다. 하지만 이우연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야 부상자들 부축해서 나온 건 기억하죠. 그런데 거기에 강예나가 있던 건 몰랐는데…… 이상하네. 내가 왜 기억을 못 했지?”
“그렇게 이상한 일이야?”
혼자 가만히 빵을 뜯으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양태원이 의문을 던졌다.
“처음 던전에 휘말려서 우왕좌왕하느라 예나 누나 얼굴을 유심히 안 봤나 보지. 심지어 부상자니까 옮기는 것만 해도 힘들었을 텐데, 충분히 있을 수 있지 않나?”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이상하네.”
양태원의 말을 듣던 이우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때 어떻게 다들 부상자를 데리고 던전에서 나온 거지?”
“와, 인성 뭐야?”
“내 말이 그 말이야.”
양태원은 경악했지만 나는 이우연이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음을 알아차렸다.
다만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어쩌다 그렇게 됐었지……?”
이우연 본인이 그 이유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영리하게 굴러가던 눈동자가 의혹에 가득 차 있었다.
“기절한 사람은 거의 다 제가 돌보고 있었으니까, 우연 씨야 기억하지 못하실 법도 해요. 게다가 상황이 급박했…… 던 것 같…… 고.”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이우연을 편들려던 솔방울 간호사조차 어느 지점에 이르자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
“…….”
잠시 침묵이 맴돌았고, 나와 이우연은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소름이 오싹, 돋았다.
이게 뭐지?
나는 차근차근 물었다.
“당시 던전 클리어 조건이 뭐였는지는 기억나?”
“……아니, 히든 클리어였다는 것 정도밖에.”
이우연이 약간 창백해진 안색으로 대답했다.
본인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기억의 공백이 답답한 기색이었다.
“일단…… 당시 던전은 정부 분류상 최초의 SSS급 던전이었어. 왜냐하면 당시 살아나온 플레이어들 레벨이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가 있었거든.”
급이 높은 몬스터를 처치할수록 레벨이 더 많이 오르니, 반대로 레벨이 오른 정도를 역산해 당시 던전의 급수를 정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조건이나 보스 몹이 뭔지조차 기억이 안 난다고?”
“아직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을 때인 데다 워낙에 충격적인 경험이라,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은 건 사실인데…… 생각해 보니 이것도 이상하네. 굉장히 자연스럽게……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려고 해 보지도 않았어. 숙자 교수님하고 한번쯤은 얘기할 법도 했는데.”
“그건 형 성격에 진짜 이상하다.”
이제야 심각성을 깨달은 양태원까지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하기야 이우연이 그 정도로 공략 복기 자체를 포기할 성정은 아니지.’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이쯤 되면 답은 하나였다.
나는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시스템상으로 기억에 제한을 받고 있는 것 같네.”
이렇게 사람들이 단체로 기억 상실 비슷한 걸 겪고 있다면 답은 그것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 플레이어가 스스로 ‘기억의 오류’를 자각합니다.
- 희귀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 ‘기억의 오류’ 제거까지 필요한 조건 충족(1/3)
- 조건 : 플레이어의 일정 레벨 달성
“으악!”
“와, 씨.”
“소름 돋네.”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본 나는 팔을 문질렀다.
설마 정말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니
게다가 달성 조건이 일정 레벨 달성이었던 걸 보면 아무래도 80레벨이 조건이었던 것 같은데.
‘거의 불가능하지 않나?’
10년을 구른 나도 이제 겨우 레벨 80을 넘었고, 사실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레벨 10, 20대에 머무는 경우가 다반사다.
즉, 죽을 때까지 모를 수도 있었단 이야기다.
“불쾌하네.”
“기분 나빠.”
나와 이우연이 그렇게 입을 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렇게 명확한 메시지로 보니 은연중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불쾌감이 느껴졌다.
확실히 그 던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긴 한 것 같은데…….
- 걱정할 것 없다.
그때, 공기가 공명하는 듯한 목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양태원을 감싼 채 눈을 감고 있던 청룡이 어느샌가 기이한 푸른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 너의 선택이 또다시 운명을 만들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