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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270화 (271/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70화

일리아스와는 또 다르다.

일리아스는 진심을 다해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했지만, 마지막 한 걸음은 내딛지 않았었으니까.

하지만, 만일 아리아드네가 정말로 타르토스의 운영자라면.

페트라의 기억 속에 있는 본래의 타르토스는 아리아드네가 멸망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저 내 망상일 가능성도 있었다.

아직까지는 어째서 타르토스가 멸망한 것인지, 아무런 단서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 차원의 틈새 사이에서 타르토스의 운영자를 만난 이후로 내 육감이 외치고 있었다.

때로는 논리나 이성을 초월한 감각이 옳을 때가 있다.

가령 적의 검에 목이 베이기 직전, 목숨을 건 싸움에서 검사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논리가 아닌 감각인 것처럼.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에이펙스의 광검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딱히 내가 시스템상 용사 클래스라고 해서 타인을 단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인간이 아니니까.

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리아드네가 죄를 저질렀다면,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라면…… 그 애를,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볼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할지.

솔직히 모르겠다.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을 무시하며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속내를 와르르 털어놓고 침묵하고 있자니, 김숙자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속속들이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원래 살다 보면 인간관계가 제일 복잡한 법이지. 특히나 오래된 친구라면 서로 길이 갈렸을 때 속이 쓰라릴 수밖에 없고.”

“……그런가요.”

“그래, 언제까지고 영원히 같은 길을 걸을 동지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적보다도 먼 곳에 가 있는 것을 발견하면…… 인생에 회의가 들기 마련이니.”

김숙자 교수가 습관적으로 외투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다 벤치 앞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그만두었다.

옆얼굴이 어딘지 씁쓸해 보였다.

“사람의 마음만큼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없다네.”

“즉, 해결하거나 화해할 방법은 없다는 건가요?”

“대개는. 자네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바뀐 적이 있나?”

“네, 저는 있어요.”

처음으로 이세계에 떨어졌을 때.

먹고사는 것이 생존 레벨로 다가오던 그때,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사치라고 생각했을 때.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뭘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왜냐하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으니까.

하지만 그 믿음을 깨 준 것은 나와는 한 치의 인연도 없는 타인이었다.

“당장 먹을 식량이 없어서 방패막이로 쓰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용병단에 지원했었거든요. 그러다 결국엔 약속했던 보수도 받지 못하고 중상을 입은 채로 필드에 버려졌는데, 그때 구해 준 게 그 친구였어요.”

고귀한 성녀께서 소문을 듣고 용병단의 만행을 파헤치러 직접 발걸음을 옮기신 것이다.

겸사겸사 방패막이로 쓰이고 버려진 이들도 치료하고.

하지만 그때는 워낙 사람들에게 질려 있던 터라, 치료만 받고 괜한 동정심은 필요 없다며 아리아드네가 귀찮게 달라붙는 것을 떨쳐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었다.

그걸로 성녀 따위와는 더 엮일 일도 없을 줄 알았고.

그렇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다음에도 계속 그랬어요. 먹고살아야 하니까 허접한 장비로 어떻게든 의뢰를 받아야 했거든요. 덕분에 몸이 남아나질 않았는데, 그때마다 어떻게 날 찾은 건지 귀찮게 쫓아다니면서 치료하더라고요.”

나중에 아리아드네가 말하길, 날 쫓아다닌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내가 본인의 시야에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엄청나게 귀찮긴 했다.

목숨은 소중하다느니, 자신보다도 어려 보이는데 이렇게 몬스터와 싸우면 안 된다느니, 크게 다치면 이상한 약초를 찾지 말고 자신에게 찾아오라느니.

물론 그렇다고 내가 아리아드네에게 곧장 감화된 건 아니었다.

지위가 고귀해 먹고사는 걱정 같은 건 할 일도 없는 성녀가 뭘 아느냐고, 너한테 치료 한 번 받으려면 돈이 얼마인 줄 아냐, 나는 몬스터한테 죽거나 굶어 죽거나 둘 중 하나인데 같잖은 소리 하지 말라고 윽박지르기나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돈도 받지 않고 상처 입은 걸 볼 때마다 치료해 주던 사람에게 외려 짜증이나 내고, 아리아드네 입장에서는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었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고 우격다짐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을 텐데.

“그럼 차라리 저랑 같이 가요!”

아리아드네는 제 보따리까지 기꺼이 내주었다.

당시에는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신전에서 귀한 꽃처럼 보호받으며 살던 녀석이, 길거리에서 먹고사느라 아등바등하던 하급 용병에게 한 소리 들었다고 발끈해서 신전을 박차고 뛰어나오다니.

그냥 무시했으면 편했을 텐데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죠? 그렇다면 알고 싶어요. 이대로라면 정말로 따분한 설교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다시 생각해도 정말 바보 아닌가 싶은데, 그런 인간이 정말로 실존했다.

아리아드네는 이를 악물고 나를 쫓아 함께 여행을 시작했다.

사실 여행이라고 할 것도 아니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문자 그대로 하루살이들의 생존기.

그래 봤자 하루면 돌아가겠지, 일주일이면 돌아가겠지, 다음 달까지 버틸 수나 있으려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신전에서 무단으로 가출한 아리아드네를 찾아내 제발 돌아와 달라고 빌어도 돌아가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계속해서 내 옆에 머물렀다.

타인이 어느새 친구가 되었고, 가족보다 가까워졌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진짜로.

……그래서 결국에는 나도 같이 그 흐름에 휘말리고야 말았다.

그렇게 지내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스템은 날 용사라고 판정했다.

그걸 봤을 때 어찌나 헛웃음이 나오던지…….

여행의 목적조차 하루하루 살아남기가 아니라, 어느새 주위에 모인 동료들과 함께 최후의 용을 처치하고 세상 구하기가 되어 있었다.

고기 방패로 쓰이고 버려질 때는 언제고, 평범한 소시민인 내가 이세계의 용사가 되다니.

신세 역전인지 아닌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내가 바라지 않았던 순간에도 변하지 않고 주어졌던, 대가 없는 그 애정이 헛된 것이 아니라고…… 증명하고 싶어졌다.

그게 바로 지금까지 용사라는 클래스명을 지고 살아온 이유였다.

그 아무것도 아닌,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런 가치도 이득도 없던 멍청한 손길 하나가 결국에는 멸망할 운명이던 대륙을 구원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으니까.

그것이야말로 나를 지탱하는 오래된 믿음이었다.

김숙자 교수가 짧은 한숨을 뱉었다.

“들어 보니 무척이나 소중한 친구 같은데…… 그럼 더더욱, 기대는 버리는 게 좋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군.”

구름처럼 피어오른 망상을 날카롭게 잘라 내는 것 같은 한마디였다.

“괜히 기대하면 상처만 깊어지니까 말이야.”

“……위로 아주 감사합니다.”

“어른한테 비꼬는 거 아니야. 자네가 원하는 대답을 주고 싶긴 하지만, 본래 올곧던 사람일수록 한 번 꺾였을 때의 반동이 심하게 오는 법이거든.”

“…….”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리아드네는 고집이 셌다. 한 번 결심하면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신전이 아무리 매달려도 끝까지 돌아가지 않고 내 곁에 머물렀던 것처럼, 만일 타르토스를 멸망시키려고 결심한 거라면 그 누가 와도 아리아드네를 설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상대가 나라고 해도.

그렇다면 나는…….

“그렇지만 그래도 친구를 포기할 수 없으니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거겠지?”

나는 눈을 깜박였다.

복잡했던 심상이 단번에 꿰뚫렸다.

그래.

그 말대로였다.

“……네.”

설령 아리아드네가 한 번 세상을 멸망시켰더라도.

시간을 거슬러 희망을 잉태하기 시작한 세상을 또다시 멸망시키려 하고 있더라도.

만약 나를 죽이려고 할지라도.

“포기는 못 하겠어요.”

다시 만나는 게 두려운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그리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아리아드네가 이 세상의 적이 된다고 해도 나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을 거라는 것.

그러자 김숙자 교수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다면 내가 줄 수 있는 조언은 이것밖에 없겠군. 실패해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으로 도전하게.”

“실패해도 괜찮다……?”

“일단, 실패는 살아남은 이의 특권이지. 살아남아야 그다음이 있으니까. 적어도 쉽게 죽어 주지는 말란 소리야.”

“……제가 죽을 것 같나요?”

“강예나 헌터 실력이야 나도 알아. 하지만 얼굴을 보니 지금 바로 전장에 나가면 허망하게 죽을 것 같은데. 잘 쉬고 있는 것 맞나? 휴식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렇게 뻔히 보이는 정도였나.

김숙자 교수의 말에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리아드네가 운영자라는 걸 알게 된 이후의 기억이 어쩐지 모두 희미하게 느껴졌다.

분명 한국에 돌아와서 사람들도 만나고 쉬기도 했는데 말이다.

그만큼 넋을 빼놓고 생활하고 있었던 셈이다.

만일 이 상태로 던전에 들어갔다면 정말 오크한테도 허를 찔려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우연도 교수님 같은 소리를 했는데.”

그래서 이우연이 일주일쯤 쉬라고 했던 건가.

김숙자 교수가 알아차렸는데 이우연이 내 상태를 몰랐을 리는 없다.

어쩐지 굳이 운명의 씨앗을 구해 온 대가 운운하며 일주일간 쉬라고 했나 싶었는데 그렇게 불안해 보였던 건가.

‘하여간 눈치 빠른 녀석.’

어쩐지 이우연답지 않게 손까지 잡으면서 이상한 걸 부탁한다 했다.

멘탈이 나가 보이니 쉬라고 해 봤자 괜히 반발심만 살 테니, 굳이 약한 척까지 하며 낮은 자세로 나온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심지어 지금처럼 이우연의 본심을 나중에 알아차린다고 한들, 날 생각해서 그렇게 말했다는 거니 뭐라고 해 봤자 이쪽만 꼴이 우습게 되는 거고. 설마 내가 이렇게 생각할 것까지 예상하고 한 행동은 아니겠지?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이우연을 한 대 때리고 싶어지네요.”

“이우연 헌터가 좀 그런 면이 있기는 하지.”

김숙자 교수가 짧게 웃었다.

“하지만 지난번에 말한 대로, 본인이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잘하는 스타일이야. 그만하면 괜찮지 않나?”

“네, 뭐…….”

“그러니 실패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살아 있기만 하면 언제든 돌아와 휴식할 수 있는 공간도, 사람도 있는 셈이잖나.”

타르토스에서 실패하면 한국으로 돌아와라, 그런 말인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내게 돌아올 곳이란 언제나 타르토스를 의미했지, 한국이 될 수는 없었으니까.

빈털터리로 타르토스에 떨어졌을 때도 한국을 돌아갈 곳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조언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그 위로는 물이 종이를 적시듯 무겁게 스며들어 가라앉았다.

나는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았다.

문득,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때 부모님의 갈등에 지쳐 무작정 가출했을 때도 이렇게 한강을 봤던 기억이 있는데.

어렸던 나를 누가 집에 돌려보내 주었는지 구체적인 경위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도 왠지 모를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누군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준 기억도.

그 희미한 온기에 잠깐 구원받았던 기억으로 다음 날을 살았다.

지금도 그랬다.

“그나저나 저러다 선이가 망부석이 되겠어.”

“그러게요.”

맥주를 사 오던 이선 헌터가, 나와 교수님이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니 맥주를 든 채 오다가다 하지 못한 상태로 저 멀리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선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즐거운 산책이었다.

* * *

시간은 빛살만큼이나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처음에 이야기했던 일주일이 끝나기까지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일단 내일 바로 던전에 들어가실 수 있도록 세팅해 두긴 했는데요.”

저녁 일찍 집에 돌아온 조한율이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내일 곧장 들어가실 건가요? 그렇다면 전 이만 수면을 취해야겠어요. 아무래도 모니터링도 필요할 테니까…….”

“아니야, 정 필요할 때는 요청할 테니까 그때 외에는 개입하지 않아도 돼.”

“네, 네. 저는 그럼 잘게요.”

“밥은?”

“적당히 먹고 왔어요!”

내 말은 이제 귓등으로도 안 듣는군. 저건 모니터링을 하고야 말겠다는 의미지?

조한율이 하품을 하며 방으로 자러 들어갔다.

부엌으로 들어가니 이우연이 냄비를 젓고 있었다.

조한율의 펜트하우스로 옮긴 이후부터 본인이 식사 당번일 때마다 요리를 하는 게, 의외로 요리가 취미인 듯했다.

레시피대로만 하면 실패 없이 요리가 완성되는 게 마음에 든다나, 뭐라나.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물었다.

“이우연, 혹시 나랑 같이 갈 생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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