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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271화 (272/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71화

냄비를 휘젓던 이우연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잠시만, 이대로는 냄비가 타니까…… 됐다.”

이우연이 가스 불을 끄고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의미를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한동안 이우연이 내 말뜻을 제대로 파악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진심으로 물은 것이었으니까.

“어디로…… 라고 말하면 때릴 거야?”

“아마?”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척을 하기에 이 녀석은 너무 눈치가 빨랐다.

잠시 후 이우연이 눈살을 찡그렸다.

내 말에 반신반의하는 기색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묻는 건데, 내가 지금 말뜻을 착각하는 건가? 뭐, 이번 던전 공략을 도와 달라든가…… 그런 의미로 이야기한 거야?”

“아니, 저쪽 공략엔 네가 딱히 쓸모없는데.”

“…….”

운명의 씨앗 공략이라면 모를까, 타르토스 쪽은 이우연에게 도와 달라고 해 봤자 의미가 없다.

현재 운명의 씨앗을 사용할 경우 나는 페트라의 육체에 빙의되는 형식으로만 저쪽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이우연이 시스템상 특별한 개체라고 해도 그 형식은 같다.

조한율 말에 따르자면 가장 성향이 비슷한 사람에게 빙의될 것이고, 그 경우 유령성의 일례를 생각해 보았을 때 빙의될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은 루카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기억을 이어받지도 못하고, 능력치도 루카스보다 떨어지는 이상 냉정하게 말해 딱히 쓸모가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랑 같이 저쪽 세계로 갈 생각 없냐고 물은 거야.”

입에서 내뱉고 보니 마음이 더욱 명확해졌다.

그저 충동적으로 문득 든 생각이기도 했고, 혹은 꽤 오랫동안 내 무의식 속에서 자리했던 생각인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진심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네가 같이 가면 좋겠어.”

이우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의를 탐색하는 시선이 아주 오래도록 얼굴 위에 머물렀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응, 제법.”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타르토스에서 머물렀던 십여 년에 비하면 한국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짧았다. 이우연과 보낸 시간도 절대적인 시간으로 따졌을 때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람 간의 관계에는 이상하게도 절대적이라는 게 존재하질 않는 듯했다.

내가 만약 타르토스로 돌아가 한국에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다면…….

‘이 녀석이 제일 아쉽겠지.’

아쉽다는 단어가 이 상황에 잘 들어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만났을 땐 재수 없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이제까지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우연은 나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잘 맞았다.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는데도 그다지 큰 위화감 없이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이우연 덕이 매우 컸다.

그 외에 한국 헌터들과 함께 공략을 할 때도 알게 모르게 개입해 도와준 것 등등, 이 녀석이 없었다면 한국에서의 생활은 제법 어려웠을 터였다.

어쩌면 완전히 나에게 맞춰서 준비된 존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리고 그 덕분에…… 아직은 동지애쯤, 혹은 우정, 하여튼 애착 같은 게 생긴 것 같다.

“어쩔래?”

대답을 기다리며 유독 검게 보이는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자 어느 순간 이우연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그림자처럼 어둡게 드리워졌다.

“……미안. 나는 안 가.”

나는 그 거절에 딱히 놀라지 않았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묻기 전부터 이런 대답을 들을 것 같다고 예상하기도 했고.

“그래, 뭐. 그렇겠…….”

“아니, 내 말 좀 끝까지 들어 봐. 일단 당신이 그렇게 말해 준 건 기뻐. 사실…… 엄청나게 기쁜데.”

이우연은 어딘가 얼떨떨한 것처럼 보였다. 전혀 기대하지 못한 말을 들은 사람 같다고나 할까.

“당신한테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해서…… 어, 진짜로 기쁜데? 이거 프러포즈지? 나 혹시 꿈꾸는 거…… 악!”

“프러포즈는 개뿔이.”

그냥 애착 인형을 데리고 갈까 고민한 것 정도거든?

짜증을 담아 갈비뼈를 세게 갈겨 주었다.

“현실 맞지?”

“아야야. 이렇게 세게 때릴 것까진 없잖아. 포션 필요하겠는데.”

이우연이 강하게 맞은 갈비뼈 부분을 문질렀다.

그야 아플 것이다. 차인 분노를 담아 금이 약간 갈 정도로 아프게 때렸으니까.

……너무 세게 때린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맞은 부위를 안고 끙끙대는 이우연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야 당연히 안 가겠지.”

이우연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 사람이다.

이상하게도 시스템이 다른 차원에서 온 바이러스 취급을 하고 있지만, 적어도 이우연 본인에게 그런 자각은 전혀 없다.

나도 타르토스에 강제로 가게 된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한국에 정이랄 게 없었어도 굳이 다른 세계로 이주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무슨 사서 고생이란 말인가.

게다가 이우연은 한국에 나름대로 탄탄한 기반까지 갖추고 있지 않은가. 다른 세계에서 업적을 쌓아 랭킹 1위가 된 나 같은 이레귤러를 제외하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강이다.

그런 이우연이 굳이 다른 세계에 가서 살 이유는 없다.

나도 그쯤이야 알고 있다.

“그냥 물어본 거야, 그냥.”

그래서 나도 딱히 실현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꺼낸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우연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은 그저…… 괜한 후회를 남겨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30년쯤 지나서 ‘아, 그때 말이라도 해 볼 걸 그랬나?’ 하고 떠오르기라도 하면 적잖게 불쾌할 것 같고.

한국에 돌아가면 치킨부터 시키기, 같은 버킷 리스트와 별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을 뿐이다.

“아니, 강예나. 혼자서 다 아는 척, 통달한 척 결론 내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줄래?”

결국 정말로 포션까지 마신 이우연이 고개를 들고 나를 쏘아보았다.

“적어도 제대로 된 대답은 들어야지. 내가 당신 성격을 아는데. 쉽게 나온 말도 아닐 거잖아.”

“……어차피 거절당할 건데 내가 구구절절 이유까지 다 들어야 돼?”

“당신도 내가 한국에 머물러 달라고 하면 거절할 거면서 왜 내가 찬 것처럼 굴어?”

이쯤 되니 진짜 열받았다.

“야, 누가 차여? 진짜 죽을래?”

“그야 내가 강예나를…… 아, 알았어! 그만 때려.”

까불던 주제에 맞기는 싫었는지 주먹을 피하던 이우연이 급기야 낄낄대기 시작했다.

저게 드디어 미쳤나, 싶어 어이없는 눈길로 바라보자 이우연이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제안은 고마워. 일단 생각은 해 볼게.”

“생각은 무슨. 넌 그냥 한국에 그대로 짱박혀 있어.”

“너무한 거 아냐?!”

“내가 가지 않겠냐고 묻긴 했지만…… 솔직히 저쪽 세계에 좋은 점이라곤 딱히 없거든.”

과학이 발달한 데다 어느 정도 치안이 유지되고 있는 현대의 한국과 비교하자면 미안한 수준이다. 문명적인 수준도 그렇고, 신분제가 아직 남아 있는 세상이라 한국인 입장에서는 솔직히 죽창을 들고 싶어질 때가 많기도 했다.

또 신전 녀석들이 저지른 짓을 보면 더욱 그랬다.

저 세계는 여러모로 글러 먹었다.

……인간에게 욕망이란 게 있는 이상 어느 세계건 다를 바 없는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당신은 저쪽이 좋은 거잖아. 가족 같은 친구들이 있으니까.”

이우연이 한숨을 쉬며 식탁 의자에 걸터앉았다.

맞은 곳이 상당히 아픈 모양이다.

“저쪽에서 10년 넘게 있었다고 했지. 친구도…… 넷이었나? 머릿수도 그렇고, 같이 보낸 시간도 그렇고 비교가 안 되네. 지는 것도 어쩔 수 없나…….”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이니 그렇게 비교할 것은 아니다만,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하나하나 본인의 패배 요소를 손꼽아 보던 이우연이 픽 웃었다.

“그래도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우리 강예나 씨가 스카우트 제의를 주시니 혹하기는 하는데.”

“그러니까 그냥…….”

“근데…… 어쩐지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 아니, 예감?”

이우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드물게도 본인조차 자신이 하는 말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뭐?”

“이상하네. 솔직히 나, 크게 애국심 있는 타입은 아니거든. 시스템 문제도 있고. 그런데 다른 곳으로 떠날까, 하고 고민하는 순간 어쩐지 한국에 남아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전생에 한국이랑 인연이라도 있었나?”

나는 홀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우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을 텐데, 평소 장난은 쳐도 헛소리는 잘 하지 않는 녀석이 전생 운운하며 저러고 있으니 어째 무섭다.

설마 귀신이라도 들렸나……?

이우연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곧 입을 열었다.

나는 긴장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근데 내가 저쪽으로 넘어가면 강예나 씨가 날 책임져 주는 건가? 저기도 호적이 있어?”

“꺼져라, 진짜.”

진짜 귀신이라도 들린 거 아냐?

나는 기꺼이 한 대 더 때려 친히 구마(驅魔)를 해 주었다.

* * *

여러모로 강렬한 일주일이었다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보면 괜찮은 휴식이 되었다.

“12시가 넘었으니 끝인 거겠지.”

그리고 휴식이 끝난 밤.

동거인 두 명은 내일을 준비한다며 일찍 잠들었고 일어나 있는 것은 나뿐이었다.

즉 이제껏 어영부영 미뤄 왔던 일을 해치우기에는 딱 좋은 시간이었다.

나는 시스템 메시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 ‘페트라’의 기억이 담긴 파편을 수령하시겠습니까?

- Y/N

슬슬 지난번 던전에서 받은 보상을 수령할 때가 왔다.

사실 던전 공략 후 바로 보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으나, 굳이 내버려 둔 것은 무엇이 나올까 두려운 마음에서였다.

‘클래스 이동으로 죽을 뻔했을 때 이미 페트라의 기억은 한 번 봤으니…….’

그리고 그때 보았던 것은 루카스가 죽고 페트라가 자결하던 장면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과거를 바꾸기 전, 원(原)역사를 살아가던 페트라의 기억을 보여 줄 게 분명한데…… 그 이상의 어떤 기억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까.

솔직히 그리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수도 없지만.”

아직 자결한 페트라가 어떻게 과거로 돌아갔는지, 그리고 그 후 아리아드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정보는 많을수록 좋으니 봐야만 한다.

결국 고민 끝에 보상 수령 버튼을 누르자 온몸이 흰빛에 감싸였다.

- ‘페트라’의 기억이 재생됩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암전 후.

시야가 트이자마자 나는 가장 먼저 자신의 팔다리를 확인해 보았다. 페트라의 나이를 파악해야 그나마 시간대를 가늠할 수 있으니.

하지만, 내게는 팔다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아니, 팔다리 이전에.

‘유령?’

육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던 그 순간.

“때가 왔네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의식이 목소리로 한순간에 쏠렸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것처럼.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리아드네…….’

찬란한 금발을 길게 늘어트리고 순백의 신관복을 걸친 성녀, 아리아드네였다.

그런데 얼굴로는 나이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보면 처음 만났을 때보다 젊어 보이기도 했고, 혹은 산전수전 다 겪고 늙어 버린 노인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아리아드네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오늘따라 품고 있는 영의 기운이 난폭합니다. 이제 그만 인도해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요?”

아리아드네가 건네진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생기 넘치는 아름다운 장미가 만발한 정원.

그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이를 발견한 아리아드네는 짧게 인사했다.

“교황 성하.”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저게 교황이라고?

말만 들었지 실제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교황이 아리아드네에게 친근한 인사를 건넸다.

“간밤에는 편히 지내셨습니까?”

“성하의 은혜를 입어 편히 지냈습니다.”

“무얼, 성녀에게라면 얼마든지 자리를 내어 줄 수 있지요. 빈궁한 처소라 대접할 것이 없어 그저 미안할 뿐입니다.”

교황쯤 되는 지위인데도 예의 바른 태도, 검소한 복장, 사람 좋은 노인처럼 웃는 모습까지. 안락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한대도 별로 놀랍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을 타르토스의 일개 평민이 봤다면 감격에 차 눈물을 줄줄 흘리지 않았을까.

물론, 저 작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는 나로서는 그저 역겨울 뿐인 가식에 지나지 않았지만.

‘게다가 빈궁하다니.’

이게 빈궁한 것이라면 타르토스인들은 대부분 빈민이다.

다음 운영자가 정해질 때까지 은거 생활을 하고 있다더니 관리 잘한 태가 나는 장미 정원 하며…… 어딜 봐도 검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화려하게 물오른 장미에서 피비린내가 풍기는 것 같아 역겹기 짝이 없었다.

속에서 무언가가 이글이글 들끓었다. 천불 같은 분노였다.

그러다 나는 문득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이건…… 내 감정인가?’

아니, 이건 페트라의 감정이었다.

나는 현재의 상황을 추측해 보았다.

지금의 페트라는…… 육체는 갖추지 못했으나 여전히 의지를 가지고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듯했다. 감정도 느낄 수 있고.

즉 유령이라는 말이다.

‘……신관 클래스의 힘인가?’

그야 신관이 영혼을 저승으로 이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게 정말일 줄은 몰랐고, 이런 식으로 적용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동안에도 아리아드네와 교황의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성하.”

시간대로 추측해 볼 때 분명 전(前) 교황일 텐데 아리아드네의 태도는 무척이나 공손했다.

그야말로 순종적인 성녀, 그 자체였다.

그 공손함이 교황의 눈에도 흡족했는지 교황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질문을 허가합니다.”

“얼마 전 외유를 허락받았을 때…… 저는 불타오르는 성을 보았습니다.”

말투는 여상했고 목소리 또한 평온했다.

그러나 교황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장미를 바라보는 아리아드네의 눈빛에서 나는 짙은 분노를 발견했다.

“그저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작인 가난한 성이었지요.”

“루카스 왕자의 소유였던 성을 말하는 거로군요. 예, 성녀 아리아드네. 그대의 옛 친우지요.”

교황이 아무렇지도 않게 긍정했다.

마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는 듯, 눈빛에는 동정이 어렸다.

아리아드네가 이슬이 맺힌 장미의 꽃잎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혹시라도 난폭한 손길에 상처라도 입을까 조심스러워하는 손길이 잎사귀를 기어가던 곤충을 집어냈다.

“황제가 성민들도 모조리 죽인 것을 알고 계시지요?”

“……루카스 왕자는 영명한 데다 공정한 인물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왕가에 태어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차라리 귀족가에 태어났다면 이 대륙에 이바지할 수 있었을 텐데.”

태생부터가 왕가의 인물이라, 살려 두는 것만으로도 현 황제의 권력을 위협하는 요인이 된다. 황제를 대신할 수 있는 핏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역의 불씨가 되니까.

그리고 교황, 운영자 입장에서 봤을 때는 미리 없애야 할 분란의 씨앗이었다.

겨우 안정되어 가는 정세를 흐트러트릴지도 모르는 꼬투리를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교황이 입에 올린 변명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조용히 되물었다.

“그래서 현 황제에게 손을 빌려주신 겁니까?”

“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교황은 고개를 떨궜다.

마치 죄악감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성녀 아리아드네. 루카스 왕자를 방치했다간 더한 분란의 씨앗이 되었을 것입니다.”

“…….”

“신관은 타인을 대신하여 죄를 뒤집어쓰는 존재. 희생된 목숨의 값은 제가 지고 가겠습니다.”

“……예, 그랬군요. 성하의 결정을 이해합니다.”

아리아드네가 조그마한 날개를 가진 풍뎅이 한 마리를 장미에서 떼어 내 하늘로 날려 보냈다.

마치 고요한 바다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교황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이해했다니 다행입…….”

“그렇기에…… 저도 각오가 섰습니다.”

그리고, 그때였다.

장미의 꽃잎을 쓸고, 곤충을 조심히 날려 보냈던 그 손.

아리아드네가 단검을 꺼내 쥔 후 교황의 목줄기에 박았다.

푹!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교황이 눈을 크게 치뜨고 무어라 외치려는 듯 입을 크게 벌렸으나 나오는 말은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조용히 죽어 가는 교황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그러니 성하의 목숨값은 제가 짊어지겠습니다.”

그리고, 마치 사냥감의 힘줄을 분해하듯 아리아드네가 손에 힘을 주어 서걱서걱, 교황의 목을 완전히 잘라 냈다.

우습게도 그렇게 쉽게.

한 시대를 조종한 배후의 인물이 사라졌다.

아마도 교황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했던 아리아드네를 자신의 아군이라 믿고 방심했던 탓일 것이다.

그렇게 허망하게 교황의 목이 땅으로 떨어진 후.

파아앗!

아리아드네의 몸 전체에 황금빛의 기운이 일순 맴돌다 사라졌다.

시스템 메시지를 볼 수는 없었지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운영자 권한이 옮겨 온 것이다.

한동안 아리아드네의 시선이 허공을 훑었다. 아마도 시스템 메시지를 읽고 있는 것이겠지.

나는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를 심정으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결국…… 너였구나.’

확실한 예감이 있었던 만큼,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기대를 배반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모양이다.

생기 넘치는 장미가 만발한 정원에서 시체와 함께 우뚝 선 아리아드네의 신관복에는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

목이 떨어진 시체보다도 더욱 생기가 없어 흡사 시체처럼 보이는 아리아드네는 이윽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결정에 변함은 없으신가요?”

그것에 대답한 것은 내가 아니라 페트라였다.

목소리는 부여받지 못했으나 영혼에 의지를 담아, 페트라는 긍정했다.

- 네.

“한 번 더 생각할 기회를 드릴게요. 본래 영혼은 신관의 인도를 따라 새로운 운명의 궤를 걸어야 합니다. 당신의 주군인 루카스 왕자 전하가 그러했듯. 그러나 페트라, 당신이 택할 길은 다릅니다.”

-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영혼을 환생의 굴레에 넣는 대신 저 차원의 어딘가로 던져 넣는 것뿐. 마땅히 따라가야 하는 궤를 이탈하는 것이니 고난이 따를 것입니다. 또한 만일 운이 좋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 성공하더라도…… 그때 당신의 영혼이 온전할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기억도 없을지 모릅니다.”

- 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시겠다는 거로군요.”

- 이번에야말로 지켜 낼 겁니다.

그 견정(堅貞)한 의지에 아리아드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페트라, 당신은 정말 제 친구를 닮았네요. 어떻게 이렇게 멍청하고…… 또 사랑스러운지.”

아리아드네의 녹색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

마치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얼굴로, 아리아드네는 손을 들었다.

“그럼…… 이것이 제 운영자로서의 첫 월권이 되겠군요. 분명 마지막은 아니겠지요.”

그 말과 함께.

콰직!

아무런 전조도 없이 다섯 손가락이 순식간에 비틀렸다.

“당신에게 운명의 가호가 있기를.”

정해진 운명을 바꾸러 먼 길을 떠나는 자를 위한 말이라기에는 다소 얄궂은 기원과 함께.

페트라의 의식이 암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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