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274화 (275/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74화

문을 여니 작고 건방진 꼬마가 서 있었다.

나는 꼬맹이, 라인하르트를 내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용케도 잘 찾아왔네. 헤매진 않았고?”

“이, 이익……!”

라인하르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이를 악문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두려움과 분노가 섞인 상태라고나 할까.

이 꼬맹이가 나중에는 그 애송이가 된다, 이거지.

사이가 사이다 보니 딱히 반갑지는 않는데 신기하기는 했다. 그땐 거기가 타르토스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으니까.

“라인하르트 공자?”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선 라인하르트를 보고 엘리사 메이가 놀라 앉아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째서 저 자…… 아니, 라인하르트 공자가 이곳에?”

“아, 이 녀석이 바로 내 계약자거든.”

계약자라기보다는 사실상 불공정 계약을 통한 노예에 가깝긴 했다.

계약 조건은 적인 황제를 죽일 때까지 내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

심지어 페널티는 죽음이다.

“헛소리!”

라인하르트가 발작처럼 외치며 검지로 나를 가리켰다.

이런, 어른한테 손가락질이라니 예절 교육이 부족한 거 아닌가?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어째서 내가 이런 짓을 당한 것이지? 계약이라니! 나는 그런 계약을 한 기억이 없다! 애초에 너란 작자를 만난 적도 없어! 설명해라!”

이 녀석의 말을 들으면 무슨 사기를 당한 피해자처럼 들린다.

아니, 이 경우 정말 피해자가 맞긴 했다. 내가 무려 금석맹약의 서라는 희귀 아이템을 써 가며 노예 계약을 한 것은 다른 세계의 라인하르트이지, 이쪽의 꼬맹이가 아니니까.

정말로 어떻게 된 걸까.

조한율 : 한 번 더 확인해 봤는데 진짜 제대로 계약이 성립되어 있네요.

계속해서 모니터링 중이던 조한율이 메시지를 띄웠다.

조한율 : 보통 아이템으로 맺는 계약은 차원이 달라지면 계승될 리가 없는데…… 뭔가 단단히 꼬여 있긴 하네요. 이런 경우 계약 표시는 되어도 실제 페널티 집행은 오류가 날 가능성도 있어요. 그리고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역시…….

“……운영자 탓이겠군.”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여기서 말하는 운영자는 현 타르토스의 운영자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운영자인…… 아리아드네를 뜻하는 것이다.

조한율의 추측에 따르면, 타 차원의 아리아드네는 나라는 플레이어를 통해 지금 내가 있는 타르토스에 개입 중이었다.

즉, 이 상황 자체가 비정상적이기 때문에 시스템 오류가 일어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조한율 : 시스템 입장에서는 드라이브가 세 개로 쪼개진 상태에서, 경로가 확인되지 않은 외부 파일이 테라 단위로 강제 다운로드된 것 같은 상황이랄까? 용량도 삑, 메모리 카드도 과열 상태인 거죠. 회로가 타들어 가도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게 비유해 봤자 나는 컴퓨터 관련은 잘 모른다.

하여간 시스템이 세 명이나 되는 운영자의 간섭을 받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 정도만 이해했다.

‘어쨌든 내겐 잘된 일이긴 해.’

루카스가 대신전에 잡혀 있다면 잠입할 방법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게 대신전쯤 되면 추기경을 포함해 신전의 높으신 분들은 죄다 거쳐 가는 곳이다. 메이의 말대로 어지간한 신분 정도는 되어야 간신히 출입이 가능할 정도

‘대신전 정문의 감시는 악명이 높지.’

검을 휴대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성력을 가진 성기사들이 샅샅이 수색한다.

그래서 나는 수도에 올 때 아리아드네가 아무리 동행을 권해도 대신전에는 따라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전의 대문을 넘어가면…….

나는 메이에게 물었다.

“대신전에는 여전히 소지창 사용 불능 권한이 걸려 있나?”

“네, 잘 아시는군요.”

그래.

가장 귀찮은 건 이 점이다.

들어갈 때 무기를 소지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대신전 내에서는 소지창 사용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실질적으로 무기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수단이 완전히 막혀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신전은 가장 비밀스럽고 안전한 장소임에 틀림없다.

‘시간이 좀 있으면 파훼 못 할 건 없지만…… 루카스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

루카스의 형은 루카스를 죽이고 싶어 안달 난 상태 아닌가.

그 왕자 놈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순순히 잡혀 갔는지 모르겠다만, 지난번에 일리아스 건을 겪고 나니 혹시라도 이상한 생각이라도 하는 건 아닌가 싶어 겁이 덜컥 났다.

그러니 빠르게 침입하려면 이 라인하르트가 필요했다.

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라인하르트 공자라면 오늘 당장에라도 대신전에 발걸음 하실 수 있겠지요. 지금으로서는 이 수도에서 가장 승률이 높은, 그리고 신전의 판돈이 걸린 경주마니까요.”

“겨, 경주마라고?”

뜻밖의 말이었는지 말을 더듬기까지 하는 라인하르트를 메이는 차가운 눈으로 훑으며 내게 정보를 전달했다.

“현 왕, 그러니까 루카스 전하의 형님 되십니다만…… 폐하께서는 아직 미혼이시지요. 대신 방계 중 하나를 자신의 후계자로 고르겠다는 의지를 보이셨습니다. 그중 하나가 이 라인하르트 공자입니다.”

메이의 설명을 들은 나는 문득 떠오른 말을 내뱉었다.

“혹시 왕이란 놈, 불능이야?”

“뭐, 뭐라고?”

이런.

아이 앞에서 꺼내기에는 너무 나간 주제였나.

하지만 그런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루카스를 견제하다 죽인 것까지는 그렇다 치고, 기껏 손에 넣은 권좌를 제 자식이 아니라 방계에게 물려준다? 이쯤 되면 합리적 의심이 아닌가.

“그래서 신체 건강한 루카스한테 열등감이라도 느꼈나?”

내 말이 우스웠는지 메이가 웃었다. 얼굴은 마구 폭소하고 싶은 듯 구겨져 있는데 미소 정도로 그치는 점에서 과연 냉정한 부관의 자질이 엿보인다.

“……그런 소문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만 루카스 전하의 견해로는 이 라인하르트 공자의 가문이 교황, 그러니까 전 교황의 출신 가문이라 그렇게 행동하시는 것 같다고 합니다. 현 왕의 목적은 칭제하는 것이고, 그러려면 신전의 협력이 필수적이니까요. 실리를 취하신 거지요.”

과연.

그러고 보니 유령성 공략 때 본 라인하르트는 후계자임을 인정받은 상태였지만, 황제를 두고 친아버지라고는 하지 않았었다.

아마도 이런 상황 탓에 친아들이 아닌 라인하르트가 후계자가 된 것이겠지.

덕분에 현재 왕인 루카스의 형은 목적대로 칭제했으며, 그 후 신전의 협력을 얻기까지 하여 대마법사로서 홀로 날뛰게 된 것이다.

“불경하기 짝이 없군!”

그때였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라인하르트가 외쳤다.

“너희들은 뭔데 감히 폐하의…… 옥체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이냐!”

“뭐긴 뭐야. 왕 목을 두 번 따는 게 버킷리스트인 용사다.”

“……뭐?”

이해하지 못한 아이가 눈을 깜박였다.

저번처럼 스무 살 남짓의 애송이었다면 닥치고 따라오라고 윽박이라도 질렀을 테지만, 십대 초반의 어린아이에게 그럴 수도 없는 일.

게다가, 이 아이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방계 왕족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업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린아이의 태생까지 단죄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용사님?”

메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나를 향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그래, 여기엔 어릴 때부터 스스로 삶을 개척해 홀로 힘겹게 선 아이가 있다.

돌려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않은 선의를, 전혀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선물처럼 돌려준 아이였다.

그 푸른 녹음의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절망밖에 남지 않은 성에서 끝까지 싸워 명예를 지키겠다며 제 생을 불태우던 기사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기사에게, 응당히 받아야 할 빛나는 미래를 주고 싶었다. 새벽의 여명과 함께 가루가 되어 일순간의 연극처럼 사라질 뿐인 결말이 아니라.

엘리사 메이가 이번에야말로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길 바란다.

이번에야말로 끝까지 돕고 싶었다.

나는 메이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쓰다듬었다.

“엘리사 메이 경.”

“네?”

“함께 루카스를 구하러 가자.”

그렇게 말하자, 잠시 멍하니 있던 메이가 환하게 웃으며 가슴에 손을 대고 대답했다.

과거이자 이제는 다신 오지 않을 미래에서 검을 걸고 맹세했듯이.

그러나 이번에는 절망 대신 희망 앞에서.

“따르겠습니다.”

* * *

메이의 추측대로.

과연 현 수도에서 가장 승률이 높은 경주마답게, 라인하르트가 신전에 가고 싶다는 말을 꺼내자 그 요청은 곧장 수리되었다.

그것도 당일 저녁, 급하게 대신전의 추기경을 뵙고 기도를 드려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고 싶다는 요청이 받아들여졌을 정도다.

라인하르트를 감시하던 시종들도 신전에 간다고 하자 순순히 보내 주었다. 호위로서 근위기사를 둘 붙이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감시는 없었다.

후계자로 거론되는 것치고는 허술한 경호였다.

뭐, 내겐 잘 된일이었다.

라인하르트의 협력을 얻어 본래 호위로 붙었어야 할 기사 둘은 곧장 제압할 수 있었다.

기절시킨 것을 묶어 골목에 버려둔 후 근위기사의 휘장이 달린 갑옷을 빼앗아 입자, 나와 메이는 어딜 보나 왕궁의 기사 그 자체로 보였다.

“그런데 보통 공자에게 붙일 정도의 호위라면 안면 정도는 익히고 있지 않나. 신전에서 수상하게 여기지는 않을까?”

“그 점은 아마 괜찮을 겁니다.”

완전히 손을 잡았다기엔 애매한 상태라, 왕실과 신전 사이에 알력 싸움이 있는 것 같다는 게 메이의 설명이었다.

“신전에 간다는데 과한 호위를 붙이면 신전을 무시하는 것이냐는 말이 있을 수 있겠죠. 아직 라인하르트 공자는 신전 세력에 가까우니 왕실에서도 조심스러울 겁니다. 또 신전 입장에서는 혹시 라인하르트 공자에게 탈이 나기라도 하면 현 왕과의 관계를 다시 쌓아 올려야 한다는 문제가 있으니, 급하게 전갈을 보내도 웬만하면 받아들이는 거고요.”

머리로는 파악이 되긴 하지만 가슴으로는 평생 가도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였다.

나는 마차 안에 앉은 채 팔짱을 끼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어딜 가든 더럽네, 권력 다툼이란.”

나 같으면 그딴 건 줘도 사양할 텐데.

그렇게 큰 힘을 쥐고 있다는 것은, 그 힘으로 무언가를 책임져야만 한다는 뜻 아니던가.

물론 그런 책임 따위는 던져 버리고 그저 단맛에만 취하는 이들이 있기에 이 세상이 이런 꼴이 난 것인지도 모르겠다만.

“흥, 그것이 바로 태생이 고귀한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차이지.”

라인하르트가 코웃음을 쳤다.

나는 뜨뜻미지근한 눈으로 꼬맹이를 바라보았다.

이유도 모르고 협박당하는 주제에 여전히 태도에 권위만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게, 불합리한 상황에 빠진 인간이 자기 방어 기제로 저러겠거니…… 라고 이해해 보려고 해도 참 싹수가 노랗다.

내 시선에 라인하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뭐, 뭐냐!”

“책임이 뭔지도 모르는 꼬맹이가 입만 살아서는.”

어지간하면 애가 무슨 말과 행동을 한들 그냥 넘어가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딴 말은 역시 듣기 괴롭다.

책임져야 할 자가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그 말이 지켜지지 않았기에 고통받은 이를 알고 있기에 더더욱.

‘일리아스랑 알리시아는 어쩌고 있으려나.’

둘 다 설마 루카스를 모른 체한 것은 아닐 테고 무언가 따로 계획이 있을 터.

특히 일리아스는 내게 미래의 모든 정보를 들은 만큼 기민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어떻게든 합류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다 왔습니다.”

마차의 바퀴가 끼긱 대며 멈추고 잠시 후, 마차의 문이 바깥에서 열렸다.

아름다운 순백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대신전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감탄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피로 아름답게 가꾸어진, 역겨운 모형 정원일 뿐이니.

굳은 얼굴의 성기사가 긴 창을 든 채 라인하르트 공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문부터는 걸어가셔야 합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라인하르트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라인하르트가 짧은 다리로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운 후 성기사에게 몸수색을 받았다. 메이도 마찬가지였다.

- 현재 필드 내에서는 소지창 사용 권한이 제한됩니다.

소지창 사용 불가 메시지가 뜬 것은 덤이었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대신전의 역량이로군.

‘아마 운영자 권한이겠지.’

예전에는 비싼 마법사라도 갈아 넣었나 했는데 진실을 알고 보니 허탈하다.

곧 날붙이가 없는 것을 확인한 성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단, 라인하르트 공자가 대신전에 계신 동안 대기실에서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러죠.”

나는 선선히 대답했다.

라인하르트가 수상한 것을 보는 눈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신전에 침입한 것까지는 좋은데 의외로 순순히 성기사의 지시를 따르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가 궁금한 것이겠지.

성기사를 따라 신전으로 들어가기 전, 라인하르트는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내가 아무리 떼를 쓴다고 해도 왕궁의 기사를 내부까지 들여보내 주진 않아.”

“알고 있어.”

중요한 것은 신전 정문의 보안을 돌파하는 것뿐.

이제 라인하르트에게 용무는 끝났다.

“그럼 가 봐.”

나는 영 불안해 보이는 꼬마의 등을 툭툭 쳤다.

“그리고, 착하게 살아라. 그래도 조금쯤은 괜찮은 어른이 되도록 노력해.”

“뭐, 뭣……!”

“나쁜 어른이 되면 그땐 용사의 손에 죽을 테니까.”

농담 반, 진담 반쯤으로 한 말에 라인하르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성기사를 따라가는 발걸음이 빨라진 걸 보면 어지간히 겁을 먹은 듯했다.

뭐…… 딱히 더 볼일도 없겠지.

나도 발걸음을 돌렸다.

라인하르트를 볼 때마다 유령성의 끝이 생각나 마음이 좋지 않던 탓에 어린애에게 화풀이나 하고, 한심하군.

그래도 의외의 곳에서 만난 악연은 더 이상 마음에 담지 않기로 했다.

미래는 앞으로 바꿔 나갈 수 있을 테니.

그리고 그 미래를 바꾸려면…….

“조한율, 잘 부탁해.”

그러자 메시지의 답이 경쾌하게 돌아왔다.

조한율 : 맡겨 주세요!

파지직!

메시지가 떠오르기 무섭게 주변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수도의 외곽에 위치한, 거대한 대신전.

어지간한 성만큼 커다란 규모의 신전이 순식간에 거대한 균열의 태풍에 휩싸였다.

- 오류가 발생합니다!

- 시스템 권한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오류 해결 중…….

- 해당 구역의 소지창 사용 불가 설정이 해제됩니다.

시스템 운영자의 빽은 저쪽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이거야.

“무슨 일이냐!”

“침입자인가? 정문을 봉쇄해!”

“추기경 예하께 연락을!”

그리고 오류 메시지가 떠오르자마자 정숙하던 신전 전체가 금세 혼란에 휩쓸렸다.

방금 전 우리가 통과한 정문의 문이 쇠사슬로 닫히고, 기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리 이야기를 했음에도 메이가 어깨를 움찔거리기에 나는 등을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모르는 척하고 걸어.”

여기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제삼자 역으로, 이대로 혼란을 틈타 신전 내부로 침입하면…….

“이 무슨 추태입니까!”

그때였다.

맑게 울려 퍼지는 성가대처럼 어딘가 신성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성기사들을 꾸짖었다.

“고작 이런 일에 정숙함을 해치다니. 모두 원인을 찾을 때까지 정 위치에서 대기하세요. 이런 때일수록 외부의 침입을 받기 쉽습니다.”

무엇 하나 거를 것 없는 깔끔한 지시와 절로 귀를 기울이게 하는 위엄.

당황해 우왕좌왕하던 성기사와 병사들이 빠르게 안정을 찾으며, 신전 내부에서 걸어 나와 지시를 내린 이를 향해 예를 표했다.

그리고, 나도 그 여자를 발견했다.

흰 햇살이 눈부신 금발 위에서 부서지고, 흰 신관복에 감싸인 얼굴은 수척해 보였으나 여전히 섬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녹색의 눈동자.

불만스럽게 기사들을 둘러보던 그 시선은 잠시 후, 정원 구석에 서 있던 나를 발견했다.

운명처럼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얽히는 순간 녹빛의 눈동자에서 반신반의하는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나 싶더니, 곧이어 확신의 빛으로 변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 눈빛을 이해한 순간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는다.

어째서.

나는 지금 저 애의 눈에 낯모를 기사로 보일 텐데.

저 애는 내가 페트라의 몸에 빙의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를 텐데.

대체 어떻게 알아본 걸까.

이건 말도 안 돼.

억겁처럼 느껴지는 찰나가 흐르고.

연분홍빛의 입술이 달싹였다. 갈급한 눈빛이 매달렸다.

아무리 말이 되지 않아도, 그런 불가능을 뛰어넘어서.

“레나……?”

이름이 불렸다.

그렇게 내가 그 시선과 목소리를, 아리아드네라는 존재를 모두 인지한 순간에.

- 던전 클리어에 필요한 선행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선행 조건 : ‘아리아드네’와의 조우

- 해당 던전 클리어 조건 : ‘아리아드네’의 죽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