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77화
미궁 안은 예상대로 몬스터들이 나름의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다.
사실 어지간한 던전보다도 촘촘하게 영역을 이루고 있어, 나아가며 마주치는 몬스터들에 약간 기가 질릴 정도였다.
조한율 : 이게 n0년차 서버의 무서움인가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빡빡한 밀집도를 자랑하는 던전은 드물다.
여기는 말 그대로 운영자가 자신의 근거지로서 구현한 곳.
본인의 의사와 어긋나는 고렙 플레이어들을 박아 놓는 던전이니만큼 평범한 던전보다 훨씬 더 악의에 찬, 폭정의 증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메이가 물었다.
“미궁 안에는 변변한 먹이도 없을 텐데 어떻게 늘어났을까요?”
“몬스터끼리 잡아먹었겠지. 그리 드문 경우도 아니니. 특히나 이 유령 개미는 더욱 그래.”
어지간한 성인 하나만큼 큰 유령 개미가 수백 마리씩 바글거리는 것을 보며 나는 설명을 이었다.
“먹이가 충분치 않으면 서로 잡아먹거든. 번식력이 좋은 만큼, 사실 먹이가 부족하지도 않은 셈이지.”
콰광!
검이 휘둘러졌다.
위협적으로 이빨을 부딪치며 먹이를 향해 기어오던 유령 개미들의 군단이 단번에 일소되었다.
“자기들끼리 잡아먹는다니…….”
메이가 기가 질린 듯 말을 이으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저럴 만도 했다.
정말 밑바닥까지 굴러 본 용병이 아니라면, 다양한 몬스터와 던전을 접할 일이 그리 없기는 했다. 기사들은 대개 주둔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까
미궁 바닥에는 내가 터트린 유령 개미들의 보랏빛 피가 흥건했다.
마침 좋은 기회였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 뭐든 알아서 손해 볼 것은 없다.
“본래 유령 개미는 번식력이 워낙 뛰어나서 소탕하려면 여왕개미와 알까지 처치하는 게 정석이지만…… 이번에는 시간이 없으니 기억만 해 두고 다음 구역으로 가자.”
의도치는 않았지만 이런 식의 가르침은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그만큼이나 미궁 안에 몬스터가 많았던 것이다.
“흡혈박쥐는 생물의 온기를 귀신같이 알아채지. 다른 몬스터 피를 이용해 유인하는 게 좋아. 미리 독을 써 두면 더 좋고. 막타 가져가.”
“독니 뱀들도 있네. 쟤네는 의외로 먼저 건들지만 않으면 공격하진 않아. 대신 한 번 물면 죽어도 놓지 않는 데다 독이 빨리 돌아서, 어지간하면 그냥 물린 곳을 베어 내는 게 빨…… 쯧, 이건 따라 하지 마라. 해독 포션 잘 가지고 다녀.”
“이런, 이 흔적을 보니 트롤도 있나 보네. 트롤이 있으면 피를 채집해 두는 게 좋은데…… 빈 병 있어?”
“아, 네!”
트롤의 피는 포션을 만들 때 쓰이는 귀중한 재료인 데다가, 비상시에는 성수에 희석시켜 어떻게든 사용할 수 있기에 매우 유용하다.
포션이 다 떨어졌을 때 써먹을 수 있는 응급 처치라고 할 수 있다.
“돈 없는 하급 용병 때 자주 써먹었지.”
“그러기엔 성수도 비싸지 않습니까?”
“아, 그건 그러네.”
나야 항상 아리아드네가 곁에 있었으니 말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엄청난 거였네. 무려 ‘성녀’를 개인 힐러로 데리고 다닌 거니.
“성수가 없으면 하급 포션에 섞어도 어떻게든 중화되긴 해. 혀가 약간 마비되긴 하지만…… 어이쿠.”
아니나 다를까 곧 트롤이 쿵쿵거리며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내가 묻힌 몬스터 피 냄새에 흥분이라도 한 건지 씩씩대는 숨소리가 거칠다.
“일단 메이 너는 뒤로 물러나 있어. 레벨 30대라고 했지? 막타는 넘겨줄 테니까.”
“아니, 괜찮…….”
쿵쾅대며 나타난 거대한 트롤이 사냥감에 눈이 뒤집혀 제 몸통만 한 방망이를 횡으로 휘둘렀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그대로 뭉개질 법한 공격.
트롤도 그 공격이 당연히 먹힐 거라고 확신했을 테다.
그렇지만.
쾅!
거대한 방망이를 고작 검 하나로 받아 낸 아주 조그마한 인간을 보는 트롤의 눈동자는 황당함으로 가득했다
덩치가 산만 한 몬스터 입장에선 이 검이 바늘처럼 보일 테니 당연하겠지.
먹이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제 공격을 막아 냈으니 당황할 만도 하다.
“트롤의 빠른 자가 치유 특성이야 유명하고…… 그래도 피를 채집하려면 깨끗하게 목을 따는 게 낫거든.”
그러고 나서 문득 생각난 말을 덧붙였다.
“아, 이런 식의 대응은 배우지 마. 평범한 롱소드 체급으로 이런 짓을 했다간 부러지기 십상이니까.”
“……할 생각도 없는데요.”
조한율 :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해욧!
이런, 알리시아한테 옮았나?
하기야 트롤과 정면으로 힘겨루기라니, 어지간하면 하지 않을 발상이긴 했다.
휙!
나는 약간 반성하며 트롤에 팽팽히 맞서던 검의 방향을 틀어 맞서던 힘을 흘려보냈다.
크릉!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깨진 균형에 트롤이 약간 비틀거린 사이.
- 님페의 바람을 사용합니다.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각력을 이용, 트롤의 머리를 세게 걷어찼다.
크어어엉!
좁은 통로 덕에 중심을 잃은 트롤은 벽에 부딪혀 더 세게 휘청거렸고.
나는 그 틈을 타 트롤의 어깨에 올라타 양다리로 목을 단단히 붙잡은 채, 트롤의 대가리를 손으로 붙잡고 자동차 스티어링 휠처럼 돌려 버렸다.
순수한 악력만으로 트롤의 목뼈를 부수자니 힘은 들었지만 못 할 것도 없었다.
콰드득!
목뼈가 꺾이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트롤의 몸체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레벨 80으로 돌아오니 A급 몬스터 정도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쉽다.
나는 메이에게 손짓을 했다.
“자, 이제 네가 막타 쳐. 바로 다음 구역으로 간다.”
“하아…… 네.”
조한율 : 그런데 예나 씨, 은근 선생님 체질이네요?
몬스터 강의(?)를 덩달아 함께 듣게 된 조한율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조한율 : 과연 랭킹 1위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모르는 몬스터가 없는 거 아녜요?
마침 트롤의 목을 따고 피를 채집하던 메이도 같은 질문을 해 왔다.
“이런 식의 던전 클리어를…… 대체 몇 번이나 해 오신 겁니까?”
“딱히 세 본 적은 없는데. 내 소문 들어 본 적 없어? 소문으로 들은 것 정도는 될걸.”
소문이라는 게 워낙 뜬금없이 부풀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너무 허황하면 오히려 축소되어 전달되는 경우도 있다.
나도 예전에 타르토스를 여행하며 내가 나오는 소문들을 종종 듣곤 했는데, 의외로 ‘그게 말이 되냐.’라든가 ‘그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라거나 하는 식으로 정리되며, 결과적으로는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로 발전돼 있었다.
그로부터 십여 년쯤 지나기는 했지만 그때와 별다를 바 없을 것 같긴 한데 말이지.
“그, 그럼 인신매매를 하던 남부의 해적들을 습격해 처단하신 것도 사실인가요?! 도중에 크라켄이 나타나서 배가 반파되었다고!”
“아, 그 대왕 오징어인지 문어인지 하는 놈 말이지.”
타르토스 대륙인들은 두족류 생물을 혐오하는 건지 두려워하는 건지, 단순한 해양 S급 몬스터를 무슨 대악마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했지만…… 진짜 대악마를 본 데다 오징어든 문어든 잘 먹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내게는 ‘와, 저만한 문어라면 문어 숙회를 얼마나 만들 수 있을까.’ 정도의 감상이었다.
“그럼 광산 지대의 광물을 독점하고 민초들을 노예처럼 부리던 백작 저택을 습격한 건요? 그때 지하에서 악마 소환진을 발견했다고…….”
“응, 백성을 인신 공양하던 악마 소환진이었지. 덕분에 마계도 다녀왔어.”
참고로 그때 릴리스와 악연 아닌 악연이 처음 만들어졌다.
메이의 눈길이 존경을 넘어 안쓰러움에 가까워졌다.
“용사님…….”
조한율 : 대체 어떤 삶을 산 거예요…….
말하다 보니 나도 그게 궁금해졌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난 진짜 소시민인데.
- 몬스터와 조우하였습니다.
- S급 몬스터 : 오크들의 왕
그때였다.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 나는 발걸음을 멈추어 세웠다.
“……S급?”
아무리 파워 인플레가 심해진 세계라고 해도 그렇지, S급 몬스터가 보스 몬스터도 아닌데 이렇게 튀어나올 일이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교황이란 자식을 만나면 진짜 죽도록 패 줘야겠다. 대체 무슨 공간을 만든 건지.
“메이, 뒤로 물러서 있어.”
“네!”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쿵!
콰쾅!
기본적인 오크보다 덩치가 몇 배는 더 큰 오크가 미궁 벽을 부수며 달려오고 있었다. 머리에는 위협적으로 보이는 뼈 모양 투구가 씌워져 있다.
나조차 어지간해선 부술 수 없었던 벽이 종잇장처럼 갈라지는 것을 보니 그 강건함을 알 만했다.
‘보통 오크는 기껏해야 B급인데.’
개체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아마 가혹한 미궁의 환경이 몬스터를 진화시키는 게 아닐까 짐작만 해 볼 뿐.
물론 그래 봤자 지금의 내 적수가 될 건 아니었다.
달려오는 저 기세대로 한 방에 쪼개 주지.
나는 마구잡이로 돌진해 오는 오크왕을 보며 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막, 검으로 베려는 순간…….
콰지직!
황소처럼 흥분해 이리로 달려오던 오크의 머리가 절반으로 쪼개졌다. 녹색 피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무슨…….”
천천히 쪼개져 바닥으로 스러지는 오크의 몸 사이로, 얼굴이 언뜻 엿보였다.
먼지를 뒤집어써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는 보석처럼 박힌 파란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메이가 먼저 그 이름을 외쳤다.
“루카스 전하! 무사하십니까!”
“엘리사 메이 경, 어떻게 여기까지……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겠군.”
루카스가 손에 든 무언가의 뼈다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한숨을 쉬었다.
아마 무기를 빼앗긴 채 미궁에 갇혔으니 이 대신 잇몸이라고, 몬스터를 사냥해 뼈를 채집해서 마력으로 강화한 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의외로 생활력 강한 녀석이라니까.
루카스가 나를 향해 눈썹을 까닥였다.
“레나.”
“응, 루카스.”
찾았다.
고고한 왕자님이 미궁에서 제 발로 걸어 나온 것이다.
그리고 루카스를 만난 즉시 아리아드네가 이어 주고 있던 실은 끊어졌다.
“이야,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 켁.”
그리고 루카스는 나를 보자마자 내 멱살을 잡았다.
감격의 재회 따윈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아, 뭐야! 왜 그래?”
“레나, 너지?”
언제나 정갈한 이목구비가 분노에 차서 빛나고 있었다.
루카스가 내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왕자님치고 드물게 냉정을 잃은 모습이었다.
“또, 또, 또! 내가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무작정 검부터 휘둘렀겠지!”
“……혹시 어디서 보고 있었어?”
“보지 않아도 그쯤이야 안다! 대체 같은 말을 몇 번이나 시키는 거냐, 이 멍청이가! 너와 알리시아의 지능은 사실 별반 차이 나지 않는 것 아니냐?”
“그건 너무한 거 아니야?!”
나는 진심을 담아 항의했다.
“아무리 그래도 알리시아 수준은 아니거든? 그냥 성질이 좀 급한 걸 가지고!”
“성질이 급한 정도가 아니지 않느냐! 내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눈을 뜨지 않았더라면 네 성검에 그대로 베여 죽었을 거다!”
“그러게 방심하지 말고 항상 눈을 뜨고 있지 그랬어.”
“그냥 순순히 반성을 해라!”
“아, 반성해. 반성한다니까. 근데 애초에 네가 순순히 수도에 올라온 것도 문제 아니야?”
“정말 한마디도 안 지는군. 대체 어디를 봐서 반성한다는 건지.”
계속해서 내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 대던 루카스는 마지막으로 내 볼을 한껏 꼬집고서야 겨우 손을 놓았다. 아마도 포기한 모양이다.
“……그래도 이번엔 약속은 지켰군.”
“약속? 아…….”
지난번에, 다음 만남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었지.
그 말대로였다.
다행히 그로부터 3개월밖에 흐르지 않은 시점이었으니.
나는 아픈 볼을 문지르며 씩 웃었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우리 왕자님, 혹시 재회 날짜라도 손꼽아 세고 있었나?”
“……내가 수도로 올라오지 않았더라면 내 성으로 형님의 군대가 몰려왔겠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내 말을 무시하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나도 루카스의 말을 무시하자니 그냥 넘길 수만은 없는 말이었다. 절로 날카로운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하, 그래서 수성(守城)을 포기하고 단신으로 수도로 올라오셨다?”
“성민들을 전쟁에 휘말리게 두기는 싫었으니까.”
그렇게 말한 루카스가 메이에게 잠시 시선을 던졌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리아스에게 네가 보고 온…… 미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랬군.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솔직히 나름대로 머리도 좋고 처세에도 능한 편인 루카스가 왜 형의 명령에 따라 순순히 수도로 올라왔나, 했는데.
일리아스에게서 ‘유령성’의 전말을 들은 것이 원인이 되었던 모양이다.
본인과 함께 몰살당한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고도 성에 뭉개고 있을 녀석이 아니긴 했다.
‘아니, 일리아스 녀석…… 그걸 순순히 말해 주면 어떡해.’
루카스 성격상 그런 전말을 들으면 당연히 수도로 올라온다는 선택을 했을 테다. 어쨌거나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니까.
그리고 일리아스가 그걸 모를 것도 아닌데…….
갑자기 도중에 사라졌다는 것도 그렇고, 뭔가 따로 생각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다.
“그거 네 탓 아니야.”
그리고 진심이기도 했다.
루카스의 신분이 재수 없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신분을 빌미로 남을 깔아뭉개는 사람도 아니었거니와, 심지어 10대 후반부터는 용병으로 구르며 제 힘으로 벌어먹고 살던 녀석이다.
그런 주제에 책임감은 올가미처럼 제 목에 걸고 있고.
그런 루카스를 거슬린다며 굳이 제거하고자 했던 건 형 쪽이다. 아무 죄도 없는 성민들까지 몰살해 가면서.
거기 어디에 루카스 잘못이 있단 말인가
“아니, 내 탓이지. 이것만큼은 네가 틀렸다.”
그리고 이런 대답이 돌아올 것도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엄격한 목소리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루카스와는 분명히 친구지만…… 왕족이라 제 잘못도 아닌 일도 책임을 지겠답시고 목숨조차 가볍게 내놓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면, 주변인 입장에서는 매우 답답하다.
“넌 진짜…… 다음 생에서는 파락호로 살아라. 다시 왕자로 태어나도 가문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아니, 그냥 평민으로 태어나라. 그리고 주변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네 맘대로 살아.”
이번 생에 이렇게 고생하는데 다음 생에서는 조금쯤 꿀을 빨아도 괜찮지 않나.
“헛소리.”
물론 왕자님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라 나는 재차 한숨을 쉬었다.
“대화를 더 해 보았자 싸우기만 하겠네. 됐고, 이제 여기서 빠져나가자.”
“빠져나간다고?”
“그래, 얼른 대신전에서 나가야…….”
“난 나가지 않아, 레나.”
왕자님이 어이없는 소리를 꺼냈다.
“나는 여기서 죽어야 할 운명이다.”
“…….”
“…….”
나도, 메이도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곧장 왕자님의 멱살을 잡았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개소리가 아니라…… 이것 좀 놓고 이야기해라, 레나.”
“개소리를 하니까 개소리라고 하지. 죽어야 할 운명? 다시 한번 지껄여 봐라. 진짜 내 손으로 죽여 버릴 테니까!”
지금 내가 누굴 구하겠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죽긴 누가 죽을 운명이란 말인가.
어이가 없다.
차라리 일리아스처럼 누굴 죽인다고 해라. 그 편이 그나마 속은 덜 답답하겠다.
그러자 루카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가 존재하는 이상, 형님은 계속해서 나를 죽이려 할 것이다. 결국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이게 최선이다.”
그게 얼마나 개소리인지는 차치하고.
루카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에 섬뜩한 것이 내달렸다.
‘이 자식…… 진심이잖아.’
큰일 났다.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리 봐도 지금의 루카스는 정말 여기서 죽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 말을 전하러 온 것이다. 그리고…… 엘리사 메이.”
루카스가 엘리사 메이 경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대에게는 미안하다. 나는 그대들의 충성 맹세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귀한 시간을 낭비시켰구나.”
“전하…….”
메이가 애끓는 소리로 불렀으나 루카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 돌아가라. 내겐 그럴 가치가…….”
“기껏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했더니.”
루카스의 말을 끊은 것은 내가 아니었다.
메이도, 루카스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미궁의 벽 너머에 서 있는 것은, 정갈한 신관복을 입은 금발의 여자.
녹빛의 눈동자가 못마땅하게 루카스를 훑었다.
“전하께서도 확실히 헛소리가 느셨습니다.”
아리아드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