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78화
갑작스럽게 나타난 아리아드네의 모습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여길 대체 어떻게 왔어?!”
이어지는 붉은 실을 따라 미궁 깊숙이 들어왔는데, 아리아드네가 그사이 여기까지 따라올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이어 어떻게 된 일인지 밝혀졌다.
무의식중에 아리아드네에게로 뻗은 내 손이 허공을 휘젓듯 통과했다. 유령 같은 모습에 잠시 섬뜩한 소름이 돋았지만, 곧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 환상이로군.”
너무 놀라서 깜박 잊었다. 아리아드네는 성력으로 제 분신을 만들어 전서구 대신으로 이용하곤 했다. 분신을 보낼 수 있는 거리라고 해 봐야 상당히 짧지만, 본인이 대신전에 있으니 이 정도는 가능했겠지.
“맞아요.”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나를 스친 시선은, 곧 루카스에게로 향했다.
“하고 싶은 말은 무척이나 많지만…… 쌓인 이야기를 풀기에는 마땅치 않은 곳인 데다 시간도 별로 없으니 빠르게 전할 말만 하고 가겠습니다, 전하. 현재 일부러 정문 쪽에 병력을 집중한 상태이니 탈출 시에는 다른 쪽으로 돌아가시길. 이왕이면 동문 쪽을 추천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전하, 부디 잘 생각하세요. 전하가 지금 그 목숨을 버리신다 한들 그것이 정말로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까?”
그야말로 충언을 바치는 신하처럼.
성녀 아리아드네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저 당신의 손에 가족의 피를 묻힐 용기가 없어 도피하시는 것이 아니고요?”
나는 흠칫 놀랐다.
솔직히 아리아드네가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저 말은 즉, 루카스를 향한 비난인 동시에 형을 제 손으로 죽이라는 말과 동일했으니까.
저런 말을 하던 애가 아닌데.
십여 년의 세월은 일리아스뿐 아니라 아리아드네에게도 적용된 모양이다.
루카스도 놀란 모양인지 눈을 깜박였다.
“……성녀인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군.”
“성녀라고 해도 친우에게 이 정도 충고는 할 수 있다 여깁니다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여기서 나가셔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그쪽에 있는 기사분들이…….”
그렇게 말하며 아리아드네의 환상이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환상이라 그런지 아까 전과는 달리 그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잘 읽히지 않았다.
“교황 성하에게 휘말려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아리아드네가 경고했다.
“그리고 전하라면 이제 성하가 어떤 의중을 지니고 계신지, 무얼 할 줄 아시는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직접적인 단어는 입에 담지 않았으되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있다.
교황이 운영자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 아리아드네가 운영자라는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요하임인지 뭔지 하는 추기경도 아는 사실을 대륙 최고의 성녀인 아리아드네가 모를 리가 있나.
그럼에도, 이럴 때마다 한 번씩 놀라게 되는 것은…… 머리 한구석 어딘가에 ‘아리아드네는 그간 아무것도 몰랐다.’라고 여겨 와서일지도.
어쩌면 그렇게 순진한 생각을 했는지.
환상이어서 그런 걸까, 아리아드네의 모습이 묘하게 멀어 보인다.
혹은, 내 시야가 이상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제 가 봐야겠네요.”
아리아드네의 환상이 깜박였다.
“그럼 부디 무사히 빠져나가시길.”
“잠깐, 아리아드네. 그대는 신전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건가? 날 도와준 걸 알게 되면…….”
“네, 저는 갈 수 없습니다.”
아리아드네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직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기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리아드네의 환상이 사라졌다.
나는 잠시 비어 버린 자리를 바라보았다.
실은 아리아드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있었다. 환상이라는 걸 알고 있어도 붙잡고 모든 의문을 풀고 싶었다.
하지만 입안을 헤맸던 숱한 물음 중에서 제대로 목소리가 되어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재회는 짧았다.
신기루가 아니라 사막의 아지랑이였군.
“곧 만나게 될 거다.”
침묵을 깬 것은 루카스였다.
나름의 위로였겠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걱정한 게 아니야. 그보다, 들었지? 어서 나가자.”
“말했을 텐데. 나는 나갈 수 없다고.”
이 지경에 와서도 여전히 루카스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역시, 나는…… 하잘것없는 권력 싸움에 숱한 목숨을 희생시킬 순 없어.”
“……후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루카스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유령성의 참상을 전해 듣고.
알리시아와 일리아스가 전 대륙의 박해를 받은 것도 보았다.
그런데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 하필 피가 이어진 자신의 형제다. 왕족으로서의 긍지가 높은 루카스로서는 형제간의 싸움에 전혀 관계없는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싫은 거겠지.
나는 시선을 내리깔고 말했다.
“아무리 저런 형이라도 일단 피가 이어지긴 했으니, 싸우는 게 꺼려지는 것도 이해해.”
물론 유령성의 참상을 루카스가 실제로 겪었다, 라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현재의 루카스는 그저 미래의 일을 일리아스에게 들은 것뿐.
형이 ‘아직’ 저지르지 않은 잘못을 책하기보다는 본인 때문에 일어난 일을 책한다.
루카스답다면 루카스다웠다.
“그러니까 나는…….”
“나도 얼마 전에, 오랜만에 부모님을 봤는데 말이다.”
다소 뜬금없이 꺼낸 이야기에 루카스의 눈썹이 꿈틀댔다.
워낙에 오랜 기간을 함께 지낸 사이다 보니 루카스는 ‘다른 세계’에 내 부모님이 있고, 딱히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괜찮았나? 다신 만나기 싫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의외로 괜찮지가 않더라고.”
당장 한국에 두고 온 부모님에게 애정도, 미련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만나니 마음이 술렁였었다.
“결국은 패잔병처럼 도망 나왔어. 진짜 억울하지. 딱히 같이 시간을 보낸 것도,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피가 이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랬나.”
루카스의 목소리에는 딱히 동정이 담겨 있지는 않았다.
하기야 그의 입장에서 굳이 동정할 만할 일도 아니다. 내 가족은 그저 내게 무관심했을 뿐, 루카스처럼 죽이려고 달려드는 건 아니니까.
대신 루카스가 뱉은 말은 이런 것이었다.
“혼자 갔나? 내가 같이 가 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말에 문득 어린 날의 약속이 생각났다.
처음으로 서로 가족 이야기를 했을 때, 술에 취해서 서로 가족을 만나러 갈 때 동석해 주겠다고 했었는데. 그리고 각자의 가족을 한 방 때려 주자고.
물론 말만 그렇게 한 것이긴 했다.
내가 용병으로 좀 유명하다고는 해도 루카스의 형은 왕족이고, 어지간해서는 나와 한자리에 있기 어려운 신분이고…… 심지어 내 가족은 한국에 있으니 더더욱 루카스가 만날 수 있는 길이 없으니까.
그냥 농담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농담 같은 위로가, 정말로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때로는 피보다 함께 보낸 시간이 가족을 만든다는 것도.
나는 픽 웃었다.
“지금 네가 날 걱정할 때야? 당장 네 형이 널 죽으라고 미궁에 가뒀는데. 어쨌든 그래서 네 심정은 이해하는데…… 이건 알아 둬라.”
“뭐지?”
“네가 여기서 죽든 아니든 나는 네 형의 목을 벨 거야.”
“……?!”
내 말에 루카스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이어 말했다.
“그깟 권력이 뭐라고 형제를 베고, 백성들조차 짓밟는 왕에게 살 가치가 있나?”
그 말에 메이가 잠시 헛숨을 들이켰다.
그야 그렇겠지.
신분제가 명확한 세상에서 왕의 목을 베겠다고 선언하는 평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루카스에게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지만, 나에게는 이미 겪은 과거이기도 했다.
내가 운명을 바꾸며 약간 달라지기는 했겠지만, 현재의 왕 또한 루카스를 배제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고귀한 신분 따위는 내 알 바 아니었다.
반역이라고?
감히 귀족에게 대드는 평민이라고?
알 게 뭐야.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그저 따른다면 나는 그냥 평범한 용사였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혼돈의 용사다.
사람들이 세운 질서에 혼란을 가져오니 그런 이름이 붙은 거겠지.
아무리 이 사회가 옳다고 여기는 법이라 한들, 설령 백성을 통치할 요량으로 만들어진 법이 있다고 해도.
아무리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같은 말을 외치고 있다고 한들 내 마음이 납득하지 못한다면, 나는 역시 따를 수 없다.
다른 모두가 그것이 정의라고 외친다고 한들 내가 그걸 불의라고 판단한다면, 나는 모두의 정의에 불복하겠다.
그 결과 결국 용사가 아니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레나, 너…….”
“전하, 외람되지만 저도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때 메이가 나섰다.
내가 처음 유령성에서 메이를 보았을 때보다는 한참 앳되고, 그러나 깊은 숲속에서 발견했던 아이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장성한.
“어릴 때 저는 페트라 경에게서 꺾이지 않는 용기를 배웠고.”
그 말에 몸속 어딘가에서 페트라의 마음이 뛰어노는 듯 움직였다.
아직 세상을 잘 몰라야 할, 그저 순진해도 될 나이의 아이들은 어른들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다.
가혹한 상황에 절망해 모든 것을 포기했더라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페트라는 본인뿐 아니라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모두 구하고 싶다고 결심했고, 그걸 실천에 옮겼다.
그야말로 용기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용병왕 알리시아 님에게서 약자에게 베푸는 동정을 배웠으며.”
알리시아는 그저 과거의 자신과 처지가 같은 아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본인의 상황이 힘든데도 불구하고 그 깊은 숲속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일면식도 없는 타인을 구한다는, 그저 그 이유 하나만으로.
값싼 동정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동정이 누군가를 살린다면 그것을 누가 욕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메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용병왕의 이름을 따 자신의 이름을 지은 엘리사 메이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읍소했다.
“여기 있는 용사님에게는……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배웠습니다.”
“…….”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메이가 루카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하여 저는,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는 기사가 되었습니다. 주군이야말로 타인을 지킬 용기, 약자를 향한 동정, 그리고 굴하지 않는 의지를 가지고 지킬 만한 분이라 생각했기에.”
강건한 의지를 담은 눈동자가 살짝 가늘어졌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제 목숨을 아끼느라 불의를 보고도 물러서라 하신다면, 주군께서는 저를, 그리고 페트라 경을 근본부터 부정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군이라 하셔도 그것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게다가 왕이 저지르는 폭정을 친족의 것이라 하여 눈감으신다면, 그것이야말로 왕족으로서의 책무를 방기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기사로서 있을 수 없는, 해서는 안 되는 불충한 말이었다.
기사의 미덕은 주군의 판단을 믿고 명에 복종하는 것이니까.
폭군이라면 능히 저 말만 가지고도 목을 칠 수도 있으리라.
“……엘리사 메이 경.”
그러나, 긴 연설을 들은 루카스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언제 그렇게 달변가가 된 건지 모르겠군. 준비라도 한 건가?”
그러자 메이의 입가에도 약간의 미소가 걸렸다.
“불충하게도 평소부터 생각한 것입니다.”
“그건 정말 불충하구나.”
“이왕 불충을 저질렀으니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페트라 경은 전하를 은인으로, 아니, 감히 부모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전하께서도 아시지요.”
“…….”
“그러니 페트라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그 목숨을 가볍게 버리지는 마십시오. 피로 이어진 가족만이 가족이 아니다, 그리 말씀하신 것은 전하이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루카스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옆에서 그 말을 듣게 된 나는, 상황도 잊고 잠시 감동했다.
어린 시절, 나는 우연히 메이와 페트라를 비롯한 아이들을 구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솔직히 끝까지 제대로 도와주지도 못했는데.
‘정말 잘 컸구나.’
땅에 묻힌 어린 새싹이 한 그루의 장성한 나무가 된 것을 보았을 때 이런 기분이 들까.
아니, 분명 이쪽이 더 뿌듯하겠지.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루카스가 말했다.
“그래, 경의 말이 옳다.”
그 순순한 인정에 나는 솔직히 놀랐다.
나 못지않게 고집이 센 녀석이 기사의 간언에 이리도 빨리 의지를 꺾을 줄이야.
내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지 루카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는다면 무엇을 듣겠나. 그리고 무엇보다…… 알리시아와 레나 네게서 배운 덕목으로 내 기사가 되었다는데, 메이 경의 말을 부정한다면 그건 곧 내 친우들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지. 그런 건 싫다.”
싫다, 라.
루카스답지 않게 유치하기까지 한, 감정적인 발언이었지만 말에 담긴 뜻만큼은 충분히 전해졌다.
루카스의 시선이 나를 응시했다.
“게다가…… 저 사고뭉치를 놔뒀다간 정말 큰일이 나겠군. 뒷수습이 필요하겠지.”
“……내가?”
“지금 레나 네가 페트라 경의 몸을 빌렸다는 걸 잊지 마라. 그 몸으로 왕을 죽이면 뒷감당을 대체 누가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너무도 옳은 말이어서 순간 대답할 말을 잃었다.
“일단 가면은 쓸 건데…….”
“무려 반역을 획책하는데 그런 얄팍한 수작이 먹힐 것 같나?”
“……안 되나? 잘 튀어 볼게…….”
“용사님.”
메이가 끼어들었다.
“지난번 요하임 추기경 때만 해도 뒷수습이 힘들었습니다. 하물며 일국의 왕은 더하겠지요.”
“……이제 나가자.”
나는 입을 다물고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불리할 때는 도망치는 것도 한 수단이지, 응.
우리는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루카스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 준 아리아드네의 실은 미궁 밖으로 걸음을 돌리자마자 다시 붉게 피어났다.
허공에 이어진 끈을 바라보니 기분이 복잡해졌지만, 나는 입을 다물고 담담히 나아가기로 했다.
‘일단 루카스부터 안전한 곳에 두고 생각하자.’
뭐든 한 걸음씩 옮기다 보면 분명, 목적지에 도착해 있겠지.
목적지까지 인도해 주는 이 붉은 실이 있다면.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미궁에 길을 잃은 양이 들어왔다, 했는데.”
그 실을 중간에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흰 손이 닿자마자 미궁 밖으로 이어지던 붉은 실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왕자 전하의 기사들이었군요.”
그리고 들려오는 온화한 목소리.
겨울에 쬐는 난로의 불처럼 따뜻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으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분노였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그럴 것이 눈앞에 나타난 것은 검소한 신관복을 차려입은 노인.
페트라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아리아드네가 죽인, 교황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