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80화
아리아드네는 무척이나 곤란했다. 자신을 향해 적대적인 눈빛이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녀님, 신전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모시겠습니다.”
아리아드네의 지시를 의심하면서도 일단은 순순히 따르던 기사들이 태도를 바꾸는 계기는, 단 한마디면 충분했다.
최근 두문불출하던 교황이 갑자기 나타나 이렇게 말하고 대신전 안으로 사라진 것이다.
“성녀, 아리아드네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하세요.”
교황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행적이 들켰음을 깨달았다.
‘들키지 않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적어도 몇 시간의 여유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진 덕분에, 교황이 직접 배신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는 않았으되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는 기사들의 시선은 이미 의심에 물들어 있었다.
그나마 평소에 친분이 있었던 기사가 예의를 차려 말했다.
“성녀님을 방으로 모시고 감시, 아니…… 경비를 세우겠습니다. 소란이 진정될 때까지 신전 내부에는 접근하지 마시길.”
아무리 차기 교황 후보자라고는 해도 현 교황의 위세 앞에서는 빛이 바래기 마련. 게다가 아리아드네와 왕자 루카스의 친분이 워낙에 유명하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다른 신전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리 성녀라고 해도 사사로운 정에 흔들려 대계를 그르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맞는 말이기도 했다.
루카스 왕자가 대신전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마음이 동요하는 것을 느꼈다.
후계자 싸움에 뛰어든 지 이미 몇 년이 흘렀다.
그간 아리아드네는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차단당했다. 그리고 마땅히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전 대륙 신관의 정점이자 운영자라는 자리는 그리 쉽게 노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제껏 정치 따위와는 멀었기에, 더더욱 신전 내부의 규율을 철저히 따라 왔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사에 어두웠다고는 해도 그 루카스 왕자가 죄인처럼 억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 그렇구나.’ 하며 그냥 넘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루카스는 절대 그런 인간이 아니었고, 될 수도 없었기에.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뛰어들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루카스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신분이나 상황이나 이래저래 챙겨야 할 게 많았으니.
그렇기에 일단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잠시간 지켜볼 작정이었으나……
아리아드네는 구름이 짙게 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것도 운명일까요?”
결국, 시선 한 번 스친 것에 마음이 동요되어 이제껏 쌓아 올린 공을 단번에 날리게 될 줄이야.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 영혼의 빛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신전에 몰래 잠입한 것으로 보이는 기사는, 겉보기에는 낯선 얼굴이었을지언정 너무도 친숙한 영혼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
레나.
어렸을 적, 철없던 자신과 함께 대륙을 여행했던 친우.
어쩌면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세계에서 흘러 들어온 이방인.
그런데 그런 친우가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나니 마음이 동요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 돕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이 후계자 싸움에 뛰어든 후로, 예전의 추억을 곱씹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저 신의 뜻을 생각하고, 신전의 규율대로 수련하며, 다른 교황 후보와 경쟁하는 것에만 심력을 쏟은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레나를 보자마자 무너졌다.
어쩌면 나는 스스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친구를 그리워하고 있었구나, 아리아드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교황이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교황, 아니, 운영자라는 자리는 아리아드네가 남은 인생을 걸고 쟁취하고자 했던 목표였다.
그 자리에 오르면 이제껏 자신이 보아 왔던 세상의 모든 부조리함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려 이리도 쉽게 목표를 포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자신은 타인의 생명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자리에 올라서는 안 되는 인간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인생을 걸고 쟁취하고자 했던 목표보다도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이 더 소중했다.
‘차라리 잘된 건가.’
이 몇 년간 쌓아 올린 목표가 모래성처럼 무너졌는데도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성녀님, 어서 이쪽으로…….”
대답 없는 기다림에 지친 기사 하나가 아리아드네의 팔을 잡고 당기려고 했을 때였다.
콰콰쾅!
폭발음이 울렸다.
아까 전과는 차원이 다른, 지축이 뒤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폭발이었다.
땅에 두 발로 서 있던 병사들은 속절없이 바닥에 넘어졌고, 기사들조차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릴 정도였다.
“뭐, 뭐냐!”
“또 폭발인가?”
“폭파구가 설치되어 있는 곳을 찾아!”
사람들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그들과 달리 먹구름이 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던 아리아드네는 조용히 말했다.
“아뇨, 폭발 같은 게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가리켰다.
아리아드네의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바라본 사람들은 당황하며 숨을 삼켰다.
“저, 저건……!”
“대신전의 결계가……!”
방금 전까지 구름이 짙게 끼어 색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던 하늘.
그곳에는 본래 대신전 전체를 감싸는 투명한 결계가 외적에 맞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결계가 맞선 것은 성력과 전혀 반대되는 성질을 가진, 마력.
그중에서도 음(陰)과 부(否)의 성질을 띤 검은 마력이 넘실거렸다. 먹구름처럼 몰려온 마력이 반투명한 결계를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의 광경처럼 보였다.
마력의 정체를 알아차린 사람들이 소리쳤다.
“흐, 흑마법사다!”
“흑마법사의 공격이다! 흑마법사가 대신전에까지 쳐들어왔어!”
“이럴 때가 아닙니다. 모두 결계에 성력을 집중시…… 컥!”
다급히 결계에 성력을 보충하려던 성기사 하나가 옅은 핏물을 뱉으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노련한 성기사가 당장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아까 전의 폭발로 성력이 새어 나가기 시작한 데다, 외부에서도 공격이 들어오니 성력 소모가 급격히 많아진 겁니다. 함부로 손을 댔다간 성력이 모두 소모될 겁니다!”
“그런데 이 정도의 공격이라면 오랫동안 집요하게 준비했을 텐데…… 대체 언제 이런 짓을……!”
아리아드네는 분개하는 성기사들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그야, 그 사람의 집요함은 아리아드네 또한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리 대신전 근처에 마법진을 배치해 두었나.’
아마도 대신전에 오래도록 고여 있던 성력을 급하게 빼내려고 짜 낸 자구책이었으리라.
마법이란 이 세계의 이치를 인간의 소망에 따라 고쳐 쓰는 것.
그리고 성력은 순리를 거스르는 것을 바로 세우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마력, 그것도 흑마법이 이렇게 대규모로 공격을 해 온다면 대신전의 성력은 마력을 정화하는 쪽으로 우선 쓰이게 된다.
그것은 즉, 이제껏 대신전에 오래도록 고여 있던 성력이 한쪽으로 쏠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미궁 안에 쌓여 있던 성력 또한 외부의 적을 해치우려고 움직일 것이다.
즉, 양동 작전이 성공한 셈이다.
‘미궁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그걸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물로 불을 끌 수 있듯, 성력이 마력보다 강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그것도 대화재라면 한 방울의 물로는 끌 수 없는 법.
압도적인 화력을 더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마법이라는 인간의 소망은 신의 의지마저 이길 수 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이 정도로 압도적인 마력을 가진 이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성력이 엄청난 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결계가 무너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추기경님을 모셔 와! 성하께서는 어디 계신가!”
아리아드네는 사람들의 혼란을 틈타 조용히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런 상황에서 성녀 하나를 신경 쓸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없을 테니 도망치는 것은 쉬웠다.
그리고 길을 찾아내는 것도 쉬웠다.
아리아드네의 생각이 맞다면 아마, 그들은 경계가 흐트러진 틈을 타 대신전에 잠입할 것이다.
특히 미궁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겠지.
그렇다면 있을 만한 곳은 뻔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여기로 가면 되나? 에잇, 암시장에서 구한 지도란 게 도움이 하나도 안 되네.”
“그야 그렇겠지. 명색이 대신전인데 지도를 구하는 게 쉬울 리가.”
익숙한 다툼 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아드네는 그 익숙한 목소리들을 듣고 발걸음을 멈추어 세웠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기 때문일까.
굳이 기척을 숨기지 않은 아리아드네를, 저쪽에서도 알아차렸다.
먼저 아리아드네를 발견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 눈치가 빠른 오빠 쪽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아리아드네 님.”
거의 십여 년 만에 보는 친우, 일리아스가 태연히 웃어 보였다.
“어, 어! 아리잖아!”
그리고 알리시아까지.
성력이 충만한 대신전에 들어왔기 때문인지, 마법으로 지탱하던 한쪽 팔이 없어 허전한 외팔 상태였지만 알리시아는 남은 한 팔로 태연히 손을 흔들었다.
마치 그간의 공백 따위는 무의미하다는 것처럼.
“진짜 오랜만이다. 여기서 보네?”
“멍청아, 내가 대신전에 있을 거라고 했잖아.”
“아, 잘난 척 좀 그만해라.”
“잘난 척이 아니라…….”
그 태연한 대화에 아리아드네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웃어 버렸다.
“이 대신전을 공격하고 침입까지 했으면서 두 분 다 참 태연하십니다.”
이렇게 웃고 있노라면 그간 대신전에 갇혀 보낸 세월을 깡그리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좀 더 어렸던 시절, 그들과 함께 대륙을 여행했던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에.
그러나 언제까지고 반짝이는 추억에 잠겨 있을 수만도 없는 일.
추억이라는 사금파리가 반짝이는 것은 그것을 비추는 빛이 있기 때문이다. 그 빛을 꺼트리고 싶지 않다면 물어봐야 할 것이 있었다.
“두 분 모두 루카스 전하를 구하러 오신 겁니까?”
“아니오, 정확히 말하자면 신전을 부수러 왔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신전 소속인 성녀 앞에서 일리아스는 당당하기 그지없다.
“이제껏 신전에 당한 게 좀 많아야지요.”
그러나 불쾌함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유쾌하기까지 했다.
솔직히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일리아스가 그렇게 결정한 것이라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행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보면 역시나 나는 교황이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구나.
아리아드네는 거듭 그렇게 생각하면서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레나의 영혼을 가진 이를 보았습니다. 그건 정말 레나였나요?”
그러자 알리시아는 손뼉을 쳤고, 일리아스는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레나 왔구나!”
“때를 너무 잘 맞춘단 말이지…….”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그건 정말로 레나의 영혼이었던 것이다.
아리아드네가 기묘한 고양감에 휩싸여 있는 사이, 일리아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성녀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친우와 재회한 반가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사감은 제쳐 두고, 지금은 당장 물어보아야 할 것이 있었다.
“저도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아리아드네 님. 이 물음의 대답에 따라 제가 해야 할 일이 달라지니, 정확히 대답해 주십시오.”
“네, 말씀하십시오.”
일리아스가 아리아드네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지난 옵타티오 공략 후, 대체 왜 레나를 출구 밖으로 떠미신 겁니까?”
* * *
“아니, 결계가……!”
당황한 것이 역력한 교황의 목소리에 나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외부에서 무언가 교황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이 대신전에서 교황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 그것도 성력이 이렇게 대규모로 빠져나갈 만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녀석이라면…….
‘일리아스가 드디어 칼을 뽑았나?’
명색이 대륙 최고의 흑마법사 아닌가.
세계를 멸망시킬 작정도 했던 사람인데, 루카스까지 잡혀간 마당에 제대로 칼을 빼어 들었다면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루카스 쪽이었다.
나는 갑자기 측면에서 느껴지는 열기를 느꼈다.
“이건……!”
고개를 돌려 확인하기도 전에.
허공에서 형성된 수십 개의 불화살이 교황을 향해 날아갔다.
이제껏 성력 때문에 제대로 구조를 이루지 못하고 사그라지던 마력이었건만, 성력이 빠져나가자 기름을 만난 불처럼 훅 타오른 것이다.
콰콰콰쾅!
불꽃의 화살이 벽과 부딪힐 때마다 미궁의 벽이 종잇장처럼 타들어 갔다.
그 모습을 보며 루카스가 외쳤다.
“레나!”
“알았어!”
루카스의 마법이 돌아왔다면 해볼 만했다. 나는 당장 불타는 벽으로 뛰어들어 검으로 벽을 박살 냈다.
‘먹힌다!’
오랜 세월 동안 성력과 결합하며 단단해진 건축물이었지만, 성력과 반발하는 마법으로 한 번 공격당한 만큼 구조가 약해져서 부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런……!”
당황한 교황이 미궁의 벽을 움직이며 내 시야를 가리려 들었지만, 루카스도 만만치 않았다.
이제껏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 것을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장대한 마법들이 속속들이 쏟아졌다.
성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미궁 속에 마력이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몬스터 무리들이……!”
몬스터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교황이 숱한 벽을 움직이며 우리와 거리를 벌린 탓에, 그새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이 몰려들어 장벽처럼 길을 막고 있었다.
“아, 귀찮게!”
검을 휘두르자 단박에 고블린의 목이 날아가며 초록색 피가 흩뿌려졌다. 거대한 거미가 기민하게 다리를 움직이며 나타났지만, 거미줄에 걸려들기 전에 루카스의 불화살이 먼저 날아들었다.
매캐한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냄새를 맡고 몬스터들이 더욱 몰려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딴 건 신경 쓰지 말고 가라!”
“몬스터는 제가 맡겠습니다!”
그러나 루카스도, 그리고 메이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루카스는 가차 없이 마법을 사용해 몬스터들을 박살 냈고, 메이 또한 섬을 들고 내 뒤에 바싹 따라붙어 내게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쳐 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알았어!”
두 사람이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은 교황을 잡는 게 먼저다.
나는 바닥을 박차고 몬스터들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마침 덩치가 커다란 트롤의 머리를 계단 삼아 밟고서, 한 번 더 허공으로 박차고 날아올라…….
‘저기다!’
서걱!
달아나는 교황 주변으로 날린 검기가 아슬아슬하게 벽을 베었다.
놀라 이쪽을 바라본 교황과 눈이 마주쳐 나는 씩 웃어 주었다.
“어딜 도망가, 이 새끼야!”
발견한 이상 놓칠 리 없다.
- 님페의 바람을 사용합니다.
바람을 몸에 휘감고, 채 장벽조차 되지 못한 몬스터들을 밟아 가며 빠르게 앞으로 돌진했다.
“이런!”
거의 지척에 다가온 나를 보고 교황이 당황해 손을 들었다.
하지만 아까 전처럼 수십 장의 벽이 길을 가로막는 일은 없었다.
하기야 그것도 그렇겠지.
이곳이 미궁인 이상 모든 벽을 움직일 수 없으리라는 짐작은 했다. 아마 이 부근에서 방어에 쓸 수 있는 벽은 조금 전에 모두 소모했을 것이다.
벽을 방패처럼 사용하며 이리저리 피하던 것도 이제 끝이다.
그러나 마지막 방패가 남아 있었다.
“성하, 물러서십시오!”
기사가 교황을 엄호하며 내 검을 받아 냈다. 황금빛의 성력을 두른 검이 위세 좋게 맞섰다.
‘제법 실력자인데.’
몇 번 더 검을 맞대 본 나는 순수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과연, 교황이 이 미궁 안까지 호위로 데리고 올 정도의 실력은 되었다.
나나 알리시아가 공격적인 검을 쓴다면 이자는 전적으로 수비에 특화된 검이었다.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들어 공격하려 해 보아도 단단한 수비라 도무지 빈틈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능력 이상의 것은 탐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검을 철벽 방어하는 타입이다.
그러니까, 시간을 끌기에는 딱 좋은 타입이라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가 비장한 표정으로 외쳤다.
“제가 시간을 끄는 사이에 어서……!”
챙강!
마치 나무토막처럼 부러진 검을 보며 기사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도 했다.
- 에이펙스의 성검이 ‘혼돈의 용사’ 클래스 보정을 받아 성력을 파훼하였습니다.
설마 성력을 담은 검이 이렇게 쉽게 부러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세상이란 불공평한 법이니까.
그리고 나는 지금 이런 방패에 소모할 시간 따위는 없다.
나는 부러진 검을 쥐고 선 기사의 배를 발로 세게 걷어찼다.
빠각!
타격감 좋게 뼈가 부러지는 감각이 전해졌다.
“커헉!”
안타깝지만 교황을 엄호하는 이상 봐줄 수도 없는 노릇.
적당히 머리채를 잡아 통째로 벽에 집어 던지자 갑옷이 우그러드는 소리가 났다.
아마 저대로 기절했겠지.
노인은 그래도 여전히 기백을 잃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최후의 방패마저 잃은 교황에게 물었다.
“여기까지냐?”
“……뭐라고요?”
“준비한 건 여기까지냐고.”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실 대답은 듣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나는 팔을 치켜들었다.
땅을 디딘 두 다리에 힘을 주고, 허리를 뒤틀고.
“그럼 이 악물어라.”
뻐어어억!
내 주먹이, 시원하게 교황의 얼굴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