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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283화 (284/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83화

저 메시지를 본 기억이 있다.

한국에서 눈을 뜬 후 강남에서 첫 번째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를 처리했을 때, 옵타티오의 환상과 함께 나타났던 메시지다.

그때는 당연히 옵타티오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저건 아리아드네를 뜻하는 말이었나.’

옵타티오뿐만이 아니라 아리아드네의 모습도, 분명 보았었다.

다만 그때의 나는 무지했기에, 그 메시지와 아리아드네를 연결시킬 생각도 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 나타난 아리아드네의 모습을 보니…….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이쪽 세계에 존재하는 아리아드네의 입을 빌려 내뱉는 끔찍한 절망이, 절규의 형태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그 존재가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을 쉬기조차 어렵다는 것이었다. 도망치려고 해도 발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고, 검을 뽑을 수도 없다.

‘내가, 압도당한 건가……!’

비단 등급이 높은 몬스터만이 아니라 플레이어끼리도 레벨 차이가 현격할 때 상대방의 기운에 압도될 때가 있다.

그러나 현재 내 레벨은 80.

SSS급 몬스터인 옵타티오를 앞에 두고도, 그리고 만렙이었던 또 다른 나를 앞두고도 이렇게까지 압도된 적은 없었는데……!

“나는, 내가 먼저 너를, 나야말로……!”

반쯤 파괴된 미궁에 울려 퍼지는 여자의 목소리는 순수한 원한에 가득 차 있었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등골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증오로 누덕누덕 기운 것 같은 목소리.

그 목소리에 미궁을 채우고 있던 몬스터들이 비참한 비명을 울렸다.

그것은 생명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저것’은 그저 목소리만으로도, 이 미궁에 있는 몬스터의 태반을 절멸시킨 것이다.

“커헉!”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목구멍에서 피가 울컥 올라오기 시작했고, 귀에서는 이명이 들려왔다. 때마침 아리아드네를 위로하려고 가장 가까이 있었던 탓에 도저히 피할 수도 없는 거리였다.

덕분에 나는 아리아드네의 몸에 덧씌워진 ‘재앙’에게 팔을 덥석 붙잡혔다.

그리고 차가운 물고기 비늘 같은 손이 내 피부에 닿는 순간.

치지지직!

“……아아악!”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저 그 재앙의 손아귀에 닿는 것만으로도 팔의 피부가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단지 외양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옥불에 타들어 가는 고통이 있다면 이런 것일까. 흰 손가락이 닿아 있는 팔이 어마어마하게 아팠다.

진짜로, 심장을 꿰뚫리는 것보다 더더욱.

어지간한 고통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는데도, 이건 또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마치 생명 그 자체를 강탈당하는 것 같은 고통.

나는 시야가 하얗게 점멸해 가는 것을 느꼈다.

미쳤다.

이대로라면 정말 죽는다……!

“레나!”

그때 누군가가 내 몸을 잡아끄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팔에서 느껴지던 고통이 어느 정도 옅어졌다.

그리고.

파아앗!

눈부신 빛의 결계가 아리아드네를 가두고 있었다.

결계를 생성한 루카스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입가에 약간의 핏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제 혀라도 깨물어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이걸로 약간의 시간은 벌었겠지…… 젠장, 저건 대체 뭐야!”

결계를 만든 것만으로도 벅차 보이는 루카스와는 달리, 결계 안의 아리아드네…… 재해에 가까운 그것은 불길처럼 녹빛의 시선을 조용히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무심한 그 모습에는 살기조차 없다. 지면에 닿기 전의 해일, 땅을 뒤흔드는 지진과도 같았다.

인간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재해 그 자체였다.

“아마 다른 세계의 운영자겠지요. 이쪽에 있는 자신에게 빙의하는 형식으로 여기에 온 거고요.”

루카스에 비해 일리아스의 목소리는 냉정하게 들렸다.

하지만 빛의 결계에 둘러싸인 재앙을 바라보는 눈에는 한 치의 온기도 없다.

그러나 곧이어 내게로 쏟아진 눈길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 차이가, 또 다른 고통이 되었다.

이미 일리아스에게 ‘저것’은 아리아드네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레나, 괜찮아? 정신 차려!”

어느새 저 재앙이 뿜어내는 끝도 없는 독기에 침식된 탓인가, 정신이 현실에서 멀어진 느낌이었다. 사실 일리아스의 얼굴도 약간 뿌옇게 보인다.

일리아스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저것’과 너무 가까이 있었던 것 같군. 레나, 기절하면 안 돼. 자칫하다간 진짜 그대로 죽는다.”

“에잇, 됐어. 언제 정신 차리길 기다려?! 내가 둘러메고 간다!”

알리시아가 그렇게 외치며 정말로 나를 휙 들어 올렸다.

가물가물한 시야로 애써 고개를 들어 보니 루카스도 기절한 메이를 둘러업고 있었다.

“일단 빙의한 지 얼마 안 된 데다, 시스템상으로 타 차원의 존재는 거부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 제한은 받고 있는 걸 거야. 그러니 지금은 최대한 멀리 가야 해. 이러다간 손도 쓰지 못하고 죽어!”

“일리아스, 자네도 운영자가 된 것이지 않나? 대항할 방법은?”

“지금 ‘저건’ 운영자라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일리아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시선은 아리아드네가 아닌 허공에 꽂혀 있었다. 아마도 현 운영자로서 정보를 읽는 듯싶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운영자라는 직책을 떠나 플레이어로서도 우리보다 몇 단계는 위입니다. 지금 운용한 것도 운영자 권한이 아니라 순수한 본인의 힘이고요.”

“말도 안 돼!”

알리시아가 반발했다.

“나 지금 레벨이 89인데? 설령 만렙이라고 해도 그래 봤자 10레벨 차이 아니야? 우리 넷이 덤비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네 계산 머리는 어떻게 돼먹은 거니? 레벨이 그렇게 단순한 숫자 놀음도 아닐뿐더러 애초에 저쪽은 만렙도 아니야.”

“그렇다면……!”

“잘 들어. 만렙이 아니라…… 내 운영자 권한으로 레벨이라는 게 애초에 보이지 않는다고.”

일리아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때였다.

조한율 :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예나 씨.

한동안 사라져 있었던 조한율의 메시지도 떠올랐다.

나는 알리시아에게 둘러업힌 채 몽롱한 상태로 메시지를 읽었다.

조한율 : 또 다른 운영자가 난입하면서 그쪽 세계의 방어가 엄청나게 약해졌거든요. 음, 지금 그쪽 운영자가 초보자라는 것도 한몫할 거고요. 덕분에 저도 이렇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게 됐어요.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가, 조한율의 메시지는 어딘가 진중하게 느껴졌다.

조한율 : 다만 제가 괜히 개입했다간 방어막이 더 뚫릴 우려가 있어서, 상황만 전달해 드릴게요. 예나 씨 친구는 막 운영자가 돼서 아직 정보 해석에는 서툴 테니까.

나는 피를 뱉으며 겨우 말했다.

“그래 주면 고맙겠네.”

스스로 듣기에도 끔찍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고맙게도 조한율은 그 점을 지적하는 대신 빠르게 본론만을 쏟아 냈다.

조한율 : 일단, 레벨 정보는 ‘??’으로 뜨고 있어요. 이건 시스템상으로 계측할 수 없는 경지라고 봐야 해요. 숫자로 표기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는 거죠.

“레벨이 만렙을 넘어서, 측정 불가인가…….”

이렇게 되면 만렙의 능력치를 빌려 올 수 있는 ‘용사를 기리는 망토’로도 대응하기가 힘들다.

“그럼…… 저 운영자의 영혼을 아리아드네의 육체에서 쫓아낼 수는 없어? 나도 페트라의 몸을 잠깐 빌리고 있을 뿐이잖아. 그런 것처럼…….”

아리아드네가 정신을 차린다면 저 재앙을 이 세계에서 쫓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가지고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조한율 : 불가능해요. 생각해 보세요. 만렙을 넘어 시스템상으로 계측할 수 없는 경지의 운영자이자 플레이어가 몸을 강탈한 건데, 본래 육체의 의지가 남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조한율 : 그뿐만이 아니에요. ‘세계를 멸망시킨 최후의 전령’은 시스템이 붙인 명칭인데, 이건 한 세계의 생명을 모두 뿌리 뽑았기 때문에 생긴 새로운 클래스…… 라고 해야겠네요.

“새로운 클래스라고?”

조한율 : 저 운영자가 있는 세계에서는 본인 외의 다른 지적 생명체란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서 시스템은 저 플레이어라는 개체를 ‘죽음’으로 정의한 거고, 그 때문에 예나 씨가 짧은 접촉으로도 그만한 상처를 입은 거죠. 기본적으로 생명과 완전히 반대되는 성질을 지닌 존재예요.

“반대되는 성질…….”

조한율 : 단적으로 말해 존재만으로도 모든 생명체가 생명을 빼앗길 것 같네요. 이쯤 되면 모든 차원을 통틀어 최종 보스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SSS급을 넘어서 뭐, EX? L? 물론 등급조차 의미도 없겠지만.

이상한 이야기였지만 조한율의 메시지에서는 약간의 경의조차 느껴졌다.

그럴 법도 했다.

플레이어란 결국 시스템을 이용해 힘을 키워 온 인간이다.

그렇지만 아리아드네는…… 저 운영자이자 플레이어는 시스템이라는 한계조차 뛰어넘어 다른 존재로 변모한 것이다.

운명이라는 신을 믿고, 시스템의 힘을 빌어 성력을 사용했던, 아리아드네라는 신관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변이.

그것이 아리아드네가 제 손으로 만들어 낸 하나의 결말이었다.

‘그래서, 운명을 거스르는 자였던 건가…….’

“하, 하하하.”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나를 업은 채 한창 미궁 출구를 향해 달리고 있던 알리시아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미치기라도 했어?”

“차라리 미쳤으면 좋겠다.”

뭐, 언제든 던전 클리어가 쉬웠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이게 뭐야.”

아리아드네를 구하려고 이 세계에 돌아왔는데, 지금 내 앞에 시스템의 한계조차 넘어 버린 괴물이자, 쓰러트려야 할 적이 되어 나타난 것이 아리아드네라니.

심지어 다른 세계의 자신조차 죽여 가면서.

나는 조용히 조한율이 알려 준 정보를 도망치고 있는 나의 친구들에게 전달했다.

“…….”

“……말도 안 돼.”

“하아…….”

그리고, 정보를 들은 모두는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설마 그 아리아드네가 저렇게 될 줄이야.

아리아드네가 누구던가.

아무리 세상의 적의와 악의를 마주하더라도 그 근본을 이해하려고 애써 왔던 녀석이다. 살아 있는 이상 희망은 있다고, 노력하면 뭐든지 이해할 수 있다고.

그런데, 저 모양이 되었다.

나는 알리시아의 어깨 위에서 달랑거리며,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 미궁 속의 재앙을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는…….”

“저건 아리아드네가 아니다, 레나.”

루카스가 냉철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한때는 네가, 우리가 아는 아리아드네였겠지. 그러나 저렇게 변모한 이상…… 저걸 아리아드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나? 우리가 아는 아리아드네는 말 그대로 ‘죽었다’.”

“그렇지만…….”

내가 무언가 말하려는 것을, 루카스가 고개를 저어 막았다.

“네가 아리아드네에게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나도 알아. 아니, 그건 집착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군.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건 당연한 일이듯이, 너와 아리아드네의 시작을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만.”

그래도, 루카스는 이어 말했다.

“지금 ‘저것’에게 동정을 가지기라도 했다간 네가 죽는다. 저것은 너를 죽이려고 이 세계에 왔으니까.”

담담한 어조로 루카스가 사실을 말했다.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방금 전만 해도 까딱하다간 저 손에 걸려 죽을 뻔했으니까.

게다가 저 입에서 튀어나오는 원망의 말만 들어 보아도, 자신의 세계와는 달리 다시 한번 기회를 얻게 된 세계 자체를 증오하는 것은 너무도 명확했다.

그리고 이 세계에 기회를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나다.

그러니 저 아리아드네가 나를 미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입을 열었다.

“……저 애는 정말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걸까?”

의문이 아니라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레나.”

“나더러 내 세계로 돌아가라고 했어.”

물론, 아리아드네가 이 세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부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나와는 다른 길을 간다는 증거였고.

나로서는 막아야만 하는 적이라는 것도 분명했다.

그러나 그 뼈저린 증오와 동시에…… 저 아리아드네의 절규를 듣는 순간, 이제껏 저쪽의 운영자가 해 온 의미 불명의 행위들이 이제야 이해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없는 세계가 구원받는 것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렇기에 내가 타르토스를 구하려고 던전에 뛰어들 때마다 내 퀘스트 자체는 철저하게 방해해 왔다.

다만…….

내가 운명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을 계속해서 방해한 것과는 다르게.

내게 일부러 멸망한 서울의 모습을 보여 준 것도.

내기를 통해 나를 한국으로 돌려보내려고 한 것도.

변칙적이기는 하지만, 그 저변에 깔린 것은 틀림없이…….

“적어도 나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고, 그렇게 생각되는 건, 내가 너무 물러서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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