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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285화 (286/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85화

Chapter 20. 오늘을 살게 하는 것

차원의 틈새 속에 던져진 지 얼마나 흘렀을까.

자아(自我)를 자각하려면 타인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없는 이 어둠 속에서는 그 무엇도 성립될 수 없다.

끊임없는 허무였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 애초에 나는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내가 누구를 구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누군가를 구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허무한 공간을 하염없이 떠도는 나에게 누군가의 기억이 스며들었다.

그건 지친 여자의 얼굴이었다.

- 그래도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게요.

새롭게 운영자가 된 자신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아리아드네는 그래도 어떻게든 이 세상을 고쳐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자신이 손쓸 수 없는 곳에서 죽어 버린 친구들을 기리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되기를.

……하지만.

애초에 타인을 교정하겠다는 자신의 생각 자체가 틀린 것이라는 것을, 아리아드네는 이윽고 깨달았다.

- 어째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걸까.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는 것이 없었다.

힘을 탐하는 사람의 욕망.

하나를 가지면 둘을 원하게 되는, 끝을 모르는 인간의 욕망. 둘을 가지더라도 셋을 가진 타인을 시기하는 욕망.

그것이야말로 삶의 끝이 정해진 인간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고.

또, 그것이 타인을 해치는 무기였다.

인간이 인간인 이상 그 굴레에서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은 순간 영원과도 같은 절망이 아리아드네를 덮쳤다.

그거야 그랬다.

아무리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 자체가, 결국에는 인간을 상처 입히니까.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근원이니까.

필멸하는 인간의 욕망만큼은 영원히 불변하는 것.

사람의 선의를 믿고, 그래서 사람을 사랑한 여자는 결국에는 사람의 욕망에 패배해 꺾이고야 말았다.

그조차 인간답다고 한다면, 그렇겠지만.

- 그게 인간의 본질이라면.

패배한 여자의 눈에 증오가 타올랐다.

- 그런 건, 살아갈 가치가 없어.

그렇게 인간인 자신마저 부정하면서.

아리아드네는 멸망을 알리는 전령이 되었다.

……그런, 아득한 과거의 기억이 잠시 내 심상을 지배했다가 떠나갔다.

아마도 아리아드네가 살아온 과거의 잔재를 엿본 듯했다.

아, 네 결론이 그런 거라면.

그렇다면 너를 구할 수 있는 건 아무도 없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저 우주와도 같은 공간을 부유했다.

어째서인지 언제 만났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악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솔직히 차원의 틈새에 던진 시점에서 이미 갈가리 찢겨 죽었으리라 생각했거늘.”

그래, 벨리알이 그런 말을 했었다.

처음 마계에 떨어졌다가 타르토스로 돌아갔을 때도 이런 차원의 틈새에 던져졌었다. 그 당시에는 악마가 나를 타르토스로 돌려보내 준 거라고 생각했지만…….

“운명력이 작용한 게지.”

계약에 따라 나를 타르토스로 돌려놓은 게 아니라 차원의 틈새에 던져 넣었더니 알아서 돌아갔다…… 그렇게 말했던가.

다시 만났을 때 그 녀석을 갈가리 찢어 놓을 걸 그랬다.

“그래, 인간들의 운명은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고, 그렇기에 본래 정해진 대로 굴러가려 하는 강제력을 지닌다. 그것이 운명력이지.”

그러나 이제 운명 따위는 지겹기 짝이 없다.

그 운명이란 놈을 한번 바꿔 보려다가 결국 실패하지 않았던가.

그래, 실패.

이제껏 강적을 상대한 적은 많았다. 죽을 위기에 처한 적도 많았고, 단순한 힘의 경쟁에서 진 적도 제법 많았다.

그러나 언제고 다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살아만 있다면 언제든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다음은 없다.

살아남았건 죽었건, 이제는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솔직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도 그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리아드네였기 때문이겠지.

세상의 그 무엇도 믿지 못하겠다고 느꼈을 때 내게 먼저 손을 뻗어 준 사람.

아무것도 아닌 내게 뻗어 준 누군가의 선의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그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증명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리아드네의 손에 의해 실패했다.

그렇다면 내가 다시 한번 일어설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 * *

“저기요, 아가씨! 여기서 자면 안 돼요.”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통에 나는 눈을 떴다.

내가 눈을 뜨자 사람 좋아 보이는 아저씨가 겨우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술이라도 마셨나. 젊은 사람이 그러면 안 돼! 얼른 집에 들어가요.”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나는 일단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친절한 아저씨는 다시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도로를 달려가는 아저씨와 함께, 넓게 펼쳐진 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모습.

한강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건가.”

언제까지고 그 허무한 공간에서 부유하다가 죽더라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인가에 이끌려 차원의 틈새에서 빠져나온 것도 모자라 한국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건 그것대로 우스운 일이었다.

대체 무엇이 나를 여기로 이끈 걸까. 이제 길을 잃은 방랑자를 인도하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

아무것도 없던 무아의 공간이 아니라 대기가 존재하고, 발로 밟을 땅이 존재하는 곳이었으나 가슴속의 공허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득, 부상당했던 왼팔의 상처를 바라보니 옷 안쪽의 피부가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다. 딱 보기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페트라 쪽에는 상처가 남지 않으면 좋을 텐데.’

단순한 감이기는 했지만 아마도 아리아드네, 아니, ‘재앙’ 의 손길은 영혼에 상처를 남기는 종류다. 그렇다면 적어도 페트라에 빙의해 있던 내 영혼에만 상처가 남길 바랐다.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

병원으로 가 보았자 이 팔이 나을 일은 딱히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우연이나 조한율에게 연락하면 곧 데리러 오겠지. 아니, 연락하지 않아도 조한율이 알아서 찾아낼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결국 소지창에서 핸드폰을 꺼내지는 않았다.

무아의 공간에서 얼마나 지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단순히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의 내 상태는 타이어가 펑크 나 퍼져 버린 차와도 같았다. 엔진이 아무리 일한다고 한들 타이어가 굴러가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나.

“…….”

혹독하게 맛본 실패가 내 몸을 구석구석까지 잠식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왔음에도 그 패배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야 그랬다.

‘남은 운명의 씨앗은 2개지만…… 이게 의미가 있을까.’

이미 아리아드네를 죽여야 한다는 클리어 조건 달성을 한 번 포기했다.

그리고, 저쪽 타르토스에 아리아드네가 재앙이라는 이름으로 강림한 이상 아리아드네를 죽이지 않으면 세계를 구할 수 없다.

그러나 그걸 내가 할 수 있을까.

피가 이어진 가족보다도 더 가족 같은 사람을 내 손으로 죽여야 세계를 구할 수 있다니.

……아니, 그보다 앞서.

‘그런 일을 해야 할까.’

모르겠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가 운명을 바꾸는 의미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한 세계의 죽음이 되어 버린 아리아드네는, 구할 수가 없는데…….

“…….”

그나저나 나를 지나쳐 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다들 왜 새삼스럽게 이쪽을 쳐다보는지 모르겠다. 현재 한국에 검이나 갑옷을 착용한 사람은 그리 드문 것도 아닐 텐데.

아니면 혹시 내가 타르토스에 가 있는 사이에 랭킹 1위의 얼굴이 팔리기라도 했나? 다들 날 알아보기라도 하는 건가?

하지만, 내 착각은 곧이어 깨졌다.

누군가 벤치 위에 올려놓고 간 신문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날짜였다.

“……2006년 12월 2일……?”

허어…….

어이가 없어서 뱉은 숨결이 희게 부서졌다.

“이게 대체 몇 년 전이야.”

차원의 틈새를 헤매다 한국에 돌아온 것까지는 좋은데, 아무래도 시간을 약간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검이니 갑주니 하는 걸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만도 했다. 그들의 눈에는 이상한 코스프레로 보이겠지.

현재의 한국에는 시스템도, 뭣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벨리알 이 새끼, 운명력 좋아하고 자빠졌네.”

내가 2006년의 한국에 굳이 돌아올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휴우우우우…….”

어디선가 땅이 꺼져라 뱉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내가 앉아 있는 벤치 앞, 덤불에 가려진 채 무릎을 끌어안고 조그맣게 웅크려 있는 아이가 뱉은 한숨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낯선 아이의 모습.

하지만, 나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겨우 뒷모습뿐이었지만, 내가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 아이는 나 자신이었으니까.

“나, 참…….”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

저건 2006년의 강예나, 나 자신의 어린 모습이었다.

‘운명력이 어쩌고, 하더니.’

과거의 나 자신이 매개체가 되어 나를 허무의 공간에서 이끌어 냈던 거였나.

한동안 멍하니 어린 나 자신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이 현실이 잘 와닿지 않았다.

뭘 해야 할지도 모르니 망망대해를 떠도는 조각배처럼 잡생각만이 부유했다.

그나저나 지금 내가 몇 살이지? 저렇게 어린데 왜 혼자 한강 공원에 와 있단 말인가.

……기억을 되짚어 보니 부모님의 갈등에 지쳐서 한강까지 가출 같지도 않은 가출을 감행한 적이 있긴 했었다.

그때만 해도 어린애답게 세상이 본인 중심으로 돌아가서인지, 부모님이 싸우는 이유가 나라고 생각해서 풀이 죽어 있을 때였다.

그래서 문제의 근원인 내가 사라지면, 부모님의 사이도 좋아지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어른들의 문제에 어린애가 낄 구석은 없다.

저렇게 맨날 싸워 대느니 나를 핑계 삼지 말고 빨리 이혼이나 하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중학교 때쯤은 되어야 했다. 고등학교 즈음에는 입시에 돈이라도 대주는 게 어디냐고 생각했던 것 같고.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다른 차원에 떨어져 버려서 부모님의 이혼이고 뭐고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고.

하지만 더 큰 문젯거리를 가져와서 그 전의 문제를 잊게 된 것도 성인이나 되어서야 할 수 있었던 일.

인식할 수 있는 세상이 이 한국에, 한 가정에 한정되어 있는 어린아이에게 지금의 고민거리는 무엇보다도 큰 것이었다.

무릎을 감싸 안고 한강을 바라보는 아이의 등에서는 그 나이답지 않은 기백마저 느껴졌다.

오늘은 절대로 집에 돌아가지 말아야지, 뭐 그런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거겠지.

그래도 내 기억으로는 평범하게 귀가했던 걸로 기억한다.

어쩌다가 다시 집에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까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한강에 혼자 어린애가 있는 걸 발견한 낯모를 어른이 이야기도 들어 주고, 간식거리를 사 주면서 달래 주었던 것 같다.

당시의 어린아이에게 그런 어른의 배려는 무척이나 따뜻하게 기억되었고, 그 덕에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너무 어릴 때의 일이라서 어른의 얼굴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설마 그렇게 위로해 준 어른이 나 자신이었나?’

그것도 그럴 법했다.

사실 아무리 어린애가 혼자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 흔할 리가 있나. 그렇게까지 해 줄 이유도 없는 것이다.

다만 그 희미한 기억 속의 어른이 나라고 한들, 지금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하나 있었다.

‘2006년이면 아직 지폐가 바뀌기 전 아닌가?’

그럼 나는 2006년의 한국에서 쓸 수 있는 돈이 아예 없었다. 소지창에 넣어 둔 금괴라면 모를까.

‘편의점에서 핫바를 금괴랑 바꿔 달라고 하면 신고당하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웃긴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내 시야에 무언가가 등장했다.

겨울에 접어들기 시작했기에 그런 걸까. 유독 맑은 하늘이 돋보이는 오후였다.

파도의 거품처럼 옅은 구름이 물결치고, 새파란 공기를 물결처럼 가르며.

대양처럼 맑은 하늘에 태양 빛을 벗 삼아 거대한 푸른 용이 유유히 유영하고 있었다.

이야, 한강 공원이 좋긴 좋네. 날씨가 좋을 땐 용도 보이고. 근데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째 몇 번 봤던 용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잠깐.

용?

“오랜만이네요, 강예나 씨.”

나는 눈을 깜박였다.

내게 말을 건 사람의 모습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왜, 여기에 그쪽이…… 어떻게…….”

“음, 아마도 기적?”

추운 겨울의 공기 속에서 여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 여자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한다.

저 높은 백록담 정상에서, 피 흘리며 죽어 가던 모습을.

그러나 지금 내 앞에, 희게 언 숨을 내쉬며 살아 있었다.

여자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예나 씨가 만들어 낸 기적이죠.”

순리를 따랐더라면 내가 만날 리 없었던 사람.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순리를 뛰어넘어 만들어진 인연.

정소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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