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87화
- 경고!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생소한 이우연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볼 시간도 없이, 다음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그쯤 되니 막 차원의 틈새에서 떨어져 나와 얼떨떨한 상태였던 나도 슬슬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혹은, 이제야 퍼즐이 맞춰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 경고! 1차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몬스터 등급 제한이 있습니다.(F급 한정 출현)
- 1차 몬스터 웨이브 활성화 시간
- 00:20:00
- 몬스터 웨이브 활성화 시간 동안 해당 구역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호수 공원 전체를 덮어씌울 만한 크기의 투명한 반구가 생겨났다.
내게는 너무도 익숙한,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가 생겨날 때의 모습이었다.
“으아아아악!”
“왜 나갈 수가 없는 거야!”
그러나 지금, 여기의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일. 여기저기에서 혼란해하는 비명이 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건 즉.
“한국에 처음으로 던전이 터졌을 때로 온 거로군…….”
이번에도 나는 현대의 대한민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약간 과거로 온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이우연이 내 부표가 된 건가.’
정소현 말대로라면 내가 만든 인연이 차원의 틈새에 빠진 영혼을 잡는 매개가 될 거라고 했으니.
하지만 이우연이 내 영혼을 붙드는 하나의 부표가 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시기가 미묘하다.
아니, 너무 적절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니 이것도 이상하네. 굉장히 자연스럽게……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려고 해 보지도 않았어.”
지난번에 이우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던전 공략의 복기조차 하지 못하도록 기억이 애매해졌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나 때문이었군.’
순리를 거슬러 온 내가 여기에 있었기에, 사람들의 기억이 애매모호하게 남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정소현쯤 되는 인물이 아닌 이상 다들 나라는 인물을 떠올릴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곧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플레이어가 스스로 ‘기억의 오류’를 자각합니다.
- 희귀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 ‘기억의 오류’ 제거까지 필요한 조건 충족(2/3)
- 조건 : 특정 플레이어와의 조우
역시 내 생각대로였다.
물론 조건이 한 가지 더 남은 게 이상하기는 하다만.
“저기요, 제 말 안 들려요?”
내가 도망가는 대신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자 어린 이우연이 다급하게 내 팔을 흔들었다. 아마도 괴물의 갑작스런 출현에 너무 놀라서 움직이지도 못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무서운 건 알겠는데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요?! 얼른 뛰어요!”
그나저나 몬스터가 나타나 혼란한 이 와중에 낯모를 사람을 챙긴다는 건 순수하게 놀라웠다. 지금의 이우연은 상태창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일반인인데 말이다.
‘하기야 지금도 성격이 좀…… 그래서 그렇지,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는 놈은 아니긴 하지.’
투덜거리면서도 양태원을 챙기는 걸 보면 이 녀석도 은근히 맹탕이다.
하기야 그러니 내 옆에 꾸역꾸역 붙어 있는 거겠지만.
……하여간 이우연의 말대로 이럴 때가 아니다.
“소지창.”
나는 이우연이 팔을 잡아끄는 것을 떼어 내고 소지창을 불러냈다.
그리고 초보자도 사용할 수 있을 만한 아이템들을 적당히 물색해 꺼냈다.
“이게 무슨……?”
허공에서 아이템이 생겨나자 그걸 본 이우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보자용 시스템 메시지가 있긴 하지만, 당장 괴물이 나타나 도망가야 할 상황이니 아마 제대로 읽지도 못했으리라.
나는 당황한 이우연의 손에 강제로 초보자용 롱소드와 포션 같은 아이템을 쥐어 주며 말했다.
“잘 기억해 둬. 소지창이라고 말하면 아이템을 보관할 수 있고, 상태창이라고 말하면 네 능력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거.”
“뭐……?”
“그리고 몬스터 웨이브는 3차까지 있어. 끝날 때까지 어떻게든 몸을 숨길 곳을 찾아. 검을 휘둘러야 할 때는 망설이지 말고.”
이우연을 만난 게 반갑지 않거나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솔직히 이 정도 국면에서 이우연이 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이런 걸……?”
나를 바라보는 이우연의 눈이 의심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것 좀 봐라.
나는 잠시 상황도 잊고 웃었다.
‘이 상황에서도 이성이 살아 있네.’
과연 나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한국의 랭킹 1위라고 해야 하나.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의혹을 가질 여유가 있다니.
키에에에엑!
그러나 그런 여유도 거기까지였다.
몬스터들이 내지르는 괴성이 들려왔다.
“살려 줘!”
“으아아아악!”
그와 함께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도.
이것저것 자세히 설명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역시 시간이 없다.
나는 이우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 이제 외곽으로 달려. 조금만 버티면 살 수 있어. 내가 해결할 테니까.”
“당신은 대체…….”
“가!”
그 말과 함께 나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휙!
휘두르는 검에 막 내게로 달려오던 오크의 몸이 반으로 쪼개졌다.
“흐아아아악!”
“괴, 괴물이!”
도로에 흩뿌려지는 초록색 피에 나와 이우연을 지나쳐 도망가던 사람들이 기함하며 땅에 엎어졌다.
돼지의 형태를 한 머리가 시멘트 바닥을 굴렀다.
잠시 흘깃 이우연을 바라보니 롱소드를 든 채 망연히 나를 보고 있다.
나는 그런 이우연을 향해 호통 쳤다.
“가라고!”
그다음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도망치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 몬스터 무리가 몰려온 탓이다.
“다들 숨을 곳을 찾아요!”
그렇게 외치며 계속 검을 휘둘렀다.
콰드득!
휘두른 검기에 몬스터 수십의 목이 떨어지며 피 보라가 일었다.
그때 누군가 내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발밑을 바라보니 슬라임에 몸이 반쯤 잡아먹힌 사람이 날 잡고 늘어진 채였다.
“사, 살려 주세요!”
나는 곧장 슬라임을 그 사람의 몸에서 떼어 내어 발로 짓이겼다.
그래도 다행인 게 슬라임은 소화가 느려서 잠깐 잡아먹혔다고 해도 약간의 화상 외에는 문제가 없다. 물론 시각적으로 흉악하긴 했다만.
나는 쇼크가 왔는지 벌벌 떨고 있는 사람의 입에 포션을 물려 주었다.
다행히 포션이 효과가 있는지 금방 회복된 듯했다.
“구, 구급차 좀…….”
“안타깝지만 구급차는 당분간 못 와요. 회복했으면 얼른 공원 외곽 쪽으로 달려가요.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게 제일 좋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한 후 곧장 일어섰다.
처음으로 몬스터를 접한 충격이 클 테니 도와주고 싶기는 했지만 지금은 더 급한 게 있었으니.
“진짜 많네. 짜증 나게!”
뻐억!
때로는 주먹으로, 혹은 님페의 바람으로 몬스터들을 짓이겨 가며 던전 중앙으로 향했다.
나오는 몬스터들이 죄다 F급이라 공략 자체에 딱히 어려울 건 없었지만 문제는 도망치는 인파였다.
가는 길에 한 명이라도 더 살리려 노력은 했지만 이미 던브가 터진 상황이라 쉽지가 않았다.
‘일단 몬스터들이 더 퍼지지 않게 막는 게 먼저다.’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의 특성상 몬스터는 던전 중앙의 게이트에서 몰려나온다. 그러니 효율 좋게 몬스터들을 처리하려면 중앙을 빨리 점거하는 게 낫다.
그런 생각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도착한 던전 중앙의 상황은 무척 심각했다.
“이런.”
아직은 몬스터와 맞서 싸운다는 생각을 아무도 하지 못하는 만큼, 몬스터들이 제한 없이 기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오크니 고블린이니 하는 하급 몬스터들이 와글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호수 표면에는 불투명한 슬라임들이 오물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다.
“윽.”
생리적인 거부감이 느껴지는 광경이다.
나는 비위가 상하는 것을 참으며 파트너의 검신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키이잉!
검신이 호수 전체를 덮을 수 있을 정도로 길어졌고.
“이제 슬슬 꺼져라!”
카카캉!
호수 위로 검을 휘둘렀다.
호수 중앙에서 기어 나오던 몬스터들은 성검의 날에 닿자마자 그대로 절명했다.
F급 한정이라 진짜 다행이다.
“히이이익!”
아직 대피하지 못하고 호숫가에 머물러 있다가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이 허어억, 하고 숨을 들이켰다.
“어, 어, 어떻게 저런 게……!”
두려움에 찬 시선은 괴물보다 내게 향해 있었다.
“다친 곳은?”
그렇게 물었지만 내 시선을 받은 사람은 대답하는 대신 엉덩방아를 찧은 채 주춤주춤 물러났다. 마치 괴물이라도 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뭐, 지금은 그렇게 보여도 어쩔 수 없나.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검을 회수했다.
“저기, 이거라도…….”
“흐아아아아악!”
심지어 포션이라도 나눠 주려고 했는데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까지.
……뭐,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2차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에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다시 호수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1차는 이걸로 대강 마무리가 되었을 거고.”
- 1차 몬스터 웨이브가 종료됩니다.
- 최대 업적자 : 강예나
- 2차 몬스터 웨이브까지 대기 시간이 주어집니다.
- 00:20:00
“문제는 2차부터인가…….”
이 던전은 정부 지정 SSS급 던전이다.
클리어 후 플레이어들의 레벨로 역산해 본 후 지정된 결과인 만큼, 지금 당장은 F급 몬스터들이 나와도 이후에는 높은 등급의 몬스터가 나올 확률이 큰데…….
“내가 클리어해야 하는 거로군.”
설마 청룡이 말했던, 내 손으로 운명을 만들어 낼 거라는 게 이런 것이었던가.
그때 들었을 때는 뭔가 함축적이고 의미심장한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말 말 그대로 내가 내 손으로 처리해야 하잖아, 이거!
쓸데없이 직접적인 이야기였다. 막상 때가 되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잠깐 혼란스러워하던 시스템이 내 레벨 80을 인정해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 한국에 돌아왔을 때처럼 그랬다면 제법 곤란했을 뻔했다
이대로라면 SSS급 몬스터라도 나오지 않는 이상 어지간해선 클리어 가능할 것이다.
‘처음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이랬으면 좀 좋아…… 아니, 잠깐.’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깨닫고 흠칫했다.
혹시…… 이후에 나올 고위 몬스터를 내가 정리해 버리는 바람에 시스템이 내 레벨을 1로 만들어 버렸던 건 아니겠지?
조한율 왈, 플레이어와 몬스터는 어느 정도 균형이 맞아야 한다고 했으니
‘……있을 법한데.’
내게는 과거지만 시간의 순리대로 따지자면 그쪽이 미래다.
그야말로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모를 상황이었다.
“허, 참…….”
만일 그렇다면 결국 내가 뿌린 씨앗을 내가 거두게 된 셈인가.
그런 식이라면, 미래 시점의 내 레벨이 초기화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그럴 수는 없지…….’
들은 대로라면 여기에는 이우연뿐만 아니라 김숙자 교수님, 조한율 등 여러 랭커들이 있었다.
그냥 내가 좀 고생하는 게 낫지, 그들을 죽게 둘 순 없다.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호수 한가운데 떠오른 마름모꼴의 문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거, 저기서 뭐가 나오든 간에 해치우는 수밖에 없나.
“……컨디션 별로네.”
워낙 상황이 급하니 얼떨결에 사람들을 구하며 몬스터를 처치하러 오긴 왔는데, 역시 현실에서 한발쯤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정소현을 만난 것도 일순간 보았던 꿈같았고.
혹시 지금 나는 지독한 악몽 속을 헤메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아리아드네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차라리 악몽이었더라면 깨어날 수라도 있었을 텐데.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
구하고 싶다는 마음이, 지금의 아리아드네에게는 무엇보다도 상처가 된다.
정소현은 내게, 나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위로해 주었지만, 나의 최선이 누군가를 상처 입혔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가장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 사람을.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도, 결국은 또 실패하고야 말았다.
그렇다면 이제, 타르토스에 다시 돌아가 보았자 아리아드네를 상처 입힐 뿐…….
“……어?”
그때였다.
호숫가 한구석, 사람의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다들 중앙에서 대피한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도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급하게 호수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에게로 뛰어갔다.
“저기요, 얼른 여기서 벗어나야……!”
하지만.
내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호수를 들여다보고 있는 인물이 누구였는지 깨달았으니까.
그 사람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낯설면서도,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뒤통수를 치는 것 같은 깨달음이 일었다.
여자는, 과거의 강예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호수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호수의 수면에는 어떤 장면이 비치고 있었다.
그 광경은 내게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유령성에서, 그들의 비명을 들었을 때.
거울 속에 비친 누군가는, 누구라도 좋으니 도와 달라며 손을 뻗고 있었다.
- 도와줘.
- 누군가, 제발!
- 누구라도 좋으니 도와주세요.
그래.
목소리를 들었다.
정체 따위 알 수 없는, 나와는 전혀 인연도 없을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를.
지금의 내가 아니라.
아무런 힘도 없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뿐인 강예나가.
- 플레이어가 스스로 ‘기억의 오류’를 자각합니다.
- 희귀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항상 의문이었다.
나는 어쩌다가 타르토스에 가게 되었던 것인지.
그 부분만 마치 누군가가 가위로 도려낸 것처럼 기억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이 기억을 떠올리는 건, 분명 지금 이 순간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 ‘기억의 오류’ 제거까지 필요한 조건 충족(3/3)
- 조건 : 과거와 대면
- ‘기억의 오류’가 수정되었습니다.
나처럼 차원의 틈새를 표류하던 페트라의 영혼이 잠시나마 틈새 사이로 빠져나와 ‘우연하게도’ 이 세계에 흘러들었으며.
저 호수를 통해 페트라의 목소리를 들은 ‘과거의 나’는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서 손을 뻗었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손을 뻗기 전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나, 과거의 나에게는 곤란해하는 누군가를 도울 만한 힘은 없다.
갑작스레 터진 던전 앞에서 내 목숨 하나 챙기는 것조차 힘들다.
그러니 여기서 손을 뻗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당장 이곳을 벗어나 다른 사람을 불러오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나는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과거의 나는 그랬다.
- 도와주고 싶다.
그냥 그런 보잘것없는 마음을 가지고서.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를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조용히, 또 다른 내가 거울처럼 비치는 호숫가에 손을 뻗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손길은 이윽고 수면에 파문을 일으켰고.
- 용사님……!
페트라의 간절한 부름에 닿았다.
길고 긴 나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스르륵, 하고 과거의 내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영혼만이 타르토스로 흘러 들어간 것이겠지.
나는 축 늘어져 버린 과거의 나 자신을 부축했다.
“하하하…….”
뜻밖의 곳에서 찾은 마지막 퍼즐 조각.
우습게도,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래.
이게 나라는 인간이다.
그저 호수 속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홀려서.
누군가를 도울 힘이 있기는커녕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외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저렇게 손을 뻗는다.
“진짜 민폐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앞에 기다리는 운명 따위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무런 힘도 없는 주제에!
그렇게 과거의 나 자신을 매도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
그래도,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해진 게 있었다.
“모든 게…… 처음부터 내가 선택한 거였구나.”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시스템은 그저 도구일 뿐, 선택도 순리를 거스르는 의지도 인간의 것이니까.
그리고 그 숱한 선택의 결과,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정소현은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백록담 정상으로 향하기를 선택했다. 그 덕에 어린 나는 안전한 한국에서 무사히 성장했다.
그리고, 페트라.
페트라도 포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영혼은 죽어서도 안식을 취하는 대신, 아무런 희망도 없는 차원의 틈을 거슬러 와…… 결국에는 운명마저 바꿀 수 있는 힘을 내게 건넸다.
나는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결과 끝에 서 있다.
지금 여기, 이곳에.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나는 검자루를 움켜쥔 손에 힘을 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리아드네, 미안.
설령 너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이 네게 상처가 되더라도.
네가 더 이상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금껏 다른 이들의 손에 숱하게 구원받아 온 나는 역시…….
“다시 한번 구하러 가는 수밖에.”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