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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293화 (294/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93화

황당한 소리였다.

“아니, 겨우 그런 걸로 차원의 틈새가 열렸다고? 그리고 그때 처음 만났다 뿐이지, 그 후로 손 정도는 잡을 일이 많았…….”

말을 이으려다 말고 나는 조한율의 뜨뜻미지근한 눈빛을 받고 말을 멈추었다.

“……전투하다 보면 그럴 일이 많아. 이우연이랑 던전 공략을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고. 서로 부축할 일도 많고…….”

왜 내가 괜히 변명을 하게 되는 건지 모르겠네.

조한율이 반쯤 뜬 눈으로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네, 네. 그런 걸로 해 두고…… 하여간, 초반 접촉 이후로 예나 씨가 빠르게 안정화되면서 그 후 차원이 흔들릴 만한 균열은 생기지 않았어요. 약간의 접촉 정도로는 문제가 없었죠.”

“그럼…….”

“그런데 이번에 예나 씨가 차원의 틈새를 헤매다가 와서 그런지, 지금 엄청 불안정한 상태거든요. 그래서 현재 상태로는 이우연이랑 손 한 번 잡아도 또 틈새가 열릴 확률이 높다, 이거죠. 그러니까 준비가 될 때까지는 손끝 하나 스치지 않도록 주의 좀 부탁드립니다.”

“…….”

이건 뭔…….

약간 황당한 심정이었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의 틈새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이번 경험으로 충분히 깨달았다. 괜한 위험 요소를 늘릴 필요는 없었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나저나 그냥 단순히 신체가 스치는 것만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이우연이 바이러스 운운하더니, 그 때문인 건가?

그 점이 약간 의문이기는 했지만 내가 캐묻기 전에 조한율이 말을 이었다.

“뭐, 하여간 차원의 틈새 자체는 그렇게 연다 치고…… 문제는 어떻게 타르토스로 통하는 던전을 정확하게 여느냐, 이건데요.”

“……쉽진 않겠군.”

마치 우주와도 같은 허무의 공간을 한없이 떠돌며 나는 무수한 세계의 편린을 보았다. 감히 숫자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부유하던 숱한 세계들.

그러니만큼 그렇게 쉽게 타르토스로 통하는 통로를 열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생각에 골몰하던 것도 잠시.

“아마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가능할 것도 같아요.”

너무 쉽게 떨어진 말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뭐? 가능하다고?”

“네.”

조한율이 씩 웃었다.

“그, ‘새벽의 방랑자’ 님하고 업무 교류 중이거든요. 지금 방법을 논의 중이에요.”

“……지금 뭐라고 했어?”

“제대로 들으신 거 맞아요.”

조한율이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새벽의 방랑자 님, 예나 씨 친구.”

새벽의 방랑자.

그 이름을 내가 잊거나 착각할 리 없었다.

그건 일리아스의 플레이어명이니까.

목소리가 떨렸다.

“설마…….”

내가 도통 믿지 못하는 기색에 조한율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네, 진짜 대화 중이라고요.”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 둘이 어떻게 대화를 해?”

쉽게 말하고 있다만 무슨 게임상 다른 서버간의 채팅도 아니고. 아무 관련도 없는 세계의 운영자끼리 어떻게 대화가 가능하단 말인가?

“관계가 없지는 않죠. 저도 예나 씨 경유로 저쪽 서버에 3번이나 접촉했고, 다른 운영자가 저한테 직접 말을 건 적도 있어서 힌트를 얻기도 했고요. 그땐 오류 메시지투성이에 바이러스만 잔뜩 받았지만.”

아마도 알리시아를 구해야 했던 던전 때의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지금 되짚어 보니 그때 조한율과 아리아드네가 최초로 직접 접촉했던 것이다.

아리아드네가 조한율의 간섭을 배제하며 한국 서버를 공격한 덕분에 전국의 던전이 동시 다발적으로 포화도가 올라갔다고 했던가.

“그래도 이번엔 서로 호의적이니까요, 단순한 정보 교류니 그렇게 부담은 없어요. 운영자들의 전용 공간이 차원 틈새에 있어서 그런지, 시차는 약간 존재하지만.”

“와…….”

설마 일리아스가 얼떨결에 운영자 자리에 오른 것이 이렇게 연결될 줄은.

또, 내가 한국에서 조한율과 인연을 맺지 못했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기회였다.

설마 이렇게 타르토스 쪽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될 줄이야.

“다들 무사해?”

“네, 무사하대요.”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물론 아리아드네가 그렇게 된 탓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긴 했지만, 역시 다른 애들도 걱정이 되니까.

“다만 상황이 좋진 않다더군요. 그 거대한 미궁에서 탈출하긴 한 모양인데, 그 후로 수도의 황군에 쫓겨서 도망치고 있다나 봐요. 수성전을 할 생각 같던데.”

“그런가…….”

사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은 아니었다.

루카스의 형은 혹시 모를 권력 분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루카스를 견제하는 거니까.

그러니 루카스가 자신의 계획과 달리 탈출한다면 쫓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루카스가 도망치는 곳이 예의 그 ‘성’이란 건데.

‘유령성 던전의 재현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착잡한 심정이었다. 나는 그 성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니까.

대군 앞에서 필사적으로 항전하던 성민들.

죽을 것을 알면서도 명예를 지키기 위해 돌격하던 병사들.

새벽의 여명과 함께 사라지던 기사들.

그 성이, 다시 한번 결전의 장소가 된다.

그때의 나는 어떻게 발버둥을 쳐도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없었다.

이번에는 그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

물론 내가 겪었던 유령성 때와 달라진 점은 분명 있다.

일단 신전의 교황이 가지고 있던 운영자 자리는 일리아스에게 넘어갔다.

유령성을 통해 봤던 과거에서는 운영자가 황제 측을 제외한 다른 플레이어에게서 시스템의 힘을 빼앗아 갔지만, 현재 타르토스 측의 운영자는 일리아스인 만큼 그럴 가능성은 없다.

적어도 일방적으로 학살당할 일은 없다고 보아도 되겠지.

잠시 생각에 골몰하던 나는 문득 의문이 들어 물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적 측의 권한을 뺏어 오는 건 안 되나?”

“그건 별로 추천하지 않아요.”

5년 차 운영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일부 플레이어의 권한을 제한하는 건 리스크가 크거든요. 신체적 손상을 피하기 힘들 거예요.”

“아니, 그럼 본래의 운영자는 어떻게 그런 짓을 한 거야?”

“제 추측이지만, 역사가 깊으니만큼 역대 운영자가 리스크를 줄이는 방법을 어느 정도 연구한 것 같아요. 신전의 모습도 그렇고요. 저로서도 흥미 깊은 사안이긴 한데…… 예나 씨 친구는 아직 운영자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고, 그런 요령을 물려받은 것도 아니잖아요. 함부로 건드렸다간 위험해요.”

하기야 그것도 그렇다.

조한율도 겨우 5년 차에 1대째 운영자인 반면에, 타르토스 쪽은 이미 시스템이 생긴 지 몇십 년이 흐른 데다 신전 쪽에서 대대로 운영자를 선출한 만큼 연구가 좀 더 이루어졌을 테니 단순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겠지.

나는 아리아드네의 손이 순식간에 뒤틀리던 모습을 떠올렸다.

괜히 일리아스가 리스크를 짊어지게 둘 수는 없다.

어쨌든 최악의 상황을 피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그럼…… 아리아드네는? 그 애는…….”

내가 그렇게 묻자 조한율이 마치 준비하기라도 한 것처럼 대답했다.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후로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대요.”

“……그렇군.”

그래도 그 후 다른 세 명의 친구와 전투를 벌이지 않아서 다행인가.

솔직히 당시의 아리아드네와는 도저히 적대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위압감, 압도적인 존재감.

아마도 B루트의 나처럼 만렙을 찍었을 뿐 아니라 시스템이 멸망이라는 존재로 인식한 만큼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게 아닐까, 그렇게 추측되었다.

‘하지만 겨우 그걸로 만족하고 사라졌을 것 같진 않은데.’

아리아드네는 자신이 없는 세계가 구원받는 것을 저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지금의 타르토스 또한 멸망시키려고 할 터.

그리고 내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을 알면 또다시 나를 그 세계에서 쫓아내려 하겠지.

나는 잠시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 방법을 논의하는 거, 미안하지만 최대한 빨리 부탁할 수 있을까.”

어찌 됐든 지금은 빠르게 타르토스로 돌아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리아드네도 황군도 어느 하나 쉬운 상대는 아니니까.

“물론 이제 그쪽이 날 도울 이유가 없단 건 알지만…… 도와주면 이 빚은 나중에 꼭 갚을게.”

조한율이 이제껏 나를 도왔던 것은 어디까지나 내 목적과 한국 플레이어를 렙업시킨다는 조한율의 목적이 어느 정도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야 조한율이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 알지만 공과 사는 철저하게 구분하는 성격이니만큼, 한국 서버에 부담이 간다고 판단한다면 나를 돕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꺼낸 이야기였는데.

조한율이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히려 제가, 아니, 한국 쪽이 빚을 갚을 차례 같은데요?”

“무슨 소리야?”

“일산 호수 공원 던전이요.”

뜬금없이 나온 장소에 이번에는 내가 어리둥절해졌다.

“그게 왜?”

“그때 예나 씨가 없었으면 저를 포함해 현 한국 랭커들 대부분이 죽었을 테니까요.”

“그건 우연히…….”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죠, 이쯤이면.”

조한율이 미소 지은 채 허공의 키보드를 툭툭 건드렸다.

“저 당시에 진짜 혼란스러웠거든요. 운영자니 뭐니, 사람들은 앞에서 죽고 다치고 괴물은 튀어나오고. 근데 예나 씨가 우릴 구해 줬어요.”

그 말에 언뜻 보았던 조한율의 모습이 생각났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이 빚을 갚지 않으면 공사 구분이고 뭐고 인간이 덜 되어 먹은 거죠.”

그 말에 나는 잠시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일산 호수 공원에서 몬스터를 처리할 때 딱히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할 수 있으니 한 것뿐.

세상에 당연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호의를 베풀었다고 해서 무언가가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면 기다리는 것은 결국 실망뿐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보답을 받으니…….

“그래서, 예나 씨. 제가 하나 제안할 게 있는데요.”

“뭔데?”

“이번 던전…… 아니,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리 예나 씨가 지금 레벨 81이 다 되어 간다고 해도 혼자서 전황을 완전히 바꾸는 건 무리이지 않나요? 말 그대로 전쟁이니까.”

감동도 잠시, 갑작스럽게 훅 끼쳐 온 현실에 나는 잠시 얼어붙었다.

그야…… 그렇긴 하지만.

“……혼자는 아니지.”

“네, 네. 예나 씨와 친구까지 4명이죠. 그리고 상대는 몇만 명쯤 되는 군대이고.”

“…….”

새삼스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지 상기시켜 줄 필요는 없는데.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조한율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 찬물 끼얹는 건 아니고요. 그러니까…… 이건 만약이에요. 혹시, 새벽의 방랑자 님과 제가 타르토스와 한국 간의 던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해 보죠.”

“……그래서?”

조한율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혹시 용병들이 필요하진 않아요?”

* * *

“레나 쪽이랑 연락이 닿았다고? 그럼 무사한 거지?”

한동안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던 일리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주 건강하대.”

“와, 진짜 다행이다……! 난 이번엔 진짜 큰일 나는 줄 알았어.”

“육체야 무사하겠지. 그렇게 놀라울 게 있나.”

그렇게 찬물을 끼얹듯 끼어든 것은 루카스였다.

일리아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드네 님이 레나를 진짜로 죽일 리야 없죠.”

“너네 그게 무슨 배짱이야. 꼴을 보니 죽일 생각 없어도 죽을 수도 있겠더만.”

알리시아가 투덜댔다.

그리 틀린 소리는 아니라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지. 그럼 이제 우리 걱정을 해야 하는 건가.”

“뭐, 상황은 그럭저럭 절망적이네요.”

일리아스는 상황과 맞지 않는 옅은 미소와 함께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벽 아래의 해자에는 물을 채우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곧 몰려올 황군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과 언데드 병사가 한데 모여 작업하는 것은 상당한 진풍경이었다.

‘그래도 반발이 적군.’

일반 사람들이 언데드에 가지고 있는 거부감은 무척 심한 편이지만, 이 성의 주민들은 지난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에 신전이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신전에 가진 반감이 커진 데다, 당장 적이 처들어온다고 하니 외려 약간 반기는 눈치였다.

언데드를 두려워하는 만큼 아군이 되면 든든할 테니.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도 간사하다.

일리아스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껏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으시고 밖으로만 나돌았던 덕분에 왕자님을 지지하는 귀족들은 없다시피 하지요. 그나마 긁어모은 군대도 삼천을 겨우 넘습니다.”

“그래도 질은 괜찮지 않냐?”

알리시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그간 인연 있던 용병 놈들을 다 그러모았는데, 실전으로 치면 이만한 놈들은 없을걸.”

“그래 봤자 용병은 백 명 안팎이잖아. 수적 열세는 명백하지. 그에 비해 이제부터 몰려올 황군과 귀족 연합군은 몇만 명 수준이고.”

알리시아가 자꾸 불길한 소리만 하는 제 오빠를 노려보았다.

“아, 재수 없게. 그래서 어쩌라고! 여기서 뒈지자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건 중요해. 게다가 지금 우리 상황조차 본래 일어날 수도 있었던 다른 가능성과 비교하면 나은 편이라는 거, 아시죠?”

일리아스가 루카스를 보며 말했다.

“본래는 십만 명 대 육천 명의 싸움이었다고 하니까요.”

“……그래, 최악은 아니로군.”

루카스는 자신의 성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유배되었다고만 여겼던 변방의 성.

상황은 분명 좋지는 않았다.

평생을 함께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친우 하나는 돌변하여 적이 되었고.

가족 간의 정은 없어도 적이 되고는 싶지 않았던 형은 권력에 취해 기어이 자신에게 칼을 들이댔다.

그럼에도 지금 자신 곁에는 일리아스와 알리시아가 있다.

“네, 분명 희망은 있습니다.”

루카스의 곁을 조용히 지키고 있던 기사가 묵묵히 입을 열었다.

검은 머리칼과, 고집스러운 눈빛을 지닌 기사.

페트라는 자신의 주군을 향해 말했다.

“용사님도 돌아오실 테니까요.”

영혼을 걸어 자신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준 기사를 보며, 루카스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 그렇다면 해볼 만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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