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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294화 (295/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94화

Chapter 22. 이 삶을 증명하는 것

루카스를 중심으로 기사들이 모여 앉은 원탁.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나이 지긋한 기사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화를 냈다.

노기사의 손에는 방금 전 전령이 전달한 황제의 친서가 들려 있었다.

하루 전.

성 앞 평원에, 드디어 적군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미 각오하고 있던 일이기는 했지만, 막상 평원을 채우기 시작한 병사들과 위풍당당하게 휘날리는 깃발을 보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현재 성에 모인 병력은 겨우 사천 명 남짓.

그에 비해 적군은 거의 오만에 달하는 숫자였다.

적군은 진영을 갖추자마자 성으로 전령을 보내 자신들의 의사를 표명했다.

전쟁에는 명분이 필요하니, 요식 행위라고는 하나 필요한 절차였다

다만 그 내용이 문제였다.

허례허식용 미사여구를 빼고 내용만 요악해 보자면 이러했다.

루카스 왕자는 실은 왕족이 아니라 악마가 의태한 사악한 종자다.

그것을 눈치챈 현 왕, 아니, 막 스스로 칭제한 황제가 신전에 요청하여 정화하려 했으나 악마는 정화를 두려워하여 신전을 탈출했다.

이에 황제는 신전과 힘을 합쳐 악마를 없애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자 병사를 일으켰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더불어 기사들은 하루라도 빨리 성문을 열고 항복해 명예를 지키고, 진정한 주인인 황실로 돌아오라는 내용도 알뜰하게 담겨 있었다.

여러모로 파격적인 내용이다.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 이런 법은 없습니다.”

모시는 주군을 악마라며 모욕당한 기사들은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아무리 적이 되었다고 해도 형제는 형제. 지켜야 할 도리는 있는 법인데 어찌 이렇게 무도하게 핏줄마저 모욕하는 것입니까! 악마라니요!”

“맞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은 없습니다!”

“아무리 명분이 필요하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모욕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분개하는 기사들에 비해 막상 모욕당한 당사자인 루카스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리 모욕받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않나. 권력에 눈이 멀어 헛소리를 주워 삼기는 이와 한 핏줄이니 말이다. 이 몸에 흐르는 피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할 말이 없군.”

“전하!”

이 또한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출생에 따라 신분이 갈리는 사회.

왕족이라면 당연히 평민과는 다른 피가 흐를 것이라 믿고, 그것이 권력과 부의 근거인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사들과 달리 상대를 막무가내로 악마화하는 것에 익숙한 일리아스는 냉정하게 말했다.

“뭐, 내용이야 깊게 생각할 것 있습니까. 어차피 막 칭제한 황제가 제 권력 기반을 다지려고 그럴싸한 명분을 세운 것뿐인데.”

내치로 내정을 다지기보다는 외부의 적을 쳐 내는 것으로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방식을 택했고, 그 목적에 맞게 루카스를 악마로 내세운 것뿐이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그게 상대방이 내세운 명분이니, 진실을 따져 보았자 아무런 소용도 없다.

남은 것은 오직, 힘을 겨루어 이기는 쪽이 진실이 될 뿐.

알리시아와 일리아스가 대륙의 적이 된 것처럼, 여기서 루카스가 패배한다면 루카스는 사악한 악마가 될 것이다.

‘그러던 내가 운영자가 된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대놓고 선전 포고문에 쓰지는 않았지만, 미루어 짐작하건대 자신이 루카스와 함께 있다는 것도 이 급한 공격의 원인일 것이다.

신전 입장에서는 대대로 물려주던 운영자의 자리를 빼앗겼으니 어떻게든 그 자리를 되찾아 와야 할 테니까.

다만.

‘그걸 황제가 용납할지는 별개의 문제지.’

상황이 재미있게 되었다.

일리아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굳이 영양가 있는 내용은 아닌 것 같으니 저는 다시 성벽의 방비나 점검하러 가 보겠습니다, 루카스 님.”

“그래, 잘 부탁하지.”

루카스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일리아스를 굳이 막지 않았다.

어차피 일리아스는 자신의 동료인 것과 별개로 단체 생활에 맞는 인물은 아니었다.

같이 싸우긴 하겠지만 일리아스와 언데드 군대는 별동대 취급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니 굳이 군사 회의에 낄 필요는 없다.

일리아스가 자리를 뜬 후.

“적군의 숫자는 많으나 그들 간의 결속력은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입을 연 것은 루카스 뒤에 배석하고 있던 페트라였다.

아직 젊다 못해 어린 외양의 기사였으나 페트라가 입을 연 순간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페트라의 실력이 출중한 것도, 루카스가 딸처럼 아끼는 아이라는 것도 다들 아는 사실이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함께 뒤에 서 있던 동기이자 소꿉친구인 엘리사 메이마저 감탄할 정도였다.

‘꼭 용사님 같네.’

요전번에 있었던 대신전 탈주극 후에, 정확히 말하자면 용사님의 영혼이 저 몸에서 빠져나간 후.

페트라에게 나이와 어울리지 않은 장악력과 무게감이 엿보였다.

그것이 되돌아온 기억 때문인지, 혹은 잠시 몸을 빌렸던 용사의 흔적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 때문인지 아직 딱히 기사단에서 이렇다 할 지위는 없는 페트라가 입을 열었는데도 그에 반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특히 귀족 연합군의 수장인 베른 공작은 뱀처럼 교활한 자이지요.”

페트라의 말대로였다.

사실 선전 포고문과 더불어 집결한 숫자 또한 대단해서 요란해 보일 뿐이지, 저쪽도 뜯어보면 그리 공고한 결속력은 보여 주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 평원에 집결하고 있는 군대의 수는 총 오만.

그중 황군이 2만 5천, 나머지는 새롭게 등극한 황제가 귀족들의 사병을 동원한 숫자였다. 특히 이 골육상잔의 전쟁에 가장 많은 군사를 지원한 것은 베른 공작이며, 귀족 세력의 수장이기도 했다.

사실상 황제에게 온전히 충성한다고 보기에는 애매한 세력이다.

“베른 공작에게 비밀리에 전령을 보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공작이라면 대놓고 반기를 들지는 않겠지만 황제의 권력을 약화시킬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페트라의 말에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귀족들로서는 왕이 칭제하는 것만 해도 큰 부담인데, 집권 초창기부터 이렇게 사병들을 동원해 대니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동생도 축출하고, 귀족들의 힘도 빼겠다는 심산이 아닌가.

직접 반역하는 건 부담이 크더라도 은근슬쩍 발을 빼는 것 정도는 협상해 볼 만했다.

“그래, 시도해 보도록 하지. 오늘 밤 내로 베른 공작의 소재를 파악하고 즉시 전령을 보내라.”

“존명.”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것에 페트라가 짧게 감사를 표시했다.

물론 루카스가 페트라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상 이 전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 전쟁을 두 번째 치르는 셈이니.

‘다만 변수도 많지.’

레나가 ‘운명의 씨앗’으로 운명을 바꾸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 덕에 페트라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전쟁의 시기가 몇 년은 빨라졌다. 그렇기에 페트라가 완벽한 답안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기에는 어려운 셈이다.

희망이 있다고는 해도 어쨌든 불리한 전황임에는 변함이 없다.

루카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페트라의 기억 속에서 루카스 자신은 운영자의 수작으로 모든 힘을 빼앗기고 독에 당해 병들어 죽어 가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여기.

아직 자신의 손에는 힘이 깃들어 있다.

그거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적어도 레나가 여기에 돌아오기 전까지, 이제껏 용사가 한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보여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루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명했다.

“베른 공작과 거래를 하려면 그만한 조건을 가지고 가야겠지. 적군의 보급을 끊을 별동대를 준비해라. 내가 직접 나간다.”

명실상부 이 대륙 최고의 마검사, 루카스 왕자.

그가 직접 전장에 참여한다는 사실에 기사들의 눈이 신뢰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존명!”

* * *

“루카스 전하는 품위를 지키며 우아하게 거래니 공작이니 하겠지만.”

성벽 위에 선 일리아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에게는 우리 방식이 있지. 안 그래?”

“그럼, 그럼.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네.”

알리시아가 씩 웃었다.

지루한 회의에는 애초에 낄 생각도 없었기에 알리시아는 계속해서 성벽에 머물러 있었다. 병사들의 무기를 손봐 주고 주민들이 짐을 나르는 것을 돕는 등 할 일은 차고 넘쳤으니.

그 덕인지 언데드나 알리시아의 괴물 팔을 보고 두려워하던 사람들하고도 서로 인사는 할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용기 있는 어린아이 몇은 팔을 쿡쿡 찔러 보고 도망가기도 했다.

“와아, 용병왕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손을 들어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 주면서, 알리시아는 코웃음을 쳤다.

“전쟁에 품위니 우아함이니 그딴 게 어디 있냐. 결국 사람 베고 검에 남는 건 시뻘건 피와 누우런 지방뿐인데.”

거기에는 인간의 존엄도 명예도 없다.

사람에게 그토록 배척받아 온 주제에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했지만.

몬스터의 숫자만큼 사람도 베며 살아남은 용병에게 염세적인 면은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것이기도 했다.

“맞는 말이야!”

“진짜, 검에 낀 지방 닦아 내는 게 제일 일이라니까? 특히 귀족 나으리들은 얼마나 처먹은 건지!”

“어떤 놈은 뱃가죽 기름으로 불을 붙였더니 삼 일 밤낮을 탔다더라!”

그리고 그 알리시아 옆에 열댓 명의 용병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었다. 그들 모두 알리시아가 연락을 넣자마자 대륙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이었다.

숫자는 적었지만 다들 알리시아에게 은혜를 입은 이들이었기에 확실한 아군일뿐더러 실력도 출중했다.

하기야 그러니 한때 수배범이었던 알리시아 편을 들어 이런 북쪽의 외진 성까지 도달한 것이겠지만.

“이야, 내가 황제랑도 다 싸워 보고! 이게 무슨 출세냐.”

“여기서 공을 세우면 저도 기사가 되거나 하는 겁니까?”

“야, 야. 기사는 무슨!”

알리시아가 코웃음을 쳤다.

“기사 되어 봤자 뭐 하려고! 매일 밤 천에 기름 묻혀서 갑옷이나 반짝반짝하게 닦다가 술 마실 시간도 없이 늙어 버릴걸?”

“으하하하하! 하기야 술 마실 시간도 없으면 안 되지.”

“이번 전쟁이 끝나면 대장이 술 삽니까?”

“야, 술이 문제냐? 내 소지창 다 털어서 술장고라도 통째로 사준다!”

“우오오오!”

우악스럽기 짝이 없는 환호성이 터지자 주위를 지나던 병사들이 한 번씩 눈살을 찌푸리고 지나갔지만 알리시아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용병에게는 용병식의 싸움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시작하면 되나?”

알리시아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일리아스에게 물었다.

그런 알리시아를 일리아스는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참다운 남매의 모습이었다.

“어차피 마법으로 목소리를 증폭시킬 건데 목청을 가다듬을 것까지야.”

“흠, 흠. 뭘 모르네. 이런 건 위엄 있는 목소리가 중요하다고. 안 그러냐, 얘들아?”

“크하하하하! 맞는 말입니다!”

“이런 건 술 한잔 마시고 해 줘야 하는데!”

누굴 닮았는지 용병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어 댔다.

평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적군들의 기세에도 용병들은 전혀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하기야 용병들이란 의뢰와 보수만 있다면 온갖 험한 일을 맡아 하는 존재들이며, 전쟁에서도 활약이 많은 만큼 이런 상황에 매우 익숙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일리아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위엄은 개뿔이.”

그러나 이런 종류의 일은 알리시아가 가장 걸맞다.

그래서 일리아스는 조용히 성벽에 그린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흡!”

알리시아가 크게 숨을 들이켠 후, 소리쳤다.

“야, 이 더러운 XX의 새끼들아―!”

마법으로 증폭된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우렁우렁하게 평원에 펼쳐졌다. 산천초목이 떨릴 정도로 거대한 목소리였다.

“내가 바로 여명의 수호자, 용병들의 왕인 알리시아다!”

“와아아아아!”

“용병왕! 용병왕!”

“여명! 여명!”

“무패의 용병!”

알리시아의 호탕한 목소리에 용병들이 호응하며 환호를 올렸다.

여명의 수호자.

그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이름에 일리아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릴 적 그렇게 헤어진 후 오랜 시간을 함께하지도 못한 남매인데, 일리아스가 먼저 ‘새벽의 방랑자’라는 플레이어명을 정했답시고 죽어라 안 되는 머리를 굴려 가며 결국 제 플레이어명에 새벽이라는 뜻을 집어넣은 그 정성이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혹은 낮에도 밤에도 끼지 못한다는 자조감에 지은 그 ‘새벽의 방랑자’의 새벽을, 멋대로 희망의 빛이라고 해석한 멍청함을 비웃어야 할지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뭐, 이렇게 말해 봤자 본인은 레나랑 맞춘 거라며 박박 우기겠지만.’

진짜 내 동생이지만 머리 하나는 죽여주게 멍청하다니까.

일리아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간에 알리시아는 용병들의 환호에 힘입어 한 번 더 소리쳤다.

“그리고 너네 황제는 고자 새끼다아아아아!”

“…….”

내가 시키긴 했지만 저건 정말…….

그 참담한 꼴에 일리아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원초적인 욕설과 음담패설에 용병들 사이에서는 왁자지껄한 웃음과 걸쭉한 욕설이 터졌다.

“아이고, 왕이란 놈이 고자 새끼란다!”

“와하하하하! 황제도 별거 없구만!”

“억울하면 누가 까서 확인해 보든가! 그리고 나한테도 알려 주고!”

“……아주 신났군.”

판이 깔렸다고 신나게 선동과 날조 중인 동생과 용병들을 보며 일리아스는 귀를 막기로 했다. 계속 수위가 더해지는 욕설을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썩는 것 같아서였다.

한심한 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대로라면 의도한 바는 달성할 듯했다.

아무래도 상대방의 사기를 떨어트리려면 대장을 우습게 만드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리고 원초적인 비꼼은 언제든 잘 먹히는 놀림거리였다.

우스운 지휘관에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진심으로 따르는 병사는 없고, 생사를 가르는 전장에서 그러한 마음가짐은 반드시 실수로 이어진다.

게다가 모두 황제에게 충성하는 병사들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내심 황제의 권력을 노리는 귀족 연합군이 포함되어 있다면 더더욱.

그래서 아까운 마력을 소모해 가며 굳이 이런 짓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심지어 아주 지어 낸 얘기만도 아니지.’

이미 장성한 왕, 아니, 황제가 결혼을 하지도 않고 후계자조차 친척 아이 중 하나를 데려왔다는 것은 세간에서 볼 때 이상한 일임은 맞았으니까.

혈연으로 권력을 이어 가는 황제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도에서도 이미 비슷한 소문이 있다지.’

그만큼 설득력 있는 얘기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아군의 속을 시원하게 해 주는 효과도 있을 것이고.

‘결혼을 하지 않는 건 루카스 전하도 똑같지만, 이쪽은 뭐…… 본인의 의지가 워낙에 확고하니.’

애초에 왕위에 오를 생각도 없는 것도 그렇고.

본인이 마음에 정한 상대가 아니라면 그냥 평생 독신으로 살 생각인 것 같으니까.

‘이러나저러나 이 왕실의 피는 끊기겠군.’

뭐, 그것까지야 일리아스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일리아스는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제까지 저쪽의 ‘운영자’와 나눈 메시지들이 복잡하게 널려 있었다.

새벽의 방랑자 : 이쪽의 준비는 다 했습니다. 그쪽은?

조한율 : 던전 세팅까지 앞으로 3일 정도 필요해요.

앞으로 3일.

이미 차원 간에 어느 정도 시차가 존재하는 사실을 감안하고 계산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실제로는 더 걸릴 가능성이 컸다.

조한율 : 이제 던전 여는 건 문제없어요. 그보다 중요한 건 B루트 운영자의 행방인데…….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가 섞여 있기는 했지만 일리아스는 눈치로 대충 알아들었다.

새벽의 방랑자 : ‘절망’ 말이지요.

갑작스럽게 나타나 그저 존재만으로 주변 생명체의 태반을 절망시킨 아리아드네.

분한 일이지만 현 운영자인 일리아스로서도 도저히 상대할 방법이 없는 존재였다.

필멸하는 존재인 인간이 죽음에 맞설 방법은 없으니까.

조한율 : 전투 중에 또 그 존재가 나타난다면 솔직히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어요. 어떻게든 대응책을 마련해 둬야 하는데…….

새벽의 방랑자 : 대응책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미 써 뒀습니다.

조한율 : ……?! 진짜요?! 그게 뭔데요?

일리아스는 그 메시지에 대답하는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원받지 못한 세상에서 희망 어린 가능성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아리아드네의 심정을 헤아려 보면, 와닿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일리아스만이 그 심정을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눈앞에서 동생처럼 아끼던 친구를 잃고.

그 후 단 하나뿐인 가족마저 잃은 후 어둡고 깜깜한 설원 속에서 이 세상을 원망하고, 증오하며, 홀로 긴 세월을 보냈었다.

억울한 마음은 자신이라는 존재를 한없이 비참하게 만들었고, 작아진 마음은 원망을 감당하지 못해 차츰 비대해져 미움이 되었다.

그 미움은 세상을 전부 집어 삼켜도 사그라들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러한 설원의 심연을 넘어 닿은 빛이 있었다.

“한 번 더…….”

일리아스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용사를 믿어 보는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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