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95화
류세연은 빈 소주잔을 테이블에 쾅!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방구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김하현은 소주잔에 소주를 채워 주면서도 핀잔을 주었다.
“사람한테 방구가 뭐니, 방구가.”
“본인이 지은 플레이어명이 그런데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방구가 아니라 방랑하는 구도자거든? 게다가 이제 본명도 밝혀진 마당에.”
막 퇴근해서 셋이 자주 만나곤 하는 단골 포장마차에 합류한 이선도, 어묵탕의 무를 집어 먹으며 덩달아 류세연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이제 플레이어명도 본명인데 그냥 본명으로 불러 줘.”
“내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 이름을 왜 불러?”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방구라고 부르는 건 어떨까 싶은데?’
……라고, 김하현은 생각했지만 굳이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본래도 까칠한 애가 술이 들어가니 더 까칠해져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지금의 류세연은 손만 대면 죽는다는 개복치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저 심정이 아예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류세연은 잔뜩 시킨 안주를 하나도 집어 먹지 않고 강소주만 몇 잔을 들이켜더니 결국 코를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짜증 나! 어떻게 방구 자식, 그런 짓을 할 수가!”
“어이구, 그래그래.”
김하현이 류세연의 입에 닭발을 하나 집어넣었다.
전형적인 술주정이기는 했지만 내용이 특이했다.
류세연이 갑자기 술이나 마시자고 연락이 온 이유.
그건 바로, 최근 한국 헌터계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 때문이었다.
현 랭킹 1위 강예나가 등급 높은 던전에 도전할 예정인데, 그 던전에 함께 들어갈 헌터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 그 소문의 내용이었다.
물론 강예나가 던전 공략에 미쳐 있다는 거야 은근히 퍼진 소문이니 새로운 던전 공략에 도전한다는 것까지야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이 소식이 헌터계 내에서 유명해진 것은 그 던전 공략에 참가하는 면면들 때문이었다.
첫번째로 알려진 인물은 이우연.
이건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강예나와의 친분이 워낙에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김숙자 교수.
여기는 좀 놀랍기는 하지만, 김숙자 교수가 은근히 ‘방랑하는 구도자’를 아낀다는 소문은 본래도 있었던 데다, 얼마 전 대한민국을 뒤흔든 일산 호수 공원 던전에 김숙자 교수도 있었던 탓에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다만.
“그 꼰대 새끼도 이번에 들어간다며!”
그랬다.
영원 길드의 길드장이자 헌터 협회의 협회장인 김성연이 강예나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배척했던 것은 워낙에 유명한 이야기였다.
헌터계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알 정도이니까.
심지어 상위 랭커들은 그런 모습을 직접 보았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김성연까지도 던전 공략에 참가한다고 한다. 그것도 개인이 아니라 길드 단위로 지원해 주겠다고 나섰다는 게 아닌가!
헛소문이 아니라, 실제로도 영원 길드는 대형 던전 공략을 준비해야 하니 당분간 필수 공략 외에 다른 던전 공략은 자제하라는 길드 내 공지가 떴을 정도였다.
즉, 김성연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의 지원을 하겠다고 나선 사실은 여러모로 명백해 보였다.
덕분에 며칠 전부터 대한민국 헌터계가 술렁이고 있었다.
- 그 방랑하는 구도자랑 영원 길드가 한 팀 먹기라도 하면…… 이거 견제 가능하긴 해?
- 강예나에 이우연이 같은 길드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 1위와 2위가 한 길드라니, 이거 정부에서 개입해야 하는 사안 아니냐?
영원 길드가 헌터계에서 절대적인 입지를 자랑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만큼 그 영원 길드에 눌린 중소 길드들의 불만도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강예나라는, 랭킹 1위면서도 어느 길드에도 소속되지 않고 정부와도 그리 접점이 없는 헌터는 어느새 일종의 상징처럼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길드의 힘이 중요하다지만 개개인의 실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홀로서기도 가능하다, 는.
그런데 그런 상징이 되어 가고 있던 강예나가 정말 영원 길드에 소속되기라도 하면…….
“끔찍해, 끔찍하다고!”
그래서 지금 류세연이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류세연을 이선이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너는 예나 씨를 몇 번 겪어 봤으면서도 그렇게 모르냐. 예나 씨는 꼰대랑은 근본적으로 안 맞는 사람이라고. 영원 길드에 들어갈 리가 없잖아. 차라리 이우연 데리고 독립을 하면 모를까.”
“응? 그래? 동족 혐오 같은 건가?”
“……야, 하현아…….”
“하하하. 원래 고집 센 사람끼리는 잘 싸우잖아. 강예나 헌터도 리더 타입이고, 김성연 길드장도 리더 자리를 내놓지 않으려는 타입이니까. 교수님이 있으면 모를까, 둘이 있으면 김성연이 죽어서 나올 것 같은데.”
“김성연이 지는 건 확정이야?”
“나도 방구 쪽이 좋아!”
류세연이 코를 훌쩍거리며 소주를 자작했다. 이제 귀찮아진 이선과 김하현은 말리지도 않았다.
“그러니까아, 어차피 김성연 같은 놈이랑도 눈 딱 감고 일할 거면 나한테도 연락을 줄 법도 하지 않아?”
이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 그쪽이 서운한 거였어?”
그랬다.
지난번 방랑하는 구도자, 강예나와 함께 던전에 들어갔을 때 류세연은 나름 호의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협업 제안을 했었다.
그런데 그 후로 연락이 오기는커녕 스쳐 지나가지도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류세연만 안달이 났다.
“나 그 김성연 꼰대랑 일하는 거 싫단 말이다!”
류세연도 랭킹 상위권의 마법사인 이상 던전 공략 때 검사인 김성연과 마주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전에 레비아탄이 나온 던전에서 굴욕을 당한 만큼, 솔직히 씹어 먹어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김성연은 영원 길드라는 거대한 길드의 수장.
중소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류세연은 소소한 사과와 막대한 보상금을 받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류세연 정도의 마법사와 호흡을 맞추려면 김성연쯤 되는 실력자가 아니라면 무리인데, 아직까지도 검사가 워낙 귀하다 보니 싫어도 함께 던전을 공략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쳐야 하지만 그때마다 속이 부글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진짜 얼굴 볼 때마다 한 대 치고 싶다고! 꼰대 자식 얼굴 한 번 치고 그냥 감빵 갔다 올까?!”
그런 류세연을 향해 이선이 핀잔을 던졌다.
“그렇게 열이 받으셔서 도플갱어가 아니라 던전을 박살 내셨구나, 응? 덕분에 내가 보고서를 세 장 더 썼다.”
“김성연을 박살 낼 순 없으니까 그렇지! 아, 그래서 방구는 뭐 하는데? 이선, 네가 말해 봐. 내가 그렇게 숙이고 들어갔는데 왜 나한테는 연락이 없냐고!”
“네가 뭘 그렇게 숙였다고.”
‘그러게.’
아차.
김하현 본인도 술이 좀 취해 있던 터라 속마음이 튀어나와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류세연이 화난 고양이처럼 눈을 치켜뜨고 김하현을 노려보았다.
“내가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했잖아! 그게 숙인 거지!”
“그래그래, 완드를 들이대면서 말이지. 류세연, 그게 먹힐 것 같아?”
이선이 류세연을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류세연 입장에서는 그것도 꼴 보기가 싫었다.
“야, 이선! 방구랑 좀 친하다고 유세떠는 거야?!”
“유세는 무슨. 친하다고 대놓고 자랑하는 거지.”
“야!”
“애초에 네가 먼저 대놓고, 신상 밝히지 않으면 같이 공략 못 한다고 협박한 것부터가 문제였어. 예나 씨가 퍽이나 널 좋아하겠다.”
“아, 내가 못 할 말 했냐고! 그때 방구가 수상했던 건 맞잖아!”
류세연의 말도 옳은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김하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할 수 있는 말이긴 한데, 어쨌든 그렇게 들이박기부터 하면 인간관계가 파탄날 것도 뻔하잖아.”
이것도 이것대로 맞는 말 잔치라 류세연은 시무룩해졌다.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을 눈치 보지 않고 다 하고 살면서 타인에게 미움받거나 경원시당하는 것은 익숙해졌다만.
“이씨…… 그래도 그다음부터는 잘해 줬잖아. 내가 그 레비아탄 던전 영상도 풀고, 어? 덕분에 여론도 반전됐고!”
“그거 너였냐?!”
이제야 진실을 알게 된 이선이 경악하며 류세연을 바라보았다.
‘……류세연치고 진짜 노력은 했네?’
레비아탄을 공략하는 영상이 뜨면서 강예나를 향한 대중의 여론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긴 했다. 적어도 실력을 의심하는 기류는 그 이후로 싹 사라졌으니까.
이걸 알게 된다면 강예나도 류세연을 보는 인식을 조금 달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정도 잘해 주는 걸로는 승부가 안 돼. 예나 씨 옆에는 이미 그 여우 새끼가 착 달라붙어 있다고. 이우연 그게 옆에서 얼마나 살랑거리는지 보면 너 기절할걸. 나는 무슨 전생의 연인인 줄.”
“아, 그놈의 이우연!”
류세연이 성질을 냈다.
그 모습을 본 이선은 아차, 싶었다.
김성연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우연이라는 단어 또한 지금의 류세연 앞에서는 금기어였던 것이다.
“그 새끼는 대체 어떻게 진언 마법에 검까지 다루는 거야? 나쁜 새끼! 비겁한 놈! 천재!”
아주 익숙한 레퍼토리에 김하현도 이선도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또 시작이다.”
“하현아, 쟤 소맥이나 말아 주자. 입이나 닥치게.”
“나는 왜 진언 마법을 못하는 거지?! 왜일까?!”
레벨은 이선과 비견할 정도로 높은 데다, 마력량은 전국으로 따져도 순위권인 주제에, 아직도 진언 마법을 깨우치지 못한 만큼 류세연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언 마법을 깨우친 것은 물론 마검사 클래스라서 혼자 물공, 마공 타입이 되어 버린 이우연은 존재만으로도 류세연의 역린이었다.
“이우연 이 나쁜 자식! 자기 혼자 좋은 건 다 해 처먹고!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냐고, 그 나아아아쁜 놈!”
그때였다.
의자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술자리에 끼어들었다.
“이우연이 뭘 어쨌는데?”
자연스럽게 술자리에 합석한 여자를 보고 류세연은 눈을 크게 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술에 취한 정신으로 보기에도 예쁘장한 얼굴에, 긴 검은 머리를 높게 묶어 올린 여자. 겉보기에 자신보다 적어도 대여섯 살은 어려 보였다.
혹시 술 취한 대학생이 익숙한 이름을 듣고 테이블을 잘못 찾아오기라도 한 건가?
“테이블 잘못 찾아온 것 같…….”
그러나 류세연이 말을 마치기 전에 이선이 먼저 손을 흔들며 반갑게 여자를 향해 인사했다.
“아, 예나 씨! 잘 찾아왔네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그 이름을 류세연이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강예나를 본 류세연은 입을 떡 벌렸다.
김하현도 입을 벌리고 벙쪄 있었다.
“서, 서, 서, 설마……!”
“이렇게 어린애였어?!”
“……민증 깐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그리고 그런 류세연과 김하현의 반응을 본 강예나는 어이없어했다.
* * *
“이야, 드디어 예나 씨랑 밥을 먹네요. 포장마차긴 하지만!”
“한 번쯤 와 보고 싶었으니까 문제없어.”
한국에 있을 땐 막 입시를 끝낸 고등학생이었던지라 포장마차에 술을 마시러 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 나를 류세연이 이글이글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포장마차에도 처음 올 정도로 어리다, 이거야……?”
“그렇게 안 어려.”
“와, 진짜 의외긴 해요. 전 백전노장인 줄 알았는데요.”
결이 다르기는 했지만 김하현도 신기한 듯 나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육체적 나이는 스물다섯 즈음인 데다, 솔방울의 스킬 때문에 겉보기에는 스무 살 때와 그리 다를 게 없으니만큼 다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쪽은 나이대가 30대 초중반이라고 했으니 어려 보이기도 하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이는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중요한 건 헌터로서의 실력이지.”
“……이야아…….”
“아, 그래서 반말이야? 랭킹 1위니까 그래도 돼? 이 어린놈의 자식이!”
김하현이 어쩐지 감탄한 반면에 류세연이 테이블을 탕 쳤다.
“일단 잔부터 채워! 이왕 나이 따질 거면 주량으로 승부해! 너 주종 뭐야!”
“……이미 취한 상태인데 무리하는 거 아냐?”
“아하하, 예나 씨. 저거는 무시하세요. 진짜 취해서 그래요. 일단 잔부터 받고요.”
“술자리 시작한 지 한 시간밖에 안 됐다고 하지 않았어?”
이선이 따라 주는 술을 받으며 나는 류세연과 김하현의 안색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둘 다 얼굴이 상기된 것이 상당히 취한 것처럼 보였다.
“이래서야 이야기는 제대로 못하겠는걸. 할 말이 있어서 온 건데.”
“할 말?”
“응, 용병을 구하러 왔어.”
조한율을 통해 내가 동료들을 구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5년여 전, 일산 호수 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낸 헌터들은 대부분 기꺼이 도와주겠다며 연락이 왔다.
심지어 그 김성연조차도 그랬다.
“솔직히 그 김성연 길드장이니까 순수한 호의라기보다는 꿍꿍이가 있겠지만 말이죠.”
“그냥 빼먹을 것만 빼먹고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을 것 같네.”
각각 조한율과 이우연의 평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자원하겠다는 헌터들이 많다고는 해도 그것만으로는 숫자를 채우기 부족했다.
“던전 형식으로 여는 만큼 입장 제한이 뜰 확률이 높아서요. 일단 조율해 보고는 있는데 아마 이쪽에서 보낼 수 있는 인원은 최대 오십 명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특히 대규모의 전쟁이니만큼 광범위한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법사들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되면 이선도 그렇고, 마력이 많은 류세연 같은 헌터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은 아깝다.
그래서 일단 제안이라도 하려고 온 것이다.
물론 제대로 된 설명은 할 생각이었다.
이번 공략은 던전의 형식은 취하고 있되, 일반적인 던전처럼 몬스터를 처치하는 게 아니라 다른 차원의 ‘인간’이 상대인 전쟁이라는 것.
그리고 아군이 몇천 명도 되지 않는 것에 비해 상대방은 몇만 명의 대군이라는 것.
또 한국의 헌터들보다 저쪽 세계의 평균 레벨이 훨씬 높기 때문에 위험도가 무척 높다는 것.
그런데.
“할래!”
소주잔을 든 류세연이 설명을 듣고 제대로 이해는 했을지 의심될 만큼 곧바로 외쳤다.
나는 당황했다.
“아니,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니까. 일단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다시 물어보고…….”
“아이, 참. 예나 씨, 류세연 쟤 취해서 지금 아무것도 안 들려요.”
이선이 소주와 맥주를 섞어 따르면서 깔깔 웃었다.
류세연이 달아오른 얼굴로 외쳤다.
“나 안 취했어! 안 취했다고! 됐고, 나도 간다! 나도 갈 거야! 이건 무조건이야!”
취했네, 이거.
나는 곤란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내일 아침에 다시 이야기해야 하는 건가? 이제 남은 시간은 이틀 정도라 시간이 별로 없는데.”
“아, 참가 여부라면 걱정하지 말고요. 지금의 류세연이라면 죽어라고 따라갈걸요? 요새 쟤의 가장 큰 고민이 진언 마법을 깨우치지 못하는 거라서요. 난도 높은 던전이란 던전에는 다 들어가고 있거든요.”
“그거, 딱히 난도 높은 던전 들어간다고 깨우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래도 확률상 간절해질수록 발현하는 경우가 많긴 했으니까요. 아, 그리고.”
이선이 소맥 잔을 건네며 씩 웃었다.
“저는 조한율 씨한테 어제 소식 들었거든요. 오늘 연가 냈어요. 그사이 긴급 사태라도 터지지 않는 이상 승인될 거예요.”
“뭐, 연가……?”
내가 이선을 바라보자 이선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 저는 공무원이라서 사적으로 던전 공략하려면 쉬는 날에 알아서 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올해에 아껴 놓은 연가 전부 끌어서 일주일 휴가를 만들어 놨어요. 그 유령성 공략에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아니, 잠깐.”
나는 이선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럼 휴일에 던전 공략을 하겠다고? 그건 너무 미안한데…….”
“에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나 씨가 도와 달라는데 이쯤이야. 그리고…….”
이선이 약간 씁쓸한 표정으로 술을 들이켰다.
“저도 그 던전의 모습은 기억에 남아 있어요. 솔직히……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었는데, 제가 책임져야 할 병아리들이 있어서 더 나서지 못했었죠.”
그 말에 나도 조용히 술잔을 입에 댔다.
당시의 일은 나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이선은 신입 헌터들과 함께 던전에 들어간 상태로 던전의 오류를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나와 이우연에게 가망 없는 던전 공략에 도전하느니 차라리 히든 루트를 찾아서 탈출하라고 이야기했었다.
그건 이선 입장에서는 옳은 판단이었다.
던전 포화도가 올라가 던전이 터질지도 모르는 마당에 한국의 최상위 헌터들을 잃으면 죽도 밥도 안 되니까.
하지만 그런 판단과는 별개로…….
“처참한 모습이었죠.”
이선 또한 그 성의 모습이 마음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아, 그때 이야기는 저도 들었어요. 이선이 엄청나게 고생했다면서요.”
김하현이 손을 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남는 자리가 있으면 저도 참전할게요. 그런 대규모의 전투라면 보조계 헌터들도 도움이 될 테니까.”
이건 뜻밖이었다. 김하현까지 자원해 줄 줄이야.
지난번 던전의 경험으로 김하현이 상당한 실력을 가진 헌터라는 거야 이미 알고 있었다.
“도와준다면 감사하죠. 환영합니다, 김하현 헌터.”
“야, 너는 왜 김하현한테는 존댓말이야!”
“면전에 대고 실례인 호칭을 부르는 사람한테 내가 왜 존댓말을 써?”
“이익! 나는 언니라고 불러!”
“……미쳤어?”
“워, 워.”
이선이 웃으면서 나와 류세연을 말렸다. 중재가 아주 익숙해 보인다.
“그나저나 다른 차원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 상대라면…….”
이선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유령들이 전투를 벌이던 차원은 대체 뭐였을까요? 그건 실제 사람은 아니었던 거죠?”
그 말에 나는 씁쓸한 심정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때는 짐작도 하지 못했고, 그곳이 타르토스였다는 것을 알게 된 최근까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다.
“누군가의…… 악몽이었겠지.”
지키고 싶었던 것을 지키지 못해 절망한 사람이 꾸는 악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