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96화
깊은 밤.
귀족들이 모인 막사의 탁자 위에서는 쉴 새 없이 의견이 오가고 있었다.
“젊은 혈기라고는 하나 이렇게 곧장 핏줄을 쳐 내겠다며 병사를 일으키다니…… 이것 참,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아니, 집권 초창기에 권력이 분산될 싹은 뽑아 두는 게 낫지. 오히려 결단력은 높이 평가해도 좋을 것 같은데.”
“하기야 동생은 어릴 때부터 백성들에게 평도 좋았으니, 집권 중 내내 위기감을 느낄 만도 하지 않겠소.”
“그래도 그렇지, 제 혈연에게 이리 무자비하다니.”
“다들 떠드는 대로 후계자를 생산할 수 없는 몸인 게 아니겠나. 그렇다면 비슷한 나이의 혈연이 경쟁자로 보일 수밖에.”
“하긴 어릴 때부터 워낙에 비교당하며 크기는 했지요. 안 그렇습니까, 공작 각하.”
“뭐, 그런 잡소리들은 치우고.”
귀족들의 의견을 듣고 있던 베른 공작은 턱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가장 의문인 것은…… 루카스 왕자는 과거 그 옵타티오를 공략했던 5인 중 하나 아닌가.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는 해도 아직 젊으니 그 실력이 녹슨 것도 아닐 터.”
아무리 과거를 묻어 버렸다고는 해도 몇십 년간 공포였던 SSS급 몬스터를 잊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그 시대를 살았던 베른 공작에게는 더욱 그랬다.
평생 해결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몬스터를,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용병질이나 하던 왕자가 해결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실 그때만 해도 루카스 왕자가 장자를 제치고 왕위를 승계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SSS급 몬스터를 처치한 것은 그만한 공이었으니까.
다만 본인이 왕위 다툼을 싫어하는 성정이라 극구 사양하며 은거했을 뿐.
일설로는 당시 실종된 동료를 찾아 대륙을 떠돌려고 왕위를 포기했다는 말도 있었는데, 공작의 정보력으로도 그 진실은 판가름하기 어려웠다.
“그런 무력을 갖추고 있는데도 왕위를 사양할 정도로 온화한 성정인데…… 심지어 신전까지 동원해 억지인 핑계까지 대 가며 굳이 죽일 이유가 있는 건가?”
공식적으로 황제는 루카스를 두고 악마가 의태를 했니, 뭐니 했지만 무지한 일반인들이라면 모를까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 귀족들은 아무도 없었다.
본래 정점에 오르면 경쟁자를 짓밟는 것이야 누구나 하는 일 아닌가. 거창한 핑계를 다 대는군, 그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다.
또한 루카스 왕자 개인의 무력이 만만치 않은 만큼 아무리 숫자로 밀어 버린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피해는 피할 수 없을 터.
더 나이가 들어 무력이 떨어진 후 쳐 내는 게 합리적이었을 거라고, 베른 공작은 생각했다.
베른 공작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침묵하는 동안 각자 다른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건 여기까지 온 이상 성과를 내야 하는데, 기후가 너무 추운 것도 문제입니다. 병사들의 사기는 점점 떨어질 겁니다.”
“숫자상으로야 우리가 유리하다지만 저 성은 천혜의 요새더군요. 수성하며 소모전으로 끌고 간다면 병력 손실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 성안에서 버티는 것도 한계는 있을 터. 이대로 시간만 조금 끌어도 자멸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여기에서 발이 묶여 있을 순 없지. 다들 때를 놓치면 다음 파종 시기를 놓치게 될 거야.”
목숨을 걸고 전쟁에 임하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귀족 연합군은 굳이 자신들의 병력을 소모해 가며 나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저 성을 함락시킨다고 해도 얻을 건 없고, 현 황제는 귀족들을 휘어잡을 만한 인품도, 위엄도, 실적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들 승전보보다는 제 손실을 걱정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의견을 모두 들은 베른 공작이 탁자를 두드렸다.
“즉 우리가 굳이 전면에 나설 필요는 전혀 없다, 모두들 같은 마음이로군.”
“하지만 그걸 황제 폐하께서 두고 보시겠습니까? 이왕 전쟁을 벌인 것, 형제를 죽이고 우리의 세력도 약화시킬 심산이실 텐데요.”
“앞장서지 않는다면 신전을 내세워 신앙심이 부족하다 하실 테고요.”
그래, 그게 문제였다.
겉으로 내세운 이 전쟁의 명분은 어디까지나 악마를 정화하려는 성전.
여기에서 내빼는 모습을 보인다면 악마와 결탁한 것이 아니냐며 신전의 지탄이 쏟아지게 될 것이다. 아무리 신전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해도 파문이라도 당하는 날이 오면 사회적인 말살을 당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쉽게 움직일 수도 없다.
누군가가 툭, 내뱉었다.
“대체 황제 폐하는 어떻게 신전을 구워삶으신 거랍니까?”
“그래, 그게 문제란 말이지…….”
이상하리만큼 루카스 왕자를 제거하는 데 집착하는 것은 황제만이 아니었다.
‘신전이 이 시점에서 개입할 이유도 없는데.’
아직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지 않아 여전히 공식적인 활동을 자제하고 있는 만큼, 황제의 형제를 악마라고 공언한 것도 모자라 전쟁을 성전이라 말하며 손을 보태는 것은 신전으로서도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둘 다 루카스 왕자를 죽이지 못해 안달인 이유가 무엇인가.
베른 공작은 머리를 굴렸다.
‘황제와 신전 사이에 무언가 있긴 한데…….’
그런데, 그때였다.
조용하던 막사 앞이 갑작스럽게 소란스러워졌다.
“공작 각하!”
막사 앞을 지키고 있던 부관이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공작은 근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회의 중에 무슨 일인가?”
“큰일입니다! 오늘 도착할 예정이었던 보급 식량이 기습을 받아 모조리 불에 탔다고 합니다!”
“뭐라?!”
“그게 무슨 소리냐!”
베른 공작을 비롯한 귀족들은 모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대체 어떻게? 누가 우리 후방을 쳤단 말이냐?”
그야 전쟁 중에 보급을 끊는 것은 당연한 전술이라고는 해도 현재 적군은 성안에 틀어박혀 있는 상태였다.
갑자기 전쟁에 끼어들어 후방을 기습할 만한 제3의 세력도 없었다.
그래서 방심한 것이다.
현재 루카스 왕자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대체 누가?
부관이 창백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루카스 왕자 본인이 직접 나섰다고 합니다.”
상상도 하지 못한 말에 막사 안의 귀족들 모두가 경악했다.
“아니, 이 상황에서 본인이 직접 나섰다고? 미친 건가?”
“대체 언제 병사들을 끌고 성에서 빠져나온 거지? 미리 매복이라도 시켜 두었나? 우리도 계속 감시하고 있었을 텐데.”
설령 뒷길이 있다고 해도 기습을 할 만한 병사를 이끌고 왔다면 그게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다.
부관이 그 물음에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적은 루카스 왕자, 한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귀족 하나가 호통을 쳤다.
“그럼 지금 단 한 명한테 보급병 삼백 명이 당했단 말이야?!”
확실히, 말도 되지 않는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베른 공작은 혀를 찼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공작 각하!”
“십 년 전 고작 다섯이서 SSS급 몬스터를 공략했다. 일반 병사들 몇백쯤 그냥 뚫어 버리고 불을 지르는 게 어려울 리 있겠나.”
그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새삼스럽게 무력의 차이가 와닿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대륙 제일의 마검사라고 해도 대략 오만 명의 군사를 거느린 적진의 후방을 홀로 친다는 것은 어지간한 배짱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인 이상 체력도, 마력에도 한계가 있지 않나. 게다가 왕자쯤 되는 인물이 혼자 움직이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럼, 기습을 당하는 동안 신관들은 무얼 하고 있었지? 한 명이서 쳐들어왔다면 사로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그것이…… 성력을 쏟아부었지만, 어쩐 일인지 전혀 통하지 않았다고…….”
“허, 참……!”
다들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신관들의 성력은 마법에 대항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마법이 불이라면 성력은 물이다.
그런데 그런 신관들이 모여 마검사 한 명을 막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뜻인가.
“신전 놈들, 겉으로만 황제를 지지하는 척하면서 웬 어중이떠중이들을 보낸 것 아닙니까?”
“아무리 루카스 왕자가 대단한 마검사라고는 해도 이건 말이 안 됩니다. 그 많은 신관들이 고작 한 명을 막지 못하다니요!”
“이건 보급 담당의 책임이 아니라 신전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람들의 아우성을 듣던 베른 공작은 부관에게 물었다.
“그래서, 루카스 왕자는 그대로 놓쳤고 보급마저 다 잃었다…… 이 말인가?”
“예, 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그대로 놓쳤다고…….”
막사 안의 모두가 침음을 흘렸다.
베른 공작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병사들을 탓할 일이 아니지.”
이제 주둔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이렇게 빠르게, 그것도 홀로 적진에 침투해 보급로를 불태워 버릴 줄은 누가 예상했겠는가.
놀라운 결단력이었다.
황제와 귀족 연합군이 서로 눈치를 보며 앞으로의 움직임을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대는 사이 상대방이 먼저 긴밀하게 움직였다.
이건 어딜 봐도 지휘관의 실책이다.
공작은 혀를 찼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실수를 어떻게 수습하느냐, 다.
베른 공작은 빠르게 물었다.
“그래서, 다음 보급은 언제지?”
“열흘 후입니다.”
“으음…….”
베른 공작은 혀를 찼다.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각자 영지에서 가져온 식량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을 텐데, 고작해야 일주일 치입니다.”
“배급을 줄이면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날씨도 추운데, 배급이 줄면 병사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요.”
군대를 유지하는 데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이다. 배를 곪은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질뿐더러 통제하기도 쉽지 않다.
당장이야 가지고 있는 군량으로 어떻게 버틴다고 치더라도 워낙에 사람 수가 많은 만큼 오래 버티기는 힘들다.
그렇게 생각하던 베른 공작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소모전의 가능성을 없애 버린 거군.’
저 천혜의 요새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약점은 성안에서 자급자족이 불가능하다는 것.
그러니 이 상식 밖의 기습은, 성 밖의 적군들이 성안의 식량이 동날 때까지 버틴다는 작전을 세우지 못하도록 경고한 것이라고 보아야 했다.
우리만큼이나 너희들도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거라고.
“……아무래도 루카스 왕자의 무력은 여전한가 보군.”
그것도 신관들이 손조차 쓸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딱지가 붙어 버렸다.
이 소식을 들으면 병사들의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질 것이 뻔하다.
베른 공작은 상상 이상의 사태에 헛웃음을 지었다.
‘이걸 어쩐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사태에, 귀족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별다른 대책 없이 막사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귀족들이 돌아간 후.
창백한 표정으로 서 있던 부관이 목소리를 낮추며 공작에게 다가왔다.
“공작 각하. 실은, 아까 전 전서구가 한 마리 도착했습니다.”
“전서구?”
“예, 베른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그 말에 베른 공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영지에서 전서구가 날아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 아닌가?”
“예, 아무래도 적군 측에서 날려 보낸 듯합니다.”
“호오…….”
단순히 군량을 불태우는 기습이 목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베른 공작이 주둔하고 있는 막사까지 알아냈다는 말인가.
베른 공작은 부관의 손에서 전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전서의 내용을 읽은 후 베른 공작은 끌끌 웃었다.
그 눈은 무언가를 고려하는 듯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이거 원, 황제 폐하께서 대단한 형제를 두셨군. 전대 교황의 서거라. 흐음…….”
신전 세력이 왜 이렇게 무리해서 황제와 손을 잡았는지 의문이었는데, 전대 교황이 서거했다면 그럭저럭 납득이 되었다.
부관도 눈을 빛냈다.
“그럼 신전 내부도 후계자 다툼으로 정신이 없겠군요. 혼란한 와중에 황제의 힘을 빌어 새 교황을 뽑겠다는 심산일까요?”
“그럴 확률이 높겠지. 어찌 됐든 전대 교황이 후계자도 정하지 못하고 죽었다면 이건 우리에게 기회다. 우리 가문 출신의 성직자를 교황으로 만든다면…….”
성직자가 되면 속세와 연을 끊어야 한다지만 인간사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결국 피에 이끌리기 마련.
베른 공작가의 방계도 여럿 성직에 몸을 두고 공작가의 후원을 받아 신전 내부에서 제법 높은 위치에 올라 있었다. 다만 전대 교황의 눈에는 들지 못해 후계자 후보에는 들지 못했다만…… 상황이 이렇다면 기회였다.
이쯤 되면 이 전쟁의 향방이 문제가 아니다.
전 대륙에 영향을 끼치는 교황 자리에 가문의 사람을 밀어 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베른 공작은 전서를 쥐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 같더니, 그것도 아니었던가.”
귀족의 목줄을 쥐려는 현 황제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되 그래도 루카스 왕자에게 붙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지배자로서는 무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베른 공작을 비롯해 귀족들의 세력을 황제 측과 갈라놓으려는 이 판단력과, 폐쇄된 신전 내의 소식까지 쥐고 있는 정보력.
또 직접 제 능력을 활용해 기습까지 감행한 담대함과, 이렇게 빨리 자신의 위치까지 파악해 전서구를 보낸 결단력까지.
‘현 황제는 신전과 결탁하고 귀족을 배척하지. 이번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이런 경향이 계속된다면 차라리 지지 세력이 없는 왕자를 앞세우는 것도…….’
베른 공작은 막사 안에서 홀로 주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 * *
“답변이 왔다.”
루카스는 일리아스에게 전서의 답변을 건네주었다.
“예상대로야. 귀족군은 황제의 폭거에 따를 생각이 없으며, 만일 내가 황제를 사로잡거나 죽인다면 그에 승복하겠다는군.”
일리아스는 그 말에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지금 이 전투가 문제가 아니라 신전 싸움에 끼고 싶을 테니까요. 빨리 몸을 빼고 싶을 테죠.”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지만 이렇게 두고 보니 우스울 뿐이었다.
“하하하. 사악한 악마에게 대항하는 성전이라고 하더니 푸른 피의 명예고 뭐고 없군요.”
루카스는 친우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간질을 시도한 것은 사실이되 이렇게 생각대로 굴러가는 것도 입맛이 썼다.
결국 권력을 탐하는 싸움에 모두를 끌어들인 셈이니.
“그래, 만일 내가 실패하더라도 실패하는 대로 모르는 척하면 될 일이니 공작은 손해 볼 일도 없고.”
그래도 저 군세의 반 정도는 발을 뺄 생각이 만만하다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숫자가 많다고는 해도 지휘관의 명을 따라 목숨을 걸고 돌진하지 않는 이상 잡병에 불과하다. 오만의 군대 중 정예군은 만 오천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보급받아야 할 식량이 루카스의 손에 모조리 불타 버린 상황.
“이 일주일 내에 승부를 봐야 한다.”
아무리 루카스가 날고 기는 실력의 마검사라고는 해도 홀로 경계가 삼엄한 대군을 뚫고 계속해서 보급을 끊을 수는 없다.
이번 기습만 해도 일리아스가 운영자로서의 권한에 언데드를 활용해 신관들의 성력을 소모시키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쉽게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권한을 남용한 대가로 일리아스의 손가락 세 개가 으스러진 상태였다.
다음 기회는 없다.
“그럼 저도 오늘 밤부터 적군의 잠을 재우지 않도록 하죠.”
하지만 일리아스는 그런 것을 내색하지도 않고 으스러진 손으로 완드를 매만지며 웃었다.
“그 악마라고 불리우는 네크로맨서의 맛을 보면 재미있을 겁니다.”
생사가 걸린 전장에서는 미신을 믿기 쉽다.
그런 와중에 밤새 뼈다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듣다 보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터.
마력만 불어넣으면 끊임없이 재생하는 언데드는 이런 형식으로도 써먹기 좋았다.
게다가 성벽 위에서는 알리시아를 비롯한 용병들이 마력을 아끼지 않고 온갖 소리를 지껄여 대며 하루에 몇 시간씩 병사들을 피곤하게 하고 있었다.
보급도 실패한 판에 적군의 사기가 떨어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루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정쟁에 이용될 뿐인 백성들이다. 겁을 먹고 몸을 뺀다면 좋으련만.”
사실 지위가 있는 기사쯤 되는 게 아니고서야 일반 백성이 전쟁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높으신 분들이야 어찌 됐든 제 목숨만 붙어 있으면 그만 아닌가.
워낙 대군이다 보니 거기에 휩쓸려 사기는 제법 충만했을 테지만, 이쯤 되면 징집된 일개 병사들도 무언가 상황이 삐걱거린다는 감을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쉽게 전염될 테고.
일리아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위에 우리가 나선다면 그렇게 될 겁니다.”
타르토스 대륙에 시스템이 열린 지 몇십 년이 흘렀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레벨을 올리며 몸을 단련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민초들이 많은 데다, 모두가 시스템을 열 수 있다고는 해도 일정 레벨 이상으로 올라가려면 막대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니만큼 루카스를 비롯한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들이 앞에 나서면, 제대로 훈련받은 황군을 제외한 일반 병사들은 지레 겁을 먹고 전열을 무너트릴 확률이 높다.
그리고 그렇게 전위에 앞세웠을 때 가장 효과적인 것은…….
“그래서, 레나는 언제 합류한다고?”
성검을 든 용사다.
아군의 사기를 올리는 것은 물론, 날뛰며 상대를 무너트리기에는 최적의 인선 아닌가.
“차원 간에 시간의 차이가 있어서, 확실히는 모릅니다. 그래도 일주일 이내로는 오겠지만.”
“……그런가.”
루카스의 표정을 보고 일리아스가 놀리듯 말을 걸었다.
“젊을 때는 그렇게 아옹다옹하더니 이젠 보고 싶으신가 봅니다?”
“헛소리.”
루카스는 가차 없이 놀림을 일축한 후,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나이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왜요? 레나는 연하를 싫어하는데 조건은 더 나아진 거 아닙니까?”
“……이 상황에 농담도 다 하고, 손도 그 꼴인데 여유가 생긴 모양이군.”
“여유 같은 건 없습니다. 가장 큰 문제가 남았으니까. 지금 상태라면 레나가 와도 문제예요.”
일리아스는 으스러진 제 손을 바라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지금의 아리아드네 님을 보면 우리 레나가 어떻게 나올지…….”
* * *
호화로운 막사 안에서 와장창, 도기가 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짧은 비명도.
데구루루!
막사 안에서 발치 아래로 무언가가 굴러왔다.
막사를 지키고 선 보초병은 그걸 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닥을 굴러 막사 밖으로 나온 것은 사람의 목이었다.
기습을 당해 군량을 어이없이 잃은 만큼, 황제의 분노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저 상황 보고를 하러 들어간 부관의 목이 이리도 쉽게 떨어질 줄이야.
검붉은 피가 흙바닥을 적셨다.
“그래서, 내 동생의 손에 군량이 모두 불에 탔다?”
그리고 황제에게서 약간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덕분에 다행히 목숨을 건진 다른 부관은 몸을 덜덜 떨며 무릎을 꿇은 채 답했다.
“소, 소, 송구합니다. 남은 군량을 모으고 있습니다만…… 으아아아악!”
눈에 뜨거운 것이 스쳤다.
검이 눈알을 깊숙이 베고 지나간 것이다.
“보고도 막지 못한다면 그 눈이 무슨 소용이냐?”
“요, 용서를……!”
하지만 고통에 무릎을 꿇은 것도 잠시, 부관은 곧이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서걱!
다시 한번 바닥을 구른 목을 보며, 황제는 어깨를 들썩였다. 동생과 닮은 파란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일렁였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개탄했다.
“도대체 쓸 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구나! 고작 한 명의 적도감당하지 못한 병사들에, 신관이라는 작자들은 그깟 마법 하나를 진화하지 못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몇십 년 전부터 몸속 깊이 자리하고 있던 열등감이 기름이라도 부은 듯 들끓었다.
“정말 악마와 계약이라도 한 건가?”
함께 검을 배우고 마법을 수학했다.
자신 또한 그럭저럭 괜찮은 성과를 냈으나 대륙 최고의 마검사가 되어 버린 동생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가 벌어졌다.
물론 같은 혈연이라고는 해도 장자는 이쪽이다. 루카스는 차남에 지나지 않았고, 왕위에는 관심도 없었던 나약해 빠진 놈이다.
그런 녀석이 어째서 시스템의 가호를 받아 저런 무력을 휘두른단 말인가!
그때, 그런 황제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가 있었다.
“군량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이 전쟁의 승리는 당신 것이니까.”
조용히 드리운 그림자.
마치 이 세계의 비극은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이 초연한 얼굴에, 금발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그 모습을 황제는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잊지는 마.”
천사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녀 아리아드네는 피 묻은 검을 든 황제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악마와 계약한 쪽은 당신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