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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297화 (298/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97화

양태원은 멀뚱히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약간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내키지 않는다는 것이 뻔히 보이지만 일단 겉으로는 좋은 어른처럼 보인다는 과업을 달성하고 있었다.

김성연 길드장이 양태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양태원 헌터, 이번 던전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기대가 많아. 잘 부탁하네.”

“예에…… 뭐.”

양태원은 떨떠름하게 악수를 받았다.

김성연은 그렇게 간단한 악수만 나누고 곧장 떨어져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와, 저 어린애가 강예나 라인을 탔다더니…… 진짠가 본데?”

“조한율이랑 친하단 말도 있어.”

“조한율이야 돈 많은 거 빼곤 별거 없다지만…… 하긴, 이우연하고도 친하지?”

“그러니까 저 콧대 높은 길드장이 직접 와서 저러는 거겠지.”

다른 헌터들이 수군대는 것이 들렸다.

그들 대부분이 ‘그’ 레비아탄 던전에서 양태원과 김성연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아는 헌터들일 것이다.

주변 반응에 귀를 기울이려는 찰나 몸을 휘감고 있던 청룡이 꼬리로 귀를 막아 주었다.

- 타인이 쌓는 구업을 들을 필요가 있겠느냐.

다정한 음성이 들렸다.

양태원은 자신에게만 보이는 용에게 히죽 웃어 주었다.

“하기야, 본인 입으로 쌓은 업은 자신의 귀에 들어가기 마련이죠.”

“또 혼자 무서운 소리를 하고 있네.”

헌터들과 동떨어져 홀로 서 있는 양태원에게 다가온 것은 이우연이었다.

“나한테 와도 돼? 누나는 어쩌고.”

“저기는 저기대로 바빠.”

누나라고 칭한 인물은 물론, 강예나였다.

강예나는 평소처럼 고고한 학처럼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헌터들 사이를 돌아다니느라 무척이나 바빴다.

그리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대형 던전 공략을 앞두고 있는 만큼, 공략 전에 다른 헌터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느라 바쁜 것이다.

“아, 언니라고 불러 보라니까?”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

그런 강예나 뒤에 왠지 고양이 같은 사람 하나가 달라붙어 있지만 저쪽은 아무래도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을 듯싶었다.

어쨌든 약 오십여 명의 헌터들이 모인 일산 호수 공원 지역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근데 왜 하필 일산 호수 공원?”

“조한율 말로는 전적이 있어서 이쪽이 타르토스와 연결하기 쉽다던가.”

양태원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한율 누나는?”

“근처 건물 하나 빌려서 던전 세팅 작업 중이야.”

“저런, 한율 누나도 이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그것도 그럴 것이, 강예나가 직접 공략 멤버들을 모은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랭킹 1위께서는 처음으로 가면을 벗고 얼굴을 공개한 채 헌터들 사이를 휘젓고 있었던 것이다.

비밀에 가려졌던 랭킹 1위, 방랑하는 구도자의 얼굴이 처음으로 밝혀진 순간이다.

잘 봐줘도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얼굴이 공개된 순간 헌터들 사이에 스친 파란이란!

혼자 보기에는 아까울 정도의 광경이었다.

“근데 뭔가 아쉽다.”

양태원은 강예나의 얼굴을 두고 여전히 구업을 쌓고 있는 여러 인물들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예나 누나 얼굴이 좀 더 극적으로 대중한테 딱! 공개되었다면 헌터계 최다 광고 모델 모나미를 꺾을 수 있었을 텐데.”

외모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저 눈빛과 카리스마 있는 분위기의 강렬함은 따라올 사람이 없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이우연은 오히려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강예나 성격에 그런 걸 하겠어? 그 시간에 잠이나 자는 게 낫다고 하겠지. 게다가 돈 욕심도 없고.”

하기야, 그런 점까지 용사답기는 했다.

“그리고…… 일부 헌터들 앞에서만 내보이는 것뿐이고, 여전히 대중한테 공개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아.”

“오, 암행어사 같은 거?”

이우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암행어사는 또 뭐야?”

최근 한국 헌터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 중 하나였다.

랭킹 1위의 헌터, 강예나가 가면 아이템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제껏 소재 파악이 정확히 되지 않고 워낙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고 나타났으니 그런 소문이 돌 만도 했다.

진지하다기보다는 우스갯소리로 나오는 이야기였지만, 저렙 헌터들 사이에서는 제법 인기가 있는 이야기였다.

“힘숨찐은 유구하게 인기 있는 소재긴 하지.”

“재밌네.”

양태원에게서 소문의 내용을 들은 이우연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름대로 좋은 효과도 있을 것 같고. 적어도 중소 길드 소속 헌터들을 무시할 일은 좀 줄겠군.”

“그거 나를 두고 하는 소리야?”

양태원은 입을 비죽였다.

“그리고 강예나 라인은 무슨, 이번 공략 끝나면 당장 다른 세계로…….”

“그만.”

“악!”

이우연이 양태원의 입을 퍽 쳐서 말을 끊어 버렸다.

양태원은 맞은 입을 감쌌다.

“아프잖아!”

“그렇게 투정 부리지 마. 그래도 강예나는 널 엄청 신경 쓰는 편이야.”

“…….”

“전력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인데도 김성연 길드장에게 엄포를 놨단 말이다. 너한테 또 예의 없게 굴면 공략이고 뭐고 가만있지 않겠다고.”

현재 주가 최상인 랭킹 1위 헌터님의 말씀이시다.

예전이야 어떻게든 강예나를 견제하고자 이런저런 액션을 취했었지만, 첫 던전의 기억마저 돌아온 지금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을 터.

양태원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하, 그래서 그런 거였군.”

어쩐지, 새삼 저 꼰대가 이상한 짓을 하나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거였다.

강예나가 자신을 뒤에서 챙겼다는 걸 알게 되자 양태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누나가 날 좋아하긴 해. 그렇지?”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그렇다.

강예나가 양태원을 동생으로 아낀다는, 아무리 눈에 뻔히 보이는 사실이라고 해도 말로 형태화시키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것이.

아니, 심지어는 말로 들어도 불안할 것 같다. 언젠가 홀연히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아니까.

그리고, 그걸 붙잡지도 못한다는 것이 더욱 슬펐다.

‘……그래 봤자 이우연 만큼은 아니겠지만.’

양태원은 이우연을 흘끗 쳐다보았다.

겉으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태연자약해 보였지만, 아닌 척해도 눈이 계속 강예나를 따라다니는 것을 보면 그리 편한 마음은 아니리라.

게다가 양태원의 영안에는 여전히 이우연과 강예나 사이를 강하게 연결하고 있는 인연의 실이 보였다.

저렇게 깊은 인연이 생긴 연유를 이우연은 여전히 밝히지 않은 채였다.

‘나라면 당장 말할 텐데.’

이만한 인연이 한국에 있다는 걸 알면 만에 하나라도 강예나가 한국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우연은 굳이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정말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모를 일이라고, 양태원은 생각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기에 그 짧은 시간이나마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기를 바라게 되는 것은 당연한 마음이다.

그러나 소중한 사람이기에 오히려 붙잡지 않고 보내 주기로 결정하는 것은, 아직 어린 양태원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감정이었다.

“……있잖아. 나 점쳐도 돼?”

양태원의 말에 이우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쳐.”

솔직히 점을 쳐 봤자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오히려 부담이 될 듯했지만, 무당이라는 특수 클래스에 아직 어린 나이이기도 한지라 괜히 하지 말라고 하는 게 오히려 심리에 안 좋을 것 같아 허락한 것이다.

양태원이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지난번에 꽃점 쳤다가 결과가 좋지 않았으니까 이번에는 산점으로 간다!”

약식으로 향을 피운 후 산통에 넣은 산가지를 섞고 흔들며 양태원은 눈을 감고 간절하게 기원했다.

“모두가 무사히 귀환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소원을 말한 후, 양태원은 산목을 차례대로 꺼내어 눈금을 읽었다.

그리고, 괘가 나왔다.

결과를 본 양태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대, 대흉(大凶)?”

“…….”

이우연은 눈살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그냥 치지 못하게 할 걸 그랬다.

“어, 어떡해? 이거는 어지간하면 나오지 않는 괘인데. 예, 예나 누나한테 말할까?”

“말하면 어떻게 할 건데.”

그렇지 않아도 심란할 터였다. 대흉이 나오든 대길이 나오든 어차피 갈 사람인데, 괜한 결과를 전해서 불안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정해진 운명 같은 건 아무 소용없다는 거 알잖아.”

이우연은 산통과 산가지를 들고 망연히 서 있는 양태원의 손에서 도구를 빼앗고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어, 어어……?”

“너도 이제 슬슬 소지창 점검이나 해. 들어가면 그럴 시간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난 이우연의 뒤에서, 양태원은 바닥에 흩어져 버린 점의 결과를 바라보았다.

“……산통이 깨졌네?”

이것은 대흉의 증거인가, 혹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청룡 님?”

양태원은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자신의 곁에 머물러 준 신에게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없이.

청룡의 몸이 인간을 위로하듯 감싸 올 뿐이었다.

* * *

“이렇게 보니 정말 적군의 숫자가 많긴 합니다.”

엘리사의 물음에 성벽에 서서 적군을 내려다보고 있던 페트라는 시선을 돌려 자신의 소꿉친구를 바라보았다.

“우리끼리 있는데 굳이 경어?”

“아니, 뭐…….”

엘리사는 말끝을 흐렸다.

“……오다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성벽 위에 완전 무장을 한 채 오가는 병사들이며, 병사들을 돕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성민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다들 엘리사와 페트라를 한 번씩 보면서 지나갔다.

특히, 페트라에게 꽂히는 시선은 대단했다.

“숫자야 많지만, 어차피 잡졸에 불과해. 잡병들이 수만 명 있어 봤자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지 못할 리 없을 텐데, 페트라는 조용히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들 오며 가며 페트라를 쳐다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전장을 내려다보는 등에는 기묘할 정도의 위압감이 서려 있었으니까.

소꿉친구를 속속들이 알고 있을 터인 엘리사 메이는, 페트라를 보며 태어나 처음으로 낯섦을 느꼈다.

그야, 엘리사도 이야기를 들었기에 페트라가 어떻게 전장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페트라가 자랑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은빛의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검을 찬 채 서 있는 고고한 기사의 모습은, 그야말로 어릴 때부터 두 사람이 꿈에 그리던 기사의 현신이었다.

다만, 어린아이 시절부터 모든 순간을 함께해 온 소꿉친구가 홀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간 듯해서 어쩐지 서운하기도 했고, 또…….

“……힘들지는 않아?”

엘리사 메이는 그렇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 아무리 잡병이라고 말한들 절대적인 숫자의 차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성이 천혜의 요새라고 한들 지금 성안에 있는 인원만으로는 긴 성벽을 모두 지킬 수 없고, 자급자족이 힘든 만큼 전투가 길어지면 이 성안에서 굶어 죽을지도 몰랐다.

전쟁의 압박감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성민들이 희망을 잃지 않는 이유는…….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시시각각 숨통을 졸라 오는 압박감을 홀로 짊어지겠다는 듯 성벽 위에 고고히 선 페트라라는 이름의 기사와.

“주군이 무사하시잖아.”

그 페트라가 태양이라도 바라보듯 올려다보는 루카스 왕자가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이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성을 버리지 않을 두 사람.

그 둘을 향한 신뢰가 이 성안에는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신뢰를 아무렇지도 않게 짊어진 페트라는 똑바로 전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적은 황제가 아니야.”

황제는 그저 동생에게 가진 열등감에, 그리고 자신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라는 혼자만의 진실에 침식되어 썩은 내를 풍기고 있을 뿐인 인간이다.

지금의 페트라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이 나빠져만 가는 상황.

독에 당해 산 채로 썩어 들어가는 고통을 감당해야 했던 주군.

설상가상으로 이제껏 쌓아 왔던 ‘힘’은 빼앗긴 채로, 페트라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맨몸뚱이와 검 한 자루뿐이었다.

결국 어떻게든 성민들의 목숨이라도 구하고 싶어 항복을 결정했지만, 그 선택은 통한의 결과로 돌아왔다.

“페트라?”

눈앞의 친우가 열어 준 길을 달리며 보았던 광경을 기억한다.

이 성이 불타고, 성민들이 짓밟히고, 주군의 몸은 품 안에서 싸늘하게 식어 갔다.

자신이 저지른 실책, 그 운명을 뒤집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눈앞에 기회가 있다.

아무런 관련도 없는 다른 세계의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 주었기 때문에.

페트라는 전장 위로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억을 되찾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 없는 목소리가 있다.

“바꿀 수 있다면요?”

자신에게 이 기회를 가져다준 여자.

성녀, 아리아드네.

성녀 아리아드네는 본래 환생이라는 운명의 궤를 따라야 하는 페트라의 영혼을 이탈시켜 준 은인이었다.

만일 아리아드네가 없었더라면 페트라는 용사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도 구원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을 터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페트라에게 유일한 희망이 된 이 세계는 얄궂게도 아리아드네에게는 도리어 절망이 되었다.

‘이게 운명의 장난이란 건가.’

다시 한번 기회를 잡은 페트라와는 달리…… 한 세계를 멸망시킨 죽음이 된 여자는, 지금 이 세계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같은 인간이기에, 그 절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도 소중했기에, 그렇게 깊이 사랑했던 존재들이 자신이 없는 미래를 걸어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이기심.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기회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마음.

그야말로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이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아리아드네 님, 당신은 이걸 진심으로 바라는 게 맞습니까?’

제 손으로 한때 사랑한 것을 모두 부숴 버리는 결말을.

페트라는 입 밖에 차마 낼 수 없는 의문을 허공으로 던졌다.

“잠깐만, 페트라 경.”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엘리사 쪽이었다.

군세를 바라보고 있던 엘리사가 눈가를 좁혔다.

“움직임이 이상해.”

“……뭐?”

페트라는 눈가를 좁혔다.

하지만 엘리사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것과 동시에, 감시대에 올라가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던 감시병이 북을 두 번 울렸다.

둥둥!

무언가 수상한 정황을 포착했다는 의미의 신호였다.

성벽을 분주히 돌아다니던 기사와 병사들이 일제히 긴장하여 성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저런 숫자의 대군이다. 게다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 평지인 만큼 시야를 가릴 엄폐물도 없다 보니 약간의 움직임이라도 있으면 당연히 보일 수밖에…….

“……잠깐.”

그리고 그 위화감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루카스 곁에 서 있던 일리아스였다.

딱!

일리아스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에 따라 성벽 해자 밖에 묻어 두었던 언데드 하나가 인간의 형태를 갖추며 튀어 나갔다.

그 편리함에 놀랄 새도 없이.

퍽!

얼마 가지 못해 언데드 병사가 허공에서 처참하게 분쇄되는 것처럼 갈려 나갔다.

그와 함께 위화감의 정체가 드러났다.

드러난 전모를 발견한 루카스가 신음했다.

“이렇게 큰 규모의 환상 마법을……!”

성녀, 아리아드네의 특기 중 하나인 환상 마법.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대군의 모습을 숨길 정도의 규모로 시전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건, 일반적인 신성 마법조차 아니었다.

하늘 위로 흰 옷자락이 스치듯, 거대한 장막 같은 일렁임이 대군을 감싸고 있었다.

그 황홀하기까지 한 빛의 장막을, 성벽에 서 있던 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마치 홀린 것처럼 올려다보았다.

적군 전체에 닿아 있는 오색의 오로라는 불길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설령 당장 세상이 멸망한다고 할지라도 그 오로라에 시선을 빼앗겨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성벽 위에서 누군가가 홀린 것처럼 그 찬란한 빛 속으로 손을 뻗었다.

그건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때였다.

콰콰쾅!

빛이 수정 속을 비추듯 아름다운 광경 사이, 조악하기 짝이 없는 불꽃이 퍼퍼펑 터졌다.

천혜의 자연을 짓밟는 인간의 발자국처럼.

“다들 정신 차려라!”

루카스의 낭랑한 목소리가 불쾌한 울림처럼 모두를 꿈에서 깨웠다.

그 목소리에 모두가 황홀한 꿈에서 깨어나 암담한 현실 속으로 내던져졌다.

그리고 남은 것은…….

“어, 언제 이렇게 가깝게……!’

“무기를 준비해라!”

놀라울 정도로 가깝게 접근한 대군의 모습이었다.

“……동사하기 직전 꾸는 꿈같군.”

걷히기 시작한 오로라를 보며 알리시아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이 세계의 죽음이 되려 하는 여자가 꾸며 낸 환상이니까.

“아리아드네, 진짜 우릴 죽일 생각이구나.”

그러나 친우의 변모를 슬퍼할 여유조차 알리시아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대군은 이미 해자 바로 앞까지 진전해 있었으니까.

- 당신은 세계를 멸망시킨 최후의 전령을 목격하였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 일리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루카스는 검을 들고 외쳤다.

“전군, 위치로!”

이 세계의 운명을 건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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