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99화
“도망치면 더 이상 쫓지는 않겠다!”
알리시아가 이번 전투를 대비해 특별히 공수한 트롤 팔을 휘두르며 적군을 망설임 없이 휘젓고 다니는 모습은, 사실상 인간이라고 하기보다는 토끼우리 안에 풀어놓은 사자처럼 보였다.
“이래야 대장이지!”
“우리도 뒤를 따르자!”
그리고 그 뒤를 쫓는 용병들 또한, 알리시아가 날뛰는 사이 성벽을 타고 내려가 적군 사이를 휘젓는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한동안은 정신이 없겠군.’
아리아드네의 마법 버프를 받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전위가 완전히 흐트러지고 있는 것을 보며, 일리아스는 언데드 군대를 성벽의 방비 쪽으로 집중시켰다.
아무리 알리시아가 날뛴다고 한들 어쨌든 혼자이기에 방어가 필요한 곳이 많았던 것이다.
일리아스의 명령을 받은 언데드 병사들은 성벽을 타고 오르려는 병사들의 발목을 잡아 뚝뚝 꺾으며 소명을 다했다.
피잉!
그리고, 한편.
엘리사는 활을 들고 해자를 넘어오는 기사들을 쓰러트리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일반 병사들과 달리 상당히 견고한 갑옷을 껴입고 있기에 사실 화살을 날린다고 한들 그리 도움이 되지 않지만…….
“으악!”
“오, 맞췄다.”
갑옷에도 이음새 부분은 있기 마련이다. 팔을 움직이는 관절 사이 이음새에 엘리사가 날린 화살이 정확히 꽂혔다.
저런 부상을 입은 팔로는 성벽을 기어 오르지 못한다.
기사쯤 되면 실력도 대단할 터. 그런 실력자를 화살 한 대로 전투 불능에 빠트린 것은 꽤 대단한 일이었다.
엘리사는 약간 흥분해 페트라를 돌아보았다.
“봤어? 방금 명중……!”
히이이잉!
기사를 탄 말 한 마리가 화살을 깊숙이 맞고 고통에 날뛰다가 위에 오른 기사를 낙마시켰다.
놀랍게도 말이 두르고 있는 금속 갑옷의 금속판을 화살 촉이 뚫고 지나간 것이다.
물론, 페트라가 쏘아 낸 화살이었다.
일반 화살로는 할 수 없는 기예를 선보인 페트라가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자원은 효율적으로 써야지요, 엘리사 경!”
“예예, 미래의 기사 단장님! 아주 잘나셨습니다!”
피잉!
해자를 막 건너려던 병사 하나를 더 해치운 엘리사는 크게 외쳤다.
그렇게 외치면서, 엘리사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버틸 만한데?’
수적인 열세는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군이 불리한 것만도 아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대륙 최고의 플레이어들이 세 명이나 모여 있지 않은가.
루카스 왕자가 하늘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는 동시에 저 거대한 규모의 신성 마법을 방해하고 있었으며, 알리시아는 용병왕이라는 위명에 걸맞게 전위에 나서서 적군을 훌륭히 교란시키고 있었다.
일리아스가 부리는 언데드 군단 또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고.
덕분에 적군 진영은 아주 혼란스러웠다.
어지간히 무명이 있는 기사라고 해도 저만한 사람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니까.
게다가 성벽을 기어올라야 하는 부담은 저쪽이 져야 하는 몫이다.
위태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저 세 사람이 버티고 있는 한 이 성은 무너트릴 수 없다, 그런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은 엘리사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대로 밤까지 버틴다면 적어도 오늘은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저쪽도 피해가 커. 베른 공작은 몸을 빼려고 할 테니 이대로 며칠만 버티면 철수할 가능성도……!’
엘리사가 문득 그런 희망적인 추측을 했을 때였다.
- 아아아아아아아……!
그러나, 그런 희망은 부질없다고 말하기라도 하듯이.
마치 노랫소리와도 같은, 혹은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전장을 파도처럼 순식간에 덮었다.
툭!
방금 전까지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엘리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떨리는 이유는…….
‘공포……?’
그래, 공포였다.
지독한 공포가 몸을 잠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거 왜 이러지?’
당황해 어떻게든 손에 힘을 넣어 보려고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심지어 손이 하도 떨리는 바람에 활을 놓쳐 바닥에 떨어트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현상은 엘리사 메이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으, 으아아아악!”
“안 돼애애애애!”
전장 모든 곳에서 비명이 터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성벽을 오르려던 적군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고, 해자를 건너던 말들조차 물속에 고개를 처박고 덜덜 떨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그러나, 정상적인 사고를 이어 갈 수 있었던 것도 거기까지.
- 전장에 드리운 ‘죽음의 장막’이 더욱 강해집니다.
시야가 흔들렸다.
엘리사는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환상을 보았다.
그것은, 어떤 여자의 절망을 구체화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피에 젖은 맨발로, 여자는 시체의 산을 뒤로하고 걷고 있었다. 흰 다리는 인간의 악의에 맞서 비틀대고, 두 손은 겨우 한 조각 남은 희망을 소중히 보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뿐.
손의 온기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희망은 눈처럼 녹아 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희망이 눈처럼 녹아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여자는 분노했다.
한때, 이 세상을 위협하는 용을 죽이러 먼 여정을 떠난 성녀.
인간의 선의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악의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며 웃었던 사람이 있었다.
사랑이 있으면 언젠가는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고.
수많은 생명을 위협하던 옵타티오가 권력을 손에 넣은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악의의 총체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성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제가 정점에 올라 바꾸면 됩니다.’
사람을 믿기에 했던, 순진하기 짝이 없던 착각.
그 자리에 오르려 노력하는 동안, 성녀는 가족처럼 생각하던 이들을 모두 잃었다.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이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때까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이미 잃은 것들은 돌이킬 수 없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더욱더 노력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사람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으며, 자신의 욕망을 양보할 수 있고, 선의를 선의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나.
그 후로 수년이, 수십 년이 흐르도록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사람들의 욕망은 괴물을 만들어 내길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은 사람을 미워하길 멈추질 않았다.
그리하여 아리아드네는 드디어 깨달았다.
- 인간의 욕망은 불멸하는 것.
그 절망이,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을 어둠처럼 스며들었다.
-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욕망을 위해 끊임없이 다투고, 시기하고, 서로를 죽일 생명들이여.
그 목소리는 인간을 저주하는 것 같기도, 혹은 가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 결국 상처만이 남을 삶을 지속할 가치란 무엇인가?
대답이 정해져 있는 물음이었으되, 그 음성에 담긴 자비는 진정이었다.
마치 신이 인간을 내려다보듯이.
이대로 어둠에 몸을 맡기면 편해질 것이다.
목숨을 빼앗고 빼앗기는 전장은 괴롭다.
아니, 실은 인간의 삶이 이미 전쟁이다.
운이 없는 자들은 그저 하루를 살아남는 것에 바빠 천박해지고, 그저 운이 좋아 그들을 짓밟고 올라선 자들은 다시 자신의 위에 선 자를 우러러보며 아래로 침을 뱉는다.
뱉은 모욕이 자신의 얼굴에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 그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져야만 하는 업이라면, 인간을 구원할 수단은 죽음뿐.
그리하여 죽음은 아리아드네가 아직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자비였다.
이 세상에 아직 희망이 남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이다.
언젠가는 이들 또한 자신처럼 결국 절망하게 되리라.
상처 입고, 실망하고, 분노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느니, 어쩌면 이대로…….
“아니!”
페트라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뺨을 철썩 때렸다.
불길 같은 아픔에 눈이 번쩍 떠졌다. 혀를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가에 피가 주르륵 흘렀다.
정신을 차린 페트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야말로 전장은 아비규환이 되어 있었다.
하늘 아래 선 모든 인간은 존엄을 잃고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적도, 아군도 없었다. 모두가 죽음 앞에서는 공평한 것처럼.
엘리사 또한 옆에 쓰러져 어깨를 감싸고 몸을 둥글게 만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페트라는 엘리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엘리사, 메이! 정신 차려!”
그러나 페트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 엘리사는 두 귀를 막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싫어, 싫어……!”
마치 다섯 살 때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제 마음속의 공포를 마주한 거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엘리사를 깨우고 있는 페트라 옆으로 루카스가 내려앉았다.
“정신을 차렸군. 괜찮나, 페트라 경?”
말투는 무뚝뚝했지만 말에 담긴 걱정은 진심이었다.
사실 아직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지만 페트라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대체 이건 뭡니까?”
“신성 마법의 극의. 레벨 80 이하는 이 환상에서 깨어나기 힘들 거야.”
그렇게 말하며 곁으로 다가온 것은 일리아스였다.
“페트라 너는 레벨이 안 되지만 강한 영혼을 지니고 있으니 겨우 깨어난 것 같고. 다른 이들은 이렇게 운이 좋진 않겠지.”
“운이 좋기는 개뿔이!”
성벽 아래에서 누군가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리시아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분노하며 여기저기 기절한 사람들의 뺨을 내리치며 다니고 있었지만, 효과는 별로 없어 보였다.
“적군에 붙었나 싶었는데 이건 더하잖아, 아리아드네! 어디 있어? 나오라고! 나와! 불만이 있으면 직접 이야기해!”
“그렇게 부르짖어도 나오지 않을 거야.”
상황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데도 일리아스는 여전히 냉정했다.
“이 정도의 영향력이라면 아무리 아리아드네 님이라도 어지간한 희생을 치렀을 테니까. 저길 봐.”
일리아스가 손가락으로 성벽 너머, 적군의 본진을 가리켰다.
아마도 적군의 수뇌부가 묵고 있었을 막사 주변에 황금빛의 무언가가 커다랗게 떠올라 있었다.
더불어, 그 주변의 땅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딜 봐도 피가 흥건히 흐른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저쪽을 희생해서 대가를 치른 모양이군. 신성 마법에 제물을 바치면 효과가 극대화되긴 하죠.”
“뭐라고?!”
알리시아가 경악했다.
“그건 진짜 악마나 하는 짓이잖냐! 저게 진짜 미쳤나.”
“……왜 하필 형님의 편을 들었나 했는데, 저런 의도였군. 일리아스, 마법을 완성시키면 어떻게 되지?”
“죽습니다.”
일리아스는 담담히 말했다.
권한 남용으로 망가져 아직 회복되지 않은 손 위로 작은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죽음의 장막’의 완성까지 남은 시간 01:00:00
- 경고! 해당 마법이 완성될 시 현 필드의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메시지를 본 루카스는 시선을 늘어트렸다.
“……결국 이렇게 나오는 건가.”
“아아아아악!”
알리시아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아리아드네에에에에에에!”
그러나, 여전히 그 목소리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페트라는 간절하게 물었다.
“어떻게,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현재로서는 없어.”
그 간절함이 무정하게도, 일리아스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한테는 이만한 신성 마법을 깨트릴 만한 수단이 없으니까.”
“마력을 쏟아부으면…….”
“나와 루카스 님이 한꺼번에 쏟아붓더라도 이만한 규모의 신성 마법을 파훼할 순 없어.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전부야. 기본적인 상성의 문제니까.”
인간은 살아 있는 이상 죽음을 이길 수 없다.
설령 아무리 발버둥 치며 그것을 거역하려고 해도.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섭리였다.
페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까진가?’
이제까지 끊임없이 노력했다. 자신이 개입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비극적인 운명을 바꾸고자 했다.
그렇게 수많은 이들의 운명을 바꿨다.
자신의 운명은 물론이고 알리시아, 일리아스, 심지어 주군 루카스까지도 기어코 이곳에 두 발로 서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족했던가?
세계에 절망한 분노에 맞서기에는 부족했던 것일까?
결국, 바꿀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건 존재하는 걸까…….
“그런 표정 짓지 마렴, 페트라.”
“예?”
절망에 빠지려 한 페트라의 마음을, 일리아스의 다정한 목소리가 이끌었다.
“그래, 벌써 절망할 필요는 없다.”
일생 동안 아버지처럼 따른 주군 또한, 곁에 선 채 명징한 눈동자로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여전히 절망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이만한 죽음이 전장에 드리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한테 방법이 없는 것뿐이지, 다른 사람도 못 한다고는 안 했잖아!”
어린 시절의 페트라를 구한 영웅이, 페트라의 손을 잡고 허공을 바라보도록 했다.
“고개 들어!”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치지지직!
허공에 거대한 스파크가 일었다.
일리아스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왔다.”
허공에, 시커먼 틈새가 열렸다.
그것은 아무리 몬스터가 존재하는 세계라고 하더라도 무척이나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탁!
허공에서 성벽 위로 가볍게 착지한 여자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눈에는 검게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죽음의 장막이 담겼다.
한 세계의 절망을 그대로 구현한 모습, 마치 지옥도처럼 변한 전장.
여자가 혀를 찼다.
“어쩌다 먼저 왔더니…… 이건 뭐, 아주 X됐네.”
검사는, 망설임 없이 검을 빼 들었다.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한 점의 흐림도 없다.
그 모습을 본 일리아스는 웃고야 말았다.
이래서야, 걱정할 필요도 없었군.
일리아스가 아는 한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용사다운 이가 검을 하늘로 향했다.
그리고.
쿠콰콰콰쾅!
마치 저 먼 지평선에 닿기라도 할 것처럼, 길게 뻗은 빛의 검이 전장을 넘어 뻗어 나갔다.
콰콰콰콰!
성검이 하늘을 뒤덮은 죽음의 장막을 가르는 순간, 거대한 굉음이 일었고.
-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용사의 의지가 실현됩니다.
인간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고, 혼자일 뿐인 인간은 무력하기 짝이 없으나.
인간의 용기는 가끔 순리마저 어그러트리며 기적을 이끌어 낸다.
때로는 차원조차 넘어서.
- 전장에 드리운 죽음의 장막이 파훼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필멸하는 인간은 비로소 죽음에 맞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을 위협하던 거대한 신성은 언제 존재했냐는 듯 사라졌다.
남은 것은 푸르른 하늘과 태양빛 아래 당당한 한 검사의 모습이었다.
저 뒷모습을, 알고 있다.
페트라는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도저히, 기도라도 하지 않고서는 바라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신이시여.”
당신이 미처 돌보지 못한 자식이 여기 있나이다.
지금 이 비루한 삶을 바치려 합니다.
페트라의 노랫소리를 들은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페트라의 얼굴을 바라보던 시선은, 곧이어 위로하듯 다정한 미소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입이 다음 소절을 노래했다.
“이 팔은 검을 휘두르기 위해.”
생명력 넘치는 낭랑한 목소리가 죽음의 장막이 걷힌 성안에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엘리사 메이가 죽음의 미혹에서 벗어나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처음으로 본 것은 알리시아의 빛나는 미소였다.
알리시아는 돌아온 가족을 환영하며 크게 소리쳤다.
“이 검은 무고한 목숨을 위해!”
일리아스는 쓰러진 어린 병사를 부축하며 그 목소리에 애정 어린 한숨을 쉬었다.
모두가, 노랫소리에 차례차례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 죽음에서 벗어난 그들의 귀에 이 성의 주인이 부르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목숨은 고결한 희생을 위해.”
성벽 위, 루카스 왕자는 두 다리로 당당히 선 채 전장을 오시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 한번의 패배도 맛보지 않은 것 같은 모습으로 선 그들을 향해 시선이 모였다.
페트라는 눈을 깜박였다.
“아…….”
그러나, 페트라만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숱한 실패를 겪고, 실망하고, 분노하며 패배했는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곳에 도달했다.
이 모습이야말로, 페트라가 영혼을 걸고서라도 보고 싶었던 광경이었다.
모두가 홀린 것처럼, 태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한두 명이 이어 가던 노래는, 어느샌가 성 전체를 울릴 정도로 커져 있었다.
여러 번 반복된 노랫소리의 마지막 마디를 들으며 용사는 웃었다.
“그래, 뭐. 죽음을 거역할 수는 없겠지.”
드리웠던 절망을 벤 용사가 성검을 들고서 두 다리로 지상에 섰다.
“하지만, 이 삶은 온전히 내 거야.”
그리고 지금부터, 그걸 증명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