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301화
이우연이 성벽에 내려앉는 것을 본 나는 어쩐지 약간 미묘한 기분을 맛보았다.
지난 유령성 전투에서도 이우연과 함께이기는 했지만, 그때는 내 친구들이 없었으니까.
도통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이 함께 있는 걸 보니 어쩐지 기묘한 느낌이다. 양태원이 흔히 말하곤 하는 세계관 파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성벽 위에 내려선 이우연은 잠시 나와 함께 있는 친구들을 훑어보았다. 알리시아를 거쳐 일리아스를 훑은 그 시선은 이윽고 루카스에게로 정착했다.
“…….”
“…….”
둘 사이에 원인 모를 이상한 긴장감이 흘렀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는데, 문득 일리아스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알리시아가 묻는 것과 동시였다.
“레나, 저거 혹시……?”
“저건 또 뭐야?”
“사람더러 저거라니.”
이 두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내 언어 생활이 온화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아니, 알리시아야 그렇다 치고 일리아스는 또 왜 저러지.
나는 어쩐 일인지 서로를 노려보다시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루카스와 이우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름은 이우연. 내가 저쪽에서 새로 사귄…….”
무어라고 해야 할지 나는 잠시 망설였다.
예전에 이우연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동료 초과 친구 미만이라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 그 시점은 지난 것 같고.
“친구……?”
그런데 또 딱 잘라 친구라고만 이야기하기에는 애매했다.
그렇다고 친구 이상의, 정확히 어떤 존재냐고 물으면 그것도 애매하다.
가족 같은 관계라기에는 긴장감이 있고, 단순한 친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깝고…… 그렇다고 관계를 더 발전시키기에는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부족한…… 음.
말끝을 흐리는 내 반응을 본 일리아스가 잠깐 눈가를 좁혔다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래…… 뭐, 모르면 모르는 대로 됐나. 내가 참견할 일도 아니고.”
“뭐야, 신경 쓰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끝까지 해. 내가 뭘 모르는데?”
“……레나, 너 지난번에 다른 운명을 걸어간 너 자신을 만났다고 했었지. 그때 별다른 일 없었어? 도플갱어의 경우는 하나가 죽어야 끝나잖아.”
“무슨 일이 없기는 왜 없어, 릴리스 만났다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해?”
“…….”
일리아스가 뜬금없는 질문을 한 후 내게는 제대로 대답도 해 주지 않고 고개를 돌리더니 한숨을 푸욱, 쉬었다.
“너도 참.”
“어? 뭐야, 뭔데?”
그 태도에 내가 황당해 하는데 알리시아가 내 등을 두드렸다.
“야, 야. 힘내라. 딱 봐도 되게 귀찮은 성격일 것 같은데. 루카스랑 싸우면 어떻게 하냐? 그럼 누구 편들 거야? 나한테만 살짝 알려 줘.”
“쟤네한테도 네 목소리 다 들려, 알리시아.”
“내 알 바야? 그래서 누구 편들 거냐고.”
그래, 네 알 바는 아니겠지.
나는 재미있어 죽으려고 하는 알리시아의 볼을 한 번 잡아당긴 후, 서로 빤히 쳐다보고 있는 두 남자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래서 너희 둘은 대체 언제까지 서로 노려보고 있을 건데? 이럴 시간 없어.”
“노려본 거 아닌데?”
“그런 적 없다만.”
둘 모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대답했다.
다행히도 알리시아가 말한 것처럼 싸울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신기해서 서로 빤히 쳐다봤다는 투였다.
그러고 보니 이우연은 유령성 전투 때 루카스에게 빙의했었지. 그러고 보니 정말 성향도 비슷하고, 은근히 죽이 잘 맞을 것도 같다.
저대로 두면 의외로 친해지는 거 아닐까.
“그나저나 이우연, 네가 두 번째야? 조한율, 다른 사람들은?”
지금이야 내가 ‘죽음의 장막’을 파훼한 직후라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지만, 이렇게 비장의 수단이 막힌 이상 저쪽도 무언가 다시 수를 짜내고 있으리라.
그 전에 우리 쪽의 태세를 정비해야 했다.
조한율 : 네에, 이제 나머지도 도착할 거예요!
조한율의 메시지가 돌아오기 무섭게, 허공에 다시 한번 시커먼 틈새가 열렸다.
차원의 틈 사이로 나타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성벽 위로 안착했다.
“오, 오오!”
“원군인가!”
“용사님이 데려온 병사들인가 봐!”
기이한 광경이었지만 다행인지 뭔지 성민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마치 구세주를 대하는 것 같은 눈길이었다.
한국 헌터들도 처음에는 그 열렬한 반응과 익숙하지 않는 풍경에 당황한 듯했지만 환영을 싫어할 사람은 없는 법이다.
“와, 이렇게 환대받을 줄은 몰랐는데.”
“듣던 대로긴 하지만 던전 안에서 진짜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느낌이 이상하네요.”
“어쩐지 뿌듯한데?”
조한율 : 이탈자 없이 모두 도착했어요. 이제 클리어 조건 띄울게요!
해당 던전 클리어 조건 : ‘공략 포기 선언’
곧이어 미리 합의했던 대로 클리어 조건이 생성되었다.
이번 던전은 자연스럽게 생성된 던전이 아니라 일리아스와 조한율이 합작해서 만든 던전인 데다, 한국 헌터들은 어디까지나 이쪽 전쟁에 호의로 도와주는 것뿐.
이 클리어 조건은 혹시라도 목숨을 잃는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도록 해 놓은 안전 조치였다.
나는 한국 헌터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언제고 포기하고 나가셔도 상관없습니다. 본인의 목숨은 본인이 챙겨야 한다는 점 기억하시고요.”
“포기 선언은 개뿔이! 내가 진짜 이번에야말로 진언 마법 각성한다!”
물론, 지금 저렇게 호기롭게 외치는 류세연처럼 개인적인 목표가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알리시아가 도착한 한국의 헌터들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인원이 많네.”
“그래봤자 50명밖에 안 돼.”
“그게 아니라…… 다행이다.”
“응?”
뜬금없는 말에 알리시아를 쳐다보니 알리시아가 씩 웃었다.
“혹시나 네가 원래 세계에 돌아가고 나서 혼자 외롭게 지내는 게 아닐까, 했거든.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러 온 걸 보면 저쪽에서도 잘 지낸 것 같아서.”
무척이나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약간 울컥하는 것을 누르면서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처음에는 그랬어.”
외로운 정도가 아니라, 타르토스를 구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만큼 애초에 한국에는 정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떠날 세계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고 구해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조한율 : 이제 저는 모니터링 시작할게요! 파이팅!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다시 보니 나름대로 반갑기는 하네요. 아, 그때 제가 빙의했던 간수장도 여기 어디 있으려나? 한번 보고 싶은데.”
“간수장에 빙의를 했다고? 비슷한 성향에 빙의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뭐어, 대학원도 어떤 의미로…….”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감회 서린 눈으로 성을 둘러보는 이선 헌터와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김숙자 교수님.
“와, 얽히고설킨 인연들이 너무 복잡해서 눈이 피곤해요. 용사란 인기 많은 직업이구나.”
처음으로 온 주제에 마치 익숙한 장소에 오기라도 한 듯 적응한 양태원. 내가 지켜보고 있는 사이 척척 걸어가 아직 어리둥절해 있는 페트라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예나 누나 동생이에요. 우리 비슷한 인연인 것 같은데 잘 지내 봐요.”
“예? 아, 예…….”
떨떠름한 얼굴의 페트라 손을 마구 흔드는 양태원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정소현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래.
처음에는 대체 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 건지 운명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우리 이야기는 나중에 할까.”
“그러도록 하지.”
나는 루카스와 무언의 합의에 이른 이우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희는 섭섭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생각보다 잘 지낸 것 같아.”
내 친구들이 긴 시간 나를 찾아 헤맨 걸 생각하면 미안할 정도로.
처음에는 왜 하필 내게 이런 시련이 주어졌나 했지만 한국에서도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졌고, 그 인연들은 나라는 사람이 무너지지 않도록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이제 한국 또한 내가 지켜야 하는 소중한 세계가 된 것이다.
그런 내 말에 섭섭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리시아는 여전히 다정하게 웃었다.
“응, 그러니까. 정말 다행이라고.”
“……그래도 보고 싶었어, 너희들이.”
“그거야 당연하고.”
나와 알리시아는 마주 보고 씩 웃었다.
그러나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도 잠시.
쾅!
- 경고!
- 던전 포화도가 급격히 올라갑니다.
- 곧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납니다.
모두가 갑작스럽게 떠오른 던전 브레이크 메시지에 깜짝 놀랐다.
“던전 브레이크라고?”
“이 근처에 던전이 있었어?!”
“그런 게 있을 리가. 대체 무슨 던전을 말하는 건지…… 일리아스!”
일리아스가 갑자기 허리를 숙였다.
루카스가 황급히 부축하며 쓰러지는 것은 막았지만, 입가에 댄 손에서는 붉은 피가 묻어나왔다.
피를 토한 일리아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세계에서 온 용병들을 잠깐 안정화시키는 동안 당했군. 아리아드네 님이 먼저 움직였어.”
“……대체 뭘 한 건데?”
“고의로 던전 브레이크를 터트린 거야. 곧 몬스터 떼가 성벽을 덮칠 거다.”
조한율도 같은 의견이었다.
조한율 : 하하하. 운영자 선배님, 진짜 너무하시네. 다짜고짜 우리 서버에 바이러스 투하하던 성깔 어디 안 가네요! 플레이어 근접 10미터 안에서 던전 터트리는 건 진짜 개매너인데.
“…….”
나는 침묵했고, 알리시아는 열이 받아 바스타드 소드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야, 이게 말이 돼? 아리아드네 이걸 진짜……!”
알리시아만이 아니었다.
시스템 메시지를 본 성내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한국 헌터들마저도 웅성대고 있었다.
“갑자기 몬스터가 나온다고?”
“이게 무슨 일이래?”
다들 멘탈이 나갈 만도 했다.
처음에는 그저 다른 세계의 전쟁에 참여한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던전 브레이크까지 터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루카스도 코끝을 찡그렸다.
“잠깐, 성벽 근처에서 몬스터가 나온다면…… 우리야 성벽 안에서 버틴다고 쳐도 지금 저기에 있는 적군들은? 미끼로 버리기라도 한다는 건가?”
“그렇겠죠. 애초에 죽음의 장막을 펼친 시점에서 죽일 생각이었을 겁니다.”
루카스는 성벽 너머로 이제야 겨우 죽음의 장막 효과에서 벗어나 몸을 추스르고 있는 적의 병사들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성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을 그들은, 한 번 신성 마법 범위 안에 들어갔던 탓에 지금은 완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성을 공격할 생각은커녕 제 몸 하나 추스르기에도 바쁜 것이 차라리 패잔병에 가까웠다.
아마 저 상태에서 몬스터에게 습격을 받게 되면 그대로 사냥감이 될 것이다.
“……루카스 님, 지금은 남을 동정할 때가 아닙니다. 저들은 적입니다.”
“안다.”
“모르는 것 같은데?”
“안다고.”
“다들 루카스만 다그칠 건 아니잖아.”
나는 일리아스와 알리시아를 말리며 패잔병이 된 적군 너머, 죽음의 장막의 효과를 받지 않은 병사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저 멀찍이 서서 여전히 흉흉한 기세로 이쪽을 관망하고 있었다.
- 던전 브레이크까지 00:05:00
“강예나 헌터, 이거 이상해!”
그리고 내게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류세연이었다.
“무슨 일이지?”
“대규모 실드부터 준비하려고 했는데 마력의 흐름이 완전히 막혀 있어요.”
류세연의 뒤를 따라온 이선 헌터가 추가로 설명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류세연 주위로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마법이라는 형태를 띠려다가 풀썩 주저앉아 버리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교수님이 마력의 흐름을 잡아도 안 됩니까?”
“못 잡을 건 아니지만, 시간이 좀 걸리겠군.”
막 각성한 상태로도 타인의 마력을 다룰 정도였던 김숙자 교수마저 저러면 정말로 답이 없다.
“왜 이러는 거지?”
그 질문에는 일리아스가 답했다.
“지금 필드에 레벨 제한이 걸렸어.”
“뭐?”
하지만 확인해 보니 정말 그 말대로였다.
- 경고!
- 레벨 40 이하 플레이어들의 마력 사용에 일부 제한이 걸립니다.
- 심각한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신속한 조치를 권고합니다.
조한율 : 우와아…… 이거 백퍼 손 하나는 날려먹었을 듯요. 그냥 제한이 아니고 오류를 일으킨 거라.
“이게 뭐야?! 말이 돼? 마법을 못 쓰게 하는 던전이 어디에 있어! 저렙은 뒈지라는 거야, 뭐야!”
“애초에 40렙 이하는 저렙이라고 할 수도 없잖아.”
류세연이 펄펄 뛰고, 김하현이 침착하게 지적했지만 아무리 날뛰어 봤자 현실이 변하지는 않았다.
김숙자 교수가 조용히 혀를 찼다
“마치 마법사들이 지원 올 거라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나오는군. 이래서야 일반 마법이라면 모를까 진언 마법은커녕 광범위 공격도 무리겠어.”
과연이라고 해야 할까, 김숙자 교수가 예리한 말을 뱉었다.
루카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수가 많은 적군을 상대하려고 광범위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법사들을 데려왔더니 레벨 제한으로 마법 사용을 막고, 인간을 상대로 수성전을 준비했더니 몬스터들을 내보내고. 이쪽의 수가 모두 읽힌 셈이야.”
알리시아도 끼어들었다.
“그리고 설령 용을 써서 몬스터를 다 처치한들, 지친 우리를 향해 남은 군사들을 진격시키면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할 거고.”
“이런 상황은…… 저도 겪어 본 적 없습니다.”
페트라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야 그렇겠지.”
물론 페트라 또한 이 전쟁을 두 번째 겪고 있는 만큼 어느 정도 유리한 면이 있겠지만…….
“이 전장을 가장 많이 겪어 본 건 아리아드네일 테니까.”
나는 전장 너머, 어디선가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아리아드네를 생각했다.
‘운명의 씨앗’을 손에 넣은 후 계속해서 의문이었던 점이 있었다.
당시에는 타르토스가 배경인 줄 몰랐던 유령성의 전투.
그때 나는 그것이 그저 역할극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 백록담 전투도, 알리시아를 만났던 숲속에서도 내가 행한 일은 그 후의 미래에 분명히 영향을 주었고, 흐름을 바꾸었다.
그건 분명한 현실이었다.
그런데 유령성에서의 전투는 달랐다.
당시 내가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그건 홀로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수도 없이 곱씹었을, 자신이 없던 과거를 가장 후회하고 있었던 아리아드네의 악몽이었던 것이다.
“내가 막을 수만 있었다면.”
그렇게 생각했기에 나타난, 어떤 이의 회한이 어린 악몽이야말로 그 던전의 정체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리아드네는 내가, 우리가 어떻게 싸울지도 알고 있었다.
“지난번 유령성 전투에서 우리는 이선 헌터의 진언 마법을 써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지.”
이선 헌터의 진언은 대범위 마법 중에서도 특이한 편이다.
마법으로 대홍수를 일으킬 수 있어 대군을 상대로 하기에 딱 좋은 마법이지만, 한국 헌터들의 레벨이 아직은 낮은 편인 만큼 레벨 자체에 제한을 걸어 버리면 손발이 묶이는 셈이다.
이렇게 한 수, 앞섰고.
“그다음으로는 내가 황제를 암살함으로써 쐐기를 박았는데…… 이것도 아리아드네가 곁에서 지키고 있다면 불가능하지.”
그러니까 아리아드네는, 이 전투에서 ‘이기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 승리가 그 애한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합니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동안, 던전 브레이크가 터진 것이다.
쿠와아아아앙!
심지어는 일반적인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처럼 브레이크가 발생한 중앙에서부터 몬스터가 밀려나오는 것이 아니라, 산발적인 틈새에서 몬스터가 몰려나오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던전이 터져 밀려나오기 시작한 몬스터들과 적군을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전군! 후퇴해라!”
“퇴각! 퇴각이다!”
저쪽에서도 갑작스럽게 터진 몬스터들을 알아차렸는지 북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도, 도망쳐!”
다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성벽 근처의 적군들은 후퇴할 겨를도 없이, 튀어나온 몬스터들에게 찢겨 죽어 갔다.
콰득!
크르르르르륵!
그리고 이쪽도 만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몬스터쯤 되면 사다리 없이는 벽을 오르지 못하는 인간들과는 차원이 다르니까.
짐승형 몬스터들이 성벽에 발톱을 박으며 훌쩍훌쩍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인간을 상대로 수성전을 하고 있었으니만큼 몬스터 대책은 되어 있지 않다는 약점을 정확히 찔린 것이다.
“에이 X,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물어뜯어야지!”
피핏!
류세연이 어떻게든 허공에서 만든 작은 불화살을 쏘아 내며, 성 위로 기어오르려는 몬스터들을 향해 이를 갈았다.
물론 기세에 비해 만들어진 불화살은 상당히 초라했다.
“자네는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그리고 김성연을 비롯한 검사들은 다른 기사들과 함께 합류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성벽을 지키는 건 우리 검사들한테 맡기고 어떻게든 마력 정체 현상을 해결해 보게!”
“그렇게 말처럼 쉬우면 벌써 했다고요, 이 꼰……!”
“저 녀석 뭐야? 나랑 성격 되게 비슷하다!”
그렇게 말하며 알리시아가, 막 벽을 타고 뛰어넘어 안으로 쳐들어오려고 했던 호랑이 형태의 마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뻐억!
막 대가리를 벌리고 알리시아를 집어삼키려던 호랑이의 흰 주둥이가 완전히 박살이 났다.
사방으로 흩어진 살점에 류세연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여기 대체 뭐야? 고렙 파티?”
“그래서, 레나!”
알리시아가 성벽을 기어오르려는 다른 몬스터를 발로 차며 내게 외쳤다.
“그럼 어쩌지?!”
“어쩌기는.”
따로 작전 회의를 할 여유도 없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알아서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레벨 제한에서 벗어난 루카스, 그리고 이우연은 날개를 펼쳐 날아다니며 광범위 마법을 이용해 수성 중이었고, 김숙자 교수와 이선 헌터는 끙끙대며 진언 마법을 시도하고 있었다.
나머지 마법사가 아닌 헌터들은 진작 병사들과 협력해 성벽을 넘어오는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있었고.
‘나와 알리시아가 없어도 잠깐은 어떻게든 되겠군.’
상황을 대충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의 친구를 악몽에서 깨워 주러 가 볼까.”
아리아드네, 너야 항상 내 앞을 걸었지. 두 수쯤 앞서는 건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네 뒤만 졸졸 따라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된 것, 그걸 철저히 이용해 줄 생각이었다.
“알리시아, 따라와!”
“어? 알았어!”
나는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요, 용사님!”
“예나 누나!”
다른 사람들의 비명이 들린 것도 같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쿵!
바닥에 착지하며 겸사겸사 몬스터 한 마리의 대가리를 짓밟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몬스터 천지가 된 성벽 아래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풍경이었다.
몬스터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입에서 나오는 악취,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들의 열기.
그리고.
콰득!
나는 나를 사냥감으로 인식하고 달려들던 몬스터의 팔 한 쪽을 맨손으로 잡아 뜯었다.
후두둑!
뜨거운 피가 주위로 쏟아지며 흥분한 몬스터들이 시선을 돌렸다.
쿠쿵!
나를 따라 성벽에서 뛰어내린 알리시아가 금세 내 뒤로 안착했다.
“레나, 뭐 하는 거야?”
“야, 알리시아. 예전에 무슨 후작령에서 했던 짓 기억나냐?”
“어엉?”
갑작스러운 추억 탐방에 알리시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 아무래도 기억력이 더 나빠진 모양이다.
“왜, 우리한테 몬스터 처치 의뢰 맡겼다가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으니까 미끼로 쓰이고 버려졌을 때. 시원하게 복수해 줬었잖아.”
“그런 경우가 너무 많아서 기억이 안 나는데, 뭘 하자는 건지는 알겠다! 그런데 우리 둘로 충분할까?”
“아니, 몬스터가 너무 많으니 두 명은 더 필요하지. 이우연!”
“응? 나?”
날개를 펼친 채 성벽 위로 올라오는 몬스터들을 던지고 있던 이우연이 용케도 내 목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휙 날아왔다.
나는 이우연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백사현 좀 찾아와!”
설령 레벨 제한을 받고 있다고 한들 클래스의 특성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건 영혼 깊숙한 곳에서 발화한 특성이니까.
제아무리 시스템이니 죽음이니 한들 그것을 없앨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
“백사현 들고 적군 한복판까지 쳐들어간다.”
일산 호수 공원에서 피로했던, 최고의 배우가 다시 한번 활약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