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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302화 (303/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302화

“야, 이우연 이 새끼야아아아악!”

성벽 위에서 몬스터를 상대하다 말고 독수리가 잡아챈 먹이처럼 달랑달랑 들려 날아가면서 백사현은 비명을 질렀다.

“너 진짜 이 개새끼가!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욕할 시간에 집중해. 그래야 한 마리라도 덜 흘리지.”

“지금 이게 집중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보이냐아아아!”

두 다리가 지탱할 곳도 없이 허공에 달랑달랑 들려 있는데 집중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백사현은 한 번 발밑을 내려다보았다가 눈을 꾹 감았다.

‘이, 이 진짜 미친 자식!’

보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리는 높이었다. 아무리 날개라는 스킬인지 아이템인지가 있다고 해도 이건 정상이 아니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육상 생물이란 말이다!

심지어는 그냥 높은 것만도 문제가 아니었다.

크르르릉!

거대한 마수가 허공에서 달랑대는 백사현의 다리를 움켜잡으려고 뛰어올랐다가 아슬아슬하게 실패했다.

- 스킬, ‘메소드 연기’를 사용합니다.

- 배역을 ‘먹이(LV.10)로 지정합니다.

“X발, 진짜!”

어그로를 끌기에 딱 좋은 스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먹잇감으로 이용할 줄이야.

그것도 그냥 수십 마리 수준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눈이 뒤집혀 달려들 판국에 이우연이 백사현을 매달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통에, 지금 이쪽을 보며 달려들 태세가 만만인 몬스터들의 수는 거의 수백, 수천 마리에 달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난 일산 호수 공원 때처럼 고블린 정도의 시시한 몬스터가 아니라, 딱 봐도 A급에서 B은 되어 보이는 흉흉한 몬스터들이다.

그 몬스터들이 전부 백사현을 보고 달려들고 있는데, 심지어 이우연에게 달랑달랑 들려 있는 상태이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만…….

콰콰쾅!

“으하하하하하! 이거 오랜만인데!”

‘저건 진짜 뭐야?!’

한쪽 팔이 몬스터인 은발의 여자가 달려드는 마수를 맨손으로 잡고 살가죽을 찢어 반으로 토막 내 버리는 것을 보면서 백사현은 기함했다.

그야 레벨이 무지하게 높은 건 알겠지만 저건 그냥 레벨만 높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저렇게 막무가내란 말인가.

“알리시아, 벌써부터 날뛰지 마. 체력 보존해야지.”

서걱!

게다가 미친 황소처럼 날뛰는 여자 옆에서 평온한 얼굴로 한꺼번에 세 마리의 몬스터를 베어 넘기는 강예나도 그랬다.

강예나가 얼마나 강한지는 이미 몇 번이고 목도한 바가 있기는 했지만, 지금의 기세는 더욱 무시무시했다.

본래도 살벌했던 기세가 더욱 날카로워졌다고 해야 할까.

“어그로를 끌어야 하는데 몬스터를 겁먹게 하면 어떡해, 강예나!”

그리고 그런 강예나 상대로 허공을 날아다니며 멀쩡한 얼굴로 충고하는 이우연도 정상은 아니었다.

콰콰쾅!

심지어 그 와중에 검기를 날려 성벽에 매달려 있는 몬스터들을 유연하게 상대하기까지.

‘뭐 하나 멀쩡한 놈이 없어!’

그 사이에 얼떨결에 끼게 된 백사현은 눈물을 삼켰다.

그래도 이제 대한민국 랭킹 20대 후반에 진입한 데다, 그간 ‘용사’ 클래스를 연기할 수 있게 된 덕분에 레벨도 그럭저럭 올라서 자신감이 붙은 참이었는데, 이런 괴물 같은 세 사람 사이에 끼니 그냥 부스러기가 된 기분이었다.

물론 그 강예나가 직접 공략원을 모집한 만큼 만만한 던전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백사현 나름대로 각오도 하고 온 던전이었다.

어차피 ‘용사’ 배역 또한 이해도를 높여야 했으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설마…… 이렇게 허공을 날아다니며 몬스터들의 주의를 끄는 어그로용으로 사용될 줄이야!

백사현이 허공에 매달린 채 우울해하는 동안 강예나와 알리시아라고 불린 여자가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이 들렸다.

“이제 슬슬 됐나?”

“그래, 3분지 2 정도는 모은 것 같은데. 나머지는 성 쪽에서도 처리할 수 있겠지.”

“그럼 됐어. 가자!”

쾅!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강예나와 알리시아가 땅을 박찼다.

“성질 급하긴.”

이우연 또한 날개를 퍼덕이며 비스듬히 활강했다.

순식간에 지면이 가까워지며 백사현은 다리를 버둥댔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신호하고 움직이랬…… 어, 어……?”

이제 적당히 어그로도 끌었으니 된 건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뭔가 흐름이 이상했다.

몬스터들의 주의를 돌린 만큼 이제 다시 성안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세 사람이 향하는 방향은…….

“적군 쪽이잖아?!”

그리고 그렇게 깨달은 동시에 백사현은 겨우 이 상황을 이해했다.

지금 그들은 몬스터를 데리고 적군들에게 향하려는 것이다!

쿠다다당!

세 사람이 잔뜩 어그로를 끈 덕분에, 이 셋을 자신의 ‘사냥감’으로 인식한 몬스터 무리가 성벽을 떠나 그들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달리는 통에 땅울림이 대단했다.

“야, 이우연. 미쳤어?!”

백사현은 여전히 허공에 매달린 채 비명을 질렀다.

지금의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너희들 지금 이대로 몬스터 끌고 적군에 들이박으려고 하는 거지!”

경기를 일으키는 백사현과는 달리 이우연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 상황 파악이 늦네.”

“이 상황을 이해하는 게 미친놈 아니냐?!”

그래, 백보 양보해서 강예나는 백사현의 배우라는 클래스를 알고 있으니 어그로를 끄는 데 써먹는 것까진 이해한다.

게다가 마수 형태의 몬스터들은 성벽이 아무리 높아도 훌쩍 뛰어넘어 버리니, 그런 몬스터들을 성벽 아래에 잡아 두려고 이렇게 시선을 끄는 것도…… 뭐, 과격하지만 성을 방어하는 한 가지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예 몬스터들을 끌고 적군으로 돌진한다고?

족히 수만 명은 되어 보이는 병사들을 상대로 정면에서?

“이거 그냥 자살행위잖아!”

그 비명을 들었는지 강예나가 흘끗 백사현을 바라보았다.

“SS급 몬스터 상대로 나서는 것보단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그건 그때고!”

지금 생각해도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아무리 봐도 직접 몬스터를 이끌고, 그것도 적군을 향해 돌진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정신 상태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백사현이 허공에 매달린 채로 밑을 보니 성벽 위로 기어오르려던 몬스터 중, 강예나의 말대로 삼분의 이 정도는 이쪽을 따라오고 있는 듯했다.

강예나와 알리시아가 직접 몸으로 뛰며 어그로를 끈 데다, 이우연이 백사현을 들고 플라잉 낚시를 한 덕이었다.

두두두두!

몬스터들이 눈이 벌게져서 달려오는 모습에서는 아무리 단련된 헌터라도 심장이 떨어질 법한 살기가 느껴졌다.

“저것들은 뭐야!”

“화살을 쏴라! 몬스터들이 이쪽으로 오지 못하게 해!”

그리고, 시야를 가릴 엄폐물도 없는 널따란 평원에서 몬스터 수백 마리를 끌고 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 어, 어떡해! 이대로 진짜 들이박는 거야?”

“여기서 물러설 수도 없지 않나?”

“그건 그런데에에에!”

뒤에는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앞에는 수만 명의 병사가 있다.

이건 어느 쪽으로 가도 죽음뿐이지 않은가.

“무슨 아이템이라도 있는 거야? 공간 이동이라든가!”

“내가 공간 이동이 가능한 진언을 쓸 수 있긴 하지만, 저쪽으로 다가갈수록 성력이 짙어져서 제대로 쓰기에는 무리야. 아직 레벨도 낮고.”

“그럼 안 되잖아! 어쩔 건데!”

아무리 강예나가 강하다고 해도, 저 괴물 팔을 단 은발의 여자가 있다고 해도 결국 단 세 명만으로 저 대군을 뚫을 수는 없다.

이우연이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글쎄, 나도 강예나가 무슨 생각인지 도통 모르겠다.”

“야, 아무 계획도 없는데 따라오면 어떡…… 끄아아아악!”

휙!

이우연은 백사현을 데리고 갑작스럽게 날아올랐다.

“쏴라!”

적군의 화살이 빗발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수백 대의 화살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마주 보는 것은 귀한 경험이었다.

물론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허어어억!”

백사현은 숨을 들이켜며 발밑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이우연과, 이우연에게 잡혀 있는 자신은 화살을 피해 날아오르기라도 했지만 직접 발로 땅을 달리는 두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

보통이라면 그대로 화살받이가 되어 버리는 게 정상일 텐데.

강예나가 몸을 한 바퀴 돌리며 하늘 위로 검이 휘둘러졌다.

“흐압!”

팟!

폭풍 같은 거센 바람이 몸을 휘감았고.

예의 그 빛나는 검날이 길어지는 것이 보였다.

순간이나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빛이었다.

콰지직!

그리고 그 빛의 검이 용사를 향했던 화살 수십 대를 한꺼번에 쳐 냈다.

후두둑.

휘두른 검에 힘을 잃은 화살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심지어 그렇게 검을 휘두른 주제에 앞을 향해 달리는 속도는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놀라운 무위였다.

그리고 강예나는 외쳤다.

“도망치는 자는 쫓지 않겠다!”

명백한 경고였다.

그 외침에 많던 병사들 사이에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그건 아마 경악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시스템상으로 레벨을 올려 인간 같지 않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더라도 숫자의 차이는 절대적이다. 홀로 만 명을 상대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지금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

강예나를 향해 화살을 쏜 궁병 하나가 주춤댔다.

시선이 마주친 듯한 착각이 일었기 때문이다.

“주, 죽…….”

죽을 것 같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야 혼자 만 명을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체력에도, 정신력에도 한계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당장 저 검을 휘두르면 가장 앞에 선 자신은 죽는다.

그런 두려움이 엄습했던 것이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적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듯한 착각!

“더, 더 쏴라! 멈추지 마라!”

“한 대라도 맞히란 말이다!”

병사들을 통솔하는 기사들이 소리를 질렀으나 한 번 두려움에 물든 분위기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래, 빨리 도망치는 게 좋을 거다!”

콰쾅!

“우와아아아악!”

“이게 뭐야!”

무슨 포탄처럼 은발의 여자가 집채만 한 마수 한 마리를 적군 측으로 던졌다.

땅에 떨어진 마수의 시체가 흙바닥을 구르며 불길한 분위기를 한층 더했다.

“이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꺼져!”

그리고 하늘에서 그 분위기를 민감하게 알아차린 백사현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짜, 진짜로 미친 거야!’

이건 말도 안 된다.

겨우 둘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아무리 개인의 무력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수만 명의 병사들 상대로는 결코 위협이 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건 적군들 또한 머리로는 분명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쏴, 쏘라고!”

“물러서지 마라! 적은 겨우 두 명, 몬스터도 겁먹을 것 없는 숫자다!”

지금도 그들은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몬스터와 강예나를 향해 마구 화살을 쏘아 대고 있었다.

그럼에도 맨앞에 서 있는 병사들의 눈은 긴장에 물들어 있었다.

어딜 봐도 저쪽이 유리한 다수인데, 겨우 두 사람에게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그, 그래도 이건 안 돼.”

백사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적군과 몬스터들을 싸우게 한다는 전략 자체는…… 어쩔 수 없다고 치자.

하지만 이 상태로는 강예나와 저 알리시아라는 여자의 목숨은 위험할 것이다.

심지어 적군 측으로 다가갈수록 성력이 강해져 마법을 쓸 수도 없는 상태라는 것은 이우연도 인정한 이야기가 아닌가.

사실상 쓰고 버려지는 미끼 역할이나 마찬가지였다.

샌드위치처럼 앞에는 병사들에게, 뒤로는 몬스터에게 치여 죽을 일밖에 없다, 이거다.

“왜, 왜 이렇게까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성에 있는 사람들이 위험하니까.”

백사현을 들고 있는 이우연이, 앞서 달려 나가는 두 사람을 보며 한숨처럼 말했다.

“원래 저런 사람이야.”

그 말에 백사현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까 성벽 위에서 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미끼 역할을 자처했다, 이건가?

“대체, 어떻게 저렇게…….”

오래된 열등감이, 이미 아물었다고 생각한 상처를 헤집으며 피를 흘리는 것이 느껴졌다.

겨우, 그런 이유로 목숨을 걸었다고?

‘굳이 본인이 나서지 않아도 되잖아.’

그래 봤자 겨우 미끼 역할 아닌가.

역할에 비해 강예나는 아군에서 비중이 큰 사람이었다. 강한 것도 강한 것이었지만 만약 강예나가 죽기라도 한다면 사기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미끼로 쓴다면 차라리 다른 사람들을 써먹는 것이 효율이 좋았을 텐데…….

“아무 대가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당장에라도 타인 따위는 내팽개칠 거면서.”

“악마보다 못한, 위선자라고 한단다.”

악마의 속삭임이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방금 전 보았던 강예나의 무위가 선연하게 떠올랐다.

그 강함이 미치게 부러웠다.

왜 나는 저렇게 되지 못할까.

왜, 나는, 어째서.

- 메소드 스킬을 사용합니다.

백사현은 애써 두려움을 떨쳐 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고, 저렇게 타고난 재능은 없고, 악마의 말대로 손익이나 따져 대는 위선자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노력 정도는 해 볼 수 있잖아. 아직 끝난 거 아니라고!’

이전에 백사현은 단 한순간이나마 용사를 연기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저 순간이 아니라 좀 더 오랫동안 연기한다면.

타고난 본질은 그렇지 않더라도 저 등을 쫓으며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저 발끝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연기가 본질이 되어 정말로 저런 인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용사 클래스 이해도가 올라갑니다.

백사현의 마음속에, 다시 한번 의지가 피어올랐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나, 참.”

그리고 백사현의 기색이 바뀐 것을 알아차린 이우연은 허탈하게 웃었다.

“진짜 변하질 않네.”

그 강렬한 눈빛이 누구의 등을 쫓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앞을 달리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목표가 되고, 누군가를 근본부터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세상 전체를 바꿀 만한 강함이 분명하다고, 이우연은 믿고 있었다.

그야말로 두 번의 생을 통틀어.

* * *

- 레벨 40 이하 플레이어들의 마력 사용에 일부 제한이 걸립니다.

- 심각한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신속한 조치를 권고합니다.

“이 마력 제한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겠는걸!”

이선이 성벽을 기어 올라오는 몬스터의 대가리를 발로 까며 외쳤다.

마법사이지만 평소 근력 수치를 올리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걸 누가 몰라?! 근데 이 시스템 오류를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 이이이익!”

그리고 계속 픽픽 꺼져 버리는 마력 정체 현상을 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 중인 류세연도 메이스를 들고 빙빙 돌며 몬스터를 후려쳤다.

물론 이쪽은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아서, 몬스터가 약간 눈이 핑핑 도는 정도에 그쳤지만 다행히 옆에 있는 검사들이 금세 처치해 준 덕에 다치지는 않았다.

“5초 후에 터트립니다. 물러서세요!”

콰콰쾅!

현장에서 급조한 폭탄이 터지며 몬스터들을 집어삼켰다.

의외로 이 상황에서 가장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은 김하현을 비롯한 보조계 헌터들이었다.

애초에 마력에 그리 구애받지 않고 임기응변으로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다른 사람들을 보조하던 경험이 많다 보니 이런 상황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김하현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버티긴 힘들어. 이번 던전은 대범위 마법을 쓴다는 전제하에 공략팀을 꾸린 거라서.”

“게다가 대인전이었지. 망할!”

류세연은 자신에겐 너무 무거운 메이스를 바닥에 쿵 떨어트리며 혀를 찼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인간 상대로 싸우는 것보단 그나마 몬스터가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이미 각오하고 들어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같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꼴을 보니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이렇게 보면 시스템도 참, 뭐 이딴 X같은 게 있는지.”

“글쎄요.”

그렇게 대답한 것은 양태원이었다.

“시스템이 문제일까요?”

“뭐라고?”

“애초에 시스템이라는 건 뭘까요.”

“……이 꼬맹이 한 대만 때려도 돼?”

“아서라, 예나 씨 달려온다.”

상황에 맞지 않는 선문답이었으나, 그렇게 말한 양태원의 시선은 진지했다.

양태원은 성벽 너머 전장을 바라보았다.

몬스터의 살기와 인간의 욕망이 뒤섞인 전장은 한눈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로 얽히고설키어 있었다.

숱한 인연의 실들이 이어지고, 그리고 끊기고.

삶은 이어지지 않았고, 죽음이 닥쳐오는 현장에서 다들 살아남으려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전장의 중심에, 몰라볼 수 없는 영혼이 하나.

그 찬란한 빛은 망설임 없이 적군에게로 돌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양태원은 생각했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건, 변화시키는 건 결국 사람이죠.”

시스템이라는 것은 그저 거창한 이름이자 이해하기 쉽게 만든, 어떤 거대한 힘의 형태다.

결국 그 시스템을 통해 힘을 발휘하는 것도 사람이고,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결정하는 것도 사람이고, 시스템의 오류를 일으킨 것 또한 결국은 사람이다.

양태원의 눈이 유리알처럼 빛났다.

그의 귀에는 다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가 좀 더 노력했더라면.

-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그래, 이것은 귀곡성이었다.

희망을 걸었으나 그것을 철저히 배신당한 인간이 내지르는 울음이다.

하나의 세상을 집어삼킬 정도의 후회와 원념이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힘을 왜곡시키고 방향을 결정했다.

양태원은 그 슬픔과 원망을 깊이 이해했다.

거대한 운명을, 누군가가 죽어야 하는 세상을 원망하는 것은 비단 지금 울부짖고 있는 저 한 사람만의 업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선의가 반드시 돌아오는 삶이라는 것은 없다.

때로는 아무리 베풀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죽어도 보답받지 못하는 마음은 너무도 흔해 비극조차 될 수 없다.

정말이지 인세란 불공평하기 짝이 없다.

그렇기에, 이 전장을 뒤덮은 울음은 세상의 비극을 추모하는 것이리라.

차라리 이런 세상 따위는 없어져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양태원 또한 모르지도 않았다.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백록담 정상에서 어머니는 꼭 싸웠어야만 했나.

그 죽음의 의미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도 과연 이 세상에 지킬 가치라는 것은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양태원은 가만히, 자신의 억울함을 억눌렀다.

“엄마는 예나 누나 같은 사람들이 있으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거겠죠.”

어머니의 마음이, 믿음이 틀렸다고 말하게 둘 수는 없다.

그래서 양태원은 청동검을 꺼내 들었다.

한때 백록담 정상을 지키고 있었던 검이고.

그 백록담 정상에서 양태원의 어머니인 정소현은 세상을 지키고, 얼마 후에 스러졌다.

그리고 지금, 이 청동검은 생명을 베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념을 위로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 모를 누군가였지만 당신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양태원은 깊이 생각했다.

한때는 굳세었을 테지만 결국 꺾여 버린 마음을 가엾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그래도요.”

당신이 꺾였다고 하더라도, 내가 여기서 꺾일 수는 없으니까.

지금 당장은 너무도 억울하고 보답받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각자 모두가 최선을 다한다면,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라고 믿으니까.

적어도 그렇게 믿으며 삶을 완수해 낸 어머니를 위해서, 양태원은 청동검에 마음을, 의지를 불어넣었다.

오색 창연한 빛이 무지개처럼 환하게 빛을 발했다.

양태원의 영안에는 전장의 중심, 인연이 한데 모여 뭉쳐진 곳이 보였다.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원념의 덩어리이자, 시스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체였다.

검은 거미줄처럼 사방에 뻗친 원독은 이 전장을 독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청룡 님, 저기로 데려다주세요!”

태어날 때부터 양태원의 곁을 지켰던 신은 양태원의 간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러했듯이.

- 그래, 그러자꾸나.

“야, 양태원?!”

“어디 가!”

양태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미숙한 무당을 몸에 태운 청룡은 높이, 높이 하늘을 비상했다.

하늘을 날며 양태원은 전장을 지배하는 목소리를 더욱 가까이 느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부(否)의 감정, 그 자체였다.

절규와 원망, 시기심, 절망한 마음과 부유하는 죽음.

자칫 정신을 놓았다간 그대로 끌려갈 것 같은 거대한 원념이었다.

양태원이 순간적으로 그 원독에 질릴 정도로.

“윽!”

양태원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으나 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청룡은 원념의 안을 비행하며 중심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이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 원념을 듣고, 그것을 끊어 내는 것은 무당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정신조차 아득해지는 어둠 속에서.

- 부탁……

그 혼돈 속에서 들려오는 한 줄기의 가녀린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양태원을 이끌었다.

- 제발, 막아 주세…….

어느 순간.

양태원은 눈을 뜨고, 검을 내리쳤다.

그렇게 찬란한 청동검이 얽히고설킨 원념을 끊어 내는 순간.

- 시스템 오류가 수복되었습니다!

전장을 섬세한 거미줄처럼 구속하고 있던 원념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 반동에 피가 울컥 솟았지만, 신체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양태원의 눈이 빛났다.

방금 전 들은 목소리.

“이거 혹시……?”

파아아앗!

다만 더 생각할 틈은 없었다.

적군을 향해 달려가던 한 지점에서 빛의 기둥이 솟았고.

전장을 지배하던 원념이 사라진 사람들 앞에, 해방된 가능성이 글씨로 형태를 바꾸어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 운명의 씨앗이 발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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