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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303화 (304/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303화

서걱!

롱소드에 얕게 가슴이 베인 마수가 괴성을 질렀고.

“밀어내!”

“힘을 팍팍 쓰라고!”

세 사람이 한꺼번에 뭉툭한 창을 들어 중심을 잃은 마수를 성벽 바깥으로 밀어냈다.

그렇게 얼마나 버틴 걸까.

“허억, 허억…….”

김성연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계속해서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성벽 밖으로 밀어내느라 힘이 부쳤던 것이다.

함께 온 길드원들과 미리 짰던 포지션대로 체력을 최대한 보존하며 싸우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높은 등급인지라 그게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마법사들의 마법이 제한되고 있는 것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본래라면 마법사들이 먼저 공격을 해서 어느 정도 정리를 하고, 성벽에 접근하는 나머지들만 상대하면 되는 거였는데…… 그 마법이 제한되니 검사들의 부담이 커진 것이다.

체력 소모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루카스라는 왕자가 부리는 병력들의 수준이 높아 아직까지는 감당할 수 있다는 것.

시스템이 열린 지 수십 년이 되었다더니 기사는 물론이고 일반 병사들에게서도 배울 점이 많았다.

‘이대로라면 힘들긴 해도 5, 6업은 무난하게 하겠군.’

그렇다면 나쁘지 않았다.

어떻게든 발버둥을 쳐 강예나의 발끝이라도 따라잡아야 하는 김성연 입장에서는 더더욱.

얼마 전 강예나가 영원 길드 검사들을 단련시켜 준 덕에 어느 정도의 발판은 다졌다지만, 그래도 나아가야 하는 길은 멀다.

김성연은 성벽 너머로 펼쳐진 광경을 보았다.

‘정말…… 대단하긴 하군.’

저 많은 몬스터들을 끌고 적군에게 들이받은, 자기보다 한참은 어린 여성을 보던 김성연은 솔직하게 감탄하고야 말았다.

처음에는 정체도 불명이고, 실력도 보장되지 않은 만큼 강예나를 수상하게 여겼다.

지금이야 일산 호수 공원 때의 기억도 돌아와 랭킹 1위 자리를 빼앗긴 것이 억울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껏 한국 최고의 길드장이자 검사로서 버텨 온 자존심은 가시처럼 마음을 괴롭혔다.

그렇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대담함과 결단력은 아무나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사람 보는 눈만 좀 키우면 좋으련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강예나가 끼고 도는 그 어린놈까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강예나 때문에 겉으로는 좋게 대하고는 있지만 레비아탄 던전에서 그 꼬맹이에게 당한 굴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강예나의 실력은 이제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양태원까지 인정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실력을 직접 확인한 적도 없고.

심지어 이번 던전에도 굳이 끼워서 데려오지 않았는가.

대체 뭐가 그리도 강예나 마음에 들었길래 그렇게…….

“길드장님, 길드장님!”

“뭐지?”

“저것 좀 보십시오!”

김성연은 길드원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속으로 줄곧 욕하고 있던 양태원이 굉장한 속도로 허공을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저게 뭐야?!”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콰콰콰쾅!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뒤덮고 있던 어둠이 걷혔다.

그리고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 김성연은 눈을 홉떴다.

- 시스템 오류가 수복되었습니다!

“시스템 오류가 수복……?!”

“기, 길드장님. 혹시 이거……!”

“……나, 참.”

김성연은 한탄했다.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스스로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렇게 뻔히 보이는 사실을 끝까지 부정할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았다.

“나도, 은퇴할 때가 됐나…….”

“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시스템 오류가 수복되었다면 빨리 마법사들에게…….”

“어? 어어?”

그때 누군가가 허공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떨어진다!”

“어떡해!”

그 말대로였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허공을 날았던 양태원이, 언제 그랬냐는 듯 무서운 기세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태원아!”

이선이 비명을 질렀다.

급하게 완드를 뻗었지만 방금 전까지 정체되었던 마력의 흐름은 마음만큼 빠르게 따라 주지를 않았다.

‘늦었다!’

그대로 양태원의 몸이 땅으로 추락해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려 했을 때.

휙!

푸른빛의 바람이 일며 양태원을 감쌌다.

이선보다도 훨씬 더 빠른 마법 시전 속도였다.

다행히도 일이 벌어지기 전에 양태원을 감싼 바람은 무사히 성벽까지 운반했다.

기절한 양태원을, 마법의 주인이 부축해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린 몸으로 무리를 했군.”

이선은 숨을 삼켰다.

양태원을 구해 낸 것은, 이 성의 성주였던 것이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미남자는 잠깐 양태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나 싶더니,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이선에게 말을 걸었다.

신분제가 있는 세상이라더니 의외로 공손한 어투였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소모된 것뿐, 휴식을 취하면 일어날 겁니다.”

“괘, 괜찮을까요? 포션이라도…….”

“아뇨, 성력 계열의 힘을 쓰는 것 같은데 이 상황에서 포션은 오히려 독입니다.”

그렇게 대답한 것은 성주 옆에 서 있던 은발의 남자였다.

사자(死者)를 다루는 일리아스의 눈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청룡을 바라보았다.

양태원의 신력이 너무 크게 소모된 탓에 실체를 유지할 수 없었던 청룡은, 마치 자식이라도 바라보듯 걱정스러운 눈길로 양태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기를 전할 수 없는 거대한 몸체가 양태원을 감싸고 똬리를 틀었다.

이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면 걱정할 필요 없겠지.

일리아스는 청룡을 보며 말했다.

“나중에 고맙다고 전해 주십시오.”

“예? 아, 예…….”

자신에게 한 말인 줄로 알아들은 이선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로 태원이가 뭘 한 건가?’

양태원과 친하게 지내고는 했지만 무당 클래스가 워낙 드물다 보니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심지어 돌발 행동이다 보니 설명도 듣지 못했고.

그런데 양태원이 기절하자마자 시스템 오류 수복이 이루어진 걸 보면, 뭘 하긴 한 것 같은데…….

“이선 헌터.”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이선을 불렀다.

김숙자 교수였다.

이선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예?!”

“마력 제한이 풀렸습니다.”

“아, 맞다!”

양태원 때문에 놀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시스템 오류가 수복되었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이선은 이제껏 목줄을 조여 오듯 정체되어 있던 마력의 흐름이 원활하게 굴러가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그리고 시스템 제한이 풀리자마자.

퍼퍼퍼펑!

막 성벽을 타고 올라 병사들을 물어 죽이려던 마수들이 불화살을 맞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병사들과 마수들 사이 안전거리를 확보한 류세연 발치 주위로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지직!

깜짝 놀라 돌아보니 류세연이 무거운 메이스는 바닥에 버린 후 완드를 잡고 있었다.

“드디어!”

퍼퍼퍼펑!

마력이 스파크처럼 튀는 것과 동시에 화려한 불꽃이 성벽 위에서 무작위로 터져 나갔다.

“죽어!”

콰콰콰쾅!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던 한이라도 푸는 것처럼 류세연이 무차별적으로 몬스터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죽어, 죽어, 죽어!”

그리고 다른 마법사들도 류세연처럼 과격하지는 않았으되 곧장 전투에 참여했다.

“이제 뒤로 물러나십시오!”

“마법을 뚫고 나오는 놈들만 상대해 주세요!”

몬스터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꽂히는 마법을 보며 병사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마법이 돌아왔다!”

“살았어, 살았다고!”

이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뭐 다행이긴 한데…….”

“이선 헌터.”

“아, 네, 넵!”

김숙자 교수의 부름에 이선은 금세 의문을 지우고 그쪽을 쳐다보았다.

김숙자 교수는 완드를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법을 쓰지 못한 동안 체력을 많이 소모한 듯싶었다.

“진언 마법의 준비를.”

“아, 네. 그렇지만…….”

이선이 성벽 아래에 우글우글 몰려 있는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강예나가 대부분 데리고 갔다고는 해도 아직 많은 숫자였다. 지금 진언 마법을 사용하면 큰 도움이 되리라.

그렇지만.

‘으으…….’

“흐아아악!”

“사, 살려 줘!”

이선은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게 아까 전처럼 서로 죽이고 죽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이미 도망칠 만한 적들은 모두 도망친 상태였고, 지금 성벽 아래에서 분투하고 있는 병사들은 달랐다.

이미 부상을 입어 도망치지도 못하고 남아 있다가 몬스터에게 둘러싸인 것이다.

게다가 던전을 열어 몬스터를 풀어 버린 것은 그들의 아군이니 배신당하기까지 한 셈이 아닌가.

“지원은 언제 오는 거야!”

그러나 지원이 올 일은 없었다.

지금 강예나가 몬스터를 이끌고 쳐들어간지라 그들의 본진도 정신이 없는 데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황제는 몇 되지 않은 군사들을 구하려고 굳이 지원을 보내기보단 그저 몬스터들이 성안으로 침입하기를 기다렸으리라.

그쪽이 효율적이니까.

소모품처럼 쓰이고 버려진 것을 깨닫고, 몬스터에게 사냥당하고 있는 얼굴에는 절망이 어려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이선이 진언 마법을 쓰게 되면 몬스터건 적군이건 모두 죽게 될 것이다.

‘나는, 사람을 구하고 싶어서 헌터가 된 거지 죽이려고 된 게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던 이선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이렇게 약한 마음먹을 게 아니야.’

이건 전쟁이지 않나. 그것도 이선이 전혀 모르는 세계의.

만일 강예나를 비롯해 한국 헌터들이 오지 않았더라면, 아니, 일이 조금만 틀어졌더라도 저 적군들과 몬스터들에게 당하고 있는 것은 이 성의 주민들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직접 이 눈으로 그 유령성의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선을 그어야 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이들에게는 실례가 될 수 있고…….

“이선이라고 했던가요.”

그때,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의 미남자가 이선을 불렀다.

이선은 잠시 숨을 집어삼켰다.

딱히 잘생긴 외모에 새삼 놀랐다기보다는, 지난 유령성 전투에서 이 성의 성주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떠올렸기 때문이다.

역시 이런 어설픈 동정심 따위는 필요 없겠지.

이선은 마음을 굳게 먹고 성벽 아래에서 분투하는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부터 진언 마법을 쓸 겁니다. 휘말려 드는 아군이 없도록 조심을…….”

“그 진언 마법 말인데.”

루카스가 이선의 말을 중간에 끊고 끼어들었다.

“진언 마법을 시전할 때, ‘인간’은 범위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겠습니까?”

그 뜬금없게까지 들리는 이야기에 이선은 당황했다.

“아니, 대범위 마법이라서 그렇게 세세하게 조정하지는 못해요. 특정한 무언가만 휩쓸리지 않게 할 수는…….”

“아니오.”

하지만 루카스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의 푸른 눈은 방금 전 이선과 마찬가지로 성벽 아래의 군사들에게 꽂혀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을 향해 검을 들이댔던 자들이었지만 그 눈에 살기는 담겨 있지 않았다.

“진언 마법은 마법사의 의지로 세계의 법칙을 거슬러 인간의 뜻을 새로이 세우는 것. 스스로에게 한계를 짓지 마십시오. 이건 선배로서의 충고입니다.”

“……어…….”

그러고 보니, 이 눈앞의 성주는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하게 높은 레벨의 마검사였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은 꼴이다.

시스템 오류로 마법이 제한되었을 때도 혼자 펄펄 날아다니지 않았던가.

“정말 그런 게 가능하다는 말인가요?”

“물론 실패하면 반동을 받을 겁니다. 진언 마법을 시전하다 실패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의 고통이 찾아올 수도 있고요. 그러니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만.”

“…….”

“만일 시도한다면, 제가 옆에서 보조하죠. 진언 마법의 통제에 성공한다면 마법사로서 세 걸음은 나아갈 테니, 시도해서 나쁠 건 없을 겁니다.”

이선은 눈을 깜박였다.

“그, 그래도 되나요?”

루카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불가능한 이야기라면 애초에 꺼내지도 않았을 텐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저 사람들은 방금 전까지 이 성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도와도 되는 걸까.

그 질문에 루카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 전쟁의 죄를 짊어져야 할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루카스는 전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이 치솟았던 빛의 기둥은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용사가 전장 한복판을 가르는 모습은 이 눈에 선연했다.

이 세계의 운명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아니, 생겼다.

그렇다면, 과거의 절망과 미움을 기억하는 대신 그 희망을 나누는 것이 자신의 몫이리라.

“이선 헌터의 생각이 그렇다면, 나도 찬성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숙자 교수가 완드에 기대던 몸을 꼿꼿이 세웠다.

“교, 교수님! 그렇지만 이게 가능할 리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그걸 왜 네가 미리 정하지?”

예전 대학원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교수의 단호한 말투에 대학원 휴학생이 입을 다물었다.

“그, 교수님…… 으으…….”

“말끝 희미하게 하지 말고. 심지어 고레벨의마법사가 직접 시전을 도와준다는데 오히려 좋은 기회 아니겠니. 드문 기회니, 이 기회에 제대로 공부하는 게 좋겠지.”

“……이 분위기 뭔가 익숙한데요. 혹시 여기 연구실인가요?”

“연구실은 아니다만.”

김숙자 교수의 엄격한 눈동자에 문득 웃음이 감돌았다.

“중요한 건 이게 선이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거겠지.”

그것은 제자를 기특해하는 스승의 눈이었다. 처음에는 왜 곧장 진언 마법을 시전하지 않나 의문이었는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납득이 되었다.

“내 생각이 짧았다. 그래, 우리는 사람을 죽이러 여기에 온 건 아니니까.”

“……교수님…… 그건 그렇지만 혹시 실패하기라도 하면…….”

진언 마법은 마력이 대량으로 소모되는 마법이니만큼, 괜히 변형을 시키려다 실패하기라도 하면 이선 본인도 본인이지만 주변에 끼치는 피해도 막대했다.

이선은 그게 걱정이었다. 괜히 좋은 일 하겠답시고 한국 헌터들을 위험에 빠트리기라도 하면…….

“야, 고렙이 버스 태워 주겠다는데 하니, 마니 무슨 팔자 좋은 소리를 하고 있어!”

몬스터를 향해 미친 듯이 공격을 하고 있던 류세연이 용케도 주워들었는지 이선을 향해 호통을 쳤다.

“어차피 여긴 한국도 아닌데 건물 좀 부숴도 시말서 안 쓰잖아! 실패해도 좀 아픈 것 빼고 손해 볼 것도 없는데 눈 딱 감고 질러!”

“아니, 누가 휘말려서 다치면 어떡하냐니까…….”

“산재 처리! 보험 청구!”

“…….”

별로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만, 결국 이선은 완드를 들고 호흡을 골랐다.

‘그래, 실패해 봤자 죽을 만큼 아픈 거지, 죽는 것도 아니잖아. 시말서도 안 쓰고, 교수님이 있으니 최소한의 방어 장치는 있는 거고.’

하지만, 성공하면 사람을 살릴 수 있다.

그것만 생각하자.

진언 마법은 마법사의 가장 간절한 염원을 세계에 드러내는 것.

마력이 이선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입에서 소원이 주문의 형태로 빠져나가 마력을 형태로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내가 선 곳이 곧 내 삶의 영역임을 선포하니.”

마력에 감응한 세계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러나, 이선은 다음 문장을 내뱉는 것을 망설였다.

내 삶의 영역을 침범하는 자를 벌하는 것.

그것이 본래 이선이 쓰던 진언 마법의 주문이었다.

한국에서 각성한 후, 몬스터들이라는 새로운 위협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을 구하려다 깨달았던 이선의 비원이다.

그렇다면 본래 쓰던 주문은 이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

제대로 통제할 수 없어진 마법이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닐까.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가.

나는 지금 제대로 선을 긋고 있는 걸까.

그런 두려움이 일순간, 이선 주위에 모이던 거대한 마력을 흐트러트렸으나…….

“때에 따라 주문을 바꾸어 형태를 변형시키는 방법도 나쁘지 않습니다.”

지금 이선 곁에는 그 길을 한참 먼저 걸어간, 다른 세계의 선배가 있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으냐, 니까.”

루카스는 자연스럽게 마법사의 진언을 유도했다.

자칫 아직 형태가 되지 못한 마력이 역류해 시전자의 몸에 반동을 줄 법한 순간들을 넘겨 가며.

파지직!

넘쳐흘러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은 마력이 다른 이들을 해치지 않도록 김숙자 교수가 통제하고 있었다.

이선은 어느 순간 자신의 시야가 이 두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음을 느꼈다.

성벽 아래, 절규하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얼굴이 하나하나 보였다.

누군가를 도우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그어 둔 선은 희미해지고, 계산하지 않고 서로에게 손을 뻗는다.

인간은 그렇게 살아남아 왔다.

선을 넘어, 새로운 진언이 떠올랐다.

이선은 입을 열었다.

“살고자 하는 이들을 수호하는 것으로서.”

마력은 곧 형태가 되어 커다란 해일이 되었다.

몬스터들에게 사냥당하고 있던 사람들은 새롭게 나타난 재해에 절망하여 엎드렸다.

하지만 그 폭풍이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일은 없었다.

“우리의 삶을 공고히 하노라.”

쿠구궁!

해일이, 전장을 휩쓸었다.

파도가 내려쳐지는 광경은 마치 폭탄이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굉음을 냈으나, 막상 물이 덮치자 그 후는 그저 정적이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재해가 휩쓴 자리.

몬스터들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휩쓸려 사라졌고.

“어, 어어?”

“맙소사.”

남은 자리에는, 사람들만이 남았다.

이선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쿠르륵, 하고 코에서 코피가 흘렀지만 닦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력보다도 진이 다 빠져서였다.

그런 이선의 등을 김숙자 교수가 두드렸다.

“성공했구나.”

이것을 청출어람이라고 하던가.

아니, 처음부터 자신보다 나은 제자이기는 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아직 상황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조용해진 가운데, 루카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의 승리다.”

북소리보다도 사람들의 가슴을 끓게 하는 목소리였다.

루카스가 선언했다.

“이제 적의 본진을 친다. 성문을 열어라!”

* * *

‘에라이, 젠장.’

류세연은 혀를 찼다.

친구가 자랑스러운 마음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속이 좁은 인간이라 그런지 저걸 보니.

“분합니까?”

그런 류세연에게 말을 건 사람이 있었다.

성주 곁에 서 있었던 은발의 남자였다.

“넌 또 뭔데?”

그리고 류세연은 짜증을 바락 냈다. 자신에 대해 알 리 없는 초면의 남자가 저렇게 아는 척 말하는 게 불쾌했던 것이다.

“참견하지…….”

“진언 마법은 재능의 영역이 아니라, 간절함의 영역입니다. 타인이 먼저 깨달았다고 해서 조급해할 필요는 없단 얘기죠.”

“아, 나도 알거든? 누군데 아는 척 참견이야?”

“저도 딱히 남의 일에 참견하는 성격은 아니고, 솔직히 당신이 평생 진언을 깨닫건 말건 관심은 없습니다만.”

“뭐야?”

그냥 미친놈인가?

류세연이 드물게도 남의 인성을 의심하는 동안 일리아스는 시선을 반짝였다.

일리아스는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전장 한복판으로 쳐들어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보다시피 제 동생들이 워낙에 무모하거든요.”

물론 둘 다 무모하지만, 특히 다른 세계에서 온 쪽이 더했다.

이 세계에 강림한 죽음을 뚫고 기어코 운명의 씨앗이 발아했다.

일리아스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이제 저 아이가 달려 나갈 곳은 아직 아무도 가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

새로운 미래였다.

그 미래에 자신이 있기를 바라지만, 만일 그렇지 않더라도 행복하기를, 안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변치 않는 것이다.

일리아스는 류세연을 돌아보았다.

“그러니 동생의 방파제가 될 수 있도록 새로운 동료를 키우는 건 제 몫이겠죠. 따라오십시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언 마법을 깨우치게 해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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