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305화
혈연이라는 것은 참 이상하다.
성격도, 신념도, 심지어는 얼굴도 그리 닮지 않았는데도.
그저 혈연이라는 사실이 인생 전체를 옭아매는 넝쿨처럼 자라 가끔은 인생 전체를 좀먹듯이 옭아맨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이우연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지금,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우연에게는.
쿠콰쾅!
황제의 목을 향해 날린 이우연의 검기는 충격적일 정도로 쉽게 막혔다.
황제 앞에 형성된 실드가 견고하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알리시아가 조용히 이를 갈았다.
“성력으로 이루어진 실드잖아, 저거! 아리아드네 이게 진짜!”
그러나 그것에 크게 비통해할 여유는 없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황제가 왕홀을 한 번 더 크게 내리쳤다.
“보았는가? 이것이 나의 진정한 힘이다!”
쿵!
단상을 찍어 내리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저것이 진정한 용사라면 내가 이리 쉽게 막을 수 있겠느냐. 저것은 모두 악마의 속삭임일 뿐이다!”
나태해졌던 군사들의 사기를 단번에 휘어잡는, 위엄 있는 목소리였다.
“저 사악한 종자들을 처단하는 자에게 내가 직접 귀족의 작위를 수여할 것이다!”
그리고 달콤한 보상까지.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우, 우와아아아아!”
“귀족 작위라고?”
황제가 순식간에 군사들의 분위기를 휘어잡는 것을 보며 강예나가 혀를 찼다.
“망했군.”
그리고 이우연도 우울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 광경은 빛바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한 번은 모르고 지나쳤던 광경.
그리고 과거에, 죽도록 후회했던 광경이기도 했다.
“쳐라!”
단상에 오른 황제가 근엄한 목소리로 외쳤고.
콰콰콰쾅!
명령을 받은 황실 마법사들은 불화살 세례를 잔뜩 날렸다.
이우연이 때맞춰 실드를 생성해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쿠쿵!
그럼에도 화려하게 터진 공격은 주눅 든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기에는 충분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나서셨다!”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
황제 측이 미리 여기저기 심어 놓은 독전대들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모양이다.
“그, 그래! 몬스터들 따위는 대마법 앞에서 상대도 안 되지!”
“두려워할 필요 없다!”
“성검이라니, 어차피 사기일 게 뻔하다고!”
덕분에 강예나와 알리시아의 기세에 밀려 겁을 먹었던 병사들 사이에서도 점차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콰직!
그리고, 계속 주춤주춤 물러나기만 하던 병사들이 슬슬 몰려들어 이우연이 펼친 실드를 부수려 검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망설이던 사람들도 분위기에 한 번 휩쓸리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기세를 탔다.
“이, 이 사기꾼 새끼들!”
“이런 곳에 용사가 있을 리 없다고!”
그것이 진실과는 다른, 그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내뱉을 뿐이라고 하더라도.
쾅!
콰쾅!
광기 어린 수십, 수백 개의 검이 동시에 실드 위로 내리쳐졌다.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은 공격이었으되 숫자가 숫자인 만큼 타격은 확실히 누적되고 있었다.
아무리 강력한 실드라고는 해도 지속해서 물리적인 공격을 받으면 타격을 입지 않을 수는 없다.
이대로라면 얼마 가지 않아 실드가 깨질 것이다.
“…….”
그리고 그 실드 안에서, 이우연은 상대방의 전력을 가늠했다.
‘실력 자체는 지금의 나와 비슷할 거야.’
본래부터 황제이니만큼 마법사로서의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다. 루카스에게 가진 열등감 또한 그런 재능의 차이에서 기원하니까.
그런 그가 유령성 전투 때 ‘SS급’ 판정을 받았던 것은 신전과 운영자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지금도 황제 뒤에는 또 다른 ‘운영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진심으로 돕고 있지는 않을 테지.’
그리 어렵지 않게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며, 이우연은 황제 주변을 훑어보았다.
어쩐지 마력을 펑펑 쓰고 있다 했더니, 주변에 배석해 있는 다른 마법사들에게서 마력의 흐름이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들을 보조 배터리처럼 사용하고 있는 건가.’
물론 황제에게 마력을 한계까지 뽑아 먹힌 다음에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하고, 평생 후유증을 앓겠지만 알게 뭔가.
본래부터 타인의 고통에는 둔감한 사람이다. 그 주제에 제 손톱 옆에 박힌 가시에는 눈물을 흘려 댔고.
왜 그걸 이제까지 몰랐던 걸까.
“야, 이우연. 너 뭐 하는 거야!”
그때, 백사현이 이우연의 어깨를 잡고 흔드는 통에 이어지려던 생각이 끊겼다.
“이렇게 땅으로 내려와 버리면 어떻게 해! 그나마 하늘에 있었으니 안전했던 건데!”
“이제 딱히 날아다닌다고 안전할 것도 없어.”
그렇게 말하며 이우연은 턱짓으로 단상에 선 황제를 가리켰다. 그리고 황제의 몸을 완벽히 보호하듯 늘어선 두터운 방어벽도.
“괜히 하늘을 날아다니다간 오히려 마법으로 공격당하기 딱 좋아. 그리고 나 혼자라면 모를까, 널 들고 하늘에서 움직이기는 한계가 있고.”
그에 비해 병사들 한가운데 있기는 해도, 오히려 주위에 병사들이 있는 만큼 황제 입장에서도 대규모의 공격은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지면에 내려와 강예나와 합류하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계산했을 때의 이야기이고, 갑자기 수만 명 병사에게 둘러싸인 백사현의 얼굴은 퍼렇게 질려 있었다.
심지어 사방에서 반투명한 실드 너머로 공격이 들어오고 있으니 아무리 굳건한 각오를 다졌더라도 두렵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미리 설명은 해 주고 움직이라고! 이러다 죽으면 책임질 거냐? 실드가 깨지면 우린 이대로 끝장이야!”
“죽기는 무슨. 너는 정 힘들면 던전 공략 포기 선언하면 되잖아?”
조한율이 이 던전을 직접 세팅한 만큼, 한국 헌터들의 부담은 적다. 공략 포기 선언을 하기만 하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뻔히 아는 사실일 텐데 그렇게 반박당한 백사현의 얼굴에 핏기가 올랐다.
“이, 이이이……!”
“일단 둘 다 진정해. 특히 너.”
“악!”
강예나가 백사현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리자 백사현이 금세 침묵했다.
적군들 사이에 내던져진 것보다 강예나가 더 무서운 모양이다.
하기야 그건 이우연도 마찬가지이긴 했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일 테다.
“이우연.”
백사현을 순식간에 조용히 시킨 강예나가 이우연을 돌아보았다.
“백사현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야. 왜 여기서 나선 거야? 굳이 네가 나설 필요 없었어. 황제가 나선 순간 너는 그대로 성으로 귀환하면 되는 거였다고.”
이우연은 헛웃음을 지었다.
“필요가 없다고? 그러는 너는?”
강예나의 눈썹이 꿈틀댔다.
“여기서 내가 나서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
하지만 이우연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강예나와 알리시아는 몬스터를 이끌며 본대를 휘저어 놓는 역할이니만큼, 적절한 때 빠졌어야 했다.
그랬던 것이 너무 깊숙이 들어온 데다 미처 빠져나가기 전에 황제의 눈에 띄기까지 한 것이다.
그야 지금까지는 기세로 압도하며 어떻게든 버텼지만, 황제가 직접 나서며 사기를 북돋은 데다 지휘권을 잡기까지 하면 이 대군 사이에서 생존할 확률은 더욱 떨어진다.
만일 지금 이우연이 실드를 치지 않았더라면 금세 덮쳐드는 병사들 사이에 고립되었을 것이다.
그건 눈이 있으면 누구나 알 만한, 뻔한 사실이었는데.
“그야 내가 도와 달라고는 했지만 네 목숨까지 걸란 소리는 아니었어. 백사현, 너도 괜히 무리하지 말고 언제든지 공략 포기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이우연은 잠시, 강예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우연으로서 강예나 입장이 어떨지 가늠했다.
강예나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인연이 생긴 헌터들에게 조력을 받는 상황이니, 괜히 관련도 없는 세상에서 혹시라도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것일 테다.
막상 본인이 한국에서 한 일은 생각도 하지 않고서.
참, 뭐랄까.
이우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람이란 건 잘 변하지 않지.”
“어?”
“그걸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렇지만 한번 죽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꺾이지 않는 강건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나 그런 누군가의 등을 쫓아 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죽어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우연은 반투명한 실드 너머로 단상에 올라 있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시스템이 ‘기억 오류’를 수정하며 거짓말처럼 돌아온 전생의 기억은 흑백으로 우중충했지만 그럼에도 희미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우연은 자신이 ‘루카스’였을 때 황제와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부르지 않는 그의 이름 또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와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었다.
더 어릴 때는 좋은 시절도 있었다. 삭막한 왕궁에서 둘이서만 의지하던 시절도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둘밖에 없는 형제야, 루카스. 서로를 의지해야 해. 내가 왕이 되면 나를 도와다오.”
나름대로 가족의 정이라는 것도 있었다.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형을 동경하는 마음도 있었다.
“왜 나는 안 되는 거냐고!”
그리고, 타고난 재능의 차이를 비관하는 형제를 동정하기도 했다.
“어째서 너 같은 게 내 동생으로 태어난 거냐.”
그렇기에 10대 후반 시절의 루카스는 스스로 왕궁을 떠났다.
그렇게 결심한 데에는 왕족으로 태어났으니 대륙의 평화에 기여하겠다는 책임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형제와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렇게 여행을 떠난 루카스는, 진정으로 자유를 찾았다.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즐겁다.’라고 느꼈던 것도 같다.
대륙을 위협하는 악룡을 처리하러 떠난 여정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는 것이 어불성설이었지만 실로 그랬다.
왕궁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을 경험하고, 왕자라는 자리에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이들의 생활을 배웠고, 평생 마주할 일이 없을 이들과 친우가 되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지금의 이우연은 생각했다.
뻔히 보이던 문제를 방치하고, 책임을 회피하며 다른 길을 선택했기에, ‘혈연’이란 게 결국 루카스의 인생 전체를 얽어매었던 것이 아닐까.
하찮은 권력 싸움에 타인을 말려들게 하거나,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
인간다운 마음이었으되, 그것은 루카스 같은 입장의 인간이 가져도 되는 마음이 아니었다.
‘진작 죽였어야 했어.’
혈연이라는 이름에 눈을 감지 말고, 왕재가 아닌 인물이었다면 가차 없이 배제해야 했다.
변할 것이라 기대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혈연의 정에 눈이 어두웠던 결과, 루카스는 잃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하나씩 잃어야 했다.
알리시아는 어딘지도 모를 깊은 숲속에서 죽었으며.
그 후 일리아스는 복수를 하려다 대륙 공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고.
아리아드네는 신전에 들어간 채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레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루카스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렇게 모두 다 잃고서야 겨우 깨달은 것이다.
이우연은 강예나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알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알리시아는 불퉁한 표정으로 실드 너머의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소한 말다툼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게 당연했다. 현재의 알리시아는 이우연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기꺼웠다.
차라리 처음부터 모르는 사이였다면 알리시아가, 일리아스가 그렇게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내 진짜 가족은 혈연 따위로 정해진 게 아니었는데.’
혈연을 아끼는 마음이건, 하찮은 권력 다툼에 끼고 싶지 않다는 고고한 자존심이건 간에.
그것은 누구보다도 소중했던 동료이자 가족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한 번 죽고 나서야 그걸 깨달았던 걸까.
그랬다면 나에게도 이런 가능성이 주어졌을지 모르는데.
“이우연……?”
“…….”
이우연은, 저 어딘가에서 이 세계의 죽음이 된 또 다른 친우를 떠올렸다.
지금 황제를 보호하고 있는 성력의 정체.
아리아드네.
그 녀석이 이 세계에 질투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우연이 살았던, 아리아드네가 걸어온 세상에는 이런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새로운 가능성을 품은 이 세상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이 세계만이라도 지켜 내고 싶다.’
이우연의 결론은 아리아드네의 것과는 달랐다.
아리아드네 입장에서는 자신마저 제 손으로 떠나보냈으니만큼 더더욱 지금 이 세계가,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희망을 찾은 지금이 원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세계의 희망을 만들어 낸 것은, 아리아드네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우연의 영혼이 강예나가 있는 세계에서 다시 태어난 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했다.
아리아드네 말처럼 그저 도박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이우연은 지금 이우연으로서 여기에 있고.
그리고 전생을 기억하는 루카스로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하여 이 세계에 새로운 운명이 태어났다.
기적처럼.
‘어쩌면, 나는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난 것인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지금, 그런 ‘이우연’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야, 이우연. 언제까지 무시할 거야? 곧 실드가 깨질 것 같은데.”
그것도 사실이었다.
이우연은 숨을 골랐다.
현재 자신의 능력치를 생각했을 때 그리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이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야.”
성 밑에 몰려 있던 몬스터들은 이선 헌터가 진언으로 정리한 상황.
그렇게 되면 이제 성 측에서도 병사를 내보낼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루카스’와 일리아스가 있다. 그 두 전력이 더해진다면 전위를 와해시키기에는 충분하다.
“그리고 황제가 전면으로 나왔다는 건 그만큼 몰려 있다는 거고.”
본래대로라면 성을 무너트려야 할 몬스터들이 전멸했고, 심지어 일부는 자신의 병사들을 공격하고 있으니 마음이 급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지금 여기서 직접 나선 것은 실책이다.
“황제를 죽이면 이 전쟁은 끝이야.”
만일 귀족들이 남아 있다면 또 다른 구심점이 되겠지만, 그들이 아직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전쟁을 핑계로 황제가 숙청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라는 것은 이우연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황제가 죽을 경우 이 전쟁은 명분을 잃고 군사는 와해될 것이다.
그러니까, 저 단상 위에 올라 병사들을 통솔하고 있는 자를 죽이면 이 전쟁은 끝이다.
강예나가 물었다.
“그래서, 넌 어쩌고 싶은데?”
이우연은, 아니, 과거 루카스라고 불렸던 남자는 저 멀리 보이는 형제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어쩌면, 진작 했어야 할 말을.
“황제를 죽여야지.”
그것은 처음부터 자신이 짊어졌어야 할 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