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306화
쿠궁!
이제껏 굳게 잠겨 있던 성문이 열렸다.
해일에 휩쓸려 가지 않고 살아남은 성문 근처의 병사들은 눈을 굴리며 성문이 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여, 열린다.”
“이제 본대를 치는 건가?”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물론 그들 입장에서 저 성은 공략해야 할 대상이었지만, 아군에게 버려진 데다 몬스터에게 사냥당하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만큼, 코앞에서 성문이 열린다고 한들 공격할 의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면 살려 주지 않을까?”
“그, 그래. 도망치면 죽이지 않는다고 했었잖아.”
그렇게 겨우 살아남은 패잔병들 앞에서 성문이 열렸을 때.
그들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커다란 백마에 탄 채 위풍당당하게 망토 자락을 휘날리고 있는 왕자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 그리고 수려한 얼굴까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얼굴이라 패잔병들은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
“왕자 전하!”
“부, 부디 자비를!”
이번 전쟁으로 황제가 가장 목을 꺾고 싶어 했던 형제이자 적. 루카스 왕자가 기사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성문을 나선 것이다.
뒤를 따르는 병사들은 겨우 천 명이 될까 말까였지만 기세가 대단했다.
특히나 왕자를 호위하듯 바로 뒤에 따라붙은, 흑마를 탄 기사에게서 느껴지는 기백은 살기처럼 주위를 긴장하게 할 정도였다.
페트라가 조용히 루카스에게 물었다.
“저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 물음에 왕자의 눈길이 성벽 아래에 남겨진 병사들을 훑었다.
그 눈길이 닿는 순간 누구나 몸을 떨었다. 전투가 끝나고 패배한 병사들의 취급이 좋을 리란 없는 것이다. 심지어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성을 공략하려고 달려들지 않았는가.
‘황제 폐하는 그리 잔인하시다던데.’
‘바로 목을 치는 거 아니야?’
몇몇 이들은 이미 목숨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들려오는 목소리는 엄격했지만 차갑지는 않았다.
“……저들의 무기를 빼앗고 후방으로 데려가라. 성민들과의 접촉은 철저히 막되, 심한 부상자는 치료해 주도록.”
“예!”
명령을 받은 기사와 병사 몇십 명이 빠르게 그들을 포박했다.
상상한 것 이상의 자비로운 행동이었다.
전시이니만큼 곧장 죽여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을 텐데.
“가, 감사합니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너나없이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패잔병들을 잠시 일별한 루카스는 곧장 말머리를 돌렸다.
“시간이 없다. 가자!”
“예!”
망토를 휘날리는 왕자를 따라 우르르 몰려가는 기사들과 열을 맞춰 행진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장관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들이 향하는 곳은, 현재 수천 마리의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는 적군의 본진이 아닌가.
그렇게 루카스가 이끄는 정예병들이 적의 본대로 출발한 후.
“근데 저래도 돼? 적군이잖아.”
현대인이자 이 상황에서 완벽하게 제삼자인 류세연은 다짜고짜 궁금한 점을 물었다.
일리아스는 마법을 준비하며 조용히 답했다.
“글쎄요, 저게 성주의 결정이니까요. 동의하고 말고는 관계없지요.”
“본인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얘기로구만?”
그 말대로였다.
“솔직히 다른 인간들 따위 제 알 바 아니라. 전 제 동생들만 무사하면 됩니다.”
“워어…….”
류세연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건 말건, 일리아스는 완드를 들고 주위의 공기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미리 그려 놓았던 마법진이 빛을 뿜으며 활성화되었다.
그러자…….
우르르!
일리아스가 불어넣은 마력에 반응해, 이제껏 성벽 근처에 묻어 두었던 몇백 기의 언데드 병사들이 땅속에서 기어 올라왔다.
류세연은 감탄했다.
“꼭 공포 영화 같네.”
턱!
땅속에서 기어 올라온 해골 손이 지면을 잡고 올라오는 모습은 호러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와, 저건 또 뭐야?”
쿵!
땅에 박혀 있던 바위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거인의 형태가 되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언데드 군대가 완성되었다.
“진짜 죽여준다.”
류세연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야 이 은발의 남자가 자신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있는 대단한 마법사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언데드며 골렘까지 조종할 수 있었다니.
“네크로맨서라는 것도 괜찮은데? 적어도 쪽수로 밀릴 일은 없겠어. 혼자 몇백 명은 상대할 수도 있겠고.”
다른 사람과 함께 던전에 들어가도 어쩐지 혼자 고립되는 일이 많은 류세연다운 발언에, 골렘 어깨에 올라탄 일리아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저 세계 사람들은 다 저런 건지, 아니면 레나와 저 류세연이라는 여자가 특이한 건지.
“……막상 시취를 접할 일이 많아지면 생각도 달라질 겁니다.”
“뭐, 그런가? 그래서 뭐야. 날 어떻게 버스 태워 줄 건데?”
일리아스를 따라 골렘 어깨에 올라탄 류세연은 눈을 반짝였다.
사실 본래대로라면 마법사는 원거리에서 보조하는 게 정석이다.
게다가 이번에 지원 온 한국 헌터들 대부분은 광범위 공격이 가능한 마법사로 이루어져 있기에, 방금 전 출발한 성의 정예병들과 굳이 섞여서 출전할 필요는 없었다.
또 수성전에서 다들 예상보다 많은 체력을 소모한 탓에, 한국 헌터들은 대부분 후방에 머무르며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하기로 했다.
류세연만 제외하고.
사실 지금도 이선 헌터에게는 비밀로 하고 몰래 따라 나온 참이다.
그리고 그 류세연을 데리고 나온 일리아스는 선선히 대답했다.
“버스가 무슨 뜻인지는 일단 차치하고, 진언 마법의 벽을 넘으려면 전장을 가깝게 느끼는 게 좋습니다.”
사실 마법사는 후방에서 공격을 보조하는 일이 많은 만큼, 종이 한 장 차이로 죽음이 오가는 전장에 나설 일은 적다.
“죽음에 가까워지면 넘지 못할 것 같던 벽도 넘게 되기 마련이니까.”
그렇기에 죽을 위기가 많은 전장에 억지로 집어넣으면 죽음 직전의 순간에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많다…… 는 것이 일리아스의 지론이었다.
물론 현대 한국인이 듣기에는 영 미친 소리였지만…….
“그래, 진언 마법을 깨달을 수 있으면 난 뭐든 상관없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류세연도 그리 정상인 인간은 아니었다. 한번 마법의 길을 걷기 시작한 만큼 끝장을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류세연의 생각이었다.
본인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내던져지기 전인데도 가장 궁금한 건 따로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어떤 마법을 쓰게 되려나? 나도 이선처럼 해일 같은 거 부르고 싶은데.”
“그건 본인이 정하는 게 아닙니다. 보통 진언 마법은 본인의 성격과 비슷하게 나타나기 마련이고.”
“그거 나 욕하는 건가?”
“……사람마다 적성은 있는 법이죠.”
적당히 대답을 해 주면서 일리아스는 앞에 펼쳐진 전장을 바라보았다.
수천 마리의 몬스터들이 몰려간 탓에 한때 기세를 자랑하던 대군은 엉망진창이었다. 몬스터 대책이 되어 있지 않은 만큼 사실상 난장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숫자가 많은 데다, 황제가 직접 나서 몬스터들을 광범위 마법으로 공격하며 절반 정도는 처리한 것 같지만, 그래도 이 난장판을 수습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어 보였다.
게다가 이 시점에서 루카스가 이끄는 정예병에, 일리아스의 언데드 군대에게 공격을 받으면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대로 와해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류세연이 물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만 더 기다리면 굳이 손댈 것도 없이 몬스터들 때문에 자멸할 것 같은데, 굳이 지금 출전해야 하나?”
“그러면 좋겠지만, 마냥 기다리기엔 조금 애매하니까요. 동생들이 저기에 있는지라.”
지금 루카스가 적의 본대를 치러 향하는 것은 강예나를 비롯해 적군 깊숙이 침투한 결사대를 지원할 목적에서였다.
그들이 도피로를 뚫건, 혹은 적들의 주위를 끌건 둘 중 하나는 해 주어야 살아남을 확률이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류세연이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예나 말이지. 이거 마음에 드는데.”
“뭐가 말이죠?”
“여기서 진언 마법을 깨닫고 겸사겸사 강예나를 구해 주면 나를 언니라고 부를 확률이 높아지지 않을까? 별 뜻은 없고, 그냥 좀 친해지고 싶어서.”
“…….”
정말, 레나는 어딜 가든 이상한 녀석들이 꼬이는군. 어쩌면 그게 용사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다 자업자득인가.’
일리아스는 기묘한 인연만 만들고 다니는 용사와 가장 깊이 얽힌 인연을 떠올리며 전장을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 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필드를 완전히 뒤덮었던 죽음의 장막이 파훼된 후, 이 세계에 강림한 재앙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수도의 대신전에서는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수백 마리의 몬스터를 절멸시켰는데.’
그러나 운명의 씨앗이 발아한 지금, 이 전투의 흐름이 슬슬 기울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일리아스는 아리아드네를 떠올렸으나.
그것도 길지는 않았다.
“와아아아아!”
“돌격해라!”
함성과 함께, 적의 본대와 병사들이 부딪힌 것이다.
* * *
“너 대체…….”
이우연의 말에 강예나가 눈살을 찌푸리는 동시에 알리시아가 말했다.
“황제 암살,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알리시아.”
“아니, 그렇잖아.”
알리시아가 거의 파괴되기 직전인 실드 너머로 황제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 병사들 사기를 올려 보겠답시고 앞으로 나온 것 같은데…… 이러다 자칫 후방에 콱 틀어박히면 앞으로는 죽일 기회도 없어. 그리고 일리아스가 그러던데, 결국 황제가 죽거나 포기하지 않으면 전투가 길어질 거라고.”
맞는 말이었다.
이 전투는 결국 루카스를 죽이고자 하는 황제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전투에서 루카스 측이 대승을 거둔다고 한들 황제가 죽지 않으면 악연은 끝나지 않는다.
“…….”
강예나가 팔짱을 낀 채 침묵했다.
미간에 생긴 주름을 보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도, 상황도 결정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결국, 강예나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 해 보자. 황제까지 가는 길은 내가 뚫어 보지.”
강예나의 결정에 따른 반응은 모두 달랐다.
“그래그래, 나도 같이 할 테니까 걱정 없어.”
“강예나 헌터, 진짜로 할 거야?! 우리끼리 황제를 죽인다고?”
백사현이 경기를 일으켰다.
강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기회기는 해. 황제만 죽이면 이 전투는 끝이다. 지난 유령성 전투 때도 그랬어. 이번도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
“그럼…….”
“돌파한다.”
“이렇게 나와야지.”
알리시아가 강예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씩 웃었다.
워낙에 단순한 성격이다 보니 강예나가 자기 마음에 드는 결단을 내린 것이 마냥 기꺼운 모양이다.
다만 백사현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굳었다.
그런 백사현에게 강예나가 물었다.
“백사현 헌터, 따라붙을 수 있겠어?”
“……윽.”
백사현이 이를 악물었다.
“사람을 뭘로 보고. 나도 이제 랭킹 20위권이거든?! 딱히 스킬도 없는 평범한 병사들 상대로 죽을 정도는 아니라고!”
“그래, 그럼 힘들더라도 잘 따라붙어. 황제가 죽고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말은 쉽지.”
그렇게 이야기는 했지만 백사현도 포기한 듯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제 곧 적군 진영 한가운데서 실드가 깨지기 직전이니, 백사현으로서도 뾰족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우연은 깨지기 직전인 실드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물었다.
“그럼 합의된 거지?”
“그래.”
“그럼…….”
“잠깐만, 이우연.”
강예나가 이우연의 팔을 잡아끌었다.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그 얼굴을 보니, 이런 상황인데도 심장이 약간 울렁이는 것 같았다.
이우연으로서는 아주 오랫동안 봐 왔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던 때에도 그리워했던 얼굴이니만큼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강예나가 입을 열었다.
“이제껏 항상 무모하게 나서는 건 내 쪽이었지. 그럴 때마다 나를 뒷받침해 준 건 너였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 차례라고 생각해서 들어주는 거야.”
“…….”
“다만.”
강예나의 강렬한 눈빛이 이우연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찔러 왔다.
“나중에, 대체 왜 이러는지 설명은 해야 할 거야.”
“…….”
침묵 후, 이우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기회가 된다면.”
그러나, 이야기를 할 날이 올까.
솔직히 강예나는 평생 모르는 편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의 아리아드네를 보고도, 이 세계의 가능성을 짓눌러 죽이려 하는 친우에게도 동정심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있는 ‘이우연’이 사실 원(原)역사의 루카스라는 걸 알면 어떨까.
차라리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심상은 눌러 두고, 이우연은 고개를 들었다.
“실드 해제까지 10초.”
“……이건 무슨 사망 선고도 아니고.”
백사현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수만 명의 적군에 둘러싸인 채 실드까지 해제되면 맨몸으로 적들에게 노출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알리시아가 씩 웃었다.
“이깟 걸로 죽겠냐?”
그 호기로운 발언과 함께.
휘릭!
실드가 해제되자마자 금빛의 성력으로 된 그물이 일행을 향해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