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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308화 (309/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308화

루카스가 황제의 목을 들고 전장에 존재감을 드러낸 순간, 아비규환이던 전장에 정적이 감돌았다.

모두의 시선 앞에 황제의 잘려진 목이 들려 있었다.

루카스의 눈길이 잘린 형의 목을 훑었다.

두 사람 간의 기나긴 역사는, 저 왕자님의 가출 시절을 지켜봐 온 나로서는 지겨울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어릴 때의 추억이니, 뭐니.

‘……결국 저렇게 끝이 났나.’

그럼에도 루카스는 그 모든 감정을 속으로 갈무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죽음을 각오했던 미궁에서 루카스는 페트라에게, 이제 도망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다짐이 저런 결과를 낳은 것이겠지.

황제가 죽은 것에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지만, 친구의 심정을 헤아리자면 역시 뒷맛이 산뜻하지만은 않았다.

“죽…… 은 거야?”

알리시아가 어리둥절한 어조로 물었다.

그럴 만도 했다.

솔직히 눈앞의 광경을 보면서도 나도 믿기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거대해 보였던 적이 한순간의 방심을 이기지 못하고 목이 떨어져서, 죽었다.

무척이나 허무하게.

한순간에.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대륙을 호령하며 숱한 사람을 고통에 신음하게 만들었던 자의 목이 떨어졌다.

마치 산 자에게 덮쳐 오는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듯이.

“폐, 폐하!”

“황제 폐하께서……!”

“신이시여!”

여기저기서 절망적인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이 역도가아아아!”

류세연의 진언 마법에 당해 잠시 상태 이상에 걸린 사이 주군을 잃어버린 기사가 벌게진 눈으로 검을 빼 들고 루카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낯이 익다 했더니, 일전에 수도에서 봤던 올리버…… 황제 직속 근위대의 대장이었다.

“…….”

하지만 아무리 루카스가 방심하고 있었다고 해도 흥분한 기사의 손에 당할 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카캉!

순식간에 펼쳐진 황금빛의 실드에 분노에 차 휘두른 기사의 검이 튕겨져 나갔다.

“이, 이익! 이 악마의 자식이 감히……!”

“두 눈 똑바로 뜨고 봐라!”

루카스는 자신에게로 달려든 기사를 근엄하게 내려다보았다. 왕자의 턱 끝이 오만하게 전장을 가리켰다.

“친혈육에게 가진 같잖은 열등감으로, 악마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 가며 이 참상을 일으킨 게 누구인지!”

루카스의 한마디가 쐐기를 박았다.

그의 손에 들린 황제의 목이 가치 없는 무언가처럼 달랑대고 있었다.

생전에 휘두르던 거대한 권력과 위엄은 온데간데없이.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하기야, 애초에 그런 핑계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그저 전장에 세워진 이상 그런 이유라도 믿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합리화되지 않기에 그러하다며 굳게 믿었을 뿐.

게다가 지금의 루카스는 어딜 보아도 이야기책 속에서나 나올 법한 정의로운 왕자,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시각적인 효과는 무척이나 빼어났다.

루카스의 말을 들은 병사들의 시선이, 그들 한가운데 있던 신관들에게로 몰렸다.

그렇지 않아도 성력을 한계까지 쥐어짜 쓰고 있던 신관들은 그 시선에 움찔하며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가 ‘악마’라는 누명을 씌울 수 있었던 것은 신전이 나서서 그 발언을 보증한 탓이 컸다.

신전에 가진 사람들의 믿음은 절대적이니까.

하지만…….

병사들이 너나없이 속삭였다.

“역시…… 누명이었던 게야. 그래, 악룡을 처치한 루카스 왕자 전하가 악마가 되었을 리 있나?”

“게다가 용사가 있었잖아. 성검을 든 용사가!”

“용사가 거짓말을 한 황제와 신전을 벌한 거야! 성력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걸 보면 역시 저놈들이 사기꾼인 거야!”

신전을 믿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 전투에서 몇 번이나 성력이 먹히지 않은 것을 본 사람들의 여론은 손바닥 뒤집듯이 변했다.

하기야 믿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이미 이 전쟁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황제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렸으니, 명분마저 희미해진 마당에 굳이 황제와 신전의 말을 믿고 루카스를 향해 달려들 필요도 없지 않은가.

심지어 그런 병사들의 흐트러진 마음을 모아 줄 만한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대귀족들도 모두 사라진 상태.

덕분에, 사람들의 분노는 슬슬 ‘속았다’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럼 신전 놈들이 사기를 친 거야? 신을 모시는 사제란 분들이?”

“사제는 무슨, 진짜 사제면 왜 성검에 힘도 못 쓰고 당했겠는가!”

“그래, 맞아!”

“아니, 그럼 우리는 사기꾼한테 당해서 전쟁에 나왔다는 거야?”

“뭐 그딴 게 다 있어?”

“나라고 죽고 싶지 않았다고! 농기구나 만지다가 이게 무슨 꼴이야!”

처음에는 그저 서로에게 속삭일 뿐이던 목소리는 점점 커져, 커다란 웅성임이 되었다.

철컥!

누가 먼저 병장기를 바닥에 내던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 검을 내던진 것과 동시에.

병사들은 다들 무기를 바닥으로 내던지기 시작했다.

“저, 저는 항복하겠습니다!”

“저는 그냥 평범한 농민이라고요!”

물론 징집병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대로 군사 훈련을 받은 황제 직속의 병사들은 그런 급격한 변모에 분노했다.

“이, 이 멍청한 것들이!”

“저런 말에 속는 거냐! 저거야말로 악마의 혀…… 크아아악!”

뻐억!

가만히 듣고 있던 알리시아가 땅을 박차고 허공을 날더니 그렇게 외치던 병사의 복부를 발로 뻥, 차 버렸다.

반항도 하지 못하고 종잇장처럼 날아간 병사가 한참을 날아가더니 땅으로 처박혔다.

알리시아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디, 더 지껄일 놈은 나와 봐. 이 여명의 수호자, 용병왕이 직접 상대해 주지. 영광인 줄 알아라!”

“저, 저저저 천한 용병 따위가…… 크헉!”

알리시아를 향해 욕을 하려던 놈도 있기는 했지만, 그 녀석도 오래 지껄이지는 못했다.

빠각!

말을 더 잇기 전에 내가 주먹을 휘둘러 이빨을 박살 냈기 때문이다.

“히, 히이익……!”

나는 숨을 삼키는 주변 병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주먹에 누구의 피인지 모를 것이 흥건했다.

어딜 보나 용사라기에는 험악한 모습이었다만, 그래도 내 손에 들린 검은 고고하게 빛나고 있었다.

네 덕분에 내 면이 살았다, 파트너.

- 에이펙스의 성검이 자랑스러워합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용병왕이 싫으면 용사가 상대해 주지. 그런데…… 용사에게 죽는 건 영광일까? 아니면, 악마 취급을 당하는 거니 세기의 불명예인가?”

“…….”

침묵만이 흘렀다.

철컹!

지치지도 않고 루카스를 향해 검을 휘둘러 대던 올리버마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땅을 향해 엎드린 그의 등에는 울분이 가득 차 보였다.

“크, 크흑…… 주군…….”

……폭군이었지만 그래도 모시는 주군이었기 때문인가. 그 슬픔은 진심으로 보였다.

다만 그렇게 분노하는 것은 그 하나뿐.

황제를 목숨 바쳐 지킬 듯이 보이던, 단상 위에 함께 서 있던 다른 기사들 및 병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기색이었다.

억지로 징집되어 끌려온 농민 출신의 병사들이라면 모를까, 황제 직속 병력들의 말로는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복수를 하겠다며, 루카스를 향해 달려들 수도 없는 것이…….

“……이제 남은 왕가의 직계 혈통은 나뿐이지.”

루카스가 말했다.

그랬다.

자신의 형이 죽은 만큼…… 이제 다음 계승권은 루카스에게 있었다.

그렇게 패악을 부렸어도 그저 혈통이 우수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타인보다 존귀하다는 세계, 그렇기에 황제가 남들 위에 군림할 수 있었던 세상.

하지만 바로 그러하기에.

이제, 그들의 주인은 루카스였다.

수도에 방계의 라인하르트가 있긴 하지만, 원(原)역사와는 달리 시기적으로 한참 이전에 전투가 벌어진 탓에 아직 충분히 자라지 못했다.

게다가 멀쩡한 직계가 살아 있는데 방계가 그다음 보위를 잇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그나마 라인하르트가 루카스와 싸우려면 신전이나 귀족의 힘을 업는 수밖에 없는데…….

“신전의 신뢰는 박살이 났고 쟁쟁한 귀족들은 아리아드네님의 손에 죽었지.”

“아, 깜짝이야.”

어느새 나와 알리시아를 찾아온 일리아스가 그렇게 말하며 나와 알리시아의 어깨를 한 번 꽉, 껴안고 놓아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집요한 네크로맨서 뒤에는 거대한 골렘이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누구라도 공격해 오면 공격할 것 같은 기세였다.

그리고 그 어깨 위에는…….

“죽겠다…….”

이 기적적인 승리에 큰 공을 세운 류세연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딱히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서 있었던 건 아니다. 난생처음 진언 마법을 쓰고 거의 탈진한 건지, 빨래를 당한 고양이처럼 골렘 어깨 위에 축, 늘어져 있었던 것이다.

“우욱!”

얼굴만 보면 거의 시체였다.

게다가 꼴도 험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제법 깊게 베여 위험한 상처도 보였고.

나는 일리아스에게 물었다.

“……괜찮은 거 맞아?”

“목적은 달성했으니 그런 거 아닐까?”

“……설마 또 죽기 직전까지 가야 깨달음을 얻는다고 무작정 병사들 앞에 집어 던진 건 아니겠지?”

“…….”

일리아스는 대답하지 않고 슬쩍 시선을 피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류세연은 류세연대로 왜 그걸 받아 준 건지 모를 일이고.

그래도…….

“고맙다고 해야겠군.”

류세연이 진언 마법으로 전체 필드에 상태 이상 마법을 걸어 주지 않았더라면, 황제를 노릴 찰나의 틈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은 이우연도 대단했고.

그야 나도 이우연이 하늘로 날아오르자마자 거의 본능적으로 성력 배리어를 깨서, 이우연이 마법을 날릴 수 있도록 돕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활약에 비하면 영 소소한 감이 없잖아 있다.

“이거, 어째 한국 헌터들에게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았네.”

그냥 보조 역할만 해 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나는 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성벽 위에서 누군가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선 헌터였다. 뒤에는 김숙자 교수님도 보였고.

“하…….”

그 모습에 유령성의 마지막 모습이 겹쳐졌다.

성벽 위에서 나를 향해 경례를 하던 기사들의 모습.

새벽의 빛과 함께 사라졌던,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던 그때를.

“그리고 저 사람들은 네가 데려왔고.”

일리아스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다정한 온기였다.

“이건 레나, 네가 아니었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풍경이야. 우리 세계의 힘만으로는 이루어 내지 못했을 승리.”

“그건…….”

그때였다.

두두두!

말이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인가, 했더니.

“용사님!”

흑마를 탄 기사가 말에서 굴러 떨어지듯 내리더니, 나를 향해 뛰어왔다.

페트라였다.

내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강한 충격이 몸을 덮쳤다.

달려오는 기세하며 입고 있는 갑옷 때문에 몸통 박치기라도 당한 것처럼 충격이 가해졌다.

“커헉…….”

“우리가 이겼어요!”

그렇지만, 굳이 아프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페트라의 심정이 어떤지.

그 한마디로도 충분히 전해졌으니까.

어깨에 차가운 무언가가 떨어졌다. 아마도 페트라의 눈물일 것이다.

“이겼다고요…….”

나는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페트라가 얼마나 지난한 세월을 겪었는지 안다.

얼마나 후회했는지,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응, 우리가 이겼어.”

나는 페트라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네 덕분이야.”

페트라가 단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네가 세계마저 넘어 나를 불렀으니까.

“진짜로…… 이긴 거군요.”

그리고 페트라를 쫓아온 엘리사 메이도 보였다.

그래…… 이긴 것이다.

전쟁은 끝났다.

아, 정말로…….

“끝났구나…….”

내가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하늘에 황금빛의 축포처럼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에 성공하였습니다.

- 최대 업적자 : 강예나

- 운명의 씨앗이 성공적으로 개화하였습니다.

- 세계가 새로운 변화를 축복합니다.

오랫동안.

정말로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싸움의 종결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숨이, 탁 내쉬어졌다.

“아…….”

이제야 드디어 이 세계는 되감긴 시간을 넘어, 아무도 보지 못한…… 겪지 못한 곳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물론 기쁜 일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슬픈 일을 겪게 될 테고, 이별할 수도 있을 테고, 언젠가는 죽을 수도 있겠지.

이번에야말로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의 순간과 맞닥트릴 때도 올 것이다.

모든 삶이 그러하듯이.

그러나, 그래도…….

“변화라…….”

어느새 이우연이 옆으로 다가왔다. 아직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건지, 손이며 발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지만 못 본 척을 했다.

대신, 나는 하늘에 떠오른 메시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유령성의 마지막 모습도…… 이우연과 함께 봤었지.

그렇기에 더욱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이우연.”

“응?”

“네가 살아 있어서, 내 옆에 있어서 다행이다.”

멋도 모르고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는 그저 괴로웠고, 타르토스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이 멀어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만일 내가 이제껏 해 온 일 중 무엇 하나라도 틀어졌더라면 나는 결코 이 장소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곳에서.

이우연과 함께…… 이 세계의 변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풍경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면, 모두 감수할 만한 고통이라고 여길 정도로.

“……응.”

내 말을 들은 이우연이 잠시 숨을 들이켰다가, 곧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아직도 내 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페트라의 어깨 위로, 함께 포옹하며 말했다.

“나도…… 당신과 다시 만나서 다행이야.”

* * *

전투의 열기는 순식간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고, 그 자리를 승리의 열기가 천천히 채웠다.

그래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기사들에게 전투의 뒤처리를 맡긴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한자리에 모였다.

하지만, 당연히 모습을 나타낼 거라고 생각한 이는 여전히 침묵 중이었기에 일리아스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숨어 있을 만한 성격은 아닌데.”

“응, 그렇지.”

“그래, 문제는 황제가 아니니까.”

이우연이 피로한 얼굴로 검을 뽑은 채 눈가를 문질렀다. 루카스가 그런 이우연을 부축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 찮겠어?”

“그래, 가자.”

전쟁은 끝났다.

바꾸어야 할 운명도 바뀌었다.

그러나, 아직 바뀌지 않은 것도 존재했다.

우리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피가 스민 땅.

전장의 후방에 쳐진 막사는 고요했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그리고, 막사 사이의 맨땅에서.

나는 그림자처럼 앉아 있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길게 기른 금발이 흙먼지에 더러워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흰 옷자락이 흙탕물에 빠져 본래 색을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리아드네는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나는.”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리시아가 아리아드네의 이름을 부르려는 것을 일리아스가 막았다.

아리아드네의 시선은 이미 전투가 끝난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백, 몇천 번을 생각했어.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지…… 하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는데…….”

그러나, 이 전장에서는 운명의 씨앗이 발아했다.

운명은 바뀌었다.

이 세계는 아리아드네가 알지 못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저는, 대체 무엇을…… 잘못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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