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311화 (312/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311화

물론 ‘죽음의 길’을 어떻게 공략할지 의논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일리아스의 말대로 수도에 남아 있을 황제파 세력과 신전을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위험했다.

황제가 죽고 주요 귀족들마저 대거 제거당한 이 마당에, 남은 황제파 귀족들이 황실의 방계를 옹립하고 결속할 가능성은 한없이 높으니까.

수도에 상징성이 있는 만큼 그쪽에서 즉위식을 올려 버리고 방어전을 펼치면 골치 아파진다.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은 루카스가 곧장 수도로 올라가 황제가 패배한 것을 알리고 승리를 선언, 그 후 왕위에 등극함과 동시에 수도에 잔존한 세력들을 정리하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죽음의 길’이었다.

- 두 세계의 동기화까지 127:38:12

이제 동기화까지 대략 5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

양태원은 곧장 제사 준비에 들어갔다. 시간은 얼마 없지만 당분간 삿된 것에 접하지 않고 목욕재계하며 출입을 삼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준비에 들어가기 전 이렇게 조언했다.

“한 세계를 집어삼킬 만큼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심상 세계이니만큼 어떤 식의 던전이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누나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난도의 적을 상정하고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가장 어려운 난도라…….”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간 어려운 상대는 많았다.

상대하기 난감한 걸로 보면 역시 ‘나’ 자신이었겠지만, 교활하기로 따지자면 릴리스가 제일이다. 끈질긴 것으로 보면 알버트도 그랬고…….

하지만 단순히 강함으로만 따지자면 역시…….

“옵타티오지.”

“아무래도 그렇지?”

전 대륙에 악명을 떨친 SSS급 드래곤, 옵타티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쓰러트렸나 싶다.

“어찌 됐든 공략 전 최상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거로군.”

루카스가 침중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아리아드네의 심상 세계에 도전한다면 루카스는 빼놓을 수 없는 전력 중 하나였다.

포지션 자체는 마검사로 이우연과 겹치지만, 현재의 이우연은 실제의 경험치야 어찌 됐든 절대적인 레벨은 낮을 수밖에 없으니 루카스가 빠지면 그만큼 전력은 손실된다.

“그렇다면 급한 쪽을 우선해야겠지.”

그게 루카스의 판단이었다.

최대한 빨리 수도를 제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찌 되었든 저 ‘죽음의 길’을 해결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끝날 테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테다.

일리아스가 코끝을 찡그렸다.

차마 루카스 없이 공략에 도전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현시점의 상황이 마음에 영 걸리는 모양이다.

“그럼 수도는 어쩌실 겁니까? 세상을 구하고 돌아왔더니 기껏 구한 그 세상에 배반당하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한데요.”

알리시아가 목 졸리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켁, 너는 너무 부정적이야. 기껏해야 5일인데 뭔 일이 있으려고.”

“5일이 아니라 단 하루만에도 세상이 뒤집힌 예는 얼마든지 있어. 넌 멍청해서 잘 모르겠지만.”

남매가 티격태격하는 동안 루카스도 결론을 내렸다.

“수도를 장악해 두는 것도 분명 중요하지. 하지만 그쪽은 나를 대신할 사람이 있어.”

“루카스 전하를 대신할 사람이…….”

무어라 말하려던 일리아스는 입을 다물었다.

루카스가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기 때문이겠지.

루카스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란 물론…….

“영광입니다. 믿고 맡겨 주신 만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페트라였다.

루카스는 자신 앞에 선 충성스러운 기사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을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묶어 올린 페트라는 주군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중책이다.”

페트라가 맡은 역할은 작지 않다.

아무리 황제가 죽어 전쟁이 끝났다고 하더라도, 루카스 쪽의 병력이 수도에 입성하게 되면 반발이 일어날 것은 뻔한 일.

“황제의 죽음이 알려지면 황제파 귀족들을 비롯해 신전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을 테지.”

잔존한 황제파 세력과 신전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유혈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도 농후했다.

또 황제가 수도에 최소한의 병력은 남겨 두었을 테니 크건 작건 무력 충돌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민심까지 챙겨야 했다. 자칫하면 형제를 죽이고 옥좌를 찬탈한 패륜아라는 이미지를 루카스가 뒤집어쓸 수도 있다.

“잔존 세력이 결집하기 전에 한시라도 빠르게 수도를 장악해야 해.”

관건은 시간 싸움이다.

상대방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수도에 입성하고 루카스의 자리를 확고하게 다져 두어야 한다.

그러니 페트라야말로 최적의 인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자신이 없다면 그리 말해라. 탓하지 않겠다.”

“아닙니다, 전하.”

루카스의 말에 페트라가 고개를 저었다.

페트라 또한 일의 중요함을 아는 만큼 긴장이 엿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감이 없는 모습은 아니었다.

“명하신 대로 전하가 돌아오실 때까지 수도를 정리해 두겠습니다.”

“그래, 엘리사 메이 경을 붙여 주지. 그 외에도 필요한 지원이 있다면 뭐든지 말해라. 내 사재를 털어서라도 내주마.”

그러자 페트라가 씩 웃었다.

기사라기보다는 장난기 어린 악동 같은 모습이었다.

“그럼 기사단 직속 병사 300명, 제가 모두 데려가겠습니다. 한시가 급하니 준마들도. 아, 병장기도 이참에 다 새 걸로 교체하겠습니다. 개선장군처럼 수도에 입성하려면 차림새도 단정해야 하니까요.”

그 말에 루카스가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사재를 털어서 주겠다고 하니 아주 등골을 뽑아 먹으려 드는군.”

“용돈은 이럴 때 받아야지요. 설마 안 주실 건 아니지요?”

그 모습은 주군과 충직한 기사라기보다는 아버지와 딸처럼도 보였다.

루카스가 항복의 한숨을 내쉬었다.

“……집사에게 말해 창고 열쇠를 가져가도록.”

“감사합니다. 반드시 기대에 부응해 보이겠습니다. 그럼, 준비가 되는 대로 바로 출발해야겠군요.”

페트라가 그렇게 말하며 루카스를 비롯해, 그 주위에 제각기 앉아 있던 나와 알리시아, 일리아스를 둘러보았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달싹이던 입술은, 곧 굳게 다물어졌다.

“그럼 돌아와서 뵙겠습니다, 전하.”

루카스는 잠시 페트라의 얼굴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수도 장악에는 적어도 일주일, 길게는 한 달 정도가 걸릴 테다.

그러니 공략에 실패할 경우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루카스 또한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딸처럼, 동생처럼 키웠던 아이 아닌가.

심지어는 한 번의 생을 더 거쳐 기어코 이번의 승리를 이끌어 낸 루카스의 기사이기도 했다.

몸 조심하라든가, 혹은 ‘죽음의 길’ 공략은 걱정하지 말라든가.

하지만, 무언가 덧칠하면 오히려 망쳐 버릴 것 같은 순간이 있다.

그래서였을까.

루카스 입에서 나온 것은 여느 때와 별다를 것 없는 평이한 한마디였다.

“그래, 잘 부탁한다.”

그리고 주군의 말에 페트라 또한 으레 그렇게 하듯, 군례를 올렸다.

“존명.”

그렇게 페트라가 등을 돌려 방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페트라 경.”

루카스와 페트라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조용히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던 이우연이 몸을 일으키더니 페트라를 불렀다.

페트라가 의아한 듯 이우연을 돌아보았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이세계의 손님. 궁금하신 거라도?”

페트라의 물음에 이우연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다.

어쩌면 본인도 자신이 왜 페트라를 멈추어 세웠는지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혹은 낯선 호칭에 무어라 반응해야 하는지 망설이는 건지도 몰랐다.

한참을 침묵하다가, 결국 이우연 입에서 나온 것은 단 한마디.

“……무운을 빕니다.”

“예? 아, 예. 감사합니다.”

약간 얼떨떨해 보였지만 그래도 격려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페트라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그 미소를 본 이우연은 다시 한번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우연의 심정이 어떤지,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 이만.”

인사를 마친 페트라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나섰다.

“나 잠깐 자리 비운다.”

그리고 나는 그런 페트라를 따라나섰다.

내가 뒤를 따라온 것을 알아차린 페트라가 나를 돌아보았다.

“용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혹시 도와줄 건 없나, 싶어서.”

“마음은 감사하지만 딱히 도움을 받을 일은 없습니다.”

무뚝뚝한 어조에 딱딱한 표정. 걷는 자세에도 기사다운 절도가 묻어나왔다.

사실 잘 따져 보면 지금의 페트라 쪽이 나보다 연상이 아닐까 싶은데, 아직도 어릴 때 모습이 생생하기 때문인지 동생처럼 느껴져서 기특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용사님도 공략을 준비하려면 바쁘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말투는 무뚝뚝해도 그 와중에 나를 걱정하는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다.

나는 바쁘게 복도를 걷는 페트라를 따라 걸으며 물었다.

“혹시 불안하지는 않아?”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저거 말이야.”

나는 허공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가리켰다.

- ‘최후의 전령’ 을 처치하십시오.

- 두 세계의 동기화까지 126:58:34

만일 우리가 저 죽음의 길을 없애지 못한다면 페트라는 명령을 수행하던 도중에 죽게 될 수도 있다.

그러자 페트라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병사들 중에는 그런 불만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어차피 세상이 멸망한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요. 제가 확실히 기강을 다잡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페트라, 네가 괜찮겠냐는 말인데.”

사실 그게 걱정이라 따라 나온 것이다.

페트라가 그리도 힘들게 쟁취해 낸 새로운 운명이 앞으로 5일 후에는 끝날지도 모른다니.

심지어 그런 마당에 수도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는 했지만 페트라의 의욕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 말을 듣고 처음으로 페트라가 미소 지었다.

“혹시라도 용사님의 공략이 실패할까 봐 불안하지 않느냐는 말씀이시라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 그래?”

“물론 지금의 아리아드네 님이 비교할 바 없이 강하다는 것도, 정말로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만…….”

페트라가 시선을 돌렸다.

성의 복도 창가 너머, 분주히 움직이는 병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하늘과 대지를 잇는 검은 기둥도.

정말이지,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광경이었다.

“그래도 지금, 저는 이곳에 살아 있지 않습니까.”

“…….”

“저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오늘이야말로 제가 가장 원하던 내일이니까요.”

창가 사이로 비춘 햇살이 페트라의 얼굴을 찬란하게 비추었다.

그 얼굴을 본 나는 숨을 삼켰다.

그저 순간에 불과했던 승리의 영광도, 가슴을 울리던 희망찬 노랫소리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그저 평범하고 지루한, 그저 삶이었고, 무엇도 보장되지 않은 백색의 미래뿐이지만…….

페트라는 이런 삶을 손에 넣으려 오랫동안 달려왔다.

“그러니 저는 오늘에 충실하겠습니다, 용사님. 만약 내일 세상이 멸망할지라도.”

페트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눈동자를 보니 내가 얼마나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는지 알겠다.

하기야 차원마저 넘어 끈질기게 이 미래, 아니, 현재를 쟁취하기 위해 달린 아이다.

그렇다면 내가 건넬 말도 위로나 격려가 아니어야겠지.

“그래, 너는 오늘에 충실해.”

대신, 나는 페트라에게 굳게 다짐했다.

“네 내일은 내가 가져올 테니까.”

이번에는 반드시 지키겠다, 고 했던 그 강렬한 의지는 여전히 내 마음에 남아 있다.

내 얼굴을 본 페트라가 환하게 웃었다.

기묘하게도, 내가 제대로 보지 못한 어린 시절의 얼굴이 떠오르게 하는 미소였다.

“네, 그러실 거라는 걸 알아요.”

* * *

“저도 지금 돌아갈 수는 없죠. 태원이는 제를 치를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챙겨서 돌아가야죠.”

이선이 그렇게 말하며 어디선가 찾아온 믹스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달콤한 냄새가 폴폴 풍겼다.

“그건 또 어떻게 갖고 왔어요?”

“직장인의 필수품이죠. 예나 씨도 하나 마실래요?”

물론 감사하게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당이 떨어진 참이었다. 심지어 마법사가 마력으로 물을 끓여 주다니, 이보다 값비싼 커피가 있을까 싶다.

“종이컵이 아니라 아쉽지만 나무 컵도 나름 풍미가 있네요.”

“종이컵이면 뭐가 달라요?”

“아, 그러고 보니 예나 씨는 모르겠구나. 종이컵으로 마시면서 컵 주위를 잘근잘근 뜯어야 겨우 회의가 끝나는 거거든요.”

“…….”

들어도 잘 모르겠다.

하여간, 짬이 난 김에 다른 헌터들처럼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해 보았지만, 이선은 양태원의 보호 겸 여기에 남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처음 쓴 진언 마법의 후유증으로 끙끙 앓는 류세연도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기도 했다.

조한율 : 뭐, 언제라도 돌아가겠다고 말만 하면 돌아올 수 있으니까 큰 문제는 아니긴 해요. 기껏 해 봐야 5일이니까, 그 정도는 지금 한국에 있는 헌터들로도 충분히 감당 가능하고.

그래도 한국 서버의 주요 플레이어가 네 명이나 이쪽에 머물러 있으니 나름대로 속이 탈 텐데 조한율은 의연했다.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기는 했다.

“그런데 휴가 내고 온 거 아니었어요?”

“아, 연가를 더 신청해야 하기는 한데…… 돌아가서 처리하면 돼요.”

“……괜찮겠어요? 태원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무사하게 돌려보낼 건데.”

“예나 씨가 태원이 신경 쓰는 거야 당연히 알죠. 근데 어쨌든 제 입장에서는 스무 살짜리 어린애 혼자 던전에 남겨 두고 나가기도 뭣하고…… 휴가야 뭐어, 내년에 가면 되니까요. 하하하…….”

이선이 건조한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봐도 딱히 괜찮은 걸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본인이 싫다는데 억지로 돌려보낼 수도 없는 일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런 걸로 알겠습니다. 이번엔 정말 크게 신세를 지네요. 감사합니다.”

“하하. 나중에 예나 씨가 맛있는 거라도 사 주세요. 그걸로 퉁치죠, 뭐.”

“아…….”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이선은 잠시 침묵했지만,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서, 예나 씨는 진짜 저 던전? 죽음의 길? 에 도전하는 건가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꼭…… 해야 하는 거죠? 잘은 모르겠지만.”

“네.”

“그렇구나…… 음.”

이선 헌터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웃었다.

“있잖아요, 예나 씨. 저는 예나 씨가 되게 마음에 들거든요. 같이 던전 들어갈 공략원을 꼽으라면 예나 씨를 세 손가락 안에 꼽아요. 알게 된 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지만, 예나 씨도 저를 꽤 신뢰해 주는 것 같고.”

“맞아요.”

약간 분위기를 탄 감은 있지만, ‘멸혼의 불꽃’ 스킬의 대상자 중 하나로 등록되었을 정도다.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 본성이 엿보이기 마련이니만큼, 이선이 신뢰할 만한 인물이란 건 확실하니까.

이선이 망설이듯 물었다.

“그런데 무슨 사정인지…… 이야기는 안 해 줄 거죠?”

“…….”

사실, 이제껏 묻지 않은 게 이상했다.

이선은 내 사정을 정확히는 모른다.

하필 왜 이 던전에 집착하는지.

물론 루카스나 일리아스 남매 등등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면서 어느 정도 낌새는 알아차렸을지는 몰라도…… 내가 입을 열지 않은 이상,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지.

“…….”

나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 이야기만이라면 못 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선의 경우, 벌써부터 제반 사정을 들어 봤자 좋을 게 없다.

언젠가 이우연이 말한 대로 정부 소속 헌터인 이선 입장에서는, 한국의 플레이어이자 귀중한 자산인 내가 타르토스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아봤자 좋을 게 없었다.

괜히 책임 추궁만 당할 수도 있고.

모르는 게 약이라는 건 이때 쓰는 말이겠지.

“그럼…….”

나는 무어라 말하려는 이선을 막았다.

“아직은요.”

“아직…… 언젠가는 말해 줄 생각이란 거네요?”

“기회가 되면요. 뭐, 솔직히 그렇게 대단한 사정도 아니에요.”

그냥 도와 달라는 소리를 듣고 얼떨결에 다른 세계까지 넘어가서 험하게 구르다 보니 이렇게 되었을 뿐이다.

이선이 픽 웃었다.

“용사라고 불릴 정도인데, 그게 대단하지 않으면 대체 대단한 사정은 뭔지 궁금해지는걸요.”

……하기야 여기저기서 나를 용사라고 부르니 이선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정말 잠깐 짬을 내어 온 거라 시간이 없었다.

“이제부터 저는 공략 준비에 들어가야 하니 따로 시간은 못 낼 거예요. 챙기지 못해 미안합니다.”

“따로 챙길 것도 없죠, 우리야 그냥 돌아가면 되는데요. 그럼 공략 후에 한국에서…….”

그렇게 말하려던 이선이 입을 다물었다가, 망설이듯 이야기를 꺼냈다.

“예나 씨, 혹시 한국에 돌아…….”

막 떠나려던 내게, 이선이 무언가를 물으려다 말았다.

내가 뒤돌아보자 이선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바쁜데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네, 그럼 이만.”

이선 헌터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던 건지 안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는 대신 방에서 걸어 나왔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로서는 아직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

아니, 아직 대답할 수 없다는 것도 웃긴 이야기였다.

꽤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그럼에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문제.

나는 성 복도의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나의 오늘과,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

- 두 세계의 동기화까지 118:12:00

‘죽음의 길’이 사라지면, 이제 정말로 타르토스는 새로운 운명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이 세계에 해 줄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나게 된다.

던전도, 퀘스트도 모두 끝이다.

그때 나는…….

“너는 어느 세계를 택할 거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