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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312화 (313/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312화

거대한 몬스터의 팔이 나를 향해 휘둘러졌다.

무게감 있는 타격이지만 속도는 인간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그대로 턱을 맞을 뻔한 것을 겨우 피했지만, 그에 안심할 새도 없이 다른 팔에 들린 바스타드 소드가 허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캉!

두 손으로 잡은 롱소드로 바스타드 소드를 맞받자 알리시아가 혀를 찼다.

“중량 차이가 얼만데 이걸 정면으로 받아? 성검 너무 사기야!”

“네가 더 사기다!”

한 손으로 바스타드 소드를 휘두를 정도면 그게 바스타드 소드냐?

새삼스럽지만 정말이지 힘이 장난 아니었다. 무슨 황소가 통째로 달려와서 치받은 듯했던 것이다. 솔직히 정면으로 맞붙으면 도저히 이길 것 같지가 않다.

챙!

그나마 약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알리시아가 잔재주를 부리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대련 한정이지만.

정면에서 부딪혀 오는 바스타드 소드를 비스듬하게 흘려내며 나는 일단 뒤로 물러섰다.

“어딜!”

하지만 뒤로 물러서기도 전에 몬스터의 팔이 한 번 더 휘둘러졌다. 이번에는 새롭게 오우거의 팔을 붙인 만큼 길기도 길어서 알리시아의 반경이 넓어진 탓에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호락호락 맞아 줄 수는 없지.

휙!

님페의 바람이 돌풍을 일으키며 아슬아슬하게 뒤로 빠지니, 알리시아가 팔을 휘두른 자리에는 바람만이 남았다.

“쳇.”

알리시아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겨우 무식한 공세에서 벗어난 나는 뒤로 물러나 숨을 가다듬었다.

‘역시 아직 만렙 상대로는 벅찬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이길 자신은 들지 않았다.

현재 내 레벨은 84.

한 번 ‘혼돈의 용사’ 클래스가 변하면서 벽을 넘고 레벨은 나름대로 순조롭게 오르고 있었지만, 알리시아의 경우 시스템상 레벨 100을 찍었다.

게다가 바로 오늘 아침에 새롭게 팔을 바꾼 만큼 기세가 아주 사나웠다. 평범한 롱소드였다면 알리시아의 바스타드 소드를 받았을 때 진작 깨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나도 무난하게 만렙을 찍을 수 있었겠지만…….

- 두 세계의 동기화까지 102:23:56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기다려 주질 않았다.

“대련은 이 정도면 됐어.”

우리의 대련을 지켜보던 일리아스가 말했다.

“성검의 기운에 스쳐도 둔화되진 않는군. 그렇다면 성력에도 어느 정도 버티겠지.”

그래, 평소라면 성검이 뿜어내는 기운에 알리시아의 팔 움직임이 둔화되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잘 버티고 있는 것은 일리아스가 손을 쓴 덕이었다.

흑마법과 연금술로 억지로 이어붙인 몬스터의 팔은 보기만 해도 흉흉한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각종 시약과 마법진으로 강화한 결과인 것이다.

사실, 아리아드네의 심상 세계에 들어갈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둘이었다. 기본적으로 성력과 흑마법은 가위바위보에서 바위와 가위의 관계니까.

알리시아가 호탕하게 외쳤다.

“하지만 나는 바위를 박살 낼 수 있는 가위다!”

“……그건 이미 가위가 아니지 않냐?”

“헛소리하지 마, 멍청아. 그래 봤자 아리아드네 님의 영역에 들어가면 반나절도 못 버티고 떨어질 가능성이 커. 즉, 우리의 전위는 반나절 지나면 큰 구멍이 생긴다는 거야. 희망이 없다시피 하군.”

자신에게만 보이는 화면을 움직이며 일리아스가 새침하게 말했다.

그 냉정한 분석에 알리시아가 짜증을 냈다.

“너는 왜 그렇게 사람이 항상 부정적이냐? 반나절 안에 공략이 끝날 수도 있지!”

“대답해 주기조차 싫네.”

“일리아스, 너 그냥 가서 자라. 피곤한 것 같은데.”

남매 싸움을 말리기에는 나도 피곤했다.

그래도 일리아스가 신경질적인 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나나 알리시아는 전장 정리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아서 쉬기라도 했지만, 루카스를 비롯해 일리아스는 전투 후에도 쉬기는커녕 계속 야근 중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알리시아를 노려보는 눈매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일리아스가 안경을 벗고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그럴 수도 없지. 빨리 운영자라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니까. 적어도 공략 전까지는 어느 정도 요령을 익혀 둬야…….”

“운영자라…….”

“아, 틈 발견!”

“야, 대련 끝났다고 했잖아!”

일리아스와 잠깐 대화를 하는 사이 알리시아가 발을 걸어왔다. 틈새를 놓치지 않는 공격에 방심하고 있던 나는 그만 발이 걸려 우당탕 흙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끝은 무슨, 이제 겨우 시작이구만!”

“야!”

쾅!

알리시아의 주먹이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곳을 박살 냈다. 겨우 몸을 굴려 피하지 않았더라면 작살이 난 것은 내 몸이 되었을 것이다.

흙먼지가 희뿌옇게 흩날렸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죽는다, 진짜!”

- 에이펙스의 광검이 당신의 투지를 격려합니다.

내 투지를 확인한 파트너가 흙먼지 속에서 파앗, 하고 빛을 내뿜었다.

알리시아가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쟤는 대체 뭘 먹고 저렇게 팔팔한 걸까?

결국 우리는 그대로 거의 한 시간을 더 붙어 싸웠다.

나와 알리시아는 체력을 모두 소모하고 연무장 바닥에 뻗어 누웠다.

꼴은 물론 엉망진창이 된 지 오래였다.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흙먼지가 덕지덕지 붙은 데다, 목구멍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알리시아가 죽는 소릴 내뱉었다.

“으아아…… 죽겠다.”

그나마 알리시아는 좀비 같은 소리라도 내지, 나는 뭘 말할 기력도 없었다.

우리의 꼬락서니를 본 일리아스가 한숨을 쉬었다.

“용사 레나가 돌아왔다고 난리 난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면 참 좋아하겠다.”

“……그런 얘기하지 마. 그렇지 않아도 보는 시선들이 너무 많아서 질렸어.”

그렇지 않아도 내가 용사 레나라고 공언한 이후로 시선이 따가웠던 참이다.

그간 페트라의 몸을 빌렸던지라 용사 레나의 이름값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볼 틈이 없었는데 이번으로 확실히 알았다.

성의 복도나 마을을 걸을 때마다 쏟아지는 경외와 찬탄의 시선.

누군가에게 그런 시선을 받는다는 건 아무리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고 낯간지럽기 짝이 없다.

사실 나는 그런 대단한 인간이 아니라, 친구랑 싸우다가 힘들면 흙바닥에도 그냥 누워 버리는,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인간인데 말이다.

“그리고 옵타티오는 나 혼자 쓰러트린 것도 아닌데 왜 나만…….”

“이름값이지. 괴물 용병왕이나 네크로맨서, 버려진 왕자보다는 용사가 용을 무찔렀다는 게 듣기 좋으니까.”

“그렇게 들으니 더 싫은데.”

“그게 레나 네 장점이지. 그래도 나쁜 것만은 아냐.”

일리아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평원 한복판의 ‘죽음의 길’을 가리켰다.

“그래도 용사의 존재 덕분에 사람들도 과도하게 혼란에 빠지지 않고 있어. 본래대로라면 몇십 시간 후에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니 다들 혼란스러웠을 텐데, 어떻게든 용사가 해치워 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리고 그런 네가 루카스 전하의 편을 들었으니까, 폭동도 일어나지 않는 거고.”

“…….”

솔직히 심정은 복잡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용사의 이름이 도움이 되었다면 그건 다행이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흙먼지 바닥에 누워 흘러가는 바람과 밤하늘에 흩뿌려진 별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누워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그러게.”

비록 멸망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지만, 어쩐지 평화로웠다. 흙바닥은 딱딱하고, 땀이 식어서 피부는 끈적이고, 팔다리에 힘도 들어가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여기에 살아 있는 알리시아와 일리아스와 함께 있다.

나에게는 그거면 충분했다.

그때, 일리아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리아드네 님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냐.”

“…….”

“나도 가끔 사람들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세상을 위해 최선을 다해 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역겹게 느껴져.”

“…….”

“막상 그 짐을 지고 있는 누군가가 얼마나 힘든지는 외면하면서 말이야.”

인간을 혐오하는 감정이 담긴 동시에, 나를 향한 걱정이 담긴 말.

일리아스가 땅바닥에 누워 있는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넌 포기해도 돼, 레나. 너는 이 세계와 함께 멸망할 필요 없잖아. 당장이라도 돌아갈 수 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나는 일리아스의 손을 쳐 냈다.

그러니까 나더러 지금, 다른 한국 헌터들이 돌아간 것처럼 돌아가라는 소리 아닌가.

그래, 이치만 따지자면 그게 가능하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돌아갈 생각 없어. 그리고…… 난 사람들이 나를, 아니, 누군가가 해결해 줄 거라고 믿는 것도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

이 세상에 아직 선의가 남아 있다고 믿는 것.

자신의 힘이 부족해 미처 닿지 못할지라도, 또 다른 누군가의 손은 닿을 것이라는 믿음.

분명 거대한 절망 앞에 꺾일 때도 있을 테고, 때로는 배신당하고 돌려받지 못하는 호의에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런 근거 없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계속해서 타인을 도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말을 들은 일리아스가 아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응, 레나다운 말이네.”

“욕하는 건가?”

“응, 반쯤은. 그래도…… 뭐, 그런 너니까 여기까지 온 거겠지.”

일리아스가 어쩐지 납득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나도 믿어 볼까. 비록 지난번에는 시간에 맞추지 못했지만.”

“응? 뭘?”

“어떻게 생각하면 이번에야말로 적절한 때인 걸지도 모르고.”

나는 눈을 껌벅였다.

“……뭔 소리야?”

“아, 저 새끼 또 자기만 아는 소리 해. 카드놀이할 때도 비장의 한 수는 숨겨 놓잖아. 재수 없게.”

알리시아가 투덜거렸다. 카드놀이를 할 때마다 꼴찌 하는 게 어지간히 서러운 모양이었다.

“그보다, 이번 공략이 끝나면 레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저쪽 세계로 완전히 돌아가 버리는 거야?”

그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넌 섬세함이라는 게 결여되어 있냐…….”

“레나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둘이 비슷해.”

“난 저 정도는 아니야!”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냐고. 실패하면 죽는 거지만 성공하면?”

알리시아치고 집요하게 묻는 질문에 일리아스가 한숨을 쉬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레나는 애초에 이 타르토스 대륙 사람이 아니니까 돌아가는 곳은 당연히 우리와 다르겠지. 옵타티오 공략 때랑 같아. 클리어 후 출구가 다르게 열릴 거야.”

“역시 그런가? 그럼 그대로 못 보게 될 수도 있겠네.”

“…….”

나는 일리아스와 알리시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니, 누구는 이렇게 머리를 쥐어 싸매고 어떻게 하면 될지 고민하고 있는데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말해도 되는 거야?

먹구름처럼 서러움과 섭섭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너넨…… 내가 저쪽으로 완전히 가 버려도 괜찮…… 악!”

알리시아가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괜찮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잖아.”

“그래, 딱히 선택권이 없다는 것에 가깝겠군. 레나, 네 영혼은 기본적으로 저쪽 세계에 속해 있어. 퀘스트가 계속해서 발생하지 않는 이상 타르토스 쪽에서 계속 머무를 방법 자체가 없어. 그렇다고 장기 퀘스트가 될 만한 몬스터를 인위적으로 발생시킬 수도 없는 일이고.”

그 말에 이우연의 경우가 생각났다.

본래 다른 곳에 속한 영혼이 지구에서 태어난 탓에…… 계속해서 던전을 클리어하지 않으면 죽을 위험에 처한 녀석.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달았는지 일리아스가 빠르게 덧붙였다.

“저쪽과 너를 비교해서는 안 돼. 저쪽은 일단, 육체가 한국에 귀속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레나 너는 육체와 영혼 모두 타르토스의 것이 아니잖아. 경우가 완전히 달라. 괜히 건드렸다간 네가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그런가.”

나도 이우연과 같은 수법으로 타르토스에 머물 수는 없단 이야기다.

…… 사실, 어느 정도 그러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일리아스의 입으로 들으니 더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내가 입을 다물자 알리시아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에이, 괜찮아.”

“뭐가?”

“가족은 떨어져 있어도 가족이잖아.”

그게, 나를 향한 위로인 것은 안다.

어디에 있든 간에 내가 행복하면 됐다고 말한 것처럼, 알리시아는 내가 죽는 것보다는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것처럼.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도 충분히 전해졌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서도 일렁이는 감정도.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어서 나는 어린애처럼 입을 삐죽였다.

유치한 건 알지만 어쩔 수가 없다.

차라리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더러 이 세계에 머물라고 떼를 썼다면 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놓고 몇 년을 나 찾아다녔으면서.”

“아니, 그럼 내가 널 반쪽으로 찢어 놔야 만족하겠냐? 응?”

“아야야. 그만, 그만!”

알리시아가 내 볼을 잡고 마구 마구 잡아당겼다.

솔직히 진짜로 아팠다.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아픔에 눈물마저 찔끔 나왔다.

“우냐? 울어?”

“진짜 아프다고!”

결국 일리아스가 등을 토닥여 주었다.

“뭐, 지금은 일단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당장 우리는 이틀 후에 죽을 수도 있는걸. 솔직히 이길 수 있는지 확신도 없고.”

“……그거 참 마음의 위안이 된다, 일리아스.”

하지만, 확실히 그렇긴 했다.

나는 평원에 펼쳐진 검은색의 기둥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3일.

이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피로를 버티다 못한 일리아스가 자러 가고, 알리시아는 자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결국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끼이익!

우리가 아지트처럼 쓰고 있는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피곤한 얼굴의 루카스가 휘청휘청 걸어왔다.

어지간하면 루카스에게 이런 말은 하지 않지만 그 미모가 퇴색되어 보일 정도로 피곤해 보인다.

나는 루카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공략은 하러 갈 수 있겠냐?”

“어쩔 수 없지. 애초에 내가 자리를 비운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니까.”

그야 그랬다.

본래대로라면 길게 끌었을 전투를 고렙 플레이어들이 어떻게든 밀어붙여 끝난 전투이니만큼, 주력이 되었던 사람들이 사라지면 사람들을 통제할 수단이 없어진다.

게다가 믿을 수 있는 페트라 같은 기사도 정예병을 붙여 수도로 보낸 상태이니, 여러모로 골치가 아플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성공하지 않으면 세계가 멸망하니까. 정말 골 때리는군.”

“그러게 말이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왕자님이 아닐 수 없다.

루카스가 미간을 문지르며 의자에 깊게 몸을 파묻었다. 하지만 여전히 허리가 꼿꼿한 것이 잘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잘 거면 침대에 누워서 자는 게 낫지 않아?”

“어차피 30분 후면 다시 나가야 해. 버티는 게 나아.”

“아, 그래…….”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들리는 것은 잠든 알리시아의 숨소리와, 가끔 저 성 밖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고 불규칙하게 들리는 루카스의 심장 소리뿐이었다.

“언젠가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지.”

그런 고요한 소란 속에, 루카스의 목소리가 한 겹 더 얹어졌다.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뭔 소리지, 싶어 잠시 기억을 더듬던 나는 눈을 껌벅였다.

그래도 다행히 루카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곧 깨달았다. 옵타티오를 공략하고 나서를 말하는 거로군.

루카스가 분명 그런 말을 했더랬다.

“아, 분위기 타서 말했을 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만.”

나는 상황도 잊고 웃을 뻔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 왕자님도 참 어렸다. 겨우 스물다섯쯤 되었던가. 강대한 적을 쓰러트리고 고양감에 무슨 말이든 호기롭게 내뱉을 법도 했던 것이다.

본래의 루카스라면, 그렇게 미래를 약속하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사람이니까. 쓸데없는 권력 싸움은 사양이라고 하면서.

“그리고 난 딱히 바라는 건 없다고 했었지.”

“그랬었지.”

그래서, 나도 누군가가 주는 포상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우리끼리, 어딘가에서 한가롭게 지내며 이렇게 지낼 수만 있다면.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루카스는 결국 원하지 않던 싸움에 휘말렸다.

삶이란 언제나 마음처럼 되지 않는 법인가 보다.

“하지만 나는 원하는 게 있었어.”

이제 루카스는, 더 이상 혈기 넘치던 젊은 왕자가 아니다. 돌아갈 곳을 스스로 없애 버린 영원의 방랑자도 아니었다.

지금 그의 눈동자에는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아직 동력을 잃지 않은 불씨처럼.

“그리고 그걸 네가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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