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314화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일단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나는 혼자였다.
‘조한율이 일반적인 던전이 아니라 심상 세계인 만큼 각자의 관계에 따라 시작 지점이 다를 수 있다고 했었지.’
그래서 미리 준비한 연락 아이템을 사용해 보려고 했지만, 무슨 조화인 건지 먹통이었다.
심지어 소지창도 열리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장비 중이었던 검과 갑옷은 그대로라는 것 정도인데…….
- 에이펙스의 성검이 당신의 투지를 격려합니다.
일단 내 파트너가 멀쩡하다는 걸로 위안 삼을 수밖에 없나.
“저기다!”
그때였다.
이쪽으로 누군가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빠르게 검을 뽑아 들고 적을 상대할 준비를 했다.
“물을 가져와!”
“화재가 점점 번지고 있어!”
“어서 이쪽으로!”
그런데,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바리바리 싸 들고 뛰어가는 신관 및 성기사들은 이쪽을 보지도 못하는 것처럼 스쳐 지나가 버렸다.
내가 검을 뽑은 채 그들 정면에 서 있었는데도 말이다.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뭐야?”
목소리까지 냈는데도 누구 하나 이쪽으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는다.
마치 내가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이봐.”
시험 삼아 분주하게 불을 끄러 달려 다니는 사람들을 툭툭 쳐 보았지만 역시 반응은 없었다.
아무래도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곳이 아리아드네의 심상 세계이기 때문일까.
‘……일단, 탐색부터 해 봐야겠군.’
상황 파악을 해야 하니 불을 끄느라 분주한 사람들 뒤를 따라가기로 했다.
대신전의 모습은 여러모로 정상이 아니었다.
건물 군데군데가 불에 타오르고 있는 것은 물론,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이 크게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분주한 사람들을 따라 대신전 정문에 도착했을 때, 나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어마어마한 인파가 정문 앞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소음의 정체는 사람들이 신전 앞에 몰려와 부르짖는 목소리였던 것이다.
“사람을 착취해서 세금이나 걷어 간 주제에 제 배만 불리는 신전 놈들아!”
“이런 게 뭐가 신을 믿는 놈들이냐!”
“우리 집은 당장 내일 먹을거리도 없다고!”
분노한 사람들이 신전을 향해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분노한 군중 사이사이에 흰 사제복을 입은 신관들도 섞여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어깨 위에 올라타거나 단상 위에 올라간 채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고 있었다.
“지금의 교황은 미쳤다! 언제까지 과거만 붙잡고 살 텐가!”
“당장 신음하는 우리들은 보이지 않는 건가!”
“교황의 자격이 없는 자에게 심판을 내려야 한다!”
이렇게 군중이 모인 지도 제법 시간이 지난 듯했다. 분위기가 상당히 달아올라 있었던 것이다.
높은 담벼락 위로 올라가 안으로 횃불을 던지는 사람들도 보였다.
심지어 앞장서 있는 이들은 굳게 닫힌 신전의 문에 몸으로 부딪치고 있었다.
“문을 열어라!”
“교황이 나와서 책임을 져라!”
쿵! 쿵!
군중들이 문에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땅울림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기세에 대신전 건물이 흔들릴 정도였다.
“마, 막아!”
“여기서 뚫리면 대신전이 난장판이 된다!”
그리고 정문 안, 신전 측에서도 병사들이 합심해 억지로 문을 틀어막고는 있었지만 그리 오래갈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성기사 하나가 신관에게 물었다.
“신성 마법 사용 허가를 내려 주실 순 없습니까? 이대로라면 끝이 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신관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성하께서는 저들을 상대로 성력 사용을 불허하셨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되어서도 말입니까!”
“아이고, 이러다 우리가 죽겠습니다!”
성기사가 성을 내고, 문을 틀어막은 병사들도 곡소리를 냈다.
그 와중에도 분노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있었다.
“교황은 어디에 있어? 나와!”
“신전이 타락한 책임을 지고 황가에 사과해!”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한동안 혼돈의 현장을 지켜보던 나는, 등을 돌려 신전 안으로 향했다.
신전에 분노한 군중과, 그것을 막는 신관과 성기사들.
이제 이 상황이 어떤 것인지 감이 왔다.
이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 아리아드네의 기억이다.
알리시아가 죽고, 일리아스가 떠나고, 루카스마저 보낸 후.
다른 이들은 아무도 모르는, 아리아드네가 홀로 지내야 했던 시간.
그 애의 악몽이 재현되는 장소.
‘아리아드네를 찾아야 해.’
대신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내 발걸음을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광활한 건물이 무색할 정도로 인기척은 찾기 어려웠고, 한때 휘황찬란한 위용을 자랑했던 대신전 내부는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은 것처럼 퇴색되어 어딘지 초라해 보였다.
그렇게 안으로 진입하던 나는 한때 루카스가 갇혀 있었던 미로로 이어지는 통로를 발견했다.
통로로 이어지는 문 위로 굵은 쇠사슬이 칭칭 동여매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마음을 걸어 잠근 문처럼 보였다.
‘이곳은 일반적인 장소가 아니라, 아리아드네의 심상 세계지.’
그렇다면 어쩌면, 이 문 너머에는…….
“…….”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검을 뽑아 쇠사슬을 내리쳤다.
금속이 마주치자 불꽃이 튀었다.
신성 마법의 증거였다.
그렇게 몇 번을 내리쳤을까.
잘린 두꺼운 쇠사슬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그와 함께, 육중한 문이 스르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인 광경에, 나는 놀라지 않았다.
높게 쌓인 단상 위.
신전의 상징이 거꾸로 달린 보좌에 앉은 아리아드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아리아드네의 발치에는 열댓 명쯤 되어 보이는 신관과 기사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지친 것처럼 자신의 발치에 엎드린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우습지 않나.”
내가 아는 것과는 다른 아리아드네의 음성.
절로 위엄을 띠고 있는, 오랫동안 지배하는 것에 익숙해진 목소리였다.
겉으로 보기에 나이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었다’라는 건 저런 뜻이겠지.
아리아드네의 얼굴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루카스를 보낸 이후로도 상당한 시간을 홀로 보낸 것처럼 보였다.
그런 아리아드네의 음성을 듣고 엎드린 신관들이 몸을 떨었다.
“내가 황족들이 이제껏 저지른 학살을 공개적으로 비난했기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말이야.”
“성하.”
“황제가 제 형제를 죽인 것도, 북부의 빈곤한 성 하나를 완전히 묻어 버린 것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건만.”
그 사건이 어떤 일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심지어 아리아드네는 루카스의 성과 백성들이 어떻게 황제에게 짓밟혔는지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그 일로 황제를 비난했던 건가…….’
루카스가 죽은 후, 정세가 어떻게 돌아갔을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고는 해도 황제는 황제고, 운영직을 독점한 신전과의 결탁으로 무력에서도 앞선 데다, 유일한 승자이니만큼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황제와 결탁한 운영자를 아리아드네가 죽이고 다음 자리를 물려받았다.
두 세력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황가와 직접 맞서기에 신전의 위치는, 특히 아리아드네의 위치는 여러모로 불안했을 것이다.
애초부터 정치와는 그리 연이 없는 성격이다.
그런 걸 잘하는 성격이었다면 대륙을 돌아다니던 시절에 이미 각 권력자들과 진작 좋은 관계를 쌓아 두었겠지.
그러나 아리아드네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에게 치료받을 돈조차 없는 이들을 향해 있었다.
아무리 신을 믿는 자들이 모인 신전이라고 해도, 결국은 돈이 없으면 조직은 성립되지 않는다.
권력 싸움 또한 사람이 모이면 당연히 일어나는 이치.
그런 아리아드네가 교황 자리에 올랐으니 신전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겠지.
아리아드네 근처에 부복해 있는 신관과 성기사들의 숫자가 그걸 증명한다. 교황을 수행하는 숫자치고는 상당히 초라한 규모.
그런 아리아드네의 귀는 신전 너머에서 들리는, 분노에 찬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우습게도, 지금 아리아드네를 비난하는 것은 이제껏 그 애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그 자체였다.
“그래서 황가가 택한 수단이 군중을 자극시키는 것이라…….”
“이제껏 쌓여 온 사람들의 분노가 모두 저희를 향하고 있습니다.”
가장 앞에 선 추기경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청빈한 인상에, 신관복의 소매에는 몇 번이나 기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지방의 교구를 맡고 있는 추기경들과도 연락이 되질 않고 있고요.”
“그도 그럴 만합니다.”
앳된 얼굴의 신관 하나가 톡 쏘아붙였다.
“저 황제 폐하께서 지방 교구가 이제까지 저질러 온 비리를 폭로했으니까요. 그들이 무슨 낯으로 성하를 뵙겠습니까? 덕분에 성하께서 이런 고초를 겪고 계신데!”
“엘렌 사제, 성하 앞일세. 진정을…….”
“사생아를 낳는 것으로도 모자라 재산을 물려주고, 제 친척들에게 신전 명의의 재산을 넘기고…… 대체 뭐 하는 짓이랍니까?”
부정함을 목격한 결벽한 신관다운 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과한 면이 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추기경이 입을 열었다.
“물론 몇몇 지역 교구가 비리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나…… 지역 교구의 처벌은 신전 내부에서도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황가에서 뭔가 야료를 부린 것이 틀림없겠지요.”
그렇게 한번 물꼬가 터져서인가, 곁에 서 있던 다른 이들도 하나둘 입을 열었다.
“맞는 말입니다. 이 흐름은 이상합니다. 그간 저희가 해 왔던 자선 활동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고, 설령 신전을 욕할지언정 성하께 이렇게까지 분노할 이유가 없습니다.”
“황실과 가까운 추기경 몇몇이 이 사태를 방관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차기 교황 자리를 노리고 조직적으로 벌인 일 같습니다.”
“이 십여 년 동안 몬스터들이 출현하는 위험 지역 공략에 가장 앞장선 것도, 모든 신전으로 하여금 부상자들을 무료로 치료하게 한 것도 모두 교황 성하이신데요.”
“정말이지 배은망덕한 자들입니다. 은혜를 입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만.”
아리아드네가 손짓하자 이런저런 말을 떠들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아리아드네는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성하!”
“내가 아무리 뽑으려 해도 뽑히지 않았던, 뿌리 깊은 폐단이다. 이제껏 신전이 저지른 일은 마땅히 심판받아야겠지. 신뢰를 회복하는 데도 오래 걸릴 테고. 그보다, 더욱 신경 쓰이는 것이 있어.”
아리아드네가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초조한 심정일 때 자주 하는 버릇이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우리와 척을 진 이상, 그저 지역 교구의 비리를 폭로한 것으로 끝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드는군. 다음이 있을 거야.”
“예? 성하, 그게 무슨…….”
“성하, 그렇다면 일단 지방으로 몸을 피하시지요.”
청빈한 인상의 추기경이 간언했다.
“사람들의 분노가 쉽사리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황제에게 반격하려고 해도 당장은 어렵습니다. 일단 몸을 피하시고, 다른 곳에서 후일을 도모하셔야…….”
그때였다.
아까 전 엘렌 사제라고 불렸던 신관 하나가 아리아드네의 발치에 몸을 던지듯이 엎드렸다.
“성하, 제가 희생하겠습니다.”
“뭐?”
“저를…… 몬스터로 만들어 주십시오.”
아리아드네가 그 말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은 표정이었다.
추기경이 경악하며 엘렌 사제를 일으켰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사제! 일어나게.”
“저는 진심입니다!”
충격을 받은 아리아드에게 아직 앳된 얼굴의 신관이 절실한 어조로 말했다.
마치 신이라도 올려다보듯, 자신을 받아 달라고 말하는 종처럼.
“과거, 옵타티오를 만들어 낸 것처럼…… 우리에게는 그러한 희망이 필요합니다.”
“…….”
어린 사제는 침묵하는 아리아드네를 향해 필사적으로 외쳤다.
“신전이 사람들의 신뢰를 회복하고, 황제를 넘어서는 힘을 쥐려면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제가 희생하겠습니다. 과거 옵타티오가 대륙 사람들의 희망을 한데 모았던 것처럼…… 제가…… 저를…….”
그 말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검자루에 손을 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저게 대체 무슨…….
하지만 검을 뽑기 전에 깨달았다.
지금 저자에게 내가 무어라고 해 보았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테다.
이건, 지금의 현실이 아니라 아리아드네의 기억이니까.
아리아드네는 가만히 자신의 발치에 엎드린 어린 신관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해졌다.
방금 전까지 치열하게 다음 수를 고민하던 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을 침묵하던 아리아드네의 목에서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에게 후일이 무슨 소용이겠니.”
그 말을 들은 신관들과 기사들이 울음을 삼켰다. 추기경도 고개를 떨궜다.
아마도 아리아드네가 포기한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아리아드네를 똑바로 보고 있던 나는 알았다.
잔잔했던 아리아드네의 눈동자가 폭풍처럼 흔들리기 시작한 것을.
그리고 그 눈 속에 해묵은 분노와 거센 증오가 일렁이는 것을.
대해를 흘러넘치게 하는 마지막 한 방울처럼, 저 어린 신관의 치기 어린 말이 속에 있는 무언가를 흘러넘치게 한 것이다.
과거, 신전은 대륙이 혼돈에 빠지는 것을 막고 사람들을 뭉치게 할 생각에 인위적으로 ‘옵타티오’를 만들어 냈다.
절망을 한데 모아 빚은 것 같았던, 그 흉폭한 드래곤에 숱한 이들이 죽어 갔다.
하지만, 반대로 그 옵타티오만 사라지면 평온한 일상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에 사람들은 발버둥 쳤다.
그게 옳은 선택이었는지, 잘못된 선택이었는지는…….
적어도 아리아드네에게는 명확했다.
“앞으로도 인간은 변하지 않을 텐데.”
아리아드네는 그 순간, 모든 희망을 버렸다.
내일을 향한 열망도 멈추었다.
“성하……?”
아리아드네 발치에서 자비를 바라던 신관이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의 시선과 마주치자 어린 신관은 두려움에 몸을 굳혔다.
“가렴.”
아리아드네가 경멸하는 시선으로 제 발치에 선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변모였다.
한때 인간을 사랑하고 선의를 믿었던 자의 분노이기도 했다.
“내게서 도망쳐라.”
용암처럼 끓는 분노를 담아 아리아드네는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들에게 이별을 고했다.
흰 신관복을 입은 아리아드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로 물결치는 긴 금발이 불길한 그림자처럼 일렁였다.
그 천사 같은 모습은, 우습게도 릴리스를 떠올리게 했다.
인간의 욕망을 저열하다고 비웃던 악마.
“그것만이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일 테니까.”
그리고, 어둠과도 같은 빛이 파도처럼 그들을 덮쳤다.
파문처럼 사방으로 성력이 퍼져 나가기 시작하며, 순식간에 대신전은 고요해졌다.
밖에서 들리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쿵쿵대며 문을 두드리던 굉음도 들리지 않았다. 신관들의 애원하는 목소리도, 기사들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흐르는 것은 그저 침묵뿐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이건…….
아리아드네가 이 세계를 멸망시키던 날의 기억이다.
“…….”
너의 악몽이 시작되던 날.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모두가 사라진 세계에서도 아리아드네는 분명 노력했겠지.
어떻게든 잘해 보려고 애쓰고, 실망하더라도 내일을 떠올리며 노력하고, 때로는 실패하면서도, 그래도 내일은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했겠지.
그러나 결국에는 꺾이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꺾인 자신을 누구보다도 증오하는 것은 아리아드네 자신이다.
- 이 세계를 멸망시킨 자가 있다.
시끄럽게 들끓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아리아드네를 향해 다가갔다.
지금의 내가 보이지 않는 친우에게.
이미 내가 도울 수 없는 과거를 오래도록 후회하며 꿈꾸고, 분노하고 절망하다 결국에는 미쳐 버린, 한때의 내 인도자를 향해.
스릉!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