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315화
그러나 검은 실체를 베지 못하고 허공을 갈랐다.
내가 보고 있었던 것은 실체를 가진 현실이 아니라, 환상이었던 것이다.
나는 아리아드네의 환상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온기도 향기도 남지 않은 빈자리.
쿠쿵!
아리아드네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던 공간이 우르르 무너졌다.
황제의 심상 공간이 사라졌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황하며 중심을 잡아 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치 무중력의 공간을 헤엄치는 듯했다.
그리고, 한 번 의식이 암전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대신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나는 또 다른 곳에 있었다.
먼저 코에 와닿은 것은 매캐한 죽음의 냄새.
그리고 폐허가 되어 버려진 거리가 보였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늠이 전혀 안 되는데…….’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이렇게 장소가 휙휙 바뀔 줄이야.
양태원이 가장 어려운 던전 난도를 생각하라고 해서 강한 몬스터와 싸울 생각만 했는데, 이렇게 아예 공략 방법도, 돌파구도 전혀 찾아낼 수 없는 상황이 닥칠 줄은 몰랐다.
소지창이 열리지 않는 것은 물론, 아리아드네를 만나도 시스템이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애초에 공략 조건이라는 게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나.’
대신전처럼 이것 또한 아리아드네의 기억 속 공간이라면, 여기 어딘가에 아리아드네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위로 보이는 모습은 어딘가 잘못된, 소름 끼치는 풍경화 같았다.
사람이 살지 않게 된 지도 오래되었는지 폐허가 된 거리, 그리고 어디서인가 풍겨 오는 지독한 냄새까지.
처음에는 왜 아리아드네가 이런 곳에 있는 것인지 의아했는데, 걸음을 옮기면서 나는 깨달았다.
‘이곳은…….’
버려진 집들, 무성히 자란 잡초, 그리고 무너진 성벽의 모습.
나는 발걸음을 멈추어 섰다.
이곳은……루카스와 페트라가 죽은 후의 유령성이었다.
“……망할.”
지금의 성은, 이런 모습이 아니다.
운명은 바뀌었고 모두가 살아남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이렇게 폐허가 된 모습을 보는 것은 역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침잠되어 가는 기분을 안고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패배한 전투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인지, 성안에는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마을 한가운데 있는 광장에서 아리아드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신전에서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과 다르게, 지금의 아리아드네는 혼자였다.
게다가…….
푹, 푹.
아리아드네는, 삽을 들고 땅을 파고 있었다.
본래는 흰색이었을 신관복은 이미 본래의 색깔을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흙먼지와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리아드네 옆으로는…….
“…….”
셀 수도 없이 많은 시체가 늘어서 있었다.
성을 한가득 채우고 있는 이 악취의 원인은 그것이리라.
아리아드네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주변에 도와주는 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하기야 권력 싸움에서 패배하고 몰락한 왕자의 성을, 누가 신경 쓸까. 성의 백성들 또한 팍팍한 삶에 이 추운 북쪽까지 쫓겨 온, 연고도 변변치 않은 빈민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들었다.
그렇기에 황제의 손에 짓밟힌 그들을 땅에 묻어 주는 것조차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리아드네를 제외하면.
아리아드네는 아무도 없는 성안에서 홀로, 그저 묵묵히 삽으로 땅을 파고, 또 팠다.
손발이 후들거리고, 삽이 꽁꽁 언 땅속으로 파고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온몸의 힘을 사용해서, 발악하듯이.
마치 세상에 홀로 남겨진 아이처럼.
“…….”
한 번쯤 쉴 법한데도 아리아드네는 휴식조차 취하지 않았다.
무덤을 파는 작업은 아주 오래도록 이어졌다.
밝았던 날이 저물고, 밤바람이 차갑게 뺨을 할퀴기 시작했지만 아리아드네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의 매장이 끝난 후.
아리아드네는 지친 몸을 이끌고 내성으로 향했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내성 또한 짓밟힌 지 오래라 밤의 성은 무척이나 을씨년스러웠다.
그 성의 안뜰.
가장 깊숙한 정원에, 묘비가 세 개 있었다.
묘비에 새겨진 이름을 본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리시아, 일리아스, 루카스까지.
‘저 세 사람의 시신을 모두 수습한 건가…….’
그 심정이 어떨지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
아리아드네는 멍하니 묘비를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한계였을 것이다.
주저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웅크린 아리아드네의 등이 덜덜 떨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가끔씩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나는…….
도저히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대체 어떤 심정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이런 건…… 아리아드네 혼자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물론, 지금의 아리아드네가 이 세상을 멸망시킨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친구들이 죽든 말든 기껏 다시 만든 운명까지 없애 버리려고 드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아리아드네가 겪어 온 시간을 이렇게 곁에서 보니 조금이나마 알 것도 같았다.
얼마나 분노했을까.
이런 참극을 보고, 그리고 이 참극을 일으킨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데도 벌할 수조차 없고, 심지어 그저 비판한 것만으로도 도리어 본인이 절벽 끝으로 몰렸다.
게다가 그나마 곁에 두었던 이들조차 한다는 말이, 옵타티오 같은 괴물을 다시 만들어 신전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라니.
아무리 아리아드네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아니, 오히려 그런 사람이기에 더더욱 인간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친구들의 묘 앞에서 흐느껴 우는 아리아드네의 모습은 무척이나 초라했다.
그 모습에 이제껏 그저 두루뭉술하게 느끼던 그 절망과 슬픔이 피부로 느껴졌다.
이 세계의 비극을 홀로 지켜보아야만 했던 아리아드네가 너무도 안쓰러웠다.
“……아리아드네.”
나는, 아리아드네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내 손이 막 등에 닿으려고 했을 때.
와장창!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울렸다.
저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였다.
“강예나!”
탁!
그리고,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챘다.
이 세계에 들어와 처음으로 느낀 실체감이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은 것은…….
“찾았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보이는 것은 이우연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 손의 온기를 인식한 순간.
- ‘이해의 무저갱’이 무너집니다.
시야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동시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이해의 무저갱……?”
“정신계 마법이야.”
일리아스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이우연 뒤에서 버거운 듯 땀을 훔치고 있는 일리아스가 서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미소 지었다.
“그래도 시간에 맞춰서 다행이네.”
“와, 진짜 아슬아슬했다니까.”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했겠군.”
심지어 알리시아와 루카스까지도 있었다.
게다가…….
콰직!
검은 그림자 덩어리처럼 생긴 몬스터가 달려드는 것을, 알리시아가 두 손으로 잡아 양 갈래로 찢어 버렸다.
“아오, 이 새끼들 엄청 끈질기네!”
“욕할 시간에 검이라도 한 번 더 휘둘러라.”
“알고 있다고!”
루카스가 휘두른 검에 맞은 또 다른 몬스터가 후두둑, 하고 끈적거리는 액체처럼 변하며 바닥에 스며들었다.
내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황당해 눈을 깜박이자 알리시아가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뭘 보고만 있어? 이런 이상한 놈들이 여기 득시글하다고.”
“득시글하다니…….”
당황하며 일어나려다가, 그제야 내가 바닥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는 사지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는 상태였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후들거려 무릎이 꺾일 뻔했다.
그런 나를 본 일리아스가 알리시아를 타박했다.
“레나는 잠깐 내버려 둬. 방금 전까지 악몽에 잡아먹힐 뻔해서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뭐라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니까, 일리아스의 말은…….
“그래, 당신은 방금 전까지 마법에 걸려 있었던 거야.”
이우연이 나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일리아스가 혀를 차며 설명해 주었다.
“아리아드네 님의 감정과 동화되는 순간, 그대로 자아고 뭐고 잃고 끌려 들어가게 될 거야. 만약 우리가 널 발견하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죽었겠군.”
나는 방금 전 아리아드네의 등을 향해 뻗으려던 내 손을 보았다.
문득, 상상하기 싫은 가정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아리아드네는 내가 정신 마법에 약하다는 약점을 노리고…….”
“아니, 그건 아냐.”
이우연이 내 말을 끊었다.
“이곳은 아리아드네가 다른 누군가를 공격할 목적으로 만들어 낸 공간은 아니야. 그저 스스로의 기억을 곱씹고 후회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그야말로 악몽 그 자체지.”
“…….”
이우연의 말을 듣자 맥이 탁, 풀렸다.
그런 내 표정을 본 이우연이 아직 잡고 있던 손을 다시금 꽉 잡았다.
“그리고 당신이 정신계 마법에 잘 걸리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타인의 감정에 쉽게 공감하고, 남의 사정을 배려하기 때문인 거야. 그걸 약점이라고 하면 안 돼.”
“뭐, 용사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해야 할까.”
일리아스도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게다가 이건 아리아드네 님을 사랑하는 만큼 걸리기 쉬운 함정이야. 아끼는 사람이 저런 일을 겪었는데 가슴 아파하지 않을 사람은 없잖아.”
일리아스의 말에 문득 청룡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해하는 순간 잡아먹힐 거라고 했었지. 그게 이런 이야기였나.
……그러니까, 힌트를 줄 거면 좀 알기 쉽게 달라니까.
나는 이우연의 부축을 뿌리치고 겨우 홀로 선 다음 물었다.
“그런데……설마 내가 마지막이야?”
다른 네 명의 모습을 보아하니 엉망진창인 것이, 아무리 봐도 이미 한참 전에 다들 합류해서 꽤 많은 전투를 치른 모양새였다.
설마 다들 열심히 싸우는 동안 나는 환상에 빠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건가?
“그래!”
콰득!
이번에는 벽 밑으로 스멀스멀 기어 들어오는 그림자를 마구 짓밟으며 알리시아가 짜증을 냈다.
“덕분에 전위를 나 혼자 맡았다니까. 이 그림자 몬스터 놈들, 물리적인 타격만 먹혀. 약골밖에 없어서 내가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알아?”
“약골이라니…….”
“대체 누가…….”
네크로맨서인 일리아스는 그렇다 치고, 졸지에 약골 취급받은 마검사 둘이 항의하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알리시아는 그런 두 남자는 무시한 채 내 팔을 잡아당겼다.
“이제 레나 네가 왔으니까 같이 박살 내 보자고. 미궁의 심층부도 코앞이니까!”
내게 기대를 거는 알리시아에게는 미안하지만, 방금 깨어났는데 갑자기 밀려오는 정보의 홍수에 나는 얼떨떨하게 물었다.
“뭐? 미궁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린데?”
“주위를 봐.”
나는 이우연의 말에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기묘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은 구불구불하게 펼쳐져 있는 미로였다.
하늘 끝까지 뻗어 있는 미로의 벽에는 아름다운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었지만,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기에는 미로 곳곳에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림자 같은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이거…… 대체 어떻게 공략해야 해? 미궁 자체를 깨부숴야 하나?”
“그런 무식한 방법부터 생각하는 게 더 대단하군.”
루카스가 미궁의 벽을 타고 넘어오려던 그림자 괴물을 검자루로 박살 내며 말했다.
“오히려 공략법은 간단해. 이 악몽의 핵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 파괴하면 된다. 그리고 그 핵은 이 미궁 심층부에 꽁꽁 감추고 있을 테고.”
“아니, 잠깐. 아깐 여기가 심층부라며?”
“그래, 맞아. 레나 네가 환상 마법에서 제일 늦게 깬 건 이 미궁의 가장 심층부에 있었던 탓도 있다. 심층부로 다가갈수록 마법이 강해지거든.”
이우연이 이어 말했다.
“그건 즉, 당신이 아리아드네가 생각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말도 되겠지. 영혼의 심층부,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까.”
“……그건 그것대로 복잡한 심정인데.”
가장 가깝기에 되레 아리아드네의 악몽에 깊숙이 걸려들었다는 건가.
아무래도 정신 줄을 단단히 붙잡아야 할 성싶었다.
“그럼 심층부의 핵은 뭐일지 예상이 가?”
“이 미궁 자체가 아리아드네 님의 영혼이자 후회하는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아마도…… 가장 후회하는 기억이 본인과 함께 잠들어 있겠지.”
아리아드네가 가장 후회하는 기억이라.
지금 보았던 장면보다도 아리아드네가 더욱 후회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하지만, 그게 뭐든 간에.
지금은 나아가야 한다.
그저 슬픔에 매몰되어 멈추어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니까.
뻐억!
나는 막 알리시아 앞으로 달려들려던 그림자 괴물을 걷어찼다.
꼭 사람의 형태처럼 생긴 그것은 내게 머리 부분을 맞자 비명을 지르듯 아가리를 벌렸다.
구루룩!
벌린 입 사이에서 회색의 연기가 뭉게뭉게 흘러나왔다.
- 도와줘…….
그 목소리를 들으려던 때, 알리시아가 한 번 더 괴물의 머리를 통째로 짓밟았다.
“오래 보지 마. 저것도 다 아리아드네의 기억이야. 자칫하면 또 정신을 빼앗길 수도 있어.”
“……그래.”
나는 검자루를 꽉 붙잡았다.
잠깐 나를 깨우느라 일행이 지체했던 탓인지, 미궁의 통로로 검은 그림자들이 우글우글 몰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알리시아가 내 옆에 서서 그 광경을 보더니 씩 웃어 보였다.
“이제야 속도가 좀 나겠네. 자, 이제 단숨에 뚫어 보자고!”
두려움 따위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나도 마주 웃을 수 있었다.
“그래, 가 보자.”
아리아드네가 거쳐 온 후회로 이루어진 악몽의 미궁.
그 심원에 숨겨진 아리아드네의 본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