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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318화 (319/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318화

쿵!

시야가 흔들렸다.

“아리아드네!”

알리시아의 울부짖음이 들려오자, 자신 안의 무언가가 요동쳤다.

-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성장 과정에서 비극을 겪었음에도 누군가에게 원망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노력한 알리시아의 삶을, 누가 고결하지 않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런 쓸데없는 감상은 아마도, 여전히 주도권을 되찾으려고 애쓰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이 발하는 감정이겠지, 라고 생각하며 ‘아리아드네’는 무심히 그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이 몸을 빼앗은 후로 익숙한 일이었다.

그들의 삶을 빼앗으려는 것은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툭, 바닥으로 떨어진 몬스터의 팔은 병사들의 발에 무참히 짓밟혔다.

“알리시아!”

당황한 강예나가 한 팔을 잃은 알리시아를 지키며 검을 휘둘렀지만, 끊임없이 몰려드는 병사들의 수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을 정도였다.

당연했다.

현실이라면 모를까, 이곳은 아리아드네의 심상 세계였다. 마음속 깊은 곳에 깃들어 있는 절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 공간은 무너지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패배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 보았자 죽는 시기를 약간 유예하게 될 뿐.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그러하듯이.

“꺼져, 이 새끼들아!”

그리고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피가 흐르는 빈 어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알리시아가 검을 휘둘렀다. 용맹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알리시아를 아리아드네는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말해, 아리아드네는 딱히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시스템이 규정한 틀조차 벗어나 인간인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해진 지금의 아리아드네를 이길 수 있는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듣고 있냐고, 아리아드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적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팔을 휘두르고, 발로 차면서.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적들 때문에 파묻힐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싸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는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는 모습은 처절했다.

그리고 꼴사나웠다.

끝이 없는 적들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는 팔에는 점점 힘이 빠졌고, 호흡은 거칠어져 가고 있었다. 눈동자에는 아직 투지가 깃들어 있었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늘어난 적들에게 파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패배는 예정되어 있는 수순이었다.

쾅!

그때, 누군가가 아리아드네를 감싸고 있는 구를 크게 뒤흔들었다. 시선을 들어 보니 성력에 정화되어 사라지고 있는 불꽃의 화살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황금빛의 날개를 펼친 남자가 한 명 있었다.

“아리아드네.”

장벽 너머에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새롭게 태어난 친우가 보였다.

아리아드네는 그 이름을 불렀다.

“……루카스.”

그 이름에 남자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친애하는 감정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 어느새 희미해졌으나, 그래도 이 루카스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같은 운명을 걸었으며 결국에는 자신의 손으로 환생의 궤도에 올렸던 옛 친우이기도 했지만, 자신과는 달리 또 다른 운명을 지키고 있기에.

지금의 아리아드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옛 친우의 손에는 푸른 마력이 휘감겨 있는 마검이 들려 있다.

함께 있을 땐 적을 향했지만, 지금은…….

“기껏 새롭게 얻은 삶을 포기할 생각인가요? 이 세계의 종말은 당신과는 상관없어요. 당신은 새로운 세계로 돌아가 살면 그만인데.”

“설마, 내가 그럴 리가.”

루카스는, 아니, 이우연은 단호하게 말하며 마력을 두른 검을 아리아드네를 향해 내리쳤다.

쾅!

물론, 아무리 세게 내리쳐도 아리아드네를 보호하는 장벽에는 흠 하나 가지 않았다.

그래도 이우연은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아리아드네는 눈살을 찡그렸다.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요, 루카스. 내 성력은 결코 고갈되지 않아요.”

“소용없지 않아. 성력이라고 해 봤자 결국 네 믿음으로 이루어진 거잖아. 지금의 네가 대체 뭘 믿고 있다는 거지? 네 자신을 돌아보라고.”

“그런 말장난을…….”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려던 때.

놀랍게도 두터운 장벽 안으로 검날이 비집고 들어왔다.

아리아드네는 두 눈을 크게 떴다.

푸른 마력이 황금빛의 성력을 튕겨 내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파지직!

장벽을 뚫어 내는 마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덕분에 검의 날이 절반 넘게 장벽 사이로 꽂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당신은 레벨도 낮은데…….”

하지만 이우연이 답을 하기 전에 아리아드네는 이 강대한 마력의 흐름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차렸다.

“바보 같은 짓을 하네요. 그러다 죽을지도 몰라요.”

루카스의 마력이 전부 이우연에게로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후방에 선 파리한 얼굴의 왕자가 마력을 보내느라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아리아드네를 선명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의지는 충분히 전해졌다.

저 왕자는,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예전의 루카스가 그랬듯이.

……그럼에도, 그 노력은 어떤 결과도 이끌어 내지 못했지만.

아리아드네는 눈앞의 이우연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저들이 밉지도 않나요? 우리에게는 없었던 미래를 가졌는데.”

“물론, 부럽긴 해. 천만분의 일쯤 되는 우연한 가능성을 잡은 그 행운이.”

완성되지 않은 신체로 과도한 마력을 쓴 대가일까? 이우연의 입가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의 세계도 아닐진대 저렇게까지 무리하며 지켜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러니까 지켜 줘야지.”

그 말에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이 옛 친우와는 역시 평행선을 달릴 모양이었다.

두 사람분의 마력을 담은 검날이 조금씩, 장벽을 뚫고 들어왔다.

“소용없어요, 루카스. 이 세계에서 저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과연 그럴까?”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아리아드네는 그저 손가락을 튕겼다.

단지 그것만으로, 막대한 마력을 이용해 장벽을 파괴하고 비집고 들어오던 검날이 반대로 쑥 밀렸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성력의 밀도에 검에 마력을 불어넣던 이우연의 얼굴에 고통이 달렸다.

인간의 의지란 신체의 고통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가.

압도적인 전력 차였다.

이쯤 되면 포기하리라, 아리아드네는 그렇게 여겼다.

“오만하게 굴지 마, 아리아드네.”

그러나 이우연의 눈빛은 여전히 투지로 빛나고 있었다.

이제 마력도 거의 다 소진되어 가고, 검을 잡은 손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데도 이우연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 이우연의 모습을 본 아리아드네는 문득, 마음속에서 무언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분노와도 닮은 아주 작은 불꽃이었다.

- 대체 왜, 이렇게까지…….

콰쾅!

어떻게든 황금빛의 장벽을 가르려고 하던 검은 아무런 소용도 없이, 무엇도 부수지 못하고 떨구어져 나갔다.

성력에 닿은 날개 한쪽도 부서지듯 사라지며 이우연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에 더해서, 아리아드네는 이 공간에 심화된 성력을 강화했다.

그들의 발버둥을 바라보는 것도 괴로웠던 것이다.

이제 그만 끝을 내고 싶었다.

파아아앗!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심상 세계를 채우고 있던 성력의 밀도가 더욱 높아졌다. 어딘가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온 듯도 했지만, 아리아드네는 귀를 막았다.

이대로 모든 것이 사라졌으면 했다.

그리고 그렇게 귀를 막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위가 고요해졌다.

아리아드네는 귀에서 손을 떼고 발밑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처절하게 발버둥 치던 싸움은 이제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있었다. 끝도 없이 수를 늘린 병사들은 이제 설 자리를 찾지 못해 쌓여 있다시피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이젠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언젠가 보았던 무덤 같았다.

빛으로 된 병사들 사이에 살아 있는 존재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천국과도 같은 고요함.

아리아드네는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렇게 모두가 사라지면 더 이상 마음이 괴로울 일도 없다. 아무도 없는 세계에서는 분노할 일도, 증오할 일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만족하셨습니까?”

그러나, 그 고요함을 깨는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일리아스가 서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러게요. 어떻게 한낱 네크로맨서인 제가 성력에 정화되지 않고 여기에 서 있을 수 있는 걸까요.”

그 얼굴에는 기묘하게 비틀린 미소가 서려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홀로 선 일리아스를 응시했다.

그렇게나 오랜 기간 동안 함께 지냈음에도 예나와는 달리 뭔가 거리감이 느껴졌던 사람. 아마 죽을 때까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됐던 사람.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쩌면 자신과 가장 닮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리아스 님.”

그래서였을까. 아리아드네는 자신도 모를 충동에 휩싸여 그에게 호소했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리아스 님도 언젠가는 저와 같아질 겁니다. 인간에게 환멸하게 될 거라고요. 그러느니 차라리 지금…….”

“아니요.”

일리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리아드네 님과 달라요. 전 지금도 인간이 싫습니다. 끔찍해요. 약자를 짓밟고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 치다가 강자에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을 보면 구역질이 납니다. 그런 세상 따위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고요.”

“…….”

“하지만, 인정하세요.”

“무엇을요?”

“당신도 저 애들이 패배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는 걸.”

일리아스가 아리아드네의 발밑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제 병사들의 무더기에 묻혀 보이지도 않는 어딘가.

그곳에 처절하게 싸우던 친우들이 묻혀 있었다.

“이런 세상이지만, 역시 아직은 저런 녀석들도 있습니다. 비굴한 약자를 외면하지 않고, 손이 닿는 한 일면식도 없는 남을 힘껏 도우며, 강자가 되어도 남들이 자신처럼 괴로운 일을 겪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요.”

“…….”

“그리고 저는 저 녀석들이 세상에 패배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제가 여기에 있는 건 오직 그런 이유입니다.”

아니, 아리아드네는 부정했다.

“하지만 결국은 패배하게 될 거예요.”

단 몇 사람의 힘으로 세상의 저울추가 기울기에는, 반대편에 너무 많은 것들이 서 있다. 인간의 본질인 욕망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탐욕스러운 욕망에 비해 선량함은 너무 뜬구름처럼, 깃털처럼 가볍다.

그러한 선의가 짓밟히는 꼴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인세는 지옥이다.

인간을 믿는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는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고 그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수없이 배신당하며 아리아드네는 믿음도, 사랑도 버렸다. 그렇게 지옥에서 벗어나 비로소 인간의 고통을 관조하고 벌하는 죽음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는 왜 아직도 여기에 서 있는 건가요, 아리아드네 님.”

“예?”

일리아스의 물음에 아리아드네는 멍하니 반문했다.

쿠콰콰쾅!

그 순간 조용해진 발치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듯 섬광이 일었다.

섬광이 이는 순간 내부에 강한 충격을 받으며 아리아드네는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성력이 파훼된 반동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절대적인 순리를 거스를 수 있는 자는 단 하나뿐이다.

- 용사가 ‘죽음’에 저항합니다.

성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쌓여 있던 병사들의 무더기가 순식간에 먼지처럼 사라졌다.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는, 쓰러져 있는 알리시아와 무릎을 꿇고 있는 루카스, 그런 그를 부축하고 있는 이우연과…….

“아리아드네.”

강예나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아리아드네는 마음속의 무언가가 탁, 하고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 그래.

자랑스러운 만큼 증오스러운 그 모습.

어차피 언젠가 패배할 것이라면 차라리 이 손으로 산산조각 내 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리시아 말이 맞아.”

고요했던 무덤에 인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리아드네에게는 그것이 자신을 다시금 지옥으로 부르는 종소리처럼 들렸다.

“거기서 내려와, 아리아드네.”

이미 다시 한번 이 마음속 어딘가에 희망을 품게 된 것을, 부정하고 싶어서 눌러 죽여 왔지만…… 그래.

아리아드네의 머릿속에 이제껏 지켜봐 온 강예나의 여정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어느 오래된 유령의 악몽이 깃든 성에서.

혹은, 낯선 세계의 호수에서.

또는 어떤 산의 정상에서.

자신과는 다른 운명을 걷게 된 세계의 자신을 만났을 때.

결국 돌아온 어느 전장에 섰을 때도, 저 용사는 몇 번이고 누군가를 도우려 손을 뻗었다.

선의가 꼭 보답받는 것은 아니며, 노력하더라도 소용없는 일도 있었고, 어떻게 해도 거스를 수 없을 것 같은 운명 앞에서 실패도 겪었지만.

결코 변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 모습 그대로, 이곳에 도달했다.

“아…….”

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고 믿었던 성력은 어느새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눈에서 무언가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점점 얇아지기 시작한 장벽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기어코 아리아드네가 덮어 버린 무덤마저 기어 올라온 용사의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를 보면서, 아리아드네는 결국 인정했다.

절망 앞에서 꺾이고, 그러나 희망을 가지고 다시 일어나고.

손이 닿지 않는 것을 얻으려 꼴사납게 발버둥을 치고.

그러한 순간들이 결국 언젠가는 빛이 바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런 순간은 이렇게도 찬란하게 아름답다.

결국에는 그들의 승리를 바라게 될 정도로.

마음속 어딘가에서 한 번 더 목소리가 들렸다.

- 너도 패배하고 싶잖아.

결국 눌러 죽일 수 없었던 이 마음은, 자신의 것이었던가.

그랬다.

미워하고, 질투하고, 부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리아드네는 역시, 저 대책 없고 무모한 선의가 승리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용사가 검을 쥐었다.

의지를 담은 성검의 날이 폭발적으로 길어져, 아리아드네를 감싸고 있는 신성의 장벽을 침범했다.

그리고.

쩌적!

본래라면, 인간 따위에게는 절대로 파괴되지 않을 신성의 장벽.

인간이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죽음.

그러나, 찬란히 빛나는 성검의 날은 이번에야말로 장벽을 완전히 갈랐다.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진 검날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아리아드네는, 그 검을 피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였다.

삶을 사랑하게 된 죽음의 패배였다.

* * *

허공에 떠올라 있었던 빛나는 원의 구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아리아드네의 몸이 바닥으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아리아드네, 괜찮아?!

바닥에 힘없이 쓰러진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스르륵!

아리아드네의 몸에서 검은 무언가가 빠져나가더니, 눈에 익은 모습으로 변했다.

물 흐르듯 물결치는 금발과 검은 색깔의 신관복을 입은 여자의 모습이었다.

“……아리아드네.”

기절한 또 다른 자신을 바라보는 ‘죽음’의 얼굴에 복잡한 빛이 서렸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은 곧 미소를 지었다.

눈에 익은 다정한 미소였다.

“어째서…….”

싸우는 것을 포기했느냐,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마음속 어딘가에서.

나는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일 저 아리아드네가 정말로 모두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황제 편에 붙었던 그 전쟁터에서 우리는 모두 죽었을 것이다.

그저 세계에 강림하는 것만으로도 몬스터를 죽일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 아리아드네가 우리를 죽이기는커녕, 그저 해묵은 복수를 끝내고 사라졌을 뿐이었다.

심지어 이곳은 아리아드네의 심상 세계.

정말로 죽일 작정이었다면 이런 귀찮은 짓 따위 하지 않고 엄지손가락으로 하찮은 것을 눌러 죽이듯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성력으로 된 병사들 속에 파묻혀서도 우리는 죽지 않고 무사했다.

그건 아리아드네의 마음에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설령 기대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절망에 몸을 맡겼더라도, 그래도 한때 우리가 함께했던 추억은 아리아드네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것을 미련이라고 하면 미련이겠지만, 혹은…… 마음을 지탱하는 기둥이라고도 부르는 것이겠지.

아리아드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복잡하던 녹빛의 눈동자가 사라지자, 그곳에는 죽음도 절망도 아닌 창백한 안색의 여자만이 남았다.

“이제, 그만 끝내주세요.”

마치,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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